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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네오 탈레반, 더 센 놈이 돌아왔다(한겨레21 070801)

by 마리산인1324 2007. 8. 2.

 

<한겨레21>2007년08월01일 제671호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7/08/021003000200708010671001.html

 

 

네오 탈레반, 더 센 놈이 돌아왔다

게릴라 전술과 첨단 통신장비로 아프간을 잠식하는 그들, ‘테러와의 전쟁’이 만든 괴물인가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밤은 탈레반이 지배한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불과 40km 남짓 떨어진 와르다크주에서도 탈레반은 거침이 없다. 주민들은 겁에 질려 있고, 지방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다. 지난 7월20일 ‘전쟁과 평화 보도 연구소’(IWPR)가 현지발로 전한 기사는 ‘테러와의 전쟁’ 6년째를 맞고 있는 아프간의 현주소를 극명히 보여준다.

 

아프간의 밤은 탈레반이 지배한다

 


△ 2001년12월13일 파키스탄 국경에 인접한 아프간 동부 산악지대 토라보라에서 탈레반 병사가 멀리 미군의 폭격을 보고 있다. 그해 겨울 눈보라를 뚫고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던 탈레반이 더 강해진 모습으로 귀환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사진/AFP/ ROMEO GACAD)

 

“밤마다 벽보가 내걸린다. 집집마다 언제든 대문이 열리고 탈레반이 들이닥친다. 텔레비전을 부수고, ‘믿음’이 약한 이들에겐 매질이 가해진다. 더 심한 짓을 당하는 이들도 있다. …해가 지면 순찰에 나서는 건 탈레반이다. 아무런 제지 없이 무기를 꺼내들고 거리를 활보한다. 밤은 공포의 도가니다.”

 

와르다크주 남부 사예드 압드 지역에 사는 사예드 왈리(28)는 “정부의 무능함에 신물이 난다”고 말한다. “탈레반은 주민들에게 정부에 협력하지 말라고 말한다. 여자애들은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도 경고한다. 벌건 대낮에 유조차를 공격하는가 하면, 차량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정부 쪽에 신고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탈레반의 잇따른 위협으로 공무원 생활을 접고 택시 기사로 일한다는 굴 라흐만(36)은 “탈레반이 곧 법이기에 살해될까 두려웠다”며 “나를 ‘유죄’라고 결정하면 곧 칼을 들고 내 목을 칠 수 있다”고 말했다. 탈레반,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탈레반의 몰락을 부른 테러와의 전쟁은 9·11 동시테러가 벌어진 지 9일 만인 2001년 9월20일 서막이 올랐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이날 의회 연설에서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라덴을 비롯한 알카에다 지도부를 보호하고 있는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알카에다 지도부의 신병을 미국 쪽에 넘기고, 그들이 아프간 내에서 운영하는 훈련캠프를 비롯한 테러 관련 시설을 영구히 폐쇄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를 거부하던 탈레반 정권은 같은 달 말 빈라덴을 이슬람 국가에서 이슬람법에 따라 재판을 받도록 하자는 역제안을 내놨지만, 파국을 피할 순 없었다.

 

그해 10월7일 인도양에서 날아온 토마호크 미사일이 아프간의 메마른 땅을 때려대기 시작했다. 9·11 동시테러가 벌어진 지 꼭 26일 만에 ‘항구적 자유’를 내건 보복전쟁이 시작된 게다. 초반부터 싱거울 정도로 일방적인 승부였다.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막강한 공군력 지원 아래 반탈레반의 기치를 든 북부동맹군은 전투가 시작된 지 한 달여 만인 11월9일 아프간 북부 최대 도시 마자리샤리프를 장악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13일엔 카불이, 25일엔 탈레반의 거점이던 쿤두즈가 각각 함락됐다.

 

전쟁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인 12월7일 탈레반의 심장부인 남부 칸다하르가 북부동맹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탈레반 정권의 붕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12월22일 전쟁 발발 78일 만에 카불에서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수반으로 하는 아프간 과도정부가 들어섰을 때, 탈레반 잔존세력은 눈보라를 뚫고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을 터다.

 


△ 아랍 뉴스채널 <알자지라>는 지난 7월5일 2세대 탈레반에 관한 짤막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다. 사진은 미 중동미디어연구소가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방송화면을 캡처한 것이다.

탈레반의 검은 머릿수건이 사라졌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포성이 멈춘 뒤에도 아프간 주민들의 고달픈 일상은 쉽게 나아질 줄 몰랐다. 지난 6년 남짓 세월 동안 막대한 군사비를 쏟아부은 국제사회는 재건·복구 지원엔 이상하리만치 인색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 등이 지난 2002∼2006년 아프간에서 사용한 군사비는 약 825억달러에 이르는 반면, 같은 기간 재건·복구 예산은 군사비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3억달러에 불과했다.

 

아편 재배 수익이 활동자금

 

아무런 외부의 도움도 없이 가난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아프간 농부들의 유일한 수입원인 아편용 양귀비 재배가 탈레반 정권 몰락과 함께 급증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2002년 3600t이던 아프간의 아편 생산량은 불과 3년 만인 지난해 6100t까지 치솟았다. 이는 전세계 아편 생산량의 92%에 이르는 규모다. 특히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아편 재배 면적이 급속히 늘자 다국적군이 양귀비 제거 작전에 나서면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됐다. 가난과 끝 모를 점령에 지친 주민들이 어느새 조직을 추슬러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탈레반과 한 몸이 돼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편은 아프간의 석유로 불린다. 아프간 국민총생산(GN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편 농사는 탈레반 집권기에 금지됐다. 하지만 탈레반의 몰락 이후 아편밭은 다시 생겨났다. 이제 탈레반은 아프간 민중들의 일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농부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아편 추수에 몰두하고 있다. 어제는 금기시했던 것도 오늘은 허용된다. 아편 재배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활동자금을 대고 있는 탈레반은 이제 이 문제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지난 7월5일 아랍 뉴스채널 <알자지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 그들, ‘네오 탈레반’에 관한 짤막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다. 미 중동미디어연구소(MEMRI)가 번역해 인터넷에 올린 17분29초 분량의 프로그램에서 위성통신 장비와 노트북 컴퓨터로 무장한 2세대 탈레반의 활동 양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세월은 흘렀고, 상황은 어려워졌다. 네오 탈레반은 이를 잘 알고 있다. <알자지라>가 돌아온 탈레반의 첫 번째 특징으로 촘촘한 그물망식으로 짜인 조직과 지역별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이동식 탈레반 사령부를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남부 헬만드주 하자라지프트 지역 탈레반 책임자인 라흐마트 알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도부에선 항상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라고 명한다. 이교도들이 우리 지역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언제든 옮겨다닐 태세를 갖추고 있다. 누구도 우리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못한다.”

 


네오 탈레반의 두 번째 특징은 ‘점령군’과 맞선 최전선에서 찾을 수 있다. 걸핏하면 격렬한 교전이 불을 뿜는 헬만드 지역에서 탈레반은 수십 명 단위로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지역 사령부와의 교신은 최신 무선통신을 활용했고, 군사 전술 면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탈레반은 다국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기존엔 볼 수 없었던 소형 터널과 참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알자지라>는 하페즈 하미드 헬만드주 탈레반군 사령관의 말을 따 “터널과 참호는 적이 공격할 때 무자헤딘이 숨어서 스스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해준다”며 “적들이 우리를 지나간 뒤에 터널이나 참호에서 나와 그들의 배후를 치는 게 우리 전술이며, 이런 방식으로 적을 패퇴시키고 인명 피해를 입힌다”고 전했다.

 

이라크의 자살폭탄 전술도 활용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둔하는 미군과 나토군의 통제력은 도심 외곽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거점을 마련한 탈레반은 지속적인 치고 빠지기식 게릴라 전술로 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인력 동원 방식도 상시 동원 체제에서 일종의 교대제로 바뀌었다. 하페즈는 “수천 명의 무자헤딘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전투에 참여한다”며 “10∼20일씩 최전선에서 복무한 뒤 집으로 돌아가 다른 무자헤딘과 교대를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탈레반과 주민을 구분해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게다.

 

‘페다인’ 또는 ‘순교 지원자’로 부르는 자살폭탄 공격자 훈련소를 따로 마련해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심리훈련을 병행하는 것도 새로운 전술로 꼽을 만하다. 지난 6월 초 아심 압둘 라흐만(23)이 출근길 카불 한복판에서 경찰버스를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해, 경찰 22명을 포함해 모두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라크에서 불을 뿜고 있는 자살폭탄 공격 방식을 탈레반은 고스란히 아프간의 거리에서 활용하고 있다. 탈레반 대변인 가운데 한 명인 자비얄라 무자헤드는 6월21일 〈B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라크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술을 되풀이하고 있다”며 “이라크에서 적을 패퇴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같은 적과 싸우고 있는 아프간에서도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어제 우리는 크렘린궁을 부셨다. 오늘 우리는 백악관을 부순다”는 탈레반의 노랫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또 다른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사진도 찍어선 안 된다고 금기시했던 1세대 탈레반과 달리 새로운 탈레반은 자신들의 ‘활약상’을 담은 동영상 CD까지 대량으로 제작하고 있다. <알자지라>가 방문한 헬만드주 탈레반 공보국에선 20∼30대 젊은이들이 검은 복면을 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동영상 편집에 몰두하고 있었고, 곁에선 FM 라디오 방송 개국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인 인질 사태 발생 직후부터 현란할 정도로 언론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탈레반의 전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5년여 만에 귀환에 성공한 탈레반은 더욱 무시무시한 ‘괴물’로 진화한 게다.

 


△ 탈레반의 뿌리는 무자헤딘이다. 1980년대 대소 항전 당시 아프간 동부 지역 은신처에서 무자헤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위). 1986년10월 아프간 와르다크주에서 소련군 병사를 붙잡은 무자헤딘들이 포로의 공산청년단 단원증을 살피고 있다.(사진/AFP)

탈레반에 납치된 배형규 목사가 참혹한 주검으로 스러진 지난 7월25일,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에선 미군과 탈레반이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튿날까지 12시간여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탈레반은 자동소총과 로켓추진유탄발사기(RPG) 등 중화기까지 동원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같은 날 ‘탈레반의 발상지’로 불리는 칸다하르주 마루프 지역에선 탈레반이 밤을 도와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 1명을 사살하고, 8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사라졌다. 비슷한 시각 인근 카크라이즈 지역에서도 경찰서 습격 사건이 벌어져 3명의 경찰이 중상을 입었다.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은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장기전일 수밖에 없다고. 도처에 적이 있으니, 그 누구라도 의심의 대상이다. 적은 ‘절대 악’이므로 이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선’의 편이 아니란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악에 맞서 나선 전쟁, 승리는 그 자체로 선이 된다. 무엇도 이보다 우선일 수 없다. 맹목적인 신념과 무분별한 보복전쟁의 피비린내가 지구촌에 진동하는 지금, 냉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냉전의 광기가 만들어낸 ‘전쟁의 땅’ 아프간이 21세기에 겪고 있는 가혹한 시련은 그 극단적 사례다. 외세에 기댄 무능한 정부와 끝없이 이어지는 점령, 더욱 강력하게 진화해 귀환한 ‘괴물’ 사이에서 지금 아프간 주민들이 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