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1/30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 박 성준 -
[부끄러운 무관심]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미국 동해안을 여행하다가 커네티컷주의 팍스우드라는 곳에 그 때 막 문을 연 '피쿼트 뮤지엄'이라는 미국 원주민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피쿼트(Pequot) 민족은 거의 다 사라지고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인디언 거주구역에 살면서 후손들에게 남겨줄 이 박물관을 세운 겁니다. 박물관 안에는 자기들 옛 마을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모형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우리 동네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쿼트 사람들의 피부색과 얼굴 생김새도 우리와 엇비슷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식이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과 물레를 잣고 있는 모습, 개울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 농사를 짓는 도구들이 우리하고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누이와 고모가 있었고, 이웃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일만 년 이상 지금은 아메리카라 불리는 이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온 원래의 주인이었구나!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그들을 거의 다 학살해버렸구나! 피쿼트 박물관에서 그들의 순결하고 발랄한 옛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대륙이 원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우리와 멀지 않은 친척 뻘 되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감동에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국에 건너간 첫 해, 말이 잘 되지 않아 그 스트레스로 위장병이 몹시 악화돼 있었는데, 그 날 이후 나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 위장병도 나아버리더군요. 키 크고 눈이 푸른 그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서투른 영어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언젠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좋은 책을 한 권쯤 번역 출판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9월 11일의 충격 뒤로 사태 전개를 보는데서도 미국과 서방측의 잣대와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 눈앞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알아보려고 해도 도움을 주는 자료나 책자가 거의 없었고, 또 평소에 너무나도 게으르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과 '지하드'에 대한 이해]
전 세계 이슬람권 인구는 14억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인구 18억의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샬롬' 즉 평화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슬람의 정신은 다양성의 존중과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알라'라는 것은 이슬람의 특별한 신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을 말하는 이슬람 말일뿐입니다. 이슬람 종교의 뿌리는 히브리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멀지 않습니다.
흔히 '성전'이라고 번역되는 '지하드'가 갖는 의미는 '내적 투쟁', '악을 극복하고 선을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내면적인 투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투쟁이야말로 지하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합니다. '지하드'의 더 깊은 뜻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깊은 자기성찰에 의한 내적 쇄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만이 아닌 외적인 것이 될 때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불의와의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장투쟁이 지하드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경우는 도발이나 침략을 당했을 때, 자신들의 종교 가치가 짓밟혔을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손에 드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인 것처럼 얘기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지하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이슬람 사람들이 왜 폭력을 쓰게 되었는가. 그 폭력의 뿌리에 대해 모르면서 이슬람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시각이 내면화되어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큰 병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이런 병에 대해 진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시각, 삐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테러를 보는 눈]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6천명이나 죽은 처참한 사건을 두고 이런 반응을 보여도 되는 것인가?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직 제3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고, 해방되었다지만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으며,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 이래로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감돌고 있고, 미국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는 언제 다시 전쟁에 휘말릴 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앞선 채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그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어마어마한 초현대 무기를 동원해 보복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온 서방 세계가 미국의 편을 들고 있고 우리 정부도 그러한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을 천명하고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란 무엇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가령 6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테러 사건이 미국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아랍지역에서 일어났다면, 그리고 그 행위자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었다면, 세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미국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폭력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방세계는 그런 미국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미국의 그런 행동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동안 이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사건들, 엄청난 규모의 참혹한 파괴와 살육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런 사건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났을 때 더 그러했습니다. 걸프전쟁에서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상하수도, 전기, 가스 시설 등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 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병으로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신문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 미국이 전해주는 대로 보도해 왔고 우리들은 그저 먼 산 보듯이 하면서 보도의 진실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무덤덤히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미국이 당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테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왕 관심을 가질 바에는 이 기회에 "테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한번 되짚어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즉, 어떤 집단이 미국 중심의 세계가 악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에 대해서만 테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강대국이 국가의 이름으로, 강대국들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엔의 승인까지 얻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파괴와 민간인에 대한 살육을 행하는 전쟁이나 군사공격은 테러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전쟁에 반대하는 인민의 연대'(People's Coalition Against War; PCAW)라는 미국에 본부를 둔 평화단체에서는 이렇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테러에 대한 해결 방법은 정당한 절차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는 협상과 외교여야 하지 협박과 최후통첩, 봉쇄와 금수조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불러올 것이기에. … '테러''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에 찬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에 의해 승인된 테러, 파시스트에 의한 테러, 개인과 집단에 의한 테러 등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테러의 개념에 따른다면, 미국이 수단의 제약회사를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라든가 걸프전에서 행했던 혹은 코소보에서 행했던 전쟁이라는 이름의 살상행위도 테러에 포함될 것입니다. 미국의 보복 군사행동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정치인 미국의 하원의원 바바라 리 여사가 말했듯이,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전에 "한 발짝 물러서서" 테러의 원인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았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테러리즘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미국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 왔기에 이슬람 민중들이 저렇게까지 처절한 증오심을 품고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자살테러를 감행했겠는가, 그들의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
어느 기자는 "미국 테러 참사는 일종의 부메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미하일 델랴긴(세계화문제연구소 소장)은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는 러시아 속담을 곁들이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약소국가들에 불안정을 조장해 이익을 챙기면서 약소민족들의 이권을 냉혹하게 무시했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에 균열이 심해졌고 그 결과 악마적 테러가 폭발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시사저널' 10월25일자 참조) 또 우리 나라 신문과 잡지에 자주 글을 써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친숙해진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는 '한겨레21' 최근호(10월2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노르웨이의 어느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 씨와 외과의사 후솜 씨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좀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의료봉사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솜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 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 손은 못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솜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솜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의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 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로 인한 아사사태에 시달려 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아프간은 미국의 신무기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21세기 첫 전쟁은 겉으로는 '빈 라덴과 그 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격을 띄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은 명분일 뿐, 미국이 테러응징을 내세워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지적합니다.(시사저널 10월25일자 참조) 숨겨진 전쟁목표는 또 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국토를 무기성능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번 테러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해가려 한다고 합니다.
[시대는 문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이번 사태가 21세기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중일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너무 심각하고 거대해서 그 효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첨단 무기를 가진 초강대국의 폭력에 맞서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하는 생물학 무기가 등장하고 해서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 사회구조와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농부이자 평화운동가인 웬들 베리(Wendell Berry)씨는 '무너지는 낙관론 - 공포 가운데서 살아가기'(Thoughts in the Presence of Fear)라는 글에서 문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대략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9월11일 사건과 더불어, 기술적/경제적 낙관론이 의문의 여지없이 통하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신세계질서’, ‘신경제’ 운운하면서 마치 우리가 무한정 성장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던 낙관론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런 낙관론을 신봉했던 정치지도자들과 대기업간부들과 투자자들은, 번영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의 극히 일부인 한줌의 부유층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에서조차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번영은 전 세계에 걸친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딛고 서있으며, 그 번영의 생태적 비용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 위협으로부터 부유층들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발전된' 나라들은 '자유시장'에게 신(god)의 지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은 한편 농민들과 농토와 마을 공동체와 숲과 습지와 평원을, 한마디로 전 생태계를 희생 제물로 삼아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전세계적으로 '경제의 비집중화'(economic decentralization), '경제정의', '생태적 책임'을 위한 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9월 11일 사건 이후로 그러한 노력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일련의 연속적 기술혁신 조차도 이번에 경험한 더 엄청난 혁신, 즉 새로운 형태의 전쟁(a new kind of war)에 의해 마구 짓밟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치 못했다. 그 새로운 무기, 새 전쟁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기술혁신의 성과를 우리들의 재앙으로 바꾸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무한경쟁 자유무역의 지구경제시스템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부유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과 자기수정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군림해온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행복한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4차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이래로 걸프전, 미국과 아프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주기로 해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기 상인들의 투자와 자본회전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는 완전 초토화라는 자연과 생활환경의 파괴가 가능하고 생태적 질서 자체를 완전히 변형해버리는 가공할 무기들이 등장했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해내는 군수산업의 경쟁은 종착점도 브레이크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경쟁의 결과 무기체계는 이미 '전쟁무기'라는 한계선을 넘어섰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재래적 의미의 전쟁 도구가 아니라, 그 악마적인 힘은 신의 영역을 침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를 먹고사는 전쟁상인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미국경제의 체질도 근본적인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미국식 삶의 방식, 미국식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제도를 세계의 모든 지역과 나라에 전파하고, 심지어는 이슬람권과 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이러한 방식은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을 꿈꾸라]
이런 모든 문제 -인류가 안고 있는 질병들- 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서 말했듯이 문제 자체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평화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전인류적인 평화운동이 지금의 반평화 흐름보다 더 거대하고 도도한 물결로 일어나야 인류가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거대한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 옹의 저 놀라운 통찰에 깊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들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꿈을 꿔야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내야 합니다. 그것은 차가운 현실주의적인 분석과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9월 11일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면서 전 세계 인류가 평화를 위해서 커다란 각성을 해야하고 서로 연대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거대한 연대가 그 반대 방향, 즉 폭력의 악순환으로 가려고 하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통제를 가하고 그 고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 9월 24일자 논단 '새로운 세계에서의 미국의 주권'이란 글에서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공격은 그래도 전통적인 성격의 공격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생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번에는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미국 땅에서 6천명이 아니라 60만 명도 죽일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결과가 미국의 보복공격과 그에 대한 재 보복으로, 탄저균 같은 생물학적 무기가 사용되는 바이오전쟁으로, 그리고 다시 원자력발전소 공격과 같은 더 무서운 재앙으로… 이렇게 끝 모르는 폭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전 세계와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자랑인 '시민적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옹호해야 하며, 미국이 더 강화된 군사주의나 전시 파시즘 체제로 가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면 먼저, 또는 적어도 동시에 미국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미국 안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고 평화적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미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점차 확산되어 갈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무력감, 우리가 미국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적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것이 창조적 상상력입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평화의 새 문명을 여는 열쇠꾸러미 중 가장 큰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엮어놓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 세계 반전 평화 연대세력의 힘으로 선의의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지금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강 건너 불이 아닙니다. 유니세프에 의하면 앞으로 한 달 안으로 식량이 공급되지 않으면 10만의 아프간 어린이들이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어 병들어 죽을 거라고 하는데, 금년 겨울에 5백만의 아사자가 나올 거라고 하는데, 어떻게 남의 문제라고 편안하게 잠을 자며 나와 내 가족만의 안전만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 미국의 한 평화 연구소(Rocky Mountain Peace and Justice Center)의 최근(11월 15일) 발표에 따르면, 앞으로 3주 이내로 아프간 주민 750만이 아사(餓死)의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그중 150만이 5살 이하의 어린이들이라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남자들은 러시아와의 오랜 전쟁에 거의 다 죽고 주민의 70%가 여자와 어린이이며, 어린이들이야말로 가장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기 어렵다는데, 영하 40도의 혹한은 닥쳐오고, 미국의 계속되는 폭격은 유엔 구호물자 운송을 위한 활주로를 다 파괴했고 식량을 실은 차량이 지나갈 도로마저 거의 다 파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금후 '테러와의 전쟁'의 전개양상에 따라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에 한반도가 걸려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북한 위협론을 보거나, 또는 미국이 아프간 겨울전투에는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면서 한국정부에 특전사 1개 여단을 파병해달라고 비공식 요청했다는 것(시사저널 11월 22일자 참조)을 보더라도 반테러전쟁의 전개양상에 따라서는 불길이 한반도에 옮겨 붙을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이런 불행한 사태를 미리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만 가지고, 그 데이터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생각해서는 이 복잡한 모든 문제에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기적 같은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꿈을 꿔야 합니다. 꿈꾸는 일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룩할 수 없습니다.
'모의 국제 테러 법정'을 세계도처에서 엽시다. 그리고 그것을 연극으로 마당극으로, 뮤지컬로 만들어 전 세계에 전파합시다. 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미국을 포함한 온 세계 각 나라의 평화세력이 일제히 떨쳐 일어나게 합시다. 평화의 인간 띠 잇기로 미국의 강경파 지도자들과 무기상인들을 포위합시다. 평화의 페스티벌, 평화 음악회, 평화 연극제, 평화 영화제, 세계 어린이 평화백일장, 평화를 주제로 그림 그리기, 평화 연날리기, 어머니들의 평화 노래부르기 대회, 평화주제의 대학가요제, 평화의 시 백일장, 각종 기발한 평화 교육 프로그램, 다종다양한 평화행사들, 세계 평화의 꽃 박람회, 평화 퍼레이드… 이리하여 평화 캠페인의 거대한 전 인류적 물결을 이룩합시다. 그 도도한 평화의 물결로 저 미국의 호전 강경 세력들을 포위합시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평화의 부드러운 힘으로 그들을 녹여버립시다. 이와 동시에 이슬람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호소합시다. 폭력의 악순환을 함께 끊자고.
테러와 보복전쟁의 악순환이 일어나면 이 지구촌에서 안전 지대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인류는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뼈 속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있고 우리의 운명은 하나입니다.
세계의 평화세력이 연대하여 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이 주역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21세기에 세계평화를 위한 운동의 모범을 창조해낸다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것이고 전 세계와 전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소중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기여에서 우리의 몫은 매우 큰 것입니다. 분단의 땅, 분단된 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꿈이 전 인류를 감동시키고 세계평화운동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합시다.
간디 옹의 말씀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예전엔 꿈도 못 꿨던 놀라운 발견이 세계평화운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의 창조적 의지와 상상력에 불을 붙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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