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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행주산성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3.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행주산성

 

- 함석헌 -

 

행주산성 가는  길

행주산성을 가느라 그  길을 물어도 똑똑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 었습니다. 행주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이요, 도원수 권율이 그것을 지휘했고 '행주치마'의 유래가 거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정작 거기를 가보겠다고, 어디 가서 무슨 차를 타고 어떻게 가느냐 물으니, 하나도 자신 있는 대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문사 사람도, 잡지사 사람도, 유명한 관광버스 회사 사람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는 사람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는 것은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돌아다니는 이야기의 행주와 행주치마지, 실지 땅에 돋아 있고  역사에 뿌리박고 있어 살아 있는 행주산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지식이란 다 그런 것 아닐까요? 안다는 것은 결국은 이야기 속에  사는 것 아닐까요? 역사 지식은 더구나  더 그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이란 물 위의 마름처럼, 바람 속의  하루살이처럼 떠돌아가는 이야기의 물결  위에 떠서 돌아가는 살림입니다. 지식은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힘이라고 다 같고 다 좋은 것 아닙니다. 능동이냐 피동이냐가  문제입니다. 움직이는 거냐, 움직임을  받는 거냐? 움직임을 받아서 움직이는  것은 힘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움직여야  참 힘이 있는 것입니다.  

행주산성 가는 길을 분명히 말해줄 사람은  몸소 행주산성에를 올라갔던 사람이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여러 해  전이 아니고 요새에 올라갔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 세상인데!  아닙니다. 정말 똑똑히 확신을 가지고 말해줄 사람은 행주산성에  사는 사람뿐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기가 쉬울 리가 없습니다. 물결에서 물결로, 물결을 차 헤치면서 나가  서만 헤엄질이 될 수 있듯이, 들은 말에서 또  새 말로 말을 버리면서 보다 확실한 말로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 한 후에 비로소 서울역에서 경의선 차를 타고 능곡역에 내리면 거기서 산성이 불과 2킬로미터인데 차에서 내려서 눈을 들면  거기 산성이 물을 것 없이 환히 보인다는 지식에까지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이날까지는 이야기의 행주로 아무 부족이 없이 해올 수 있었던  내가 왜 기어이 산성을 내 발로 디뎌보기 전에 마지않는다는 것입니까?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움직이란 말입니까?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말입니다.  지금 이 수레바퀴가 진흙탕에 빠졌습니다. 말에다 채찍을 더해도 더해도 말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득이 탔던 내가 자리에서 내려와 바퀴살에 어깨를 대고 밀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는 한 이 수레는 사람째 말째 실은 보물째 이 속에 빠져들어 한가지로 다 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수렁은 밑을 모르는, 멍청하고만 있으면 점점 빠져드는 무관심의수렁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어디 벋디디고 기를 씀  수 있는 돌부리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  돌부리가 남한산성이요 행주산성입니다. 그것은  벌써 여러 백 년 전에 비슷했던 경우에 우리보다 전의사람들이 거기다  발을 벋디디고, 역사를 건졌던 일이 있는 이름이 있는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자는 사람을 깨우려면 귓가에 대고 요란한  종을 울려야겠는데, 멍청한 국민을 움직여 역사의 싸움을 싸우게  하려면 지난날의 참혹하고 비참했던 싸움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는데, 그러려면 내가 그것을  겪어봤어야 하지! 나는 지금 그 이야기의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후에 말을 하려고 행주싸움에 참여하려 나서는 것입니다.  

 

누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인가 

 

남쪽에서 온 새는 앉아도 남쪽 가지에 앉고 북쪽에서 난 말은 북에서 오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소리를  질러 운다고,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앉으니  버리고 쫓겨온 압록강가 내 집  생각이 아니 날 수 없었고, 38선, 6, 25  생각을 다시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이 6월 28일인 데서이겠습니까? 1947년 3월 17일 이른 새벽 38선을 기어넘어 희미한 첫 광선에 토성역을 발견하던 때의 감격, 거기서  자유에의 첫 열차를 타고 이 서울에  와서 내리던 때의 가슴의 울렁거림! 그 자유의 나라가 이런 따위 부자유의  나라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후  봄바람 가을비에 동서남북을 떠돌아 오늘까지 오면서도  뒤안의 늙은 참배나무 서 있는 내 집을 잊을 수는  없었는데, 그 집이 있는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은 처음입니다. 북행! 이놈의 운명의  북행을 언제나 해보느냐? 왕건이 하려다 못했고  윤관이 벼르다가 겁쟁이놈들 올무에  빠져 못했고, 최영이 발은  내디뎌보았지만 못생긴 군인놈한테 다리를 들려 넘어지고 말았고, 애처로운  효종으로 하여금 청강에 비듣는 소리에 쉬게 하고 분한 이완으로 하여금 달 속의 계수나무를 보고 울게 했던 이놈의 역사적 과제, 내 잃은 옛집을 찾는 것은 어느 날일까? 6월 28일 바로 오늘이었습니다. 25일 전쟁이 터지던 날은 일요일  이어서 그때까지 정기적으로 하던 종교강화를 하려고 아침에 오류동에 들어오다가 서울역에서 비로소  그 소식을 들었는데, 물론 듣고 놀랐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북에 있을 때부터 앞날 일을  말하게 되면 말마다 “피 흘려야 됩니다”하던 그들  공산주의자의 말을 처음부터 들어왔던  터이고, 오자마자 군도부터 닦기 시작한 소련군의 짓을 보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라는 것이 그렇게 준비가 없었던 줄은 몰랐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혹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모양으로  미국 군부에서 그 정보를 다 알면서도 여론을 전쟁하는 데로 이끌기 위해 일부러 거기까지  이르도록, 내버려두어서 일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도 미국 군부가 모른 것  아니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버려두어서 불집이 일어나도록 했다고 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합니까? 군이란 그런  것이요, 정치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속는 것은 민중뿐입니다. 그래 소식을 듣고 모임에 가서 『이사야』30장을  읽고 헤어지고, 이튿날 약속했던 대로 연세대 기도회 시간에  가서 말을 하고 하루 쉬어 28일에 다시 할 예정이었던 것을, 있는  동안에 형세가 차차 험악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중지하고 오류동으로 돌아와서 27일 밤  두시가 지나도록 라디오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어리석었습니다. 테이프 레코드를 되풀이 돌리게 하고 저희는 벌써 도망간 것을 모르고 정말 그 말대로 서울을 절대 버리지 않고 죽기로 지키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28일 아침이 되니 소식이 오는데  간밤에 서울은 함락이 됐다는 것이고 정부는 벌써 남쪽으로 내뺐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만이겠습니까? 정치란 다 그런 것입니다. 말은  다 좋게 나라 일이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결코 나라  생각 아니합니다. 정치하는  못된 사람들이 나라 일 해주려니 믿었다가는  큰일납니다. 나라 잃고 나 망합니다. 말이야 물론 공을 세우지만, 현란한  꽃일수록 씨가 없듯이 그것은 실속 없는  속이는 말뿐이고, 속을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힘드는 일은 아니하고 남의 수고한 결과를 빼앗아 거들거리고 먹고 마시고 입고 놀고 권세를 마음껏 휘둘러보자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백 가지 이론을 할 것 없이 이날까지  모든 민족의 역사는 민권의 투쟁의 역사요 자유의 역사입니다. 옛날같이 핏줄로되던  사회는 몰라도 적어도 이  기술문명 기업국가에 있어서는 옛날 관념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완전히 빼고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업자들한테 완전히 속고 맙니다. 그러고는 더구나 분한 것이 내빼기는 저희가 먼저 내빼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면 피난하지  않았던 사람을 부역행위라  해서 욕하고 벌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비겁과  무식했던 것을 가리기  위해서 한 악독한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입니다.

 참 의미에서 누가 정말 나라를  지켰습니까? 이 나라 땅을 갈아 그 흙으로 내 살을 만들고 그 바람으로 내 생각을 만들어내며, 죽은즉  다시 그 흙 그 물로 돌아가며, 거기서 아들 딸을 낳고 사는 사람이 정말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한국적인 생활이 있대도 그들에게 있고  한국적인 생각이 남아 있대도 그들 민중에 있습니다. 자기네의 권력 유지에 필요하다 생각하면  언제든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도 좋고, 외국 정치업자와 흥정을  해도 좋고, 그 흥정의 결과 일부 민중을 팔아넘겨도 좋고, 외국  장수와 민중에게 해로운 거래를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가입니다.

 엄정한 의미에서 정치인에게 조국은 없습니다. 조국은 조상의 땅, 살림, 방, 말, 정신을 차마 못 버려 도망할 생각도 못하고 고생을 견디다가 죽어 그 받았던 것을 도로 갚는 못난 민중에 있습니다. 나라일 한다면서,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업신여기고 의심하여 너희는 나쁜 것을 먹고 입으면서 견디어라 하고 거리에 나온즉 민중을 보기 싫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겹겹이 무장하여 공포기분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우리와는 이해가 서로 반대되는 사람들이요 우리의 대적인 것을 스스로 외쳐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전쟁이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통일하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속이는 말입니다. 전쟁으로 통일 절대 아니됩니다. 전쟁을 말하는 목적은  “통일이 안되더라도 정권은 내가 쥐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접을 붙여 속이자는  말이지만 절대 속아서는 아니됩니다. 외국 세력에 끌려 마지못해  동포가 서로 싸우면서도 눈물 한 방울도 아니  떨어뜨리고 정말 ‘승리’를 했다고 자랑하며, 공로  훈장을 만들어 서로 걸어주며 으스대는 것들, 그것을 밑천으로 정권을 쥐는 것들, 한번 쥔 다음에 민중의 불평이 아무리 있어도  외국의 힘을 빌어 만 년 집정을 하겠다는 것들이 결코 나라  생각 통일 생각 하는  사람들 아닙니다. 통일은,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어 끌려서 대진을 하게 됐더라도, 서로 바라보는 순간, 너와 내가 그럴 사이가 아니었지, 네 손에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내가 어찌 너를  죽일 수야 있겠느냐 하는 마음이 다 같이 들지 않는 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북에서 쳐내려온 자나 쳐들어간  자나 서로 제국주의에 또는 공산주의에 복수한답시고 살인.강간을 맘대로 하는 그것들이야말로 나라의 도둑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쟁이 무슨 명목으로나 절대 나서 아니되겠지만 설혹 불행하여 또 전쟁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번에는 18년  전 모양으로 어리석게 그들을 믿고, 속아 행동할 마음이 없습니다. 내 노력한 것을  빼앗아가고 내 인격을 짓밟고 내 자유를 침해하며 못살게 구는 데는 무슨 좌우 적백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행주산성에 올라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차가 능곡에  닿았습니다. 정말 눈을 드니 행주산성이 물을 것 없이 알아볼 수 있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것은 겉이 아니오 속입니다. 행주대첩의 자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의 산 모습을 보고 싶었고 그 모습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잘 아실 것  같아 국민학교를 찾아 들어가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보다도 그 동리에 사시면서  권율 장군을 제사하는 행주서원의 원장으로 계시는 서강영  선생을 소개해주시면서 그가 아주 자세한 것을 아시니 그리  찾아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산 밑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물었더니 75세의 노인이신데도 아주 꼿꼿하고 앞서 길을 인도하여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유감인 것은 자세한  것을 기록한 책자가 있어서 그것을 빌려주시겠다고  찾았으나 마침 쉽게 찾아지지 않아서 그냥 듣고만 온 것입니다.

 행주대첩의 원인은 첫째는 그  지리에 있는 것을 산꼭대기에 올라서면서 알았습니다. 소위 행주산성이란  얼핏 보기에 요것이었던가 할이만큼  자그마한 산입니다. 이름을 덕양산이라고 한다는데 산에서 옛날  백제시대의 기왓장 조각이 나온다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역사가 오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강가에 나가서 마치 주먹을 불끈 쥐어서 내민 것같이 나앉은 산인데 높기는 그리 높지 않으나 강가에서는 그  벼랑이 아주 험해서 옛날  싸움에 있어서는 지키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뒷녘에는  지금도 내리라는 동리가 있고 서노인 말에는 옛날에는 천  호가 넘은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 옆이 서원이 서 있는 곳인데 거기는 포구여서 옛날에는 대단히 번성했다 하고 지금은 그렇지 못하나 아직 행주 웅어잡이로 유명하고 웅어 생선을 먹으러 오는 손님을 상대하는 요정들이 몇 집 있었습니다.
 
 산에 올라 보면 앞은 한강인데  그 강을 건너 건너편에 김포평야와 김포 개와산이 서 있고, 그  뒤로 멀리 부평 안암산이 높이 서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때에 일본군은 그 산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산 뒷면은 들입니다. 그래서 산은 마치 섬같이 들과  강 사이에 오뚝 서  있습니다. 지금은 다 논밭으로  개간이 됐으나 그때는 강물이 많이  들어왔고 뒤에 가는 일선이  있어서 육지와 연락이 됐다고 합니다. 거기 올라서면 파주, 서울, 김포, 부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므로 군사의 움직임을 일일이 알  수 있고 겸하여 큰 강을 꼈으니 지키는 데는 매우 유리했을 것입니다. 이 지세를 알아보고 거기 진을  쳤던 권장군은 확실히 잘 보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때 장군의  생각은 서울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올라오는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명장 이여송이 벽제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는 기운이 죽어 감히 크게 공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냥 두어서는  아니된다는 권장군의 생각이어서 서울을 향해 진군을 했는데 그것을 안 일본군은 주위에있는 3만의 큰 군사를 모아 단번에 그것을  무찔러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난 것이  행주싸움인데 그때 거기 모인 우리 군사는 4천 명이라기도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1만이라고도 하나 산성의 크기로 보아 많은 군사가 있으려  해도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나 성도 돌이 아니고 토성에다가 목책을 두르고 대진을 했고 첫날 목책의 한 부분이 무너져서 한때 위태했었으나  겁나서 물러서려는 군졸을 권장군이 목을 베어서 군사들을 독려했으므로 다시 용기를 얻어서 싸우는 중에 마침 대적의 장수 요시카와가 부상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물러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지리가 험한 것도 그 이긴  원인의 하나겠지마는 아무래도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사기에 있습니다. 그때 전쟁 기술에서 한다면  우리와 일본은 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벌써 조총을  가지고 무장한 군대였고, 우리는 옛날식의 활과 칼과 창뿐이었으니 어림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그때까지  국방이란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율곡이 군사  10만만 기르자는 것을 듣지 않았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바야흐로 일어나는 당파싸움과  썩어진 유교 때문에 정치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올 때까지 아무 방비 없이 모르고 있었고 상륙한 지 한 달이 못되어 서울이 함락이 되었고, 비가 죽죽 오는 밤에 임금이란 것이  초초한 행색으로 도망을 간즉 궁중에 달려들어 불을 지르고 도둑질을  한 것이 적군도 물론 적군이지만, 평소에  학대받던 일반 백성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은 역시 나라의 주인입니다. 첨에는 아무  방비 없는 데 들어온 도둑 앞에 어쩔 줄을 몰랐으나  차차 반항하는 정신이 일어나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일은  이것입니다.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임금의 심부름꾼인 벼슬아치나 그 군인이 아니고 일반 백성이었다는 것. 그 나라를 지키자고 맨주먹을  가지고 일본도와 조총의 위험에 대항하여 노한 양같이 일어난 민중의 의기가 아니라면 덕양도 없고 권율도 없습니다.


택국강산입전도
생민하계락초소
빙군막화봉후사
일장공성만골고


옛날도 이런 소리를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들판이고 산이고 온통 전쟁판이 됐구나, 백성이 어찌 농사하며 삶을 즐길  겨를이 있겠느냐? 전쟁하고 공을 세워 벼슬한단 말 하지  마라. 장수가 하나 공을 세우려면 1만이나  많은 뼈다귀가 쌓여야 한다.

 역사가 늘 도둑맞는  역사입니다. 일해서 번 것을 지키고도 공은  언제나 도둑맞습니다. 무장지졸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말도 옳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옳은 것은 독불장군이란  말입니다. 장군이란 것이 없으면 민중 속에  통일이 한때 없을 수 있지만  필요를 느끼면 언제나 민중은 사람을 골라  내세웁니다. 그러나 민중이 없으면 아무리 힘과 재주가 있는 놈이라도 어찌 장군 노릇을 할 수 있습니까? 군사 많이 가지고 무기  충분히 가지고 한 싸움은 또 몰라도 안시성 싸움같이 행주싸움같이 한줌밖에 안되는 적은 군사를 가지고 적의 큰 무리를 이기는 싸움에서 그 힘은 전혀 졸병의 스스로 하는 용감한 정신에  있습니다. 어찌 감독을 해서 하고 꾀로써 합니까? 목숨을 잊고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의기에 불붙은 모든 마음에서 되는 것입니다.
 전공을 말함에 대장  아무개, 원수 아무개를 말할 뿐이고 정말  주인인 민중은 왜 말하지 않습니까? 억울합니다.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억울해할 줄 모르는 것이  민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인입니다.  쿠데타 해놓고 서로 제가 해먹겠다고 주류파 비주류파  싸우는 것은 주인이 아닌 증거입니다. 공은  공 생각하지 않는 민중의 것입니다.

생성하는 생명의 신비

 산에 올라가면 비각이  있습니다. 비석 글자가 모두 볼 수  없이 닳아져버렸습니다. 돌의 질이 나빠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 옆에 근래에 새로  세운 큰 비석과 그것을 개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역사와 자취와  그 사실을 잘 기록해 보존해야지요. 하나, 그것도  역시 낡아빠진 정치가 군인들의 생각입니다.  돌에 새긴 것만이 기록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깊이 새겨도 또 없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날까지의 역사는 임금과 귀족의  역사건만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이 있습니다. 뼈에  새기고 피에 새긴 기록입니다. 민중 그 자체가 기록입니다.  정신빠진 자들 민중의 심장에 새길 생각은  아니하고 거기 새겨진 것 읽을 생각은 아니하면서 돌에 쓰고 책에 쓰면 무엇합니까? 사슴의 자랑은 뿔에 있습니다. 족제비의 자랑은 꼬리에 있습니다. 임진란의 뿔과 꼬리는 무엇입니까? 이순신이요 권율입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강강수월래가 그 뿔이요  행주치마가 그 꼬리입니다. 행주치마가 있는 한  행주싸움의 정신은 잊을 리  없고, 이 나라 이  민중이 망하지 않고 있는 한  행주치마는 없어질 리 없습니다. 세계의 전적 기념비도 많고 용감한  싸움 이야기도 많지만 이 행주치마에서 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은지 모르고 그 옷의  철학을 쓴 것이 칼라일이지만 그 문호의 의상철학도 행주치마는  몰랐습니다. 칼라일이 살았더라면 가르쳐주었을 것이고 가르쳐주었더라면 무슨 더 깊은 철학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치마가 무엇입니까? 음부를 보호하잔 것입니까? 여자의 미를 드러내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슨 종교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아마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치마의 정말 의미는 행주산성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자기로서는 여자로서의 인격적  정결을 지키고, 한 집안을  위해서는 생명선의 정결을 지키며, 일할 때는 땀을 마셔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는 이 치마는 생성하는 생명의 신비의 상징입니다. 아기를 싸서 키우는 그  폭 속에서 작게는 마음이 자라났고 크게는 나라가 자라났습니다. 그 치마가 이제  나라가 위태할 때는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악을 무찌르는 무기가 됐습니다. 평화라면 여자의  몸에 걸친 치마에서 더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짐승보다 더 흉악한 대적을 막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라의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한없이 약하면서 한없이 강하면서 오직 사랑 오직 봉사에 사는 아내와 어머니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 이 치마 아니겠습니까? 가장 위급할  때에 생명을 건지는 것도 이  신비의 능력에 있단 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이 행주치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에 서울 거리를 휩쓰는 치맛바람, 입었다기보다는 바람에 날아가다가  죽은 가지에 걸린 것같은 미니는  어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도 행주 같은  역사의 결정적인 고비가 돌아오면 틀림없이 또 나올 행주치마를 믿습니다. 해가 한강  위에 저뭅니다. 어린  솔포기가 던지는 그림자마다  꾸부리는 치마 입은 형상 같습니다. 돌,  돌, 돌, 손톱이 빠져 피가 납니다.  발자국마다 피가 고입니다. 치마가 다 뚫어졌습니다. 살이 드러납니다. 엎디어 가슴으로 대신합니다. 쓰러집니다. 또 일어납니다. 돌, 돌, 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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