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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에코페미니즘

생태여성론이란 무엇인가 /문순홍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인드라망생명공동체> 200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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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여성론이란 무엇인가? 
  
                                                                                                                                                                       문순홍 (바람과 물 연구소 소장)

■ 개념의 등장

에코페미니즘은 생태학과 여성론이 결합한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여성/자연 그리고 남성/문화간 同置性에 대한 직시(Ortner, 1974) 그리고 여성이 피지배성과 자연의 피지배성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직시(Rae, 1994)로부터 시작하였다. 생태사상과 여성론의 결합인 에코페미니즘은 이론과 운동에서 각기 개별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운동 차원에서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은 반핵 반군국주의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이러한 결합의 예들은 각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73년 프랑스 라작지방의 군사훈련장 건설 반대운동, 1975년 독일 비일 핵발전소 건설반대운동, 1980년 영국 그린햄 콤몬 핵발전소 건설반대운동, 1980/81년 미국 여성 펜타곤행동집단―이 운동은 1980년 「여성과 지구에서의 삶:80의 에코페미니즘」이란 회의로부터 연이어 폭발된 운동이다. 이 운동의 목적은 반생명적 핵전에 대한 준비 그리고 핵무기 개발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Merchant, 1992: 184)―들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문순홍, 1994b). 이들 운동에의 여성참여가 공유하는 입론은 여성의 자연 및 사회에 대한 시각이 남성들과 상이하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의 자연 및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이 친자연적이고 평화지향적이란 점이다.

이론적 측면에서 여성주의와 생태사상 간의 접합은 여성주의 저작들이 그려낸 여성해방의 유토피안적 대안사회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대안사회의 윤곽이 생태론자들의 생태공동체 이미지와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레 에코페미니즘의 맹아를 만들어 주었다. 생태사상과 여성주의가 그린 대안사회의 자화상은 분권화, 비위계질서,직접민주주의적 구조, 지역의존적 경제, 가부장제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다(Kuletz, 1992).

캐롤린 머챤트(Merchant,1990,1992)에 따르면 에코페미니즘이란 용어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드본느의 저서 {여성해방인가 아니면 죽음인가} (1974)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그녀는 자연파괴와 여성억압적 남성중심사회를 연결지어, "우리의 삶에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두가지"는 "인구과잉과 지구자원의 파괴"로 이는 "남성중심적 체제"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이로부터 탈출할 수있는 유일한 길은 "남성적 권력을 여성이 파괴하는 것"으로, "생태위기 해결에서 여성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만이 유일하게 지구 상에서의 인류생존을 보장해 줄 수있다. 이후 이 개념은 킹이 1976년 버몽에 사회생태학 연구소를 건설하면서 더욱 발전되었고, 에코페미니즘의 이론적 논의는 제2의 여성해방물결이 최전성기에 달했던 1970년대 말경부터 본격화된다. 당시 마리델리의 {여성과 생태학}(1978), 수잔 그리핀의 {여성과 자연}(1978), 캐롤린 머찬트의 {자연의 죽음}(1980) 등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들은 후기 에코페미니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리델리의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적 재생산적 생물적 속성 또는 자연으로부터 단절하길 요구하지 않는 것"이란 정의는 여성해방이론 내 본질주의 대 유물론 사이의 뿌리깊은 논쟁을 에코페니미즘에서 다시 한번 더 부활시켰고, 이후 이 논의 진화의 끈이 되었다. '


―결국 본질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간 논쟁이란 여성성이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존재한다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역사·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인가? 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었다. 자연과 여성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논쟁은 반복되는데, 이 경우 논쟁의 관건은 여성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진 본성과 자연에게 주어진 본성은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양자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역사·사회적인 것의 내용은 문화라 불리는 집단적 의식인가 아니면 국가 및 경제라 불리는 사회적 실체인가 등이다. 이와 관련하여선 Hein: 1993, Morris:1993, Soper:1992, Mellor:1992을 참조하라.―
현재 에코페미니즘은 제3의 여성해방운동이라 지칭할 정도로 장미빛 기대를 받고 있다.


■ 에코페미니즘의 분화

'이러한 자연과 여성간 연관성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우기 여성억압과 자연파괴를 어떻게 동시적으로 풀 수 있을 것인가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에코페미니즘은 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간의 공통점―이와 관련하여선 문순홍(1994c)를 참조하라.―에도 불구하고 내적 불일치를 안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를 분류하는 방법은 학자마다 상이하다. 예로써 빌(Biehl,1991)과 같은 학자는 심리생물적 에코페미니즘과 사회구성적 에코페미니즘으로, 멜러(Mellor,1992)는 본질주의적 에코페미니즘과 유물론적 에코페미니즘으로, 쿤즈(Cunze, 1994)는 급진적 에코페미니즘, 사회주의적 에코페미니즘, 제삼세계적 에코페미니즘으로, 그리고 워렌(Warren,1991)과 캐롤린 머챤트(1992)는 자유주의적 에코페미니즘, 맑시즘적 에코페미니즘,문화적 에코페미니즘, 사회적 에코페미니즘 그리고 사회주의적 에코페미니즘으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분화는 하나의 이론으로 굳어졌다기 보다는 사실 경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현실적 요구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현실에서 양성평등적이고 친생태적 사회건설을 저지하거나 방해하는 장벽은 때론 문화적 집단의식의 형태로, 때론 경제적 생산방식 또는 경제적 합리성으로, 때론 정치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문제제기의 영역(사회공간)을 확장하였고 이를 이론으로 정당화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풀기위한 3중 과정론―이 3중과정론은 필자가 주조한 개념이다.


방법론적 개체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든 방법론적 전체론에 입각한 사회주의든간에, 70·80 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회과학 이론들은 하나의 전체사회를 사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해서 조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른 바 "신사회운동"의 등장이후 전체사회를 국가, 경제 그리고 시민사회로 삼분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3중 과정론은 이러한 3분법에 기초한다. 이로부터 이른 바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선 세 개의 영역(국가영역, 경제영역 그리고 지역사회 및 가정영역)이 모두 동시적으로 운동 및 문제해결의 대상으로 논의되고 활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이라 칭하고, 급진적 여성해방론과 근본생태론간 결합, 급진적 여성해방론과 사회생태론간 결합 속에서 그리고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 생태사회주의간 결합 속에서 유형화하고자 한다.


■ 근본생태론과 급진적 여성해방론의 결합 :문화공간

이러한 결합은 생태사상과 여성주의가 결합한 초기적 유형으로 70년대라는 시기적 상황에서 가능하였다. 60년대 말에서 부터 70년대초 등장하기 시작한 자연파괴와 새로운 형태로 제기된 여성에 대한 물음은 생태사상과 급진적 여성해방론으로부터 답을 구하고 있었다. 당시 생태사상의 문을 연 것은 근본생태론이었다. 근본생태론과 급진여성해방론이 결합되던 초기에는 여성과 자연이 본래적으로 동일하다는 생물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경향성이 주도적이었다.

본질주의적 경향의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비인간적 자연이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 "여성은 자연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동일성에 대한 주장은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속성으로 인하여 구분되고, 인간과 자연도 각기 다른 속성으로 인하여 구분될 수밖에 없는 실체라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자연과 여성은 "돌보고" "양육하는" 존재방식, 모성, 감성 그리고 직관적 능력을 자신의 속성으로 하는데, 이 속성은 특히 여성에겐 생물적 결정요인에 의해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그 근거를 역사적 신화 속에서 찾고 있다. 예로써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 지구가 이른바 "어머니 지구"로 불리웠음을 상기시키고, 그 이유로 지구가 가지고 있는 농경적 비옥도와 계절적 순환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동질성이 서구문명에 의해 억압과 종속을 영구화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 왔음에 주목한다. 자연은 인간의 경제적 원료저장고로 댓가없이 고갈/파괴되었고, 여성들은 어린이를 육아하고 가계를 돌보는 열등한 가사영역에 희생되도록 강요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눈에 이러한 자연파괴과 여성파괴는 오늘날 현대적 생태위기의 동일한 뿌리인 것이다.

이렇게 에코페미니즘이 출산이나 보육, 또는 직관적 능력 등의 속성을 여성의 생물적 특성에 기인한 내재적 속성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이것은 여성과 자연간 상관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다른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이견과 반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성=자연이란 동일성 주장은 사실상 오랫동안 보수주의에 의해 여성을 가정으로 묶고 억압하는데 사용된 "여성적 본성론"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속성이 사실상 본질적으로 주어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남성이 창조한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비판하는 집단이 서서히 등장하였다.

이들은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스트들로,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보육" 등의 속성이 생물학적 특성임을 포기한다. 이들은 여성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생각이 사회적 구성물 즉, 남성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임을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자연은 그 자체로서 역동적인 것이고, 이 역동성은 음과 양의 조화에 의해 나타난다. "음 또는 연성적" 속성은 협력, 감성, 전일적 사유, 감동, 그리고 직관을 의미하고, 주로 여성과 연관지워져 여성적 원리라 칭해진다. "양 또는 강성적" 속성은 경쟁적 독단성, 합리주의, 공격성 그리고 유물론적 사고와 유사한데, 이는 남성적 원리라 불리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은 性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포함된) 자연의 보편적 속성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개개 인간은 음과 양이 상대적 평형을 이룬 존재이며, 여성적 원리와 남성적 원리가 나름대로 어울어져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고대 이후의 세계에서 이러한 평형은 두개의 "분열된 문화" 속에서 양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따라서 양적인 가치와 원리를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전면에 관철되면서 이러한 가치는 인간과 특히 남성에게로만 한정되었다. 이 분열된 세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할 대상으로 국한시킬 때, 곧잘 여성=자연이란 등식이 사용되곤 한다. 따라서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즘의 관심은 "보육자"로서의 여성, "여성적 요소가 풍요로운 것"으로서의 자연이란 은유를 해부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은유의 열쇠는 이원론과 도구주의에 있다.

근대를 비판하는 많은 철학자들은 이 세계가 이원론, 즉 "두개의 독립된, 상대방에게로 환원될 수없는 실재"로 구성되었다고 상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즘은 이로부터 더나아가 사회적 위계체제내에 서열화된 두개의 실체 그리고 이 실체가 우리 의식(개체적 의식, 집단적 문화)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계적 위치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분열된 의식에서 두개의 실체는 공통분모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불연속적으로 이원화된 세계에서 두개의 쌍 중 한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구분은 존재물들에 내재된 가치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유용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수단, 즉 도구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수동적이고 그 자신의 목적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원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것은 가치변형과 문화적 변형이었다.

그러나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즘의 궁극적 한계성은 사회현실에서 해방적 잠재력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 원인은 이들이 자연과 여성의 상관성을 생물학적 근거가 아닌 은유나 주관적 요소로 국한시킴으로써 왜 여성해방이 자연해방과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데 있다. 때문에 자연을 유기적으로 다시 살려내는 작업에 여성을 동원할 수있었던 본질주의적 생물중심적인 초기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열정을 감소시켰다. 두번째로 이들은 자연과 인간사회를 연결시킴에 역사사회적 기반을 놓쳐버렸고, 인간사회의 분화과정을 분석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사회의 다른 영역들, 즉 경제영역과 정치영역에서의 여성억압 및 해방을 고려할 수없었다. 세번째로 이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원형이 선사시대와 고대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시대로의 낭만주의적 복귀과정만을 꿈꾸고 현실사회의 제도적 변수를 간과하였다.


■ 사회생태론과 급진적 여성해방론간 결합:신 구 정치공간

사회생태론과 결합된 에코페미니즘, 즉 사회적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각기 다른 생물적 속성이 있음을 그리고 인간이 자연과 다른 독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모두 인정한다. 동시에 여성이 남성에 대해 "타자화"되어, 열등한 것 또는 도구로 취급되고 있으며, 비인간적 자연이 인간에 대해 "타자화"되고 열등한 것 또는 도구로 간주됨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이들은 위에서 지적한 주류 에코페미니즘(근본생태론과 급진여성주의간 결합)의 한계를 보완하고 이에 또 다른 대안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 에코페미니즘은 사회생태학의 지배와 위계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이고, '여성'억압과 '자연'억압의 근원을 인간사회의 진화과정에서 찾고 있다. 즉, 인간사회는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것들 사이 '더불어사는 삶의 방식'을 깨트리는 방향으로 진화하였고 이로부터 억압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는 더불어사는 윤리와 사회구성원리를 회복하는 것―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문순홍, 1992:2.2.2장'과 '문순홍, 1994c'를 참조하라.―에 달려있다.

사회생태론적 에코페미니즘의 이러한 더불어 사는 윤리와 사회구성적 원리에 대한 강조는 - 문화구성적 급진여성운동이 사회변혁을 위해 제기한 운동영역 인 - 사적영역을 뛰어 넘어 공적이고 정치적 영역으로 나가야 함을 정당화하여 준다. 이로써 에코페미니즘을 정치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즘의 무정치적 보수성이란 한계를 보완하였다. 그래서 사회생태론적에코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사회적 민주화과정에 통합된 한 부분으로 해석한다. 사실 생태사상과 이에 의거한 생태운동은 전체로서의 인류에 해당하는 보편적 일반이익을 대변하여야 하는 운동이고, 여성해방은 이른바 남성문제를 동시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서로에 대한 억압과 구속을 풀어주는 인간해방운동의 한 영역이다.

이러한 에코페미니즘의 정치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새로이 정의하도록 한다. 이 새로이 정의된 여성상은 세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주체로서의 상이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의 권력과 정치화 개념은 이미 기존개념을 넘어서는 것임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의 권력 개념은 기존의 부정적 개념 즉, "타인에게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힘"이 아니라 긍정적인 개념으로 '무엇을 하도록 하는 힘'(Ruether, 1993)이다. 또한 정치 개념도 기존의 부정적 개념인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영향을 가하는 행위로서의 통치"가 아니라 긍정적인 개념으로 '공동문제에 관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의견을 조정하는 행위' 그자체이다.

따라서 정치화과정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이고, 기존 사회의 모든 원칙과 의제들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나아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고 이를 집단화하는 것이다.


■ 사회주의와 에코페미니즘간 접합:생산공간 및 국가의 활용

사회주의와 에코페미니즘을 종합하려는 학자들은 사적유물론이 남성적 물질세계만을 자신의 이론틀내로 관철시키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들은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물음들에 답하려 노력한다 : ①사적유물론과 남녀간 재생산관계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②더나아가 생물학적 차이로서의 재생산력은 남녀관계에 어떠한 방식으로 투영되는가? ③이른바 물리학적 유물론이 관철되고 있는 자연과 사회적 유물론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사회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이 경향성에 동참하고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사회가 가지고 있는 세가지 물적 토대를 받아들이게 한다. 그 하나는 마르크시즘이 역사의 추동력으로 상정하고 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간 모순이고, 그 두번째는 남녀관계를 결정하는 재생산력과 재생산관계간 모순이며, 세번째는 인간사회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관계이다. 이러한 물적토대와 이에 근거한 관계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사회주의적 에코페미니즘에게 남녀간 재생산관계는 사적유물론의 생산관계가 물적기반인 생산력에 기반하듯이 재생산력에 기반하고 있으며, 따라서 무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 영역에서 구현된 것은 사실 자본의 이해관계이면서 남성의 이해관계이고 나아가 인간중심적 이해관계―세계를 누구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른바 생태학(Ecology)을 세계해석에 어떠한 형태로든 끌어들이려는 입장은 데카르트와 뉴튼으로부터 이어지는 근대철학의 기반인 인간중심성에 대해 공격한다. 이 인간중심성은 자연과 인간의 엄밀한 분리에 근거해서 세계를 인간본위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입장을 통칭한다. 반면 인간과 자연간 비분리성 또는 상호연관성에 터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주체로서의 인간 중심성 인정은 방법론적 인간중심주의 또는 자연배려적 인간중심주의라 칭한다. 나아가 이의 연장선상에서 신인본주의(Neo-Humanism)란 용어가 등장하고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태동에서부터 그리고 그 이론적 논거에서 부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중심적 논거가 관철되어 있는 사회이다. 이에 생태론자들은 그들이 근본생태론자이든 생태사회주의자이든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선 문순홍:1994d를 참조하라. 이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생산과정을 가치창출 과정으로만 등치시키고 그 이면의 노동소비과정을 배제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잉여가치 창출을 비가시화시켰다. 동시에 생산영역을 재생산영역과 자연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킴에 의해 생물적 변수와 생태적 변수들이 소비되는 과정을 비가시화시키고 이로부터 창출하는 잉여가치들을 무시하였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 자유재(자정능력) 및 희소재(자원)로서의 자연은 경제관계에서 배제되든가 정당하게 댓가가 지불되지 않아 왔다(외부불경제)―자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한 정의는 철학이 태동한 이래 많은 학자들에의해 시도되어 왔다. 필자는 자연에 대한 정의를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로 한정하여 ①자원 또는 생산원료, ②자정능력, ③휴식처 또는 심미적 가치로 파악한다. 이 중에서도 경제활동과 관련하여 자연은 ①과 ②의 의미가 크다.


특히 자정능력은 인간이 만들어낸 폐기물(폐기가스, 폐수, 고형쓰레기)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 주는 능력으로, 이 능력들은 거의 최근까지 일종의 자유재로 간주되어 왔고 그래서 사용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지불되지 않았다. 이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시장의 결함이라 칭한다. 즉,그 동안 시장은 유한한 자원과 무한한 인간욕망 사이에서 공정한 자원분배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두어 왔으나, 이 환경파괴 문제에서 시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장의 결함은 외부경제와 외부 불경제를 초래하는데, 특히 자정능력 파괴로서의 환경오염은 외부불경제라 칭한다.―.여성노동력 또한 공식경제관계 외곽에 놓여있어 불가시성을 특성으로 한다. 여성의 육아/가사노동은 현 시장경제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며 따라서 지불되지 않아도 되는 노동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상되지 않고 착취할 수있는 노동으로서의 여성노동은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여전히 가부장제적 구조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여성들에게 "최상의 착취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여성들은 노동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그들의 기본적 생존 조차 否認될 정도로 착취되기 때문이다.

특히 제 1세계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았던 시기의 제3세계에서 경제적 행위는 교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계 그 자체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의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적 활동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제3세계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여성들의 활동 즉, 생존과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여성들의 노동은 여성과 지구간의 관계를 밀접히 하는 것이다. 쉬바(Shiva)는 여성들이 지구의 생태적 지속성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여성에 기반한 지속가능성(Women-based-sustainability)이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현금작물 재배과 유전공학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생산과정의 노동소비와 가치창출이란 이중적 범주화에만 초점을 맞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가 지향한 인간해방은 노동자 해방으로만 국한되었고, 이에 의해 창출된 대안사회로서의 사회주의 사회는 "거짓 자유"가 관철된 사회였다. 사회주의적 에코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사회는 진정한 자유가 완성된 사회이며, 이 자유는 재생산관계에서 그리고 자연과 인간관계에서도 관철된 것이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과 사회주의간 결합은 남성지배적인 생산지상주의적 사회주의에 단순히 여성을 첨가함으로써 달성될 수는 없다. 마르크스적 사회주의는 여성의 삶과 방식 - 생산의 남성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영역이 여성과 자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 - 을 고려하도록 다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여성과 자연을 - 경제체제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 포괄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초점을 두고있는 경제분석이란 장벽을 궁극적으로 깨지 못한다면, 사회주의적 에코페미니즘이라는 혁명적 이론(실천)은 구축될 수없다. 사실 멜러Mellor,1992)는 에코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간 결합이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없다고 지적한다. 전자는 페미니즘에 의존하고, 후자는 사회주의에 의존하는데, 에코페미니즘은 뉴에이지 운동가로부터 사회주의사상가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생태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무정부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한다. 여하튼 이들간 결합을 위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쟁은 에코페미니스트들에게 사회주의적 여성운동이 초점을 맞추고 있던 영역 즉, 생산과 국가란 공간을 열어 주었다.


■ 에코페미니즘의 적소와 3중 과정론―적소(Niche)란 생태학에서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 곳에서는 특정 이론이 자생적으로 등장할 수 있고 가장 번식력이 강한 사회영역을 지칭한다.―

결론적으로 에코페미니즘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연과 인간을 재발견해내는 운동이며,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을 재발견해내는 운동이다. 이러한 재발견의 실천영역은 기존제도의 공간과 비제도화된 공간으로 나뉠 수있고, 제도화된 영역 내에는 다시 경제영역과 민주주의제도란 정치공간이 존재한다. 따라서 에코페미니즘의 논의는 三重고리를 동시적으로 풀어야 한다:남성과 인간중심적 영역으로 간주된 제도 공간에의 여성 및 자연, 경제공간에의 여성 및 자연, 친생태적 지역사회 건설의 또 하나의 주체로서의 여성회복. 에코페미니즘은 이 세가지 고리들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페미니즘의 적소 확대는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의 회복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회복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