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남한산성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3.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남한산성

 

                                - 함석헌 -

 

  남한산성 역사의  옛터, 옛사람 1968년 6월  2일, 예배를 마치고  나서, 오후에 내 그림자와  대화를 해가면서 병자호란의 옛터인  남한산성에 오르기로 했습니다. 해가 서산에 기웃한 다음 쓰라렸던 역사의  옛 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어쩐지 자신의 생애의 그림인 것도 같았습니다. 관광버스를  타러 세종로로 가면서 생각했습니다. 5월이 다 지나 가고 이제 6월이로구나,  5월 지나가니 시원하다. 꽃 피는 5월에 무슨 죄가 있으리마는 곳곳에 써붙인 ‘5.16혁명기념'이란 글귀 보면 '오월비상'이라는 말이 연상되어 나빴는데, 그것 아니 보게 되니  좋지 않은가, 했습니다. 사실 4 .  19 다음에 5 . 16이 온 것을 생각하면  마치 피던 꽃에 강서리를 친 것 같은  느낌이 납니다. 지난 4.19날도 수유리 기념탑에 갔다가 학생들을 만났더니, 그 먼저  묻는 말이 “왜 금년엔 '4.19의 날'이라고  써 붙였는지 아십니까? 선생님 소감은  어떻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는 별 이상한 생각 없다. 그것을  이상히 생각하는 것은 너희의 지나친  신경과민이 아니냐?” 하고 대답을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역시  그들이 옳았습니다.

 

4.19를 4.19의 날이라 불렀으면 5.l6도 5.16의 날이라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혁명이라는 말을 천하가  다 인정하는 4 ' 19에서는 일부러  떼버리고 5 . 16에 다만 커다랗게  붙인 것은 마치 “우린 떡 아니 해먹었어요” 하는 듯 더욱더 냄새가  납니다. 젊은 마음은 역시 날카로웠습니다. 후생이 가외입니다. 그래  그런지, 5 . 16 때문에 첫머리에서부터 틀리게 보아서 그런지, 세종로 네거리에 요새 세운  충무공의 상을 보아도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이 아니냐, 반성도 해보았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하고 짚지도 않았습니다,  제일에 크기가 너무 지나치게 크고 또 그 자리도 적당치 않습니다.  친근하게 존경하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고 위압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만 강합니다. 그저 크기만  하면 자랑이 아닙니다. 맨 복판이면대접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전체에 있습니다. 저  설 자리에 서야 하고 제 무게를 모자라지도 않게  지나치지도 않게 가져야 합니다. 대들보는 위에 있어야 하지만 주추는 밑에 있어야  합니다. 기둥이 모퉁이에 서자 않고 어간에 들어와서는 방안이 있을  수 없고 문살이 가늘지 않고 지나치게 굶으면 햇빛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엄자룡을 궁중으로 부르면 대접이 아닙니다. 광무제는 친구라는 생각에  했겠지만, 도를 같이 담다가 채찍을 들  마음이 났으면 그때 벌써 친구 자격은 잃은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개선을 축하하는 만세소리에 취해 임금 될 생각을 했으면 착각을  한 것입니다. 저는 위대해지자는 생각에 그랬겠지만 군인임을 잊고 남의 자리를 탐내 커지려 할 때 이미 길은 세인트헬레 나로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6 . 25 이후 나라 형편이 어려우므로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면  아니라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군인이  일마다에서 판을 치고 기회를 자주 만들어 군사열을 고취하고 무력숭배를 일으키려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한심한 일입니다. 한해 어떻게 되어  열매가 아무리 많이 달렸다 하더라도 그 가지만을 두고 다른 가지를 모두 잘라버리면  나무는 옳게 자라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됩니다. 나무 전체의 균형을  보아 주지, 곁가지를 고르게두고 너무 지나치게 열었으면 따버리기까지 해서 긴 생각을 해야 길이길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군인은 아무리 위대해도 결코  나라의 주간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민중의 공론에 의하여 되는 젓이 없이, 도깨비처럼 어둠 속에서  쑥 나왔다가 훌쩍 사라지는 세상이므로 누구의 의견으로 어찌 돼서  되는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충무공을 지나치게 내세우는데는 확실히  불쾌할 정도의 우상숭배의 심리가 들어 있는 것이 들여다보입니다. 충무공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의 정신을 오는 세대속에 살리자는 것보다는 그를 팔아서 군인숭배를  시키자는 심산이 들어 있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임경업 장군에대한 태도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달렸던 큰일인 점으로 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다를 것이 없고, 그 덕과 공에서 하면 충무와 충민이  서로 더하고 덜 할 것이 없는데,  충무를 그렇게 찬양하는 사람들이 충민은 별로 말하지 않고 버려둡니다.  그 이유는 아마 다른 것 없고, 한 분은 나타나  보이는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한 분은  분하게 실패한 장군으로 끝마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나 공은  결코 그 성공 실패에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말 높은 정신은 도리어  패군지장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팔아먹는 데는 역시 눈에 띄는 결과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충무를 찬양하면서도  충민을 버려두는 것 아닐까?  그 이용 가치를  노린 것입니다. 두 분을 위해 다 슬픈 일입니다.  두 분은 다 거듭 순국한 것입니다. 한 번은 몸이 죽었지만  지금은 정신이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충무를 정말 숭배할진대, 몸소 일선에서 총탄에  쓰러지는 그 정신을 그대로 따랐어야 할  것입니다. 부귀를 다 마음대로 누리면서 찬양이 무슨 찬양입니까?

 

주고받는 잡담이  귓결에 들렸습니다. “너 저거  뭔지 알아?" “뭐야,  충무공 상이지.” “아니야,” “그럼  너 말해봐."  “저거  청와대 문지기야, 무섭지!” 어린 후손을 위압하자는 충무공은  아니었을 터인데, 왕양명 의 "노회"라는 시의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노회사생고역방  객래계마해의상 탁근비소환련이 직간불요종이상 아무리 당당한, 구름을  스칠 수 있는 나무라도 그 서는  자리를 잘못 만나면 딸 대접을 받게 됩니다. 말을 가져다 매고 옷을 벗어 거는 듯한 억울한, 시끄러운 대접을 받게 되는 충무를 위해 분한 생각을 가지면서 관광버스 회사에를 들어갔습니다. 가서 보니 요새는 남한산성 가는 버스는 없다는 것입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손님이별로 없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이상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구경꾼에 역사의  옛 자취, 더구나 나라의 운명이 하마  끊 어졌다 이어진 이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이 적다, 그럼 다들 어디로  놀러가나? 정말 놀러만 가는 것인가? 가뭄이 심하면 험한 골짜기를 찾아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혜를 얻으려면 무식한 사람을 찾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큰 냇물에 가서 될 것이라면 가뭄이랄 것이 없습니다. 학식 있는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날껏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역사가 험한 고비에 가고, 속에 기운이 지친 때거든 지나간 날의  어려웠던 역사의 고비를 다시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나야  막힌 데를 뚫고 나갈 수가 있고, 보아야 생각이 나옵니다. 옛 자취는 그래서 찾는  것입니다.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이라고. 두보는 울지만 나라는 망하고 산과 물만 남았다는  것 아닙니다. 전생 나서 만호장안이던 서울이 쑥밭이 됐다는 것 아닙니다. 거기까지 갈 져를 이 없습니다. 적병이 눈에 뵈고 칼소리가 귀에  들리기 전에. 산이 산으로 뵈고 물이  물로만 꾀며 풀과 나무가 풀과 나무로만 만져지 게 될 때  나라는 벌써 없습니다. 나라는 산 하나입니다. 역사는 숨쉬는 것입니다. 가를 수 없이 하나요 산 것이 나라요 역사입니다. 땅과 사람과 주권이 합해서 나라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깨져서 땅으로 사람으로 주권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나라 내놓고  산과 물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나 내놓고 풀과 나무가 혼자 자랄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전쟁이 나서 나라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깨졌으므로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생각하여 보십시오.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꾼에게 산천초목이 따로  있습니까? 시 읊고 그림 그리는 예술가에게 거기 서 있는 자연이란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 산 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과학자에게  있어서까지도 역사를 빼어놓은 자연은 있을 수  없 습니다. 그래서 관광버스는 못 타게 됐으니 불편이람 불편하게 됐으나, 그 대신 구경꾼에 섞여 놀러가지는 못하게 됐습니다. 시내버스로  천 호동을 나가서 거기서 여주.이천행 버스를  타고, 광지원에 내려서 거기서  다시 산성행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승객은 모두  구경꾼이 아니고 생활전선의 일선에서  싸우는 생활전사 그야말로 참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고 살리자는 군인입니다. 거기 비하면 소위 국방 맡았다는 군인은 죽이고 죽는 가마 군인입니다. 이제 그들은 오늘의 군인인 대신에 나는 300년 전  병자호란 싸움을 싸우는 옛 군인입니다. 그들과 마주 앉으니 이제야 옛날이 대화 아닌  대화를 하며 가는 것이 있습니다. 차 속에 앉아  생각을 하는 것인가? 생각속에 담움질을 하는  것인가, 내가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인가? 역사가 나를 응시하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처럼 이상하고  그처럼 재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쓴 지 꼭  10년이 됩니다. 생각해서 쓰노라 했지만, 그야말로 생각 없이 썼다가, 생각 더 깊이 하라고 인생대학으로 보내 스무 날 퇴수  를 하고 나왔습니다만 그런 자가  10년이 되는 오늘엔 알았느냐 하면. 역시 생각이 모자랍니다. 그동안도 줄곧 생각을 하리라 했지만 역시 채 못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생각은 언제나 시작뿐입니다. 문지방  앞에 서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시작이요 생각은 나중입니다.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란 것이 없습니다.  하고 나면 내 것이 아니고 나를 그 속에 빠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하므로 살았지만 또 생각으로 죽습니다. 생각이야말로 격전입니다.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는 싸움입니다. 자랑 끝에 불난다지만 생각 끝에  싸움입니다. 아닙니다. 싸우면 생각하게 됩니다.  요새 대낮에 잠꼬대가 붙습니다.  우리는 “싸우면서 건설한다” 합니다마는  그것은 무의미한 말입니다. 괴테의 말대로 개념이 없는 곳에  바른 말이 쑥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지만 싸움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 문화는 전국시대에서 나왔고  유럽의 오늘은 종교전쟁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생각을 해보자고 남한산성에를  갑니다. 아닙니다. 내 생각이란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하는 것 아니라, 생각이 나를 낳았습니다. 붙잡습니다. 죽이고 또 살려냅니다. 생각은 부활입니다. 불사조입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했는데, 이 백성은 생각을 했습니까?  아니했습니까? 4.19는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생각입니다. 살았습니다. 그럼 5.16 그것도 생각입니까?  군인은 생각을 죽여버려야만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면  우리만이 아닙니다.

 

월남전쟁을  하고 징을 죽이고  케네디 형제를 죽이는 미국 국민도 생각을  한다면, 참 무섭게 하는 국민입니다. 죽은 로버트의 골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만나면 하는 인사가 “요새는 글 아니 쓰십니까?”에서 “더 쓰셔요,  더 오래 사셔요" 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들은 생각을 해서 하는 말일까?  생각 없이 하는 말일까? 누구와 싸우란 말입니까? 누구를 죽이란 말입니까?  눈은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를 바라보면서 마음은 내 그림자와  이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버스가 광지원에  왔습니다. 있다던 산성행 버스는 없습니다. 또 고쳐 생각을 해야 하게 됐습니다. 새 싸움이 벌어집니다. 성을 팔아넘기고 구차한 목숨 하나를 건지자고  허방지 방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인조와 그 밑을 따르는  벼슬아치들이 울며불며 가던 길을, 나도 가야 합니다.  해는 벌써 서산에 넘어가고 어둠이 내리는  초여름 골짜기를 개구리떼의 군악을 들으며 나는 이젠  뵈지도 않는 내 그림자와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역사의 주인은  이름없는 민중 음력 5월  초이레 달이 공줌에 떴습니다. 지금을 제 철로  피는 찔레꽃의 질은 향기가 품속으로 스며듭니다.  때때로 길가 초막 호롱불밑에서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300년  전 있었던 피어린 그 비극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땅에는  평화요 하늘에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말소리와  칼소리와 사람의 울부짖음이 들렸습니다.  문득 골짜기마다 나무숲마다에서 청태종의  군사가 달려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모가지 잃은 귀신이 제각기 아우성을 치는것 같았습니다. 여자의  울음, 아이들의 부르짖음, 늙은이의  통곡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나무란  나무, 풀이란 풀이 다 치솟아 오르는 피 같았습니다. 걸었는지 달렸는지  걸음은 발에 맡기고 생각은 5천 년  역사의 물결 속을 쨌다 가라앉았다 하는 동안 20리 길이 다 되고 산성에 들어가서 찾노라 찾은 여관이 이름도 백제장 인데,  가서, 산목련이 소복한 미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문간에 선 때는, 이미 아홉시가 지났었습니다. 복잡할 줄 알았던 여관에 손님은 하나도 없고 옛 전장다운 고요속에 하룻밤을 지내게 된 것은 쓸쓸하면서도 다행이었습니다. 몸을 씻고 산나물로 시장기를 멈춘 후에  산성 안은 밝은 아침에 돌기로 하고 자려고  자리에 누우니, 형영이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싸움은 힘들고 싸움보다도 더한, 생각하기는 더 힘드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평안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날카로운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쩍새 아닙니까? 소쩍새라  들으면 소쩍이고 접동이라 들으면 접동입니  다. 불여귀라는 저  새. 옛사람의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공산이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은 촉국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지금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는고. 단종의 자규시도 읊어보았습니다.  저렇게 우는 것은 누구일까? 새가 아닙니다, 여기서 원통한 모욕을 당하던  인조일까? 아닙니다. 먹을 것이 다 되고 힘이 다 되고 꾀도 다 되고 다  되어 40일을 버티던 마지막 끝에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나가 항복을  하려는 마당에 그래도 마지막  정신을 가다듬어보려 애를 썼던 사람을 내 손으로 잡아  원수에게로 보내던 그, 그때에 단 한  사람으로 났던 임장군을, 억울한 줄을  뻔히 알면서도 권신들의 하는 일에 못견디어  난장에 맞아죽게 두던, 그 겁쟁이, 그, 그 약한 그가 울 리가 없습니다. 그럼 그때에 모든 정처의 책임을 졌던 최명길인가? 그 밖의 만조백관이라는 것들인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역사의 흐름 위에 떴던  거품이지 역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는 이가 있다면, 살아 있는 흔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입니다. 이름도 없이 풀처럼 났다 풀처럼  버힘을 당하는, 그러면서도 또 나는  민중입니다. 이 앞으로도 역사를 맡아야 하는 민중입니다. 어린  시절에 역사를 배울 때  인조가 오랑캐라고 멸시해왔던 청태  종 앞에 무릎으로 기어나가, 세 번 절해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그 예를 하여 항복을 했다는 말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하던 것을 기억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 아니합니다. 소위 정치한다는 것 들에게 이 이상 속지 않으렵니다. 욕을 본 것이 있다면 민중이요 원통한 이가 있다면 이  민중입니다. 나라의 주인공이면서도 짐승 대접을 받고 어려운 때가 오면 아낌없이 팔아넘김을 당하던 민중이야말로 비통한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항복했다, 업신여김을 당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민중은 저를 판 일도  없고 짐승처럼 긴 일도 없습니다. 죽이면 죽고 버리면 버림을 당하면서도 차마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무명의 민중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홍수 같은 그  전쟁이 지나간즉 다시 삶이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나라를 할 수 있고 한국이라는 문화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정치가가 썩어지고 비겁한 반면에 민중은 겸손히 끈질기게 용감하게 그냥 살아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태종이 강하고 영웅이어서  패배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라의 주인공 민중을 버렸기 때문에 민중에게 버림을 당하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아침에 수어장대에 올라갔습니다. 산성 안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 다. 이제 슬픈 역사의 자취는 어젯밤의 꿈처럼 볼 수  없고 눈에 가득한 것은 푸른 생명의 물결뿐이었습니다. 저기가 서울인가, 저기가 송파요 삼전도인가? 청태종은 지금 어디 가고 만주족은 어디로 갔는가? 당년에 아우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만주군의 뼈와 살이 다시 피어난 것이 저  어린 솔들인가? 역사는 거룩하고  생명은 거룩합니다. 당년에  서로 목을 찌르던 원수도 이제 긴  역사의 빛에 비추이면 저 나란히 서는  소나무 . 떡갈나무 모양으로 새 시대의 한 역사를 메고  대화를 하면서 나갑니다. 산을 내려오자니 아침 이슬이 옷을 적셨습니다. 저 밭에는  옛날에 무수한 군인이 죽어 묻히지 않았을까? 제때를 만난 함박꽃이 흐들흐들 피어 웃었습니다.  그 한 밝은 마음이야말로 민중의 마음입니다, 떠나려는 순간에 최 전도사가  그 합 박꽃을 한 아름 가져다주었습니다. 역사의 오는  시대는 이렇다는 말인가, 생각을 하면서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1968)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