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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박성준

박성준-먼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특집 / 소통

먼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 박 성준 -


「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이름이 생각나요. 우리나라에는 「사랑의 기술」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죠.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이 중요한 것도 알고, 사랑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고 마음 앓이를 하면서도 정작 사랑을 잘 못한단 말이에요. 그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죠. 방법을 좀 알아야 해요. 그 방법을 배워나가다 보면 사랑을 잘 하게 돼요. 하나의 접근법인 것 같아요.

 

소통이 잘 안 되는 것도 근원의 문제가 있겠지만 그 원인을 풀어 치유하는 데 있어서 접근법은 우리가 그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나, 하는 거죠. 흔히 기술이라고 하면 기계를 움직이는 기술, 테크놀로지, 공학적인 기술을 연상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테크놀로지를 재미있게 쓰더라구요. 사랑의 테크놀로지, 대화의 테크놀로지, 심지어는 듣기의 테크놀로지, 영성의 테크놀로지까지. 「The Art of Loving」에서는 Atr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깊은 경지의 그런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퀘이커들은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의 빛, the inner Light.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존재, 씨앗(the Seed), 영(the Spirit), 그리스도, 신적인 현존,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걸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면의 빛이죠. 각 사람 안에 그가 누구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혹은 종교가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어떤 사람도 그 안에 빛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요. 내 안에도 물론 빛이 있고. 우리는 그 빛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바라보아야 하고, 그 빛이 우리를 이끌어 줄 때 그 빛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내면의 빛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주는지 귀를 기울이고 그 이끌림에 따라서 가야한다, 이렇게 생각한다구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 사람 안에 있는 빛에 귀를 기울이려고 해요. 사람을 만날 때, 그 빛이 나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는가, 그렇게 접근하지요.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그런 것이 나온 게 아닌가,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잘 듣지 못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자기와의 관계에서는 자기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모르거나, 소중한 것을 이미 잃어버렸다고 자포자기하거나 나는 그런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야, 하고 단정해버리는 마음이죠. 그래서 스스로가 황폐해져 버리는 겁니다. 남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부부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동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상대방을 소중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들으려고 하는 자세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닌가. 자기가 황폐해져 있는 것처럼 남들도 다 비슷하게 보이면서 단지 그냥 남은 내가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하려고 하는 나의 아젠다의 수단으로 상대방을 보고 마는 거죠. 내 아젠다의 중심에 서서 상대방을 활용가치로 생각하니까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는거죠. 빨리 상대방에게 주입시키거나 설득시켜 받아들이게 만들어 추진해나가는데 중심이 가있죠.


저는 언제나 어디서나 모이면 그 때가, 그 곳이 학교인 ‘움직이는 학교’란 걸 하고 있어요.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그런 방법을 한번 사용해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둘러앉아 가지고 누구나 똑같이 1분씩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거죠. 1분이 넘을 수도 있고, 말하기 훈련이 잘 안 된 경우에는 2분이 넘어버리고 3분이 넘어버리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짤막짤막하게 이야기하면서 계속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 할 때 자기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거나 남의 이야기 허점을 자꾸 따져보고 있거나 분석하고 있거나 그러지 않고 자기를 포옥 내맡겨서 남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는 연습을 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비판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이야기를 듣는데 목적을 두었을 때 ‘자기의 전 존재가 귀가되어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 마음을 듣는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한 바퀴, 두 바퀴 이야기 순서가 돌아가면서 준비가 안 됐거나 하고 싶지 않은 분은 말 안 해도 되죠. 말 안한 사람보다 말 한 사람이 더 우수하다거나 더 유능하다거나 그런 기준이 전혀 없이. 말 안 한 것은 그 나름대로 좋고, 말씀 한 분은 말씀 한 대로 좋고. 말 없이 말한 경우도 있고 말하면서 충분히 말이 안 된 경우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혀 그런 기준으로 보지 않으니까 말하는데 강박관념을 갖지 않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에서 한 바퀴 돌면 말씀 안 한 분도 또 하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듣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리가 주어지고, 방법이 주어지니까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더라구요. 아, 듣는게 쉽지 않구나, 하는 것도 알게 돼요. 평소에 나는 항상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내 생각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의 허점이나 반박할 자료를 생각하고 있었지 진정으로 듣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더라구요. 그런 방식이 참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사람 사이의 소통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걸 제가 배웠기 때문이에요. 어디서 배웠느냐. 바로 펜들힐에서죠. 팬들힐은 미국 팬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퀘이커의 학교예요. 일종의 영성 센터라고 할 수 있는데, 항해하던 배들이 잠시 들러 쉬는 항구라고도 할 수 있는(쉬면서 재충전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곳이에요. 두 가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하나는 영적으로 깊어지는 것, 또 하나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 그래서 이 두 가지가 튼튼히 결합되어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 학교에서 매일 아침 8시에, 1시간 동안 귀를 기울이는 예배를 해요. 말을 하지 않고 귀를 열어놓고 편안하게 하는 퀘이커식 예배를 합니다. 1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오래된 건물에 8시가 되면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어딘가에 귀를 기울여요.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딘가에 있는 어떤 존재를 향해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그 존재는 자기 안에 있기도 하죠. 새소리라든가, 바람소리, 저 멀리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 무슨 소리든지.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침묵 속에서 귀를 열고 있으면 그 침묵의 깊이가 점점점점 깊어져요. ‘아, 깊구나. 아, 고요하구나’ 그런 걸 느껴요. 그런 훈련을 2년 동안 했어요. 내가 할 말을 닫아놓고 편안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편안하구나, 그걸 알게 되었죠.

 

그것이 그렇게 좋은 걸 알고 나서 한국에 돌아올 준비를 하며 한국을 생각하니까 너무 기가 막히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의 이런 면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니까. 예를 들어 듣는 기능과 말하는 기능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면, 듣는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정상이 아닌 거죠.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살고 있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래요, 정상을 회복해야죠.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듣는 기능을 살려야 겠다. 그래서 ‘듣기’라는 화두를 얻어온 거죠. 제게 온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듣는 연습을 하면서 우선, 휴식의 의미를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일을 한다는 것과 쉰다는 것. 일을 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하고. 정말 일을 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는 것인가. 일을 하면서 쉴 수는 없는가.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정신없이 일을 하는 것이 과연 잘 하는 것인가. 일이 제대로 되는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첫 번째 반응은 편안해졌다, 평화롭다, 이런 느낌이구요.

 

그리고 얼마나 우리가 듣는 걸 못하는지 알게 되죠. 잡념이 자꾸 들어오고, 자기 생각이 생기고…. 잘 들어보려고 하는데도 안 되는데,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조차 없이 지내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두 분씩 짝을 지어서 한 분이 이야기하면 한 분은 오직 듣기만 하는 시간이 있어요. 5분 뒤에 역할을 바꾸거든요. 근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가 듣지 않고 사니까. 그리고 매사에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즉흥적이고, 관성에 끌려가고. 제대로 쉬지 못하니까 자기를 돌아볼 시간도 없어요.

 

숨을 길게 들이쉬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만큼 헐떡이며 살아왔는가를 알게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숨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숨은 팽개쳐져 있고, 헐레벌떡 헐레벌떡하는 동안에 중심에서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숨을 자기 걸로 삼게 되면 숨이 우리에게 엄청난 일을 해줘요. 어떻게 숨이 자기것이 되냐구요? 틱낱한 이라는 베트남의 스님으로부터 배운 건데요. 물론 직접 만난 것은 아니지만 책을 통해, 그분을 만났던 분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죠. 그분도 ‘듣기’를 강조합니다. 숨쉬는 방법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얘기해 줘요.

 

“숨에 대해서 생각하라.”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서 지금보다 두 배쯤 길게 들이쉬고 내쉬어봐라. 숨을 쉰다는 것을 마음속에 늘 가지고 있어라.’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 서둘지 않게 돼요. 말을 하면서도 생각하게 돼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귀울이게 되고, 더 많은 소리들이 들려와요.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를 ‘mindful’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이것은 ‘이즈러지지 않은 보름달 같은 마음으로 현실에 대해 깨어있기’ 입니다. 예전 운동에서는 의식화를 위해 많이 노력했죠. 이런 의식화는 참 중요하긴 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한 사회의식을 가진 상태이면서 동시에 숨을 쉬고 있고,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고, 장악하고 있고. 그리고 따뜻한 마음, 그것은 조각이 아니고 보름달처럼 이즈러지지 않은 것이어야 하죠. 그런 마음으로 운동을 한다면 정말 운동이 되지 않을까. 틱낱한 스님은 그렇게 해야 운동을 제대로 한다고 말합니다. 증오의 마음이 아니라 따뜻한 깨어있는 마음으로 운동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제가 감옥에서 나와 산지가 13년 정도 지났어요. 그게 80년대, 90년대 초였어요. 변혁운동의 소용돌이 속이었죠. 그러면서 항상 마음 속에 고민이 많이 있었어요. 뭐가 옳은 것인가에 대한. 그전에는 감옥에서 13년 반 동안 있었고.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투적인 혁명가의 삶을 살았고, 막시스트였고, 그 이전에 크리스찬이었고. 그런데 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 복잡한 고민을 안고 살았죠. 지금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어요. 막스주의 문제라든가, 혁명의 문제, 또 기독교에 관한 문제라든가, 막스주의 때문에 고민한 것 못지 않게 신앙문제 때문에 고민했거든요. 최근의 마음과 생각에 도달하면서 많이 정리가 됐어요. 따뜻한 마음으로 현실에 대해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면 되겠구나, 그렇게 정리가 된 거죠. 현실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어디에 칩거해서 수행을 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며, 현실 참여를 하면서 수행자적 자세를 간직하고자 합니다.


아무도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순 없습니다. 그대 속에 이미 반쯤 잠든 상태로 존재하는 그대 자신의 지식을 일깨우는 것 밖에는. - 칼릴 지브란 ‘선지자’ 중에서


만일 그가 진실로 지혜로운 이라면, 자신의 지혜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대에게 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대를 그대 마음의 문지방에까지 안내해 줄 것입니다. - 칼릴 지브란 ‘선지자’ 중에서


우연히 모인 생각의 단편이나 말을 가지고 듣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이것도 하나의 방편이죠. 퀘이커들은 교리를 안 가지고 있어요. 교리를 만들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고정돼있지 않고 자기 생각하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열려있죠.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죠. 여백이 있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