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평화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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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학교의 ‘거룩한 책읽기’
- 귀를 열면 마음으로 들립니다 -
- 박성준 -
가톨릭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중세 수도원에서 전통적으로 수행해온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는 방법을 새롭게 재발견해 성서읽기 등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성서의 어느 부분을 큰 소리로 낭독하면서 ‘읽는다’기 보다는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다음으로 그 특정한 성서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음미하고 성찰합니다. 그런 다음 정성어린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을 감지합니다. 이리하여, 말씀을 개념화하거나 분석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 안에 평안히 머무는 상태로 자신을 맡겨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깨달음(awakening)이 일상적인 활동과 삶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 나는 가톨릭의 이 ‘거룩한 독서’에서 암시를 받아 ‘움직이는 학교’(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만남과 소통의 한 방법론입니다)의 ‘거룩한 책읽기’ 방법을 고안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학교의 ‘거룩한 책읽기’는..
- 책 읽기의 목적이 지식과 정보의 획득에 있지 않고 삶의 지혜와 통찰을 얻는 데 있습니다.
- 이 글 읽기는 지성적이기 보다는 체험적이고 논리와 사변을 추구하기보다는 진실과 지혜를 추구합니다.
- 책 속의 살아있는 그 무엇(생명)을 찾고 그것과 더불어 느끼고 생각하고 묵상하며 ‘더불어 숨쉰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런 자세와 방법으로 함께 책을 읽습니다.
- 이 경우 책은 도구이고 수단이지만, 단순히 ‘읽는다’를 넘어서 책 속의 그 무엇에 깊이 귀기울여 듣고, 드디어는 그 책의 속내를 꿰뚫어야 합니다.
- 한권의 책을 가운데 놓고 둘러 앉아 서로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사람들은 서로를 더욱 더 깊고 따뜻하게 느끼며, 서로 간에 개성과 다름이 있음을 알고 존중하며 이해와 우의를 돈독하게 합니다.
- 움직이는 학교에서 책을 읽을 때는 책을 ‘읽는다’라고 하기보다는 ‘듣는다’고 하는 데 더 가깝습니다. 단순히 즐거움을 얻거나, 지식이나 정보를 획득하거나 증대시키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을 공경하기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열어두고, 마치 아기가 어머니 품에 안겨있듯이, 수동적으로 자신을 책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 염려, 측은한 마음 같은 것들입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가, 그 아이가 아프거나 아프지 않거나 간에, 그 아이의 현실이 나의 현실이 되어, 섬세하고 따스한 사랑으로 아기의 현재의 상태를 알고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한권의 책 속에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람에게 경청하듯 하는 것입니다.
- 움직이는 학교에서 함께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책과 더불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서로를 느끼는 일입니다. 그 책을 통해 나와 우리 안에 있는 감수성이 깨어나고, 꽃봉오리가 벙그러지듯 나와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리고, 보름달처럼 마음가득 따뜻하게 깨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 이러한 책읽기를 통해 세상과 더불어 살아 숨쉬고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함께 행동합니다.
통째로 듣기
- 경청(mindful listening)의 방식으로 듣기를 할 때 사람의 의식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분석적이고 비판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감성적으로 수용하고 용납하려는 의지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비분석적인,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며, 분석하고 쪼개려 하지 않고 통째로(holistic)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말하기’(speaking) 방식으로 접근하면 저쪽 역시 말하기 방식으로 대응하게 마련입니다. 이 쪽이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기 시작하면 저쪽에서도 자신을 논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들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 보다는 먼저 자신을 방어하는데 주의를 집중하게 됩니다. 일단 논리적 방어 기제가 서로 간에 작동하기 시작하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논리와 논리의 대결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쪽 논리와 저쪽 논리가 맞서 겨루는 형국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나와 너의 진정한 만남의 관계가 아닙니다.
- 이러한 관계를 바꾸어놓기 위해서는 ‘듣기’(listening) 방식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오직 들으려 하고 이쪽에서 먼저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면 상대방도 나에 대해서 논리로 접근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논리라는 도구(무기)를 놓아버리고, 그래서 수용하려는 태세가 되면, 상대방의 굳게 잠겼던 마음의 문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도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 .... 그것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고 그리워하고 그것 때문에 행복해 하거나 눈물짓는 것 .... 그것들은 논리로 풀어내려면 결코 풀려나오지 않습니다. 논리라는 도구를 놓아버리고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면 그것들은 엉킨 실타래 풀리듯 슬슬 풀려나게 됩니다. 상대방의 굳게 잠겼던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이야기가 풀려나오면 듣는 이 쪽의 마음도 열리고 변화를 겪게 됩니다.
권력자 들은...
- 권력자들은 물론이고 이른 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사로잡혀서 항상 그것으로 남을 설득하고 주장하고 요구하고 전파하는 데 익숙해졌고, 그렇게 행동하기에 바쁩니다.
-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자세가 아예 없거나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우선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어떤 근심이나 괴로움을 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얼 느끼고 있는지, 마음을 열어놓고 귀기우려 들어 보려는 그런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생각이 자기보다 좀 모자란다고 여겨지면 곧 가르치려고 하고 주입시키려 듭니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동화시키려 합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 나와 다름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격려의 눈길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옳은 일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잘 하고 있다는 자기 긍정은 있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이내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빙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임을 갖습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한 사람이 너무 길게 말을 하거나 이야기를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합니다. 둘러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며 누구나 이야기에 참여합니다. 남이 이야기 할 때 잘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잠기거나 상대방의 이야기 속의 허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온전히 내맡겨서 남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는 연습을 합니다.
- 한 바퀴, 또 한 바퀴, 각자 1분 정도씩 말을 합니다. 이야기할 준비가 미처 안 되었다고 느끼거나 혹시라도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말없는 손짓으로 옆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넘겨주면 됩니다. 이야기가 돌아가며 무르익어 갑니다.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 속에 잠자던 이야기를 일깨우는 실마리가 되고 상대의 진실이 나의 심금에 부딪쳐 와 내 소리를 울려냅니다.
- 상대방의 말을 분석 비판하면서 듣고 허점을 발견하여 논박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통째로 듣기’가 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연습이 거듭되면서 조금씩 더 잘 들을 수 있게 됩니다.
- 돌아가면서 1분씩 말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이야기가 길다고 핵심에 이르는 것이 아니지요. 마중물을 조금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수가 이끌려나오듯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마중물이 되어 나의 진실의 샘물을 솟구치게 합니다. 내 생각을 간추려 짧게 이야기하고 옆 사람에게 넘겨주고 하면서 이야기는 나선형을 그리며 움직입니다. 그러면서 개성과 차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공감의 깊이가 더해지며, 나와 너의 진실이 맞닿고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며 해답이 주어집니다.
-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각 사람 속에 존재하는 빛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아래의 두 글이 자주 인용됩니다.
“배운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아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고, 행한다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가르친다는 것은 그들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리처드 바크의 소설 ‘환상’ 중에서)
“아무도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순 없습니다. 그대 속에 이미 반쯤 잠든 상태로 존재하는 그대 자신의 지식을 일깨우는 것 밖에는.”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 ‘움직이는 학교’의 중심에 자리하는 원리는 ‘경청’입니다. ‘경청’(mindful listening)은 베트남 출신인 틱 냣한 스님의 ‘mindfulness’라는 사상으로부터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 ‘mindfulness’란 보름달처럼 어느 한군데 이지러짐이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청은 그런 마음의 상태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경청’에는 정신치료법이나 심리요법에서 말하는 ‘듣기’(listening)보다 더 깊고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즉 ‘경청’엔 자기성찰과 내적 쇄신, 나아가 각 사람의 변화와 세상의 변혁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이것을 ‘예언자적 듣기’(prophetic listening)(평화학자 Elise Boulding의 용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현재의 삶의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 새 삶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는 이들은 열명 정도의 작은 모임을 꾸려 아름다운 학교 방식의 말하기와 듣기, ‘거룩한 책읽기’를 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학교나 교회,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이, 뭔가 대안이 될 새로운 모임과 공동체, 새로운 사회, 새 세상을 갈망하는 이, 이를 위한 새로운 지식과 통찰에 목마른 이들은 서로 찾고 방문하여 ‘따뜻하게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으로 서로의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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