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환경연대> 2004-08-3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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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마리아미스․반다나 시바 지음, 손덕수․이난아 옮김, 창작과 비평사.
주1) <비평>11호. 2003 여름
김정희(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전임연구원)
여성학은 다른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요청하는 바이기도 하며 여성학 스스로의 과제이기도 한, 한가지 과제를 현재까지는 늘 안고 간다. 그것은 젠더 연구가 소수 여성주의자들의 연구로 게토화되지 않기 위한 요구인데, 기존의 몰(沒) 젠더적인 인문․사회과학적인 연구와 젠더 2) 연구가 통합된 탈남성중심적인 연구 형태가 연구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은 많은 경우 희망사항일 뿐이다. 여성학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여자의 일상 삶이 그렇듯이, 숲과 나무 모두를 보기 위해서 이중의 짐을 짊어진다. 예를 들면 여성노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현황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여성 노동에 대한 연구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드문 통합적인 저서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미즈(Mies)와 시바(Shiva)는 그들이 대안적 세계관과 대안적 생활양식 원리로 제시하는 대안적 ‘자급적 관점=생존적 관점’에서 현재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구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급적 관점’은 바로 “세계 여성들 일상의 생존활동 속에 뿌리박고 있는 물질주의이고 내재성”(33)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젠더 통합적인 연구이면서도 지구화에 대한, 여성편향적이지 않은 포괄적인 연구서라 할만하다.
주2) 1995년 9월 5일 북경 제4차 여성대회 GO(정부기구)회의는 성(性)에 대한 영문표기 섹스(Sex) 대신 젠더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젠더와 섹스는 우리말로 '성'이라는 같은 뜻이지만 원어인 영어로는 미묘한 어감차이가 있다. 젠더는 사회적인 의미의 성이고, 섹스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성을 뜻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서구에서 1970년 대 말에서 1980년 대 초반까지 여성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으로부터 성장해 왔는데, radical 에코페미니즘, social 에코페미니즘 등의 갈래가 있기는 하나 몇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생태계가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파괴되고 있다는 위기감, 만물의 생명성에 대한 자각에 근거하는 전일적이고 유기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추구, 이 세계관에 기초한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 ‘영성’(spirituality)이나 ‘마음’으로 표현되는 전일적 존재성 회복의 지향 등을 공통된 특징으로 한다. 시바의 경우는 이같은 에코페미니스트로의 정체성이 그녀의 모국인 인도 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인간이 바수다이바 꾸뚬깜(Vasudhaiva Kutumkam)이라는 것, 즉 지구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힌두어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상기하면서 자연의 생명원리를 문화적 진보의 최고 형태로 정의하는 것이 인도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한 타고르를 인용한다(327). 한편, 미스와 시바는 미국의 레디컬 에코페미니스트들의 비교(秘敎) 운동을 사치성 정신주의(32)로 비판하면서 이들의 영성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앞서 언급한 여성, 특히 3세계 여성의 일상 생활에 뿌리박은 ‘자급적 관점’을 제안하고 있다.
공저자 중 미스는 독일인으로 오래 전부터 여성․환경․제3세계 운동을 해왔으며 시바(Shiva)는 핵물리학을 공부하다가 환경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인도 여성이다. 한 사람은 남, 다른 한 사람은 북에서 서로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살며 일하고 있으면서도 함께 책을 쓴 목적은 “자본 축적을 위해 전 세계 인간과 자원의 통제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대두함에 따라 점점 비가시화되는 ‘다른’ 전지구적 과정들을 가시화하려는 것”에 있다고 두 사람은 말한다(10).
시바는 근대/근대과학의 환원주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 비판의 포문을 연다. 근대의 환원주의 과학은 창조적인 재생력인 동시에 재생의 터인 종자, 자연과 여성(의 육체), 농민을 식민화하고 종속시키며 이들의 온전한 생산성과 힘, 잠재력을 빼앗는다(39-41). 세계관에 대한 비판에 뒤이어 시바와 미즈는 그들이 ‘악개발’(maldevelopment)로 부르는 개발/근대화/ 성장의 어두운 이면을 분석적․성찰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에 의하면 근대의 개발은 서구 제국주의 엘리트 남성들이 어머니 땅(=자연)과 여성을 식민화하는 과정이었다. 여성의 식민화란 근대 민족 국가가 여성의 성과 출산력, 작업 능력 및 노동력을 필연적으로 통제했음을 말하는데(158) 그 결과는 빈곤과 다양한 형태의 파괴였다.
상품생산을 위한 경제개발은 식민과정의 지속이고 GNP와 같은 재정지표만 강조되는 개발에서 여성․어린이․환경을 둘러싼 생명의 연결망은 주된 관심 대상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선 이들을 빈곤하게 한다. 예를 들면 1988년 한 해 동안 북의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려는 채무 관련 조정 정책이 직접 원인이 되어 죽어간 아동의 수는 50만명에 이르고 있으며 14세 미만과 15~19세의 남성의 노동 참여율은 인도의 경우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3세계와 인도에서 이 연령대의 여성노동자들은 늘어나고 있다. 공동체/생태계 파괴, 이로 인한 오염, 수질 악화, 물 부족 등이 원인이 되어 생겨난 가족도 집도 없는 ‘거리의’ 아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1억명으로 추정되며 개발도상국의 1천 만 명 가량의 어린이들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고 2억명 가량의 어린이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3세계 아동 사망의 34.6%는 식수 위기가 원인이며 매해 500만명의 어린이가 설사병으로 사망하고 있다(106-112).
두번째로 개발은 땅과 공동체의 유기적 연관을 파괴시키고 이로 인해 제3세계 농민들은 전 지구적 비료․살충제․종자 시장으로 편입된다. “그것들은 나와, 내 어머니와 내 가족들이 키운 종자이며 내 딸이 키울 종자예요”라는 말에 잘 나타나고 있듯이 여성들은 토착 농업에서 생물 다양성의 관리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농업이 비료, 살충제, 농약, 종자를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과 곡물의 자유 수입을 허용하는 ‘시장접근’과 같은 국제 규약에 종속되면서 여성은 이같은 지위를 상실함은 물론 여성․남성 농민 모두 농사를 포기하게도 된다(8, 11, 15장). 최근의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생명공학의 발전은 땅과 농민/여성과의 연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가공할 위협이 되고 있다. 종자의 핵심은 생명의 유지인데, 다국적 기업에게 종자의 가치는 생명의 단절과 거대한 시장 형성에 있다. 생명공학은 고의적으로 다음 세대를 낳을 수 없는 종자를 만들어냄으로써 농부들을 종자관리자에서 종자소비자로 바꾸어 놓는다. 이외에도 법적 특허니 지적 소유권이니 하는 제도들이 농민들로 하여금 종자를 따로 비축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 결과 여성, 남성 농민들은 의사결정과 종자관리라는 영역에서 쫓겨나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같은 다국적 기업과 생명공업의 횡포는 제3세계 농민들이 공유하는 유산이자 관리물을 훔치고 빼앗는 것이고 세계 곳곳의 소비자로부터는 안전하고 건강한 음식을 훔치는 이중의 절도 행위이다.
세번째로 개발은 공동체 내 폭력, 특히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과 문화 해체와 이와 연결된 상업화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중독과 학대와 공격을 증가시킨다(8장). 땅에서 나는 풍요를 파괴하고 그것을 국가의 자원으로 대체하자 새로운 결핍과 겹핍된 자원에 대한 새로운 쟁투가 일어났고 긍정적 복수성을 대신하여 모두가 다른 모두와 다투는 이중성이 생겨났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과 학대의 증가는 그 결과이다. 한편, 산업화로 인해 자연으로부터 소외가 일반화된 가운데, 유일한 자연 접촉으로 남게 된 성행위는 성적 집착의 문화를 만들고 여기서 매매춘 여성들과 AIDS 감염이 번성한다. 국가 중심의 개발 논리에 대항하는 게릴라 운동, 민족독립운동 들이 생겨나지만 이 운동들도 부정적 이중성에 따라 움직이며 일부 여성들은 무장폭력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남성들을 좇아, 스스로를 무장화하기도 한다.
네번째로 개발은 생명을 파괴하고 종속시킨다. 핵발전소, 유전공학, 생식기술은 우리를 자연의 적으로 만들고 있다(6, 12, 13장). 유독 물질과 핵 사고 등으로 인해 자연유산, 사산, 영아사망, 기형아 출산이 증가하고 있다. 체르노빌 사태 이후 이같은 현상들의 증가로 인해 원자력 공학이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유전공학과 생식기술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다른 투자 영역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상황에서 종자와 여성 신체의 생식 능력이 새로운 투자 영역과 이윤 창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생식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생식산업은 모성, 즉 한 여성이 적극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신체와 협력하는 생명 창조의 과정을 산업생산의 한 과정으로 바꾸어 놓았다. 점점 더 많은 생식기술자들이 여성의 자궁을 태아에게 ‘위험한 환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임신은 질병시되고 있고 여성들은 실험 재료가 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양수 검사는 성감별용으로 활용됨으로써 여아인 태아가 상당 수 낙태되고 있고 임신전 성 선택 기술은 산부인과의 성업을 돕고 있다. 한편, 신장은 하나에 5만 달러, 자궁은 빌리는 데 1만 달러라는 식의 상품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해 부유한 중산층에 의해 빈민 여성들이 착취당하는 새로운 형태가 준비되고 있으며 ‘번식자 여성’이라는 새로운 계급마져 등장할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이같은 빈곤과 파괴의 양상은 그 자체로 근대적 개발이 멈추어져야 함을 말해주는데, 미즈와 시바는 이에 더해 이같은 개발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를 하나 더 든다. 즉 세계 인구의 1/4이 세계 에너지의 75%를 사용하며 이산화탄소 배기량의 80%를 발생시키는 성장지향적 산업적 세계시장체제를 전 세계에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두개의 지구가 필요하며 남이 북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북이 현재의 수준에서 성장을 멈춘다고 하더라도 500년이 걸릴 정도로 지금과 같은 개발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이 체제로는 남이 북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며 격차만 더욱 더 벌어질 뿐이며 보다 근본적으로 지구 자원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장, 17장).
이러한 인식에서 미즈와 시바는 풀뿌리 수준의 자급적 생활, 남성 따라잡기 전략을 벗어나기, 소비주의 극복 등을 제안한다. 이러한 대안을 추동하는 것은 ‘자급적 관점’으로 이것은 생활양식을 구성하고 운용하는 대안 원리로 여성들의 일상 생존 활동 속에 뿌리박고 있다. 즉 자급적 관점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착취적이지 않으며 가부장적이지 않고 자급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대다수 세계 여성들 일상의 생존활동 속에 뿌리박고 있는 물질주의적인 내재성이다. 자급적 관점은 식량과 다른 기본 필수품의 자급자족, 지역성, 국가관료주의로부터의 탈집중화, 자기중심적이고 개별성에 근거하는 시장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 참여민주주의 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 필연적으로 씨너지 효과를 낳는, 다른 사회문제들에 대한 해결 요구,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페미니즘적인 자급과학과 기술, 문화와 노동의 재결합, 공기․쓰레기․토양․자원 등 공유재산의 탈상업화, 남성들과 사회의 무장해제 등을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18장).
미즈와 시바는 생존의 터전인 지역 생태계를 개발의 위협으로부터 20여년간 지켜온 인도 칩꼬 여성의 운동, 역시 인도의 몇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의 댐’ 건설 운동, 독일 쾰른 시의 가출 청소년이나 감옥 탈출 젊은이들의 자립을 시도하는 SSK 콤뮨 운동, 일본 주부들의 생활클럽 운동(생활협동조합운동) 등을 자립적 운동의 예로 제시한다.
이상에서 대략적으로 개괄해 본 미즈와 시바의 에코페미니즘은 현재의 초국적 자본들이 주도하는 상품 사회를 자급적인 소규모의 ‘지역 공동체’- 미즈와 시바는 생활협동조합, 자립적인 마을, 인위적인 공동체 등 다양한 형태를 지칭하고 있는데 편의상 이것들을 ‘지역 공동체’로 뭉뚱그렸다 -로 개편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사회관계와 정체성의 탈가부장제가 수반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변혁 방법론이다. 이 점에서 시바와 미즈의 ‘자급적 관점’의 개념은 3세계 여성들, 특히 민중 여성들의 삶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는, 즉 이미 주어져 있는 생존적 삶의 방식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고 보인다.
국가나 자치단체 주도의 개발에 반대하는 자생적인 주민 운동의 발생과 그 성과는 우리 사회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다. ‘90년대 초의 안면도, 굴업도의 핵폐기물터 반대 주민운동, 우장산 살리기를 필두로 해서 지역 산을 개발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곳곳의 주민운동들은 많은 경우 개발을 막아내는 성과를 보았고 이러한 운동은 2000년의 ‘고양시 러브 호텔 난립 저지 운동’, 2001년 용인의 대지산 살리기 운동 등과 같이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자급적 운동은 단순히 개발을 막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미즈와 시바의 자급적 원리는 자급적인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개발 반대 운동이 어떤 수준에서건 지역적 자립을 모색하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한 경우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나마 유기농 직거래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있기는 한데, 생활협동조합이 주민자치에 기여하는 센터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까지는 속단할 수 없고 두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자급적 지향은 도시든, 농촌이든 기존의 마을에서 보다는 귀농운동 같은 사례에서 더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생태마을을 지향하게 하는 동력은 민중의 삶에 내재하는 자급적 원리라기보다는 종교적 구심점(홍성 풀무생협을 주도한 풀무농업기술학교의 경우와 실상사 중심의 생태마을 운동 등)을 갖고 있거나 도시의 소비주의의 삶을 떠나기로 결단한 도시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이다. 이러한 양상은 미즈와 시바가 3세계 민중의 삶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는 자급적 관점이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오히려 내 경우는 미즈와 시바도 지적하고 있듯이 다국적 농업 기업에 종속된 농민 현실을 직시하며 여기서 자급적 관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을 하나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마을 하나를 새로 만드는 것이 백배 더 쉽다’라는 귀농운동가들의 말처럼 우리의 자급적 관점인 농심(農心)이 사라지고 파괴된 것이 오히려 기정 사실은 아닐까? 농심이 하나의 전설일 뿐인 것이 우리가 서 있는 현재 지점이다. 그만큼 척박한 토양이다. 그러나 미즈와 시바가 말하는 자급적 관점을 가치 지향으로 하여 이를 하나의 현실적 실체로 만들어 가는 것 외에는 이 문명을 구원할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하는 것 또한 어설픈 생명여성주의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귀농운동은 그 하나의 유력한 사례인듯 싶다.
그런데 철저하게 소비주의의 삶의 양식을 구가하고 있는 도시 삶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의 거점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도시 속에 생겨나고 있는 생태교육을 지향하는 대안초등학교 운동들, 공동육아, 생활협동조합...이런 것들이 변화의 단서가 되는 것들일까? 막연하지만, 좀 더 래디컬한 도시인의 실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세식 화장실이나 그 오물은 한강으로 흘러가는 주택 양식이 아니라 오물을 퇴비로 활용할 수 있는 텃밭이 있으며 태양열이나 빗물을 활용하며 식생활을 공유하는 공동주택 운동 같은 건 한국의 도시적 삶에서는 불가능한 걸까? 교륙(絞戮)의 제도 교육에서 아이들을 구출해 생존력있는 아이들로 길러내는 게 불가능하기만 할까? 30대 후반, 40대까지 즐거운 삶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은 봉쇄당한 채, 사교육 지출을 허용하는 것외에는 아파트 장만을 향한 외길을 걸어야 하는 삶, 30평 아파트 안의 행복 신화를 떨구어내는 산고(産苦)는 있겠으나, 신나는 대중적 삶은 모색될 수 없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영성에 대해 언급해보면, 존재성 파괴가 상당히 철저하게 진행된 현실을 직시하면, 미즈와 시바가 ‘부르조아 정신주의’로 치부해버린 영성회복의 움직임들을 다시 한 번 천착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수련 문화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영성 회복의 문화는 그 동기야 다양하겠지만, 대중들의 존재성 회복을 향한 몸짓으로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그것이 상품화된 영성주의로 전락할 위험은 충분히 있고 부분적으로 실제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운동/생명운동에서 영성 회복은 부르조아의 사치스러운 영성주의로 치부해버릴 수 만은 없는 존재성 회복의 초석으로 작용할 수 있는 내포를 지니고 있고 그 외연이 뻗어갈 수 있는 방향과 범위 또한 열려져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영성 문화는 생명운동이 버리기보다는 통합해야 할 중요한 초석이 되는 자원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대안학교들은 제도권 학교와는 달리 영성 교육 또는 수련을 과목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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