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환경연대> 2004-12-0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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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전국연수 강연 :: 생태주의와 여성의 대화
다시 짜는 세상 - 생태 위기 시대, 에코페미니즘의 함의
1. 들어가며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새로운 세기의 문명 패러다임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상생과 평화 등으로 만들어질 것이라 했지만, 여전히 이 지구는 기어코 전쟁을 벌인 거대 군사주의의 슈퍼파워 앞에서 약탈당하고 위협당하고 있다.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오존구멍은 점점 커지고 빙하는 녹아내리고, 세계 여기저기서 대재앙을 예고하는 듯 엄청난 기상이변이 계속되는 지금의 이 시대를 많은 사람들이 ‘생태 위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와 더불어 그것은 단순히 변덕스럽고 무지막지한 자연 환경 재앙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에 생존하는 모든 생물들을 절멸을 향해 몰고 가는 생태계 존속의 문제이며, 그런 위기를 불러온 것은 다름 아니라 불과 200년 동안 이 지구를 지배했던 파괴적인 서구 산업문명이라는 절대적 동의이다.
그러므로 ‘생태계 위기의 시대’라는 말이 품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수많은 위기적 징후들은 그것이 그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자연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파국의 근본 바탕에는 자연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었던 서구 산업문명과, 육체와 정신, 감정과 이성,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고 위계화하는 서구 이원론적 세계관이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를 과학과 문명의 진보를 가져다 준 세기라고 선선히 동의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전쟁과 살육, 자연에 대한 약탈, 파괴를 가져온 서구 문명 앞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수식어가 붙는다. 바로 ‘남성적’ 또는 ‘가부장제적’이라는 수식어이다.
그것은 지금의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을 여성과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놓고 조작하고 지배해왔던 가부장제 산업문명으로 보는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용어이지만, 대안의 패러다임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차이’를 위계화하고 조화와 공생보다는 지배와 대립을 지향해왔던 지금의 문명이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그에 대비되는 여성성을 대안의 가치로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의 가치로서의 여성성을 다시 보고자 하는 흐름 안으로는, ‘깨끗하게 하고 보살피고 살려내는’ 역할로서의 여성성과 모성을 새삼스레 강조하고 한술 더 떠 찬양하는 불순한(?) 흐름들도 밀고 들어온다. 그들은 다름 아닌, 누구나 다 환경파괴․오염에 책임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본다는 식으로 ‘환경파괴구조의 메커니즘에 눈멀게 하는’ 보편적 환경 위기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열심이었던 거대언론을 비롯한 보수적 환경담론의 생산자들이다. 그들은 생태위기를 불러온 위계적 이원론에 기반한 남성적 문명에 대한 아무런 성찰 없이, 오염되고 어질러진 이 지구환경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성들의 각성과 헌신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들의 여성성 찬양은, 지금까지 남성 보수주의가 여성을 지배해왔던 방식대로 남성에 의해 주조된 여성성을 강조하여 성별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려 것이라는 혐의를 드러낸다.
예를 들면 ‘주부의 힘으로 환경을 살리자’ ‘주부가 깨어야 환경이 산다’ 등의 구호를 내세운 거대재벌신문은,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으로서 여성들, 특히 주부들을 굉장히 강조한다. 물 함부로 쓰고 온갖 세제나 음식찌꺼기로 오염된 생활폐수를 내보내고, 편리하다고 일회용품을 쉽게 사용한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비싼 화장품, 모피를 선호하는 여자들의 과소비풍조가 얼마나 많은 환경파괴를 가져오는지 아느냐고 진지하게 충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주부가 자각하고 환경을 살리고자 하는 작은 실천을 충실히 한다면 파괴되는 환경이, 죽어가는 생명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며 ‘환경수칙 ○○가지’ 등을 제시하면서 ‘살림’을 하는 여성들의 환경을 ‘살릴’ 가능성과 역할을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들, 특히 주부들은 환경파괴의 원흉으로 비하되었다가, 환경을 살리기 위해 생활 속에서 지혜를 모으고, 자연과 생명을 보듬어 안고 다시 살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졸지에 격상되어 미화된다. 그것은 또한 손 숙, 김명자 씨 등 여성 환경부 장관의 기용으로 더욱 상징적 의미를 띤다. 그런 방식으로 환경을 살리는 일은 주로 여성의 몫이구나 라는 암묵적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 파괴나 오염에 여성들이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거나, 본질적으로 ‘모성’을 가진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자연친화적, 혹은 환경친화적이라고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많은 여성들은 거부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남성들은 여성성이나 모성을 강조하며 여성들을 지배해왔고, 환경파괴와 오염의 상황 속에서 다시 여성들에게 그것을 정돈하고 보살피고 살려내는 ‘수동적인 청소부’의 역할을 강요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무기에 반대하고 여성과 아이들의 몸과 삶을 위협하는 환경파괴에 맞서 싸우던 여성들은 그 싸움의 너머의 지향점을 단지 파괴되고 어질러진 것을 수선하고 정돈하는 ‘환경 청소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지배체제의 최정점으로서의 군사주의와 가부장적 생산 지상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삼는다.
냉전체제의 핵무기 경쟁과 거대 과학기술의 위험이 엄청난 환경․생태 대재앙을 불러오는 가운데 그것에 맞서 싸우는 평화운동과 에콜로지 운동이라는 실천운동 속에서 탄생한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자연에 대한 억압이 같은 맥락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여 그 연관 고리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에코페미니즘은 남성 권력 체계들이 ‘자연’과 한 세트로 묶어서 이미지화한 ‘여성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에코페미니즘의 대안원리로서의 ‘여성성’ 혹은 ‘여성적 원리’로 세상을 다시 짜는 것(reweaving)을 지향한다. 그것을 위해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환경에 대한 착취, 군사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등의 온갖 억압들이 어떻게 성차별주의와 연관되어 있는가, 데카르트 이래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여성과 자연을 어떻게 동일한 방식으로 지배해왔는가, 급진적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평가되고 적극적으로 긍정된 여성성을 어떻게 바라보야야 하는가, 남성중심 체제가 말하는 ‘여성성’과 생물학적이고 본래적으로 여성은 자연과 가깝다는 본질주의적 주장을 넘어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성평등적 대안사회를 위한 ‘여성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실천운동과 논쟁 속에서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2. 에코페미니즘의 역사 - 남성적 원리로서의 군사주의와 폭력적 개발에 대한 저항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이라는 두 가지 운동에 뿌리를 두고 여러 가지 억압에 대한 현실의 저항운동 속에서 탄생하였고 또한 그 속에서 성장해가고 있다. 그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유럽에선 핵에너지․핵무기 개발, 핵미사일 전진배치 등에 항의하는 반핵평화 운동(1973년 프랑스 라작 군사훈련장 건설반대운동, 1975년 독일 빌 핵발전소 건설반대 운동, 1980년 영국 그린햄 코먼 핵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 등)을 통해 형성되었고, 미국에서는 1980년 쓰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 사고 항의 운동, 1980~1981년 미국 여성 펜타곤 행동, 러브캐널 사건 등 유독 폐기물 반대 운동 등을 통해 형성되었다.
여성들은 그러한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사 지배, 핵 지배 체제는 단순한 입법, 행정의 문제가 아니고, 따라서 그 해결도 남성 중심적 체제 내의 변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즉 이 운동에 참여하는 다른 남성 운동과는 다른 입장과 다른 시각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치열한 반핵 평화 운동의 경험을 통해 여성들은 그 문제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연관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산업문명의 근원적 문제이며, 또한 여성을 자연과 등치시켜 대상화하고 지배하고 혐오해왔던 가부장적 사회체제에 근원을 두고 있는 문제임을 깨달았다. 거기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체제에서 남성의 여성 지배가 인간의 자연 지배와 같은 맥락에서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했고 생태계를 되살리고 인간사회에 평화를 실현하는 문제와 여성해방의 문제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절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반핵 평화운동에 일생을 헌신했던 독일 녹색당 창시자 페트라 켈리는 “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생태적인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군국주의와 환경파괴와 성차별주의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구조를 외면하고 이루어지는 사회정의 및 비폭력 운동은 공허하고 불완전하다” 라고 말하면서, 남성지배가 자연지배와 여성지배 등 모든 지배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핵미사일 주둔에 항의하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여성들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에도 그와 같은 절박한 인식과 발견을 잘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우리의 반대는 우리들(여성들)의 해방을 위한 우리 자신의 투쟁과 일치한다. 우리가 고조된 핵의 위협과 남성중심의 문화 사이의 연관, 전쟁의 폭력과 강간의 폭력 사이의 연관을 이렇게도 명백히 볼 수 있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사실 여성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역사적 기억일 뿐 아니라…평화시에 우리가 겪는 일상적 경험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끊임없는 전쟁상태에서 살고 있다. 남성들의 대다수가 즐기는 잔인한 전쟁놀이가 전통적인 성관계와 동일하게, 공격, 정복, 점령, 통제의 순서로 진행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한 여성이건 한 나라건 그 차이는 미미하다.
에코페미니즘 운동이 지난 70, 80년대 서구에서 여성들의 반핵 평화운동을 통해 생성되고 발전해 갔지만, 한편 제 3세계 여성 민중투쟁을 통해서도 발전해갔다. 1970년대 중반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의 칩코운동과 나마다댐 반대운동, 1980년대 아프리카 케냐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린벨트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인도 아프리카 등의 제 3세계 지역은 서구의 지속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개발 프로젝트가 강제로 주입되어 오랫동안 이어왔던 지역 생태계에 기반한 전통경제가 무너지고, 다국적 기업의 모노컬처경제(설탕, 면화, 커피, 담배 등 다국적 기업을 위한 단일한 품목만을 생산하는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거대한 산업농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개발 프로젝트는 이른바 ‘구조재조정사업(Structural Adjustment Programs:SAPs)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는데, 그것의 대가는 엄청난 부채와 서구식 화학농법으로 인한 사막화, 염분 집적, 숲의 파괴, 여성과 어린이들의 기아라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양태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자연생태계에 천착하여 삶을 일구어왔던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일상의 필요하고 하는 것은 환금작물에서 얻어지는 현금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수세기 동안 쌓아온 지혜를 가지고 물과 식량과 그밖의 삶에 필요한 것들은 얻어내는 생존활동이었다. 제3세계 민중들, 특히 여성의 삶과 그들의 이해와 요구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다국적기업의 단기 이익을 뽑아내기 위해 폭력적으로 개발 프로젝트가 강요된 결과, 그들 삶의 터전인 자연은 급속히 파괴되었고, 여성들은 노동은 더욱 길어지고 가혹하졌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물 한 동이와 한 주머니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다녀야 하고, 식량을 얻기 위한 노동은 더욱더 고단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제 3세계 여성들은 서구로부터 마치 시혜하듯 주입된 개발프로젝트가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국적 기업의 안정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남성주의적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뿐 아니라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뽑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기획이라는 것을 알고 여기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렇게 에코페미니즘은, 냉전체제의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으로부터 제3세계 여성에게 가혹한 부담을 가져다주는 서구 중심의 폭력적 개발을 거부하는 운동 속에서 성장하면서 그것들이 일관되게 남성중심의 가부장제가 여성과 자연을 하나로 묶어 통제하고 지배하는 방식임을 드러내고 분석하고 있다.
3.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의 정당화-서구 가부장제 이원론
여성과 자연은, 그것이 남성중심의 메타포이든 아니든 생식하고 보살피고 양육하는 특성을 들어 항상 자연과 함께 묶여서 상징적으로 비유되어 왔다. 흔히 쓰이는 ‘어머니 지구’ ‘어머니 대지’가 그렇고, 원시림 등 자연환경이 훼손당하였을 때 ‘처녀가 강간당하였다’고 비유하는 것이 그렇다. 여성은 이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자연과 동일시되어 억압되어왔는데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그 뿌리를 데카르트 이래 확고하게 형성되어온 서구의 기계론적이고 가부장적이원론의 세계관에서 찾는다.
기부장적 서구 이원론은 여성과 자연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로서, 두 개의 대조되는 개념들의 차이로부터 위계를 만들고,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그 개념들의 쌍은 상호대립적이고 배타적이며 그 관계는 지배-종속적이다. 즉 세계는 남성/여성, 정신/육체, 주체/ 대상, 자아/ 타자, 주인/ 노예, 이성/감정, 문화/자연, 문명/ 미개, 생산/재생산, 공적/사적, 보편/특수 등으로 대조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측항이 우측항보다 우월하고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나 구분이 아니고 좌항이 우항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도구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고 ‘우월한’ 남성이 결핍되고 열등한 여성과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방법에서 두 개의 대조적 개념은, 이 두 개념 간의 상호연관성과 연속성을 인정하거나 다른 것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 완전함과 결여라는 적대적이고 위계적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자아 아닌 타자는 지배하고 통제해야 할 것이지 자신과 연결되어 있고 그 나름의 긍정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A와 A가 아닌 것의 이분법 속에서 A가 아니면 부정되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환원주의적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서구 이원론의 가부장적 성격을 분석해온 발 플럼우드(Val Plumwood)는, 서구 산업문명을 관통하는 토대가 바로 주인으로서의 남성 정체성과 도구주의라 규정하고, 자아와 타자,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등의 이원론의 대조쌍에서 주인으로서의 남성은 늘 타자를 통제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도구화해왔음을 지적했다.
이렇게 이러한 가부장제의 환원주의적, 도구적 이원은 여성과 자연이 자율성과 생산성, 순환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고 통제와 지배, 정복, 차이의 위계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위계론적인 이원론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종속, 남자에 대한 여성의 종속, 백인에 대한 유색인의 종속, 식민지종주국에 대한 식민지의 종속으로 확장되어왔다.
이 이원론 안에서 자연은 여성과 함께 열등하고 지배되어 할 대상인데, 그것은 늘 인색하고 거칠고 변덕스러우며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월경을 하고 출산을 하는 여성 육체의 이미지와 연관되어왔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란 이원론에서 열등하고 지배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 ‘자연의 성질’과 동일하게 구성된다. 즉 육체적이고 감성적이며 덜 문명화되고, 비주체적이고 수동적이고 열등한 것을 말한다. 반면, 남성성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이고 이성적이고 강인하며 ‘우월한 것’으로서, 자연과 여성, 소수자를 지배하고 경쟁하고 위계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성질을 말한다. 그리하여 남성은 자율과 통제, 이성을 가지고 정치와 경제 등의 공적 영역에, 여성은 자연과 같은 이미지로, 생명을 낳고 기르고 돌보는 재생산의 사적 영역에 고정되어왔다.
4. 여성은 본질적으로 자연과 같은가 -본질주의를 둘러싼 논쟁
여성이 본질적으로 자연과 같은가, 혹은 자연과 더 친화적인가 하는 문제는 페미니즘 내부의 오랜 논쟁점이었고, 에코페미니즘에서도 자연과 여성의 동일성, 친화성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생태적 사회와 양성 평등적 사회를 만드는데 과연 해방적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의를 형성하고 있다.
인본주의적 페미니즘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시몬느 보봐르는 『제2의 성』에서 임신, 월경, 출산, 양육 등 여성의 생물학적 요인을 ‘완전한 인간’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데 제한요소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여성이 남성보다 자연에 더 친화적이라고 보는 것은 성차별적인 책략이며 그것은 여성해방운동에서 여성의 힘을 분산시킨다고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그 또한 여성을 자연으로 보는 이원론의 틀 자체를 문제시하거나 뛰어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7세기부터 1860년대까지의 자유주의 여성론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주체, 동등한 이성의 소유자로,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확대하고 경제․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을 확장할 것을 주장하며,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은 여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라 규정하면서 거부한다. 이들은 수동적이고 감성적이며 자연친화적이라고 규정된 속성은 거부하지만, 대신 이성, 생산영역, 문명, 합리성의 가치들을 우월한 것으로 보고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위계적이고 도구적인 이원론의 전제들을 문제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성과 자연의 연관에 관한 문제는 급진주의페미니즘의 물결(제2페미니즘 물결)이 거세게 일렁이던 1970년대에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생물학적인 속성을 근거로 해서 남성지배구조와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두 가지의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파이어스톤처럼 성적 계급 철폐와 재생산에 관한 통제권을 장악함으로써 기술공학적 도움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생물학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급진주의적 문화파 페미니즘으로서, 여성의 자연 친화성, 생물학적 특성을 부정하고 가치절하하기보다, 그것과 연관된 높은 수준의 영성, 비폭력 평화주의, 보살핌의 능력, 자연과 여성의 깊은 유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찬양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과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지 않고, ‘차이’를 근거로 여성을 억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전복을 시도한다. 그 차이야말로 생태계를 살리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기반이며, 차이에 기반한 여성들의 문화는 독창적이고 위대한 것으로 찬양된다(Griffin, Christ, Rich, Daly, Spretnak. Starhwak 등). 이들은 월경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의 몸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찬양하고, 가부장제가 출현하면서 남성들과 남성신(God)에 의해 말살된 여신(Godess) 숭배 전통을 복원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캐롤 크리스트(Carole Crist)는 “월경을 하고 출산을 하고 전통적으로 아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펴온 여성의 특별한 지위로 인하여 몸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여성의 연관성은 명백해졌다. 여성은 문화를 창조하는 남성들보다 육감적이고, 육체적이며 세속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폄하되었다.… 전통적으로 성적 유혹자로, 그리고 여성의 육감적 본성의 샘플로 여겨져온 이브의 신화에서처럼…여성의 몸에 대한 폄하는 월경, 출산, 여성의 갱년기를 둘러싼 문화적, 종교적 터부 속에 표현되고 있다. 여신이라는 상징은 여성의 몸과 몸의 주기 및 과정을 형용하고 재강조하는 과정을 돕는다. 여신의 창조적 측면 중에서 생명을 부여하는 힘은 물리적 출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신은 또한 치유와 쓰기, 정의로운 법률 입법을 포함한 모든 문명의 창조자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여신이나 마녀를 숭배하는 이교도 전통을 부활시켜 그것을 의례화한다. 그리고 사라진 영성의 회복과 찬양을 위해 시, 음악, 종교, 미술 등 문화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급진주의적 문화주의 페미니즘은 생태론과 결합해서, 가부장제에 의해 열등한 것으로, 가치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지배당하던 것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위대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여성생태론 운동의 활력과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여성을 자연과 묶어놓음으로써 가부장제의 지배를 고착화하려는 남성지배체제의 의도를 실현해주고 그 지배구조를 은폐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된다. 또한 그들이 여성과 자연의 친화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서구의 지배적 이원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단지 관계의 역전만을 시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들은 자연지배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종, 계급, 지역 차별의 문제를 설명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매일 고된 노동과 가난에 시달리는 제3세계 여성들과의 연대를 만들어가기엔 여러 위험요소가 있는 서구중심적 논리라고 비판받는다.
여성의 자연 친화의 문제는 이렇게 그것을 부정하거나 해체하려는 입장과 긍정하고 재평가하려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또 한편으론, 여성과 자연의 억압의 형태가 같다는 큰 틀은 동의하지만, 여성과 자연의 동질성에 대해서는 급진주의적 문화주의 에코페미니즘과는 다른 견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무역사적이고 생물학적 개념을 해체하고, 그 연관성은 생물학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constructivism)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구성주의는 다시 또 여성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인가, 아니면 구체적인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즘과 유물론적 에코페미니즘으로 나뉜다.
문화구성적 에코페미니스들은 ‘여성과 자연의 속성이 동일하다’고 하는 개념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King, Warren, Plumwood, Bhiel 등). 따라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성과 자연의 본질이 같은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발 플럼우드는,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것, 서구의 이원론, 환원주의의 전통은, 여성을 열등하고 비이성적고 수동적인 것으로 고정시켜서 남성은 생산영역, 정치, 사회 등 공적 영역에, 여성은 재생산영역과 가정 영역등 사적 영역에 속하게 하여 남성 위계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보았다. 이들의 관심은 여성과 자연을 등치시키는 은유와 이데올로기를 해부하는 데 있으므로 대안 또한 가치체계와 문화의 변형을 중심으로 제기된다.
한편, 유물론적 경향의 에코페미니즘은 서구 이원론과 도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여성 지배와 자연 지배가 구체적인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은 구체적으로 ‘몸’을 가지고 있고 그 육화된(embodiment) 존재는 불평등하게 성별화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성별노동분업과 재생산 영역 속의 여성 경험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본다(Mellor, Harding, Salleh, Mies, Shiva, Agawal 등). 여기서 물적 토대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육체와 그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장소(Embedness)\'이다. 즉 이들은 몸이라는 생물적 요인과, 가족과 지역의 생존을 담당해온 여성의 경험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여성과 자연을 억압하고 지배했는가를 보려고 한다. 또한 여성과 자연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경험되는 재생산 영역, 특히 일상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하는 제3세계 여성들의 경험을 중요한 지점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1세계 여성들이 제3세계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물질적 풍요로움의 기반 위에서 ‘여신’ 전통을 부활시키는 등의 문화적 의식을 치르는 동안 제3세계 여성들이 폭력적 개발의 결과 가혹해진 노동조건에서 가족들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생계노동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유물론적 경향의 에코페미니즘은 보살피고 생산하며 살려내는 특성이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남성중심 체제의 이원론의 틀을 넘어서는 대안의 가치로서의 여성성, 즉 여성이 재생산 영역 속의 경험으로 체득한 보살핌, 배려, 공생, 탈중앙집중, 비폭력 등의 원리를 남성들에게까지 요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여성이 본질적으로 자연과 같은가 하는 것에 관한 논쟁은 가부장사회에서 무시당하고 가치 절하되었던 ‘여성성’을 재발견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이 가부장제의 이원론의 틀을 뛰어넘는 대안의 가치로 확장시켜나가야 한다는 흐름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5. 맺으며 -여성들이 다시 짜는 세상
‘여성성’이란 여성해방운동의 역사에서 부정하고 벗어버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가치를 재발견하여 긍정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의 문제로서 존재해왔다.
성차별주의 문화가 너무나 공고하고 여성들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여전히 묶어두려는 가부장적 제도가 강하게 남아있는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에게 ‘여성성’이란 벗어버려야 하거나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여성성이란 늘 연약하고 예측불가능하고 감정적이며 소극적인 것이고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공한 여성들이 강조하는 것은 일관되게 남성 이상의 강인함과 승부욕, 그리고 합리주의 정신과 프로의식이다. 그러나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들과 맞서 남성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진정한 여성해방의 전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 곧 드러났으며 그것은 일부 능력 있고 혜택 받은 여성의 엘리트주의로 이어진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부장제하에서 부정적으로 간주된 여성성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여성의 생물학적 육체로부터 오는 특성을 ‘우월한 것’으로 적극 긍정하는 흐름 또한, 그것이 가부장제가 ‘생물학’을 이용해 여성을 억압했던 것처럼 성별분업을 고착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자연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을 문제화하는 에코페미니즘도 이와 같은 ‘남성과의 차이’, ‘여성성’을 둘러싸고 발전해온 페미니즘의 흐름과 함께 자연과 여성의 연관성에 관한 논쟁을 발전시켜왔다. 즉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해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긍정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것이 여전히 가부장제의 ‘이원론’의 틀 안에 있는 한 딜레마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견고한 가부장적 이원론의 틀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많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성중심의 견고한 이원론 안에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의 전복을 시도하는 것이나(급진적 여성해방론), ‘몸’을 지닌 여성이 성별화되고 그 성별화된 상황 속에서 종속과 불평들을 경험하고 있는 그 구체적 ‘차이’의 문제에 둔감한 것(자유주의 여성해방론)에서 모두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걸프전에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거나, 대처처럼 군사주의의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위치에 올라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폭력적인 가부장제 구조를 비폭력적인 ‘여성 원리’로 변형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역할을 하는 데 여성이 더 본질적이고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 비폭력성과 보살핌과 상호존중의 가치가 여성에게만 귀속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갈수록 절망감을 더해주는 생태위기의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지금도 그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이고 또 그 위기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고 보살피고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부장제가 부여한 ‘청소부’의 역할을 수동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서가 아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 몸으로 경험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려 하고, 거기에서 여성성은 남성중심의 이원론을 넘어 새롭게 구성된다. 그럴 때 아드리안 리치가 말한 대로 ‘여성은 자신의 육체에 反해서가 아니라 육체와 함께 달리는 것이며, 여성의 신체성은 운명이기보다 자원이 되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환경파괴와 오염, 죽임과 파괴를 불러오는 군사주의로 어질러진 가부장제가 펼쳐놓은 판 위에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새롭게 세상을 다시 짜는 전혀 다른 대안의 세계를 통해 이 엄청난 생태 위기 시대를 극복하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성과 자연을 한 세트로 묶어 지배하고 차이와 다양성을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여 지배하는 남성적 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넘어 ‘다른 것’, ‘타자’라고 하는 것은 배제되고 억압당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가치있게 연계되어 있고 공생하며, 다르다는 것은 풍요로움과 진보의 기반이 된다고 하는 것, 즉 사랑과 보살핌, 상호부조와 연대,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여성들이 ‘삶’(육체와 장소를 가진)으로서 체득한 ‘생태적 여성성’들이 새로운 사회의 원리로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고도 경제성장과정을 압축적으로 지나온 한국사회는, 아직도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가 뿌리 깊은 사회이며, 그만큼 여성억압이 여러 가지 억압과 복합적으로 얽혀 작용한다. 그러므로 ‘여성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상황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틀 안에서 제기되는가 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생태계의 파괴 양상이 모든 생명의 존속 문제로까지 제기되는 지금 상황에서,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고 죽임당한 것들을 살려내고, 더럽혀지고 상처받은 것을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은 바로 여성에게 있다. 어쨌든 성별 분업 체계 속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해왔던 여성들은 그 경험 속에서 남성들보다 관계 지향적이고, 양육과 배려와 보살핌의 가치, 평화와 생태적 감수성에서 남성보다 더 민감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바로 이 생태위기 시대를 극복하는 데 희망이라는 것은, 남성 가부장제가 짜 놓은 판 안에서 때로는 무시당하다가 때로는 조명 받는 그 ‘여성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모든 생명을 품어안는 그저 ‘거룩하고 유순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희망인 것은, 그들이 비폭력, 사랑, 보살핌, 다양성의 존중,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라는 여성의 가치가 바람직하고 해방적인 것으로 되도록 이 세계를 다시 짜려고(reweaving)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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