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준-귀를 열면 마음으로 들립니다

 

귀를 열면 마음으로 들립니다

- 박성준의 ‘움직이는 학교’ 이야기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움직임’을 준다, 고여있던 물에 물꼬를 트듯 너와 나 사이에 막혀있는 것을 터서 흐르게 한다. 움직이게 한다. 마음의 흐름이 시작된다.

 

‘움직임’이란 말엔 ‘변화’라는 말이 함께 감지된다. 박성준 씨가 ‘움직이는 학교’를 시작한 이유 역시 ‘변화’를 위해서다. 나의 변화, 우리의 변화, 그리고 세상의 변화... 그 변화를 위해서 그가 즐겨 쓰는 화두는 ‘경청’(敬聽)이다. 경청이란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임’이다.

 

“세상의 변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교회와 사찰이 수없이 많은데도 왜 세상은 이토록 변하지 않을까? 그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소통이 막혀있기 때문은 아닐지...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면서도 진정으로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때문은 아닌지... 저 자신의 이런 반성으로부터 ‘움직이는 학교’의 구상은 시작되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직장 동료가, 이웃과 이웃이 마치 처음인 듯 다시 만날 수 없을까, 그래서 관계를 새롭게, 깊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지요.”

사람과 사람이 새롭게 만나는 방법, 거기엔 우리가 잊고 있었던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으로 듣는 것, 바로 ‘경청’이 보물처럼 숨어 있었다.

“일방적인 전달은 소통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없고, 말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의 설교도 마찬가지지요. ‘하늘의 말’을 성직이라는 통로를 통해 일방적으로 전한다는 방법은 ‘소통’이 아니라 ‘주입’일 뿐입니다. 그 곳에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마음의 움직임을 기대할 수 없지요.”

‘움직이는 학교’라는 발상은 박성준씨가 2년간 머물렀던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Pendle Hill: 퀘이커의 명상센터이자 공동체 학교,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에서의 감동적 체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퀘이커들은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 안에 그가 누구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혹은 종교가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속에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퀘이커들은 각 사람 속에 있는 빛으로부터 들려오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며 고요한 묵상 가운데서 예배를 드린다. 퀘이커의 명상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이라는 점에서 동양의 참선과 조금 다르다고 한다. 함께 모여 서로의 빛에 귀 기울이는 예배를 통하여 드높은 인격적 자율성을 가진 개개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되며 무르익어 간다는 것이다.

“2년 남짓 펜들 힐에서 매일 아침 침묵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말을 닫아 놓고 편안하게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편안하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저는 그곳에서 사람 사이의 소통에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지요. 그곳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듣기’가 생활화 되어있었어요. 부러웠지요. 한국에 돌아올 준비를 하면서 나는 이 ‘듣기’를 나의 친구들에게, 한국 사람들에게 ‘선물’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6년 간의 공부를 마치고 작년 7월 귀국하고서부터 ‘경청’을 화두로 ‘움직이는 학교’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가 가르치고 있는 성공회대학교 학생들과 여러 시민단체의 활동가들과 더불어 ‘새로운 만남’의 실험을 하고 있다.

 

열 명에서 열 다섯 명 이내의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임을 갖는다. ‘움직이는 학교’에선 한 사람이 너무 길게 말하거나 이야기를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둘러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며 누구나 이야기에 참여한다. 남이 이야기 할 때 잘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잠기거나 상대방의 이야기 속의 허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온전히 내맡겨서 남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각자 1분 정도씩 말을 한다. 이야기할 준비가 미처 안 됐다고 느끼거나 혹시라도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말없는 손짓으로 옆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넘겨주면 된다. 상대방의 말을 분석 비판하면서 듣고 허점을 발견하여 논박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통째로 듣기’가 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연습이 거듭되면서 조금씩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돌아가며 무르익어 간다.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 속에 잠자던 이야기를 일깨우는 실마리가 되고 상대의 진실이 나의 심금에 부딪쳐 와 내 소리를 울려낸다.

 

“돌아가면서 1분씩 말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이야기가 길다고 핵심에 이르는 것이 아니지요. 마중물을 조금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수가 이끌려나오듯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마중물이 되어 나의 진실의 샘물을 솟구치게 합니다. 내 생각을 간추려 짧게 이야기하고 옆 사람에게 넘겨주고 하면서 이야기는 나선형을 그리며 움직입니다. 그러면서 개성과 차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공감의 깊이가 더해지며, 나와 너의 진실이 맞닿고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며 해답이 주어집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각 사람 속에 존재하는 빛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아래의 두 글이 자주 인용된다고 한다.

 

‘배운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아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고, 행한다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가르친다는 것은 그들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리처드 바크의 소설 ‘환상’ 중에서)

 

’아무도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순 없습니다. 그대 속에 이미 반쯤 잠든 상태로 존재하는 그대 자신의 지식을 일깨우는 것 밖에는.‘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모두 통하는 의미입니다.

 

‘경청’은 ‘움직이는 학교’운동의 중심에 자리한다. ‘경청’은 정신치료법이나 심리요법에서 말하는 ‘듣기’(listening)와 좀 의미가 다르다. 박성준씨가 말하는 ‘경청’엔 자기성찰과 내적 쇄신, 나아가 각 사람의 변혁과 세상의 변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예언자적 듣기(prophetic listening)’라고 부른다.

 

그는 베트남 출신인 틱 냣한 스님의 ‘mindfulness’란 사상으로부터 ‘경청’(mindful listening)이라는 중심개념을 얻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mindfulness’란 보름달처럼 어느 한군데 이지러짐이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경청은 그런 마음의 상태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박성준 교수는 80년대 변혁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13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감옥에 들어가기 전 한때 마르크시스트로서 혁명가의 삶을 살았던 그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변화에 대한 한평생의 오랜 고뇌와 방황 끝에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다름 아닌, 따뜻한 마음으로 현실에 대해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면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건 현실에 등 돌리고 앉은 수행이 아니라 가파른 현실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하며 수행자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가 ‘경청’이라는 화두로 ‘움직이는 학교’를 시작한 지 1년. 아직 실험 중에 있긴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 시민운동단체와 노동자들의 모임에 이르는 폭넓은 실험의 결과 이제 조금씩 가능성을 확인해가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움직이는 학교’ 운동은 제도권 밖에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물이 흘러가듯 여유롭게 움직여 갈 것이라고 한다. 

 

‘움직이는 학교’는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금전적 계산을 떠나 있다. ‘학교’라고 하지만 장소도 건물도 조직이나 제도도 없다. 학생이 학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찾아간다. 아니, 선생과 학생이라는 이분법적 나눔이 없다.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친다.

 

현재의 삶의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 새 삶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이가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를 찾아 길을 떠날 것이다. 오늘의 교회나 사회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이, 뭔가 대안이 될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회, 새 세상을 갈망하는 이, 이를 위한 새로운 지식과 통찰에 목마른 이들을 찾아가  ‘따뜻하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그들이 ‘내면의 빛’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다.

  

마음의 귀로 들어보는 글

-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 자아를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가득한 마음’이 되도록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매순간의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 그리고 삶과 깨어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줍니다. 언제라도 마음이 산만해질 때면, 그대의 숨을 사용해서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숨을 다스리는 것은 몸과 마음을 그대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입니다.

- 어느 때라도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고 싶으면, 즉시 그대의 숨을 먼저 관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 앉는 순간부터 숨이 깊고 고요해지는 시간까지 그대 안에 일어나는 온갖 생각이나 변화를 의식하십시오. 10분이나 20분이 지나면 그대의 마음과 생각은 잔물결마저 일어나지 않는 연못처럼 고요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연습하기에는 지금 내 마음이 너무나 격해 있고 흩어져 있다고 생각되시거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숨쉬기부터 하십시오. 우리의 숨은 끊어지고 부스러지기 쉬운 나약한 실오라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그것을 부릴 줄 알게 되면 숨은 우리가 그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경이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 이전에 나는 하루의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온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나 자신을 위해 책을 읽거나 뭔가를 하기 시작할 때부터가 ‘나의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숨’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게 된 지금은 다릅니다. 접시를 닦을 때 나는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이의 숙제를 도우면서 나는 나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을 하며, 길을 걸으며, 사람을 만나며.... 나는 나 자신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실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는 무궁무진한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해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틱 냣한님의 ‘마음이 일으키는 기적’(The Miracle of Mindfulness) 중에서>

움직이는 학교에서 함께 읽어보고 싶은 책들

*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 헬레나 노르베리 - 호지/ 김종철, 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이석태 옮김/ 보리

* ‘경쟁의 한계’, 리스본 그룹 보고서/채수환 옮김/ 바다

* ‘The Miracle of Mindfulness-A Manual on Meditation', 틱 낫한 (미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