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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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소리> 2005년 3,4월
《함석헌선생 탄신 104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발제》
함석헌의 문명비판과 초월적 자연주의
유 헌 식
I. 문명의 맹점
"인생은 바쁜 문명의 장터에서 잊어버림을 당하고 고아처럼 뒷골목, 시궁구멍에 헤매인다"(19/19).1) 말을 바꾸면 이렇다. 사람은 문명으로 가득 찬 숨 가쁜 도시에서 자기의 삶을 박탈당하고 잘못 된 길 위에서 홀로 방황한다. 여기서 문명에 대하여 자연이, 시장에 대하여 농촌이, 자기 망각에 대하여 자기 인식이, 사도(邪道)에 대하여 정도(正道)가, ‘홀로’에 대하여 ‘더불어’가, 혼란에 대하여 정돈이 대응한다. 이 대비는 문명비평가로서의 함석헌의 면모를 가늠하게 한다. 문명에 대한 그의 반성과 비판은 단순히 기계문명과 산업사회에 묶인 현대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머물지 않고 인간 그 자체가 겪는 문제사적/존재론적이고 역사/사회철학적인 성찰과 맞물려 있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문명이라는 굴레가 이제 인간을 옥죈다. 나는 이런 세계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꿈꾸던 세계는 적어도 이런 세계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면서 주어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생각하는 존재인 나로서 할 일은 어떻게 하면 이 미친 운전수의 차에서 내려 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인생이 지금 할 일은 이 문명이라는 큰 나무가 거꾸러지는 날 다시 새로 날 수 있는 씨앗을 제 속에 여물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4/310). 이는 자연주의자 루소의 생각과 통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져서, 나는 경험에 의하여 이미 내가 그러한 사회에서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나의 마음이 바라고 있는 상태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제 3 산책)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자 투기장에 들어가 죽어서 나온다. 경기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전차를 더 잘 다루게 되는 것을 배워서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같은 곳) <에밀>의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본래 살고자 희망한 세계를 그려나가면서 새로운 인간상과 사회상을 주창한다. 함석헌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문명비판적 문제의식 속에서 사색에 몰두한다.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 해서 그런 줄만 알았던” 함석헌(18/352). 그런데 현실은 그를 배반한다. 자신이 들었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 자기를 발견한다.2) 인간으로 살기. 인간으로서 희망하는 삶을 살기.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에 항거할 것. 웃고 살고 싶은데 울며 살게 하고, 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도록 조장/정당화하는 숱한 이데올로기와 사회제도들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행동할 것. 인간이 꿈꾸는 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들을 제거할 것. 인간은 꿈꾸는 대로 살지 못 한다/했다, 그런데도 왜 계속 꿈을 꾸어야 하는가?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함석헌에게 주어진 문명론적 물음이다
출생이라는 자연적인 사태에서 빚어진 인간 존재는 본래 사회나 문화를 모른다. 인간은 그래서 피노키오처럼 자신의 자연적인 욕구에 따라 사회문화적인 요구의 틀 밖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렇게 자연적인 욕구에 갇힌 무정형의 인간을 세우고 갈고닦기 위해 교육이 요구된다. 틀이 없는 인간에게 틀, 즉 격(格)을 부여하여 인간으로서의 틀, 즉 인격(人格)을 갖추게 한다. 여기서 바로 교육이 문제가 된다.4) 앞에서 언급한 루소가 그랬고 함석헌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교육은 백년지대계이다. 그런데 이 교육이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인간성 자체를 계발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특히 문명론적 시각에서 함석헌은 기술과 인격의 분리를 현대 교육의 맹점으로 지적한다. “근세의 과학이 발달하고 기계가 발명이 되어 공업이 일어남을 따라 사람들은 기술을 퍽 존중하게 되었읍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읍니다. 인간문화가 발달된 것은 물론 기술의 발달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기술은 인격의 발현이라는 것입니다. 기술 뒤에는 언제나 인격이 있어서 그 기술을 부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을 존중하게 된 현대는 인격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기술만이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읍니다”(9/214). 기술은 인간에게서 나왔는데도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제 만든 기계에 종이 된 죄수”가 되었다(2/143).
그런데 techn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techne는 본래 현대 기계 문명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기술’의 뜻만을 지녔던 것이 아니다. techne는 “진리를 빛나는 것의 광채 안으로 끄집어내어 앞에 내어 놓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술의 poiesis(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 놓음)도 techne라 불렀다”.5) 이렇게 참된 것, 아름다운 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빛나게 하는 것이 techne의 본래 뜻인데도 실제에서 technology는 그 반대의 사태를 빚고 있다. 인간 속의 참됨과 아름다움을 오히려 파괴하는 방향으로 현대의 기술 문명은 줄달음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함석헌이 culture를 “참이 있어 그것을 드러내는 것”(2/145)으로 정의한 것과 바로 통한다. 그래서 culture의 어원인 라틴어의 cultura가 ‘경작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할 때 경작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가공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경작을 함축한다. 그래서 키케로와 스토아학파는 cultura animi, 즉 ‘정신의 연마’를 culture의 본령으로 이해한다. 마음과 정신을 수양함으로써 인간 속에 있는 동물적 욕구를 억압하여 참된 것이 발현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문화의 목표이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은 인간 정신의 연마라는 전인격적 교육으로 나아가지 않고 기술시대에 적합한 지식을 습득한 인간을 양산하는 데 몰두한다. 기술적인 인간은 기계의 특정 부품처럼 사용된다. 기술적인 지식을 갖추지 않은, 상품의 생산성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사회에서 도태된다. 그 사람의 인격, 인간적인 품격이 어떠한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물의 물질적 속성을 탐구하여 그 원리를 캐서 인간의 물질생활을 이롭게 하는 일이 최우선적인 과제이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자만이 인간적인 가치를 인정받는다. “문명은 점점 더 공리주의로 빠져서 모든 일에 있어서 물리적인 결과만을 존중하는 데로 기울어졌고 정신이니 동기니 하는 것을 생각지 않는 세상이 돼버렸읍니다”(8/21).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일군의 영국 철학은 공리주의를 표방하면서 지식의 유용성에 착안하였다. 근대 경험론에 토대를 둔 공리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경험적 사실과 지식을 토대로 지식의 경험적 객관성과 유용성을 학적인 인식의 모범으로 삼아왔다. 다른 한 편으로 대륙 철학은 이성의 위력에 의존하여 계몽을 기치로 내걸었다. 경험과 이성이 인식론적으로는 서로 대립하지만 양자는 모두 합리성을 모토로 형이상학적 신비주의의 미몽에서 깨어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는 꽁뜨를 중심으로 실증주의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자연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한 ‘인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결과적으로 인간성 자체를 훼손한다는 반성이 일게 되었다.6) 이 반성은 그들이 거부했던 형이상학적 신학적 인간관이 다시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과학기술문명의 발달과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인식의 무실성과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근대 이후 등한시되었던 신학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다시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계몽’은 단순히 철학 사조로서의 계몽주의에만 해당되는 용어가 아니다. 중세의 신학과 근대 합리론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적 활동은 모두 계몽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 한에서 헤겔이 계몽의 기획을 비판하면서 그 표적에 유명론과 경험론 그리고 공리주의를 포함시킨 점은 유념할 만 하다.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적 이성은 유한성, 개체성, 유용성, 목적성을 지향하여 인간과 세계를 감각적으로 경험 가능한 실재, 즉 사물로 고정시킨다. 이러한 도구적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유용한 목적에 따라 사물을 생산하고 분리하고 종합한다.7) 그는 함석헌과 마찬가지로 초월성을 인간 이해에 끌어들인다. 초월성을 끌어들인 헤겔의 시각과는 다르지만 이러한 시각은 비판이론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이들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 지닌 비인간적/비생명적 처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8) 하이데거 또한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계몽의 기획을 비판한다. 기술문명 사회의 인간은 “무엇을 공급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데 여기에서는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적 면모가 왜곡되어 나타난다.9)
함석헌이 과학기술 문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을 구별하자는 것이다. “과학이 아는 것은 생명의 겉의 부분”이다(12/224). 생명의 속 부분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 정신은 정신입니다”(12/220). 영적인 정신을 무생명적인 사실로 다루는 데에서 현대 과학기술 시대의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인간을 사물적인 대상으로 다루는 모든 과학주의적 접근에 반대한다. “과학은 인생을 순전히 과학의 대상으로만, 다시 말하면 기계로만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미리 짐작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암담이라는 것은 말 못하는 기계로 알고 업신여겼던 우주 인생이 말을 하기 시작한 데에서 나오는 놀람입니다”(12/224). 기계가 ‘말’을 한다는 것은 기계가 정신/혼을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기술주의자들은 기계로 다루어지는 인간 속에 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 동안 잊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이란 기계의 특성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생명’이라는 보편성의 원리를 담지하고 있는 근원적이고 무한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함석헌은 지적한다. 그래서 쓰임은 끝이 있지만 인간은 끝이 없다. 인간의 무한성은 인간을 정신적 생명체로 이해하는 데에서만 성립하는 사태이다.
II. 정신의 생명
함석헌은 어떤 근거에서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가? 생명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거나, 생명의 수단화를 알게 모르게 정당화하는 모든 문명적 처사를 그는 거부한다. 문제는 생명이다. 생명을 가볍게 보고 뒤틀리게 하고 죽게 하는 과학적,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사고와 행위에 그는 반대한다. 소위 문명과 문화를 기치로 내세운 인류의 철학과 역사는 반생명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그는 진단하면서 그의 생명 사상을 숙성시킨다.
그는 학문적인 철학과 생활 철학을 구별한다.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의 줄기는 학문적인 철학이 이어왔다. 학문적인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학적인 인식이 관건이지 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인 구상이 아니다. 함석헌이 통상적인 의미의 인생철학을 ‘생활철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生-活, 즉 ‘생명을 살리는’ 철학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생활 철학은 “종교ㆍ도덕과 살아 있는 관련을 가진 철학”(12/230)으로서 학문적인 인식 활동을 넘어서는 행위 철학이다. 생명을 살리는 철학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의 보존과 해방을 목표로 한다. 전통적인 철학이 휴머니즘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정작 있어야 할 인간의 ‘생명’이 없다. 근대 합리주의가 인간의 주체성을 발견하고 독일 관념론이 이를 발전시켜 거대한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관념의 죽은 생명이 누워있을 따름이다. 더구나 학적 인식의 객관성 추구라는 이름 아래 철학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할 뿐 그 지식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생명을 살리는 문제에는 절대적으로 게을렀다. 근현대 철학의 중심 개념인 주관성(상호주관성), 실용성, 합리성(이성성), 실증성(경험가능성) 등은 인간과 세계를 내재성의 원리(Prinzip der Immanenz)에 바탕을 두어 설명하려 함으로써 생명이 지닌 초월성(Tranzsendenz)은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몰아내는 경향을 보였다.
세계사의 진행에서 볼 때도 ‘생명’은 역사의 지향점이 아니었다. 특히 중세의 고답적이고 형식적인 교회의 부조리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해방’을 모토로 하는 문예부흥이 시작되면서 고대 그리스의 인문학적 정신이 새롭게 발굴되었지만 이 정신은 다분히 ‘자연 지식적인 태도’에 입각해 있었다. 더구나 신대륙 발견, 근대적 과학기술의 발명, 중상주의의 부상, 국민국가의 출현 등은 지식 위주의 학풍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지식주의”는 자연과학의 발달 - 기계의 발달 - 공장제 생산 - 산업혁명 - 군국주의 - 민족주의 - 제국주의 - 사회주의ㆍ공산주의ㆍ전체주의라는 일련의 과정을 낳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을 위한 인도주의적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 인간의 깊은 혼 속에 있는 모순에서부터 해결하잔 태도는 아니었다”고 함석헌은 진단한다(12/230). 결국 ‘인간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문예부흥의 기획은 무산되고 급기야는 ‘동방의 빛’을 찾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기에서 함석헌은 새로운 문예부흥을 주창한다.
새로운 문예부흥에서 중심은 ‘생명’이다. 근대의 기획으로서의 문명 생활은 생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문명은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20/2). 생명은 제쳐두고 非/反생명적인 것을 위해 일, 즉 노동 행위가 진행되었다. “생명이 목적이요 일은 그것을 위한 것”인데(8/80), 본말이 전도된 형국이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정신이다. 생명은 자연이다. 생명은 하나다. 생명은 자유다. 생명은 하나님이다. 생명은 주체다. “생명은 인조(人造)는 못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아무리 작고 낮아 뵈는 것이라도 전체의 나타남입니다. 우주의 대생명(大生命) 그 자체입니다”(8/80). 생명은 인위적인 것일 수 없다. 하늘이 내린 것이다. 생명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주어진 우주적인 명령이다. 그런 한에서 생명에는 우주적인 창조주의 뜻이 속속 배어 있다. 생명의 운동은 그 본래성과 보편성 그리고 근원성으로 인하여 인류의 문명사와 구별된다. 비록 문명과 문화라는 인위적인 옷 속에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도 생명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힘에 의거하여 빈틈/쉴틈 없이 세계 안에 편재한다. “역사는 생명의 역사다. 국민의 역사거나 인류의 역사거나 문화의 역사거나 천연의 역사(博物)거나 구경에 있어서는 이 대우주를 꿰뚫고 흐르는 대생명의 역사다”(9/42). 대우주의 필연적인 움직임 안에서 문명이란 한갓 거푸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명은 우주의 정신에 도전하고 급기야는 정신을 허약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문명은 병이다. 역사상의 문명도 제 속에서 난 원인 때문에 망하지 않은 문명이 없다. ... 그 원인은 ... 문명으로 인하여 정신이 약해지는 데 있다”(2/144).
그렇다면 문명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2/144) 하는 일이다. 인간은 문명 속에서 자신에게 자연으로 주어진 순수성을 상실했다. 자연적인 야성(野性)은 인위적인 문성(文性)과 구별된다. “문(文)과 야(野)”를 함석헌은 “글월과 바탈”로 푼다(2/140). “자아가 실현되어 나온 것”으로서의 글월과 달리 바탈은 “사람의 손질이 가지 않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2/141). 인위와 자연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면서도 스스로 다른 것을 만든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켜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 문명/문화가 그 대표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문명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거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10) 이때 거부의 준거점은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부과된 자연적인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문인(文人)과 야인(野人)의 문답”(2/140)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이제 문(文)이 용(用)이라면 야(野)는 체(体)다. 체는 바뀌지 않지만 용은 끊임없이 형태를 달리한다. 문의 변화의 주체는 체로서의 야다. 야는 세련되고 화려한 껍데기로서의 문/무늬와 달리 질박하고 순박한 알맹이/바탈이다. 야는 없는 것을 짓지 않고 이미 있는 것을 그냥 드러낸다. 여기서 함석헌은 야인(野人) 즉 들사람을 내세운다. 들사람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 꾸미지 않고 지어진 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 자연에서 주어진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들사람은 문화인의 밖에 있으면서 항상 문화인의 안티테제로 활동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언자다. “예언자란 거의 다 야인이다. ... 그는 온전히 문화인의 테두리 밖에 섰다”(2/145). 문화 밖에 섬으로써 인간은 참인간을 만난다.
이 참인간을 함석헌은 이제 ‘씨’이라 일컫는다. 씨은 “맨사람”, “난대로 있는 사람”이다(14/362). “씨은 사람의 짓(人爲)에 사는 것이 아니고 제 스스로 하는(自然) 움직임에 사는 것”이다(8/68). 씨은 생명의 정신성, 자연성, 통일성, 자유성, 신성(神性), 주체성의 결합체이다. 씨은 물질에 대하여 정신이고, 인위에 대하여 자연이며, 구별성에 대하여 통일성이고, 동물성에 대하여 신성이며, 종속성에 대하여 자유성이고, 의존성에 대하여 주체성이다. 전자가 문명의 특성이라면, 후자는 생명의 속성이다. “씨의 은 하늘에서 온 것”(8/56)이기 때문에 유한이 아니라 무한과 영원에 이어져 있다. 그래서 씨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다.
문화와 문명은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역사의 껍데기인데 반해, 씨이 따르는 우주적 이법은 역사의 알맹이를 구성한다. 그것은 문명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역사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보이지 않게 진행되는 뜻의 역사를 이룬다. 문명의 죽은 역사 밑에서는 씨의 생명의 역사가 흐른다. 문명이 걸친 옷 속에는 씨이 호흡하고 있다. 하지만 씨은 역사의 진행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자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앞서 열거한 씨의 특성은 현실태가 아니라 가능태로서 주어지는 사항들이어서, 그것들은 앉아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그러니까 씨에게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사명이 부여되어 있다. 자기 속에 내재된 특성을 겉으로 드러내라는 하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정신’으로서의 씨은 ‘생각’을 해야 하고, ‘자연’으로서의 씨은 ‘작위’를 거부해야 하며, ‘통일’로서의 씨은 ‘분열’을 타파해야 하고, ‘자유’로서의 씨은 ‘구속’에 항거해야 하며, ‘신성’으로서의 씨은 ‘동물성’을 극복해야 하고, ‘주체’로서의 씨은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능동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씨은 씨의 자격이 없으며, 씨의 이러한 활동을 부정하거나 저해하는 모든 학문적 정치적 기획과 공작은 반(反)생명적인 것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을 함석헌은 “씨과 권력의 싸움”(8/69)으로 규정한다. 문명의 표피적인 결과물을 곧 인간성의 실현으로 착각하는 인본주의적 인식행위와 권력행사에 씨은 저항해야 한다. 이 저항활동은 씨의 정신이 살아 깨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한반도인들을 함석헌이 “정신적으로 거지인 백성”(12/245)이라고 칭할 때, 이는 그들이 자신 속에 잠재된 생명의 움직임에 둔감하여 이를 밖으로 드러내는 데 게을렀다는 것을 뜻한다.
인류 문명의 진행은 정신의 생명을 살리고 이어가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하는 함석헌에게 문명의 역사는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행진곡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문명이란 발달이나 진보가 아니고 연기입니다. 마땅히 죽을 줄 알면서도 그것을 좀 미루어보자는 것입니다. 문명이 정치의 종이 되지 않았을 땐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때에 사람은 죽음을 인정해 놓고 미루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넘은 새 생명을 붙잡음으로 그것을 이기려 했읍니다”(8/152). 문명을 죽음을 향한 굿판으로 여기는 함석헌에게 문명적 진보사관이란 있을 수 없다. 진보가 있다면 오직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뿐이다. “인류사는 큰 견지에서 하나님에 향하는 진보의 걸음이다”(99/93). 그리고 이 진보는 정신을 바탕으로 생명을 키워가는 씨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III. 자연과 문명
정신의 생명성은 함석헌의 문명비판의 근거이다. 그의 생명 사상에서 정신의 자연성은 문명의 인위성에 대하여 상위에 자리 잡는다. 그런데 여기에 혼란스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기계론적인 물질성에 대하여 목적론적인 정신성을 강조하고 기술적인 인위성에 대하여 존재적인 자연성을 부각시킬 때 전자의 정신성과 후자의 자연성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함석헌이 문성(文性)에 대하여 야성(野性)을 옹호하면서, 씨은 인위(人爲)가 아니라 자연(自然)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자연성이 전자의 정신성과 어떻게 맥을 같이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정신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자연주의자일 수 있는가? 물론 그는 기독교적인 서양 사상과 노장적인 동양 사상을 하나로 소통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 연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함석헌은 문명(文-明)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재(素材)대로 있는 자연에 사람이 제 속의 정신을 넣어서 비추고 갈고 닦은 것으로 자기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빛을 드러내는 것”(2-360)이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도록 되어 있는 방향으로 길을 내어 주는 것이 원칙적인 의미의 문명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문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이러한 본래적인 뜻에서 벗어나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을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하는 참된 문명이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빛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자. 정신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가 비판하는 인위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작용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문명비판의 최종적인 근거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왜곡시키는 데 현대 문명의 맹점이 있다.
함석헌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시각은 자연을 문명비판의 근거로 삼아 온 오랜 지적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얼마나 지지될 수 있나? 자연 상태의 인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데에서 문명이 출현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 해방되고자 하는 자연을 다시 인간 해방의 근거로 삼는다는 일이 가능한가? 사회적 다윈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약육강식은 필연적이며 이러한 자연의 생리에 자연주의자들이 동조할 리 없다. 그렇다면 거부해야 할 자연과 따라야 할 자연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자연에는 좋은 자연과 나쁜 자연이 있다는 말이다. 자연에서 드러내야 할 긍정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자연에서 억제해야 할 부정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 가운데 무엇이 부정되고 무엇이 인정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함석헌의 자연주의는 답해야 한다.
동양의 노장 사상은 말할 나위 없고 주역과 성리학을 포함하여 서양의 고대 철학에서도 자연 속에 감추어진 이치에 따라 사유하고 행위하는 것을 덕으로 삼아 왔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자연종교는 자연적인 것(physis)을 ‘원만하게 질서 지워진 것(cosmos)’으로 보아 이를 따르는 것이 곧 선이다. 우주의 운행에 담긴 질서는 곧 인간 세상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가치이다. 디오게네스는 고대의 히피족으로서 자연적인 삶을 추구했으며, 스토아주의자들도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자연이 이렇게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객관적인 자연은 인간의 주관적 의지가 지향해야 할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에는 자연 그 자체의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특성으로 인해, <자연적>이라는 이유로 오이디푸스왕이나 안티고네처럼 인륜적 정의(正義)를 포기해야 하는 부조리를 가져온다. 고대적 사유에서 자연의 양면성이 인식되지 않은 한에서 이러한 결과는 불가피하다. 이러한 부조리를 간파하여 근대의 자연법 사상가들은 자연 상태의 인간과 자연적인(타고난) 지적(知的) 본성을 지닌 인간을 구별한다. 이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지적 본성을 타고난 인간은 계발되어야 할 대상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계몽주의적 이해는 불가피하게 자연과 문명에 대한 이중적인 의미를 야기하여 결국 자연을 통한 자연의 극복 그리고 문명을 통한 문명의 극복이라는 양가적 측면을 드러낸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에게 이제 자연과 문명은 비판의 척도이면서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연과 문명의 양가적 의미를 하나의 장 안에서 무모순적으로 설명한 인물이 루소다. 루소는 소위 낯설음(Entfremdung)이라는 현상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를 떠나면서 그의 참된 본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인간에게 낯설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인 참된 본성은 교육을 통하여 계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는 참된 인간성의 계발이 규범적으로 항상 자연성에 준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성은 인간성 계발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문명 사이의 합일점과 차이점을 발전론적인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게 한다.11)
이러한 루소의 자연관은 함석헌과 통한다고 보인다. 함석헌이 비록 루소처럼 ‘낯설어진 자연성’이 아니라 “잃어버린 야성(野性)”(2/144)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야성은 분명히 루소와 마찬가지로 계발을 기다리는 자연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글자 그대로 잃어버린 것이라면 어떻게 다시 되찾자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함석헌과 루소처럼 문명비판의 근거를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의뢰할 경우 문명의 비판과 개혁이 단지 당위적인 공론에 그치지 않고 실현 가능한 요구가 되기 때문이다. 루소가 주장하듯이 인간이 자기애와 동족애 그리고 자유와 완벽추구를 지향하는 한에서 이러한 성향에 위배되거나 이를 왜곡하는 모든 종류의 문명은 거부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연스럽지 않은 것, 자연답지 않은 것, 자연 자체가 욕구하지 않는 것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거나 각색하는 문명적 시도는 악이며, 인류의 문명은 이러한 자연친화적 사유를 통해서 여과되어야 한다. 문명화는 이제 자연화와 동격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인간은 자연성에 따르기만 하는 존재인가? 자연성에 따르면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되는가? 인간은 오직 객관적인 자연의 추종자에 지나지 않는가? 인간이 자기 속의 자연을 부단히 밖으로 드러내기만 하면 참된 문명이 되고 역사가 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함석헌은 루소와 달리 단순한 자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하는데, 이는 루소의 자연주의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칸트에 따르면 루소가 말하는 ‘인간 속의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Willensfreiheit>와 어울리지 않는다. 의지의 자유는 자연적인 자유의 욕구와 다르다. 인간은 의지(意志)하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의지하지 않으면 거역할 수 있다. 따라서 잘못된 문명에 대해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된 문명에 대한 책임은 자연에 있지 않으며 비판의 근거도 자연에서 찾을 수 없다. 잘못의 책임은 인간의 비자연적인 자유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하지만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단순한 사실의 차원을 넘어 선한 의지로서 ‘규범적인’ 성격을 띤다. 무제한적으로 선한 것은 지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칸트의 테제와 더불어 문명비판에서 루소적인 의미의 자연주의가 설 수 있는 땅은 좁아진다. 의지의 자유는 인간을 자연에서 해방시키며, 의지의 자유를 토대로 삼을 경우 문명과 문명비판의 관계는 자연에서 독립하여 순전히 문명내적인 문제가 된다.
하지만 칸트의 자유의지론에서 거부되는 것은 자연의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자연의 내재적 성향이다. 칸트의 자유의지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연적 성향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연성, 즉 인간에게만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연적 성향(본성)이다.12) “인간은 그의 동물적 현존재의 기계적인 배합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할 뿐 어떤 다른 행복감이나 완전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이것들을 자기 스스로, 즉 본능에서 자유로워져, 자기 고유의 이성을 통하여 마련”하는데, 이러한 경향이 <자연의 발전 계획> 속에 이미 들어가 있다.13) 한 편 이러한 자연의 계획은 도덕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도덕적이고 선한 심성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은 순전히 가상이고 불행의 씨앗이다.”14) 종래의 공리주의와 루소 식의 자연주의를 거부하는 이러한 설명에서 칸트는 문명과 역사의 흐름에서 “자연의 도덕적인 의도”를 읽고 있다. 객체적인 자연성의 극복이 목적론적인 초월적 자연을 통하여 수행되는 셈이다. 목적으로서의 자연의 개입은 칸트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도덕성을 신적인 섭리에 두지 않기 위해 부심한 결과이지만, 문명과 역사의 배후에는 자연의 계획이 깃들어 있다고 본 점에서 칸트는 자연주의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않는다.
칸트의 초월적 자연주의(또는 자연적 초월주의)는 함석헌의 문명/역사관과 통한다. 그는 한 편으로 자연을 문명비판의 근거로 삼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자연을 초월적인 것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씨의 특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우선 씨이 지닌 <양심>의 초월적 자연성이다. “산 것은 내 재주와 힘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 알 수 없는 전체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 이 마음은 제가 만든 것 아닙니다. 신비롭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한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이 있는 것입니다. ... 하늘이 주었습니다. 하늘이 무엇입니까? 자연입니다. 전체입니다. 알 수 없이 계신 이입니다. 알 수 없으나 압니다. 배워서가 아니고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그래 양심이라 합니다. 양심의 근본이 하느님이요 부처요 대생명입니다.”(8-60). 이 대목에서 함석헌은 인위와 자연을 대비시키면서 마음의 바깥을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마음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마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동체이다. 마음의 활동은 하늘의 섭리이고 자연의 명령이다.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생명의 율동이며 씨의 활동이다. 씨에게는 자기를 움직이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 마음은 그 타자를 알 수가 없다. 마음은 자기 생명의 출처를 향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문은 열려 있어도 이쪽에서 그쪽으로 다가가는 문은 닫혀 있다. 그쪽에서 의지를 가지고 이쪽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쪽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쪽이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양심이 그 증거이다. 마음의 양심은 절대적인 타자의 호흡이다. 그 호흡의 결과적인 흔적으로 양심은 실재한다. 양심은 공리주의적인 선(善) 개념과 달리 유용성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쓸모가 있어서도 아니고 경험에서 습득한 지혜가 아닌데도 양심은 마음을 명령한다. 양심은 경험 이전에, 경험과 독립하여 실천적인 윤리적 행위를 유발한다. 여기에 씨의 자연적 초월성이 성립한다. 이 초월성으로 인해 씨은 비록 크기는 사소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지대하다. 그래서 씨의 생명은 존귀하고 모든 곳에 편재하며 영원하다. 씨은 하늘과 자연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것의 초월성에 동참한다. 초월적 사태로서 존립하는 씨의 생명활동은 그래서 어느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 뜻을 의지(意志)하면 결국은 관철되기 마련이다. 씨이 자기와 서로를 신뢰하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저버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씨이 초월성의 알맹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음으로, 씨의 초월적 순수성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 꼴이다”(2/146). “씨은 어리석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대로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준 대로 있는 것입니다. ... 씨은 속는 줄 알면서도 참을 줄 밖에 몰라서 참는 어리석은 바보입니다”(8-78). 이는 바보의 미학이며 순수의 위력이다. 꾀를 내지 않고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성에 따라 자기를 움직이는 자가 씨이다. 꾀는 지혜롭지만 어리석음(愚)만 못하다. 그러니까 어리석음은 본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꾀를 내는 자가 만든, 그들 편에서 보기에 어리석을 따름이다. 씨의 마음에는 오직 순수만 자리 잡고 있다. 순수는 맹하고 멍하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순수의 정체이고 힘이다. 그것은 지향하는 방향도 없고 계산하는 이익도 없다. 순수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 데로나 갈 수 있다. 자유이다. 순수는 부드러우나 지치지 않는다. 순수는 아무 맛도 냄새도 모양도 없다. 그래서 강하다. 『장자』의 응제왕 편에 등장하는, 이목구비 없는 중앙의 왕 ‘혼돈(道)’이 그러하다. 순수는 실상 일상적인 삶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삶의 추진력이다. 순수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도록 명령받았을 때 그 인간이 꿈꾸던 <인간>을 대변한다. 순수는 인간 존재의 본래적인 이상을 꿈꾸고 실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아름답다.15)
씨의 양심과 순수는 씨이 하늘(자연)의 뜻과 맞닿아 있다는 징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씨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데에서 아무 것도 겁낼 것이 없다. 하지만 양심과 순수는 그 자체로는 실천력을 지니지 않는다. 양심과 순수는 선험적인 가능적 원리일 수는 있어도 실천적인 의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 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석헌은 ‘자유’를 말한다.16) 씨의 자유성은 양심과 순수의 자연성을 넘어서는 주체적 실천의 원리이다. “마음은 자연이 아닙니다. 생명이 자기의 특별한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넣어 준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즉존(操則存) 사즉실(舍則失), 지키면 있고 버리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자유이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행복은 반드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는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짓는 것입니다. 만들지 않고는 없습니다”(8-79).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함석헌이 노장(老壯)적인 자연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노자와 장자는 시종일관 자연의 지배와 복종을 말하나 함석헌은 마음과 자연 사이에 거리를 둔다. 마음은 하늘/자연에서 나올 때 자유를 부여받았다. 성서적인 의미의 자유관이다. 이 자유는 칸트의 자유의지와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선택 능력이다. 행위의 방향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아 행위자가 스스로 방향을 정해야 한다. 마음은 선택지를 놓고 방황할 수 있지만 선택가능성으로 인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마음의 평화/평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드는 것이다. 이 <만듦>의 특성 때문에 씨에게는 주체성과 역사성이라는 사태가 출현한다. 결국 주체성과 역사성은 씨의 자유성을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한다.
그리하여 칸트가 오도된 문명의 책임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듯이 함석헌의 씨도 잘못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그래서 그는 <자기>부정을 문명 개혁의 요체로 삼는다. 함석헌은 부정의 본질적인 대상을 ‘나’로 삼는다. 문제의 출처는 ‘나’다. 신채호 식으로 큰 나(大我)와 작은 나(小我)를 나눌 수 있다면 함석헌의 ‘나’는 이 둘을 포괄한다. 씨이 행하는 외부를 향한 저항은 큰 나의 부정이며 내부를 향한 반성은 작은 나의 부정이다. 헤겔의 용어를 빌면, 객관정신과 주관정신의 자기 부정 활동이다. 양 방향적인 부정(否定) 행위는 곧 생명의 본래적인 활동이다. “생명은 반발이다 저항이다”(2/175). 이 부정은 “스스로 자기에 대하여 하는 저항이다. 자성저항(自性抵抗)이다”(2/176). 생명은 정신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정할 수 있다. 정신은 자기를 돌이켜 살펴보며(反-省), 자기를 되새김할(反-芻) 수 있다. 내가 나를 부정할 때, 죽일 때 나는 살아난다. 생명으로 살기 위해 씨은 자기를 죽여야 한다. 죽음으로써 삶이다. “죽은 시간에야 내가 살아날 것”이다(2/202). “혁명의 원리는 죽어서 삶”이다(2/103). 인간적인 욕구를 부정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람 아니’로 부정되어서만 인간은 살아난다”(2/66). 자기부정은 단순히 자기를 무화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헤겔 변증법의 지양(Aufheben)처럼 ‘규정적인 부정(bestimmte Negation)’이다.17) 부정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면서 앞서 부정된 것 이상의 것(das Mehr)을 내포한다. 생명은 자기부정을 통하여 풍부해진다. “인격이란 자기반성으로 자기부정을 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 자기는 자기 이상일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쉼 없이 자기 초월을 해나가는 것이 인격이다”(2/95).
함석헌의 부정은 철저하게 ‘자기의 부정’이다. 따라서 “자아개조(自我改造)”(2/75)이다. “진리를 위해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9/275) 한다. 자기 밖에서 아무 것도 끌어들이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성향만으로 자기를 부정한다. 부정되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나다. “내가 아담이다. 민족이 나다. 인류가 나다. 역사도 나요 인생도 나다. 내 속에 다 있다. 그러므로 원흉을 밖에서 찾을수록 못 찾고, 악을 벌할수록 죄는 놓쳐버린다. 모든 죄가 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 천하 죄인 다 잡고도 나 하나 그냥두면 소용없다. 역사상의 모든 죄악이 다 내가 참여한 죄악이다. 나도 공범이다. 내가 주범이다”(2/101). 자기 안의 범인을 스스로 찾아 그를 죽임으로써 자기를 살린다. 자기 안에 퍼져 있는 암세포를 스스로 찾아 제거함으로써 자기가 자기 생명의 주인이 된다. “안(內)이란 모든 것이 다 아니(否)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 가진 때가 맘이요, 그때가 왕이요, 그 왕이 온전히 왕 노릇하는 맘, 즉 제 노릇을 하는 맘이다”(5/309).
씨의 순수성과 초월성 그리고 자기 부정성은 씨이 자연적인 생명체이면서도 그 안에 자연을 넘어서는 정신을 지니는 데에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씨은 정신적 자연이면서 자연적인 정신이다. 자연과 정신이 씨 안에서 통일체로 구현되어 있지만 이때의 자연과 정신은 선한 의지를 지향하는 도덕적인 것으로서 보통 ‘자연 상태’의 혼돈스럽고 무자비한 자연이나 작위적/기술적으로 물질과 세계를 조작하는 정신과 구별된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반생명적인 자연과 친생명적인 자연 그리고 기술적인 정신과 도덕적인 정신을 구별해야 하며, 친생명적인 자연과 결합하는 도덕적인 정신을 통하여 반생명적인 자연과 결합하는 기술적인 정신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IV. 문명과 문명비판
함석헌의 문명비판은 ‘자연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자연 초월적’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자연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씨 속에 있는 자연은 앞서 서술했듯이 살리면서 또한 죽여야 한다고 할 때 살려야 할 자연은 자연에 내재한 도덕적인 정신이며 죽여야 할 자연은 기술적인 정신에 의해 개발된 자연이다. 함석헌의 현대 문명비판은 따라서 <초월적 자연주의>라고 칭할 수 있다. 이때 비판의 준거로서의 자연은 통속적인 의미의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자연이다. 그의 초월적 자연주의는 도덕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서 효용과 욕망에 지배되는 자연적 생리와 구별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구별 없이 혼용해 온 <문명Kultur>과 <문화Zivilisation>를 조심스레 구별할 필요가 있게 된다. 함석헌 자신도 이 구별에 착안하지 않고 있지만 양자의 구별은 함석헌의 문명비판의 기준과 성격을 명료하게 하는 데에서 긴요하다.
<문명>이란 본래 서구인의 “자의식”과 “자존심”을 표현하는 말로서 야만 또는 미개와 구별된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이며 독일어권에서는 문명을 “인간의 외면과 피상적인 면만”을 드러낸다고 보아, “인간 고유의 능력과 본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문화보다 저급하게 여겼다. 독일의 ‘문화’는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는 ‘문명’과 달리 시대와 지역의 고유한 특성이 반영된 종교, 예술, 철학적인 생산품을 일컫는다. 문명은 보편성을 지향하나 문화는 특수성을 지향한다. 그래서 문화에서는 민족간의 차이가 강조되고 자기 정체성을 항상 주제화한다.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무엇이 프랑스적인지 무엇이 영국적인지 묻지 않았지만 독인인은 무엇이 독일적인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어 왔다.18) 엘리아스는 문명과 문화의 구별 행위와 그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한다. 독일에서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둘러 싼 논란이 야기된 것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낙후된 독일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관련되며, 또한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독일의 역사적 경험과 직접 관련이 있다.
문명화된다는 것은 격식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것을 뜻하며 그런 한에서 자연적인 것은 ‘아직 깨이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문명인으로서의 인간은 기본적인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과 도구를 필요로 하며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이러한 문명적인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보편적인 규준으로서 이에 미달하면 바로 계몽의 대상이 된다. 그런 한에서 서구의 제국주의는 분명 문명적 제국주의였다. 이에 반해 문화는 격식을 찾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성향의 계발에 중점을 둔다. 이 성향이 계발되는 방식은 민족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주의자들은 문화의 민족적 특수성을 강조한다. 18 세기 서구에서 논란이 된 문명과 문화의 대립은 기본적으로 외적인 격식과 내적인 교양의 대립이었다. 문명과 문화의 대립은 외적인 공손함과 참된 덕망의 대립이며, 표피성/허례의식/가벼운 대화에 대하여 내면성/감정의 심화/책 속으로의 침잠/인격의 도야가 대립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도덕의 이념은 문화Kultur에 속한다. 하지만 이 이념을 명예욕이나 표면적인 예절에 치중하는 관례적인 것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문명화Zivilisierung를 뜻할 뿐이다.”19)
문화를 문명에 비하여 우위에 두는 태도는 사회학적으로 볼 때 당시의 궁정인과 귀족들에 맞서 “덕망과 교양을 갖춘 중산층의 자기 정당화”(Elias, 위의 책, 10)이지만, 문명비판의 시각에서 볼 때 이는 문명이 인문적 가치를 경시하고 기술적인 가치에 치중하는 데 대하여 문화의 입장에서 경종을 울리는 처사이다. 여기서 칸트는 후자의 사실을 <도덕철학적으로> 근거 지었던 것이다. 문명이 기술적인 것, 유용한 것, 상업적 가치가 있는 것을 지향한다면, 문화는 고상한 것,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 내적인 도야, 영혼의 깊이에 가치를 둔다. 문명의 외면적 가치가 껍데기라면 문화의 내면적 가치는 알맹이라는 생각에서 문화 의식은 지식인 사이에 급격히 파급되면서 문화는 문명 비판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사정은 함석헌의 문화 사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문화의 도덕성을 문명의 기술성에 대해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우선 함석헌은 문토불이(文土不二)적인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래서 우리 것의 뿌리를 간과한 채 외래 것을 수용하는 태도에 반대한다. “우리말로는 할 수 없는 종교 철학 예술 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 두시오. 그까짓 것 아니고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글이 돋아나지, 공작의 깃 같은 남의 글월 가져다 아무리 붙였다기로 그것이 우리 것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1-347). 문화는 자연적인 민족 정신에서 생성되는 것으로서 이 정신을 바로 세우지 않고 외래의 기술문명을 단순히 흡수할 경우 문화 정신은 파괴되고 기술 문명은 오용된다. “정신이 서기 전에 기술 문명이 먼저 들어오면 그 사회의 자치적인 통일을 깨뜨린다”(2-146). 문화 없는 문명은 위험하고 문명 없는 문화는 무력하다. 문화와 문명은 이렇게 상호보완적이지만 함석헌에게서 문화는 문명에 선행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문화가 각 민족의 자연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숙성하기는 하지만 세계사의 주류를 담당하는 문화는 있어 왔다. 여기서 “함석헌은 한민족이 현대 문화의 위기를 뚫고 동서 문화를 아우르는 세계 문화를 여는 데 자격이 있다고 본다. 그 까닭은 한민족이 유교, 불교, 물질문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나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이념과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종합하고 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한민족의 정신문화적 원형질인 ‘한’이 세계문화 형성의 이념과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20) 한민족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여 이를 세계사적인 문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함석헌은 모색한다.
문화가 문명에 선행하는 가치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함석헌의 생각은 문명의 실용성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인식에도 잘 나타난다. 함석헌은 논어의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참 사람은 그릇이 되려 하지 않는다”로 옮긴다. 실용성이 인간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뜻을 잃고 쓰이기만 힘쓰면 짐승이요 기계입니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아무데도 쓸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참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12/239). 기술, 기계, 공장, 생산, 과학, 공리(功利), 재주 등 현대 사회의 생존경쟁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는 사항들을 그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기술과 과학은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도구가 거꾸로 인간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기술과 과학의 특성에 맞게 개조되고, 급기야는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비약하기에 이른다. 이제 실용과 공리는 사회생활의 덕목으로 인정되면서 쓰임새가 곧 인간의 판단과 평가의 기준으로 둔갑한다. 쓸모는 하지만 단지 한시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다. “쓰일 때까지는 대접을 받지만, 다 쓰인 담에는 제사상에 놨던 허재비처럼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12/240). 그릇이 어떤 용도를 목적으로 지어지는 한에서 용도를 다한 그릇은 더 이상 그릇이 아니듯이 인간이 용도에 따라 가치가 평가되는 한에서 용도에 미달하거나 용도를 마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인문적 가치는 경시되고 오직 기술적 효용만이 중시되는 현대 문화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렇게 볼 때 함석헌의 문명비판은 문화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함석헌은 기계 문명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계라면 우리말로는 틀이다. 베틀ㆍ재봉틀 하는 틀이다. 인격이라는 것도 일종의 틀이다. 그 사람 틀이 잡혔다, 틀이 크다 하는 것은 다 그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 기계라면 생명과 반대되는 것으로 아나 사실은 생명이야 말로 틀이다. 정말 기계의 시작은 생명이다. 틀이란 것은 부분이 모여서 그 모아 논 부분 이상의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다. ... 서양말에서 생명의 활동을 한 가지 말로 표시하는 때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machanism, organism이다”(2-87). “사람이 기계를 만든 것은 제가 기계기 때문일 것이다”(같은 곳). 여기서 함석헌은 기계를 인격(格)에 준하는 생명체로 여긴다. 또한 그는 기계를 “우리가 물질과 접촉하는 점”이며 “볼 수 없는 정신의 무한한 능력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으로 파악하면서 기계가 없이는 “물질이라는 깊은 소(沼)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의 세계를 우리는 알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고 말한다(2-366). 더 나아가 그는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을 인간이 미신적인 사유에서 깨어나게 하는 치유책으로 간주한다. “과학과 기계의 발달은 낡은 종교를 몰아내고야 말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기계를 발달시켜서만 기계 이상의 참 기계인 우주기계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고, 생명을 인조해 보아서만 정말 인조 아닌 생명의 자조(自造)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2-88).
이렇게 볼 때 함석헌은 과학기술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그를 <초월적 자연주의자>라고 지칭했던 것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가 이제 관건이다. 기계는 인간과 물질의 매개자일 뿐만 아니라 정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드러내는 현실태이며 기계의 발달은 우주의 기계적인 운행의 검증 수단이라면, 기계문명 비판의 대상은 무엇인가? 앞서 인용한 대목을 다시 끌어 오자. 문명이란 “소재(素材)대로 있는 자연에 사람이 제 속의 정신을 넣어서 비추고 갈고 닦은 것으로 자기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2-360). 이를 바탕으로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신을 자연에 불어넣는 데에서 (기계)문명이 출현한다면, 잘못된 (기계)문명의 책임은 (기계)문명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게 있다. 말을 바꾸면, 문명비판의 대상은 기계문명이 아니라 그 문명을 만들어낸 잘못된 정신이다. 자연과 기계는 말도 없지만 죄도 없다. 오직 인간의 말(로고스)이 말썽의 출처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말한다. 기계를 “어떻게 바로 쓰나 하는 것을 연구해서만이 옳은 해결을 얻을 것이다”(2-366). 다음으로, 문명은 ‘자기와 자연 속의 빛’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 작업에 실패하거나 태만할 경우 문명이라 할 수 없다. 말을 바꾸면 문명비판의 기준/준거는 ‘인간과 자연 속의 숨어 있는 빛’이다. 이 빛은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객체적인 자연이 아니라 초월성을 띤 자연이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정신에 있으며, 해답은 자연 속의 빛에 있다. 함석헌은 겉으로는 문명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실은 문명을 제작하고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을 비판하며, 그 기준을 초월적인 자연에서 찾고 있다. 그런 한에서 그는 굳이 구별해서 말하면, 외적인 물질과 상관하는 문명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과 상관하는 문화를 비판한다. 따라서 함석헌의 초월적 자연주의는 어디까지나 문명비판의 기준/준거와 관련된 사항이다.
‘자기와 자연 속의 빛을 드러내는 일’을 함석헌은 ‘삶의 바탈(性)을 드러내는 일’과 동일시하며, 바탈을 다시 우주 전체를 일컫는 ‘한’과 연결시킨다. 이 사실은 그의 초월적 자연주의를 이해하는 데 최종적인 단계로서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비판의 기준이 궁극적으로 삶의 바탈인 전체로서의 ‘한’을 드러내는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렇다면 ‘바탈’은 무엇이며, ‘한’은 무엇인가? “본래부터 있는 것은 바탈이다. 천명이요 성(性)이다. 문(文)은 그것을 내 처지에 따라 내 힘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realize한 것이다. 문명은 실현이다. 문명ㆍ문화의 명(明)이나 화(化)는 그 뜻을 표시하는 말이다. 바탈은 곧 실(實), 참이 있어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밝힘이요 됨이다”(2-143). “우리말의 한(혹은 칸, 큰)은 일(一)이면서 대(大)를 표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자로도 일(一)이면서 대(大)면 천(天)이 되는 것같이, 한은 곧 하나님이다”(2-347). 바탈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는 뜻에서 <자연성>을 띤다면, ‘한’은 ‘하늘/하나님’이라는 뜻에서 <초월성>을 띤다. 바탈과 ‘한’을 함석헌은 자기 사상의 구성에서 대단히 비중 있게 다루지만, 문명론의 맥락에서 볼 때 바탈과 ‘한’의 연결은 <초월적 자연>을 문명 비판의 최종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탈이 “문(文)에 대해 야(野)”(2-141)를 뜻하고 ‘한’이 “물질적ㆍ정신적 우주의 근본”(2-348)을 뜻할 때, 바탈의 자연성과 ‘한’의 초월성의 결합은 모든 문명적 행위의 산출의 준거이면서 동시에 비판의 근거이다.
초월적 자연이 문명비판의 근거가 되는 한에서, 누가 어떻게 문명을 비판하여 혁신할 것인가 하는 방법적인 과제가 남는다. 구체적인 실천적 주체를 함석헌은 씨에서 찾는다. 초월적 자연주의를 실행하는 주체는 씨이다. 씨은 “제 스스로 하는 움직임(自然)에 사는 것”(8-68)이며, “땅에 와 있는 하늘의 말씀”인 “알갱이”(17-107)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하늘의 결합태로서의 씨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천상의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씨은 통일된 전체(‘한’)의 대변자로서 이 전체에 반하는 지상의 사태에 저항하는 통전적인 주체이다. 씨들의 모임인 “뿌리족”은 “전체의 이름으로 서서 전체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의 무리”이다(8/379). 씨은 통일된 전체의 의지를 대변하기 때문에 그 뜻을 펴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전체의 자리에 서기만 하면 이기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8/71).
(여기서 잠시 ‘연결자’로서의 씨의 특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함석헌은 씨의 구성(球性)에서 씨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본다. “우주적인 생각 끝에 생명의 씨를 가장 완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씨은 구슬의 모양을 하게 된 것이다(8-58). 그런데 이 구슬을 중심에서의 반지름이 동일한 구(球)의 형태로 이해하면 안 될 성싶다. 씨의 구성을 “바깥과의 접촉을 오직 한 점에서만 하자”고 했을 때 그 점(點)을 함석헌은 곧 씨로 이해한 듯하나 실은 그 점이 접촉점인 한에서 그 점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이어야 하며 그럴 경우 씨은 구형(球型)이 아니라 끝이 뾰족한 타원형(橢圓型)의 모양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구형과 달리 타원형의 극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기 때문이다. 원이나 구는 이음새 없이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에 생명이 트일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끝이 뾰족한 타원체의 극점은 좌우의 대립적인 힘들이 만난다는 내적인 메커니즘과 더불어 안과 밖이 만난다는 외적인 메커니즘을 싸안고 있는 역동적인 양상을 시사한다. 외부적인 접촉과 내부적인 진통의 끝에서 생명이 잉태될 수 있다. 더구나 극점의 예리함은 함석헌이 누누이 강조하는 씨의 깨어 있음과 싸움의 뜻이 담겨 있다. 씨은 예민하고 예리한 감성과 이성의 가지 끝에 서있다. 그 끝은 우주적 생명의 최후의 몸짓이고 이 몸짓은 자기 생명의 보존과 탄생을 위한 우주의 명령이다. 이 명령에 위배되는 외부적인 힘에 대항하는 일은 이제 씨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원은 싸울 수 없다. 싸울 수 없게 되어 있다. 마냥 둥근 것은 자기의 현재적 평온에 탐닉하는 낭만일 수는 있어도 자기의 생명을 잉태하는 창조활동일 수 없다. 씨이 방패이고 창일 수 있기 위해서는 원이 아니라 끝이 뾰족한 타원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21))
씨은 그 자체로는 통일된 생명체가 아니다. 분열과 고통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실천적인 의지를 지니고 하늘의 우주적인 뜻을 실현할 때에 비로소 씨로서 바로 설 수 있다. 씨은 부여받은 잠재 능력만으로 씨일 수 없다. 또한 씨의 ‘나’가 ‘나’의 개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급급할 경우 씨일 수 없다. 전체의 통일적인 뜻과 생명이 씨의 생각과 행위를 통해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통일은 나를 죽이는 데에서 나온다. 나를 나라고 주장하는 데에서는 통일이 나오지 않는다. 헤겔의 용어를 빌면, 씨의 주관정신이 의지와 실천을 통하여 절대자의 절대정신과 결합하는 한에서만 씨의 생명성은 보장된다. 함석헌이 하나님을 “절대정신”(12/220)으로 이해했을 때 그 하나님은 정신의 근거이고 귀착지로서 씨의 정신은 그 절대성을 향하여 추진되어야 한다.
그릇된 문명에 대한 씨의 저항은 이제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인류 문명의 한계는 단순히 문명의 차원에서 극복될 수 없다. “문제는 영원에 있지 결코 땅위에 있지 않다”(19/251).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즉 정신이 문제다. ‘한’의 영원성과 맞닿아 있는 씨은 초월적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인간 속에 깃든 반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정신에 대항하여 ‘한’의 생명을 살려내야 하며, 잘못된 문명의 틀(格)을 자연이 본래 있고자 하는 방향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교정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문명비평가)
1) 함석헌의 글 인용은 한길사에서 간행한 <咸錫憲 全集>에 근거한다. 빗금의 앞은 전집 권수이고 그 뒤는 쪽수를 가리킨다.
3) "문제는 우리만이 아니오. 문명 전체가 잘못 됐기 때문이니 인류 전체가 깊이 반성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18/204)
2) 한반도의 현실은 한국인을 포함한 인간의 삶 자체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단순히 역사철학의 맥락에서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한반도를 염려한 것은 자신이 속한 한민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 일반에 대한 애정 때문이며 그런 한에서 그 작품은 철학적 인간론과 문명론의 영역으로 확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한민족의 일원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권리가 있는데 한반도의 현실과 역사는 그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박탈한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한다. 그래서 한반도는 함석헌에게 하나의 주제/숙제로 등장한다. 한반도가 나의 땅이기 이전에 인간의 땅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고갈시키고 말살하는 한반도의 역사와 위정자들에게 함석헌은 거부의 몸짓을 한다.3) 그래서 그냥 <한국 역사>가 아니라 그 앞에 <뜻으로 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뜻>을 통하여 한국의 역사는 곧바로 세계사에 동승하고 급기야는 인간의 존재사에 편입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한국역사를 정당히 이해하려면 우주사적인 관점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9/12). 그는 경험적이고 국부적인 잣대가 아니라 초월적이고 총체적인 잣대를 가지고 한반도 역사를 인류의 문명사와 관련시켜 평가하는 문명비평가의 시각을 견지한다.
4) 독일어에서 교육을 Bildung이라고 하는데 이는 ‘세우다/형태를 만들다’를 뜻하는 bilden에서 온 말로 맥락에 따라 도야(陶冶)와 문화로 번역된다. 그래서 세움-갈고닦음-교육-문화는 한 줄로 이어진다.
5) M. Heidegger, Die Technik und die Kehre, 105f.
6) 인간에 대한 실증주의적 설명의 한계와 관련하여 프랑크푸르트의 사회비판이론가들은 특히 인간 소외 현상을 지적하였다.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경시한 채 인간을 사물이나 기계로 전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체제의 보수성과 기술의 인간 지배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실증주의와 비판이론 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은 소위 <실증주의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7) 졸고, “자기의 탈중심화를 통한 자기와 타자의 상호침투”, 철학과 현실, 2004년 여름호 참조.
8) M. Horkheimer & Th. Adorno, "Kulturindustrie. Aufklaerung als Massen- betrug", in: Dialektik der Aufklaerung 참조.
9) Heidegger, 위의 책, 37.
10) Jaspers는 철학적인 세계 인식과 기술문명이 결코 세계에 대한 통일적인 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행위를 Welt-orientierung, 즉 ‘세계를 단지 지향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K. Jaspers, Philosophische Weltorientierung, München, 1994. 85ff. 참조.
11) 이상 H. Schnädelbach, 「Plädoyer für eine kritische Kulturphilosophie」, in: 『Kulturphilosophie』, Leibzig, hg. v. R. Konersmann, 1996, 315ff. 참조
12) 헤겔의 표현을 빌면 자유의지는 제 2의 자연으로서, 실재하는 자연보다 상위에 있는 인간 고유의 본질적 성향이다.
13) I. Kant, 「Ideen zur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ürgerlicher Absicht」, 제 3 명제.
14) Kant, 위의 글, 제 6 명제.
15) 유헌식, “순수의 무력과 위력”(철학과 현실, 2003년 여름호, 철학문화연구소) 13쪽 이하 참조.
16) 이 맥락은 독일 관념론에서 칸트가 양심의 선천성에 자유의 실천성을 도입하고 이 자유 개념을 헤겔이 <법철학>에서 인륜적인 체계로 구체화한 점과 관련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유를 역사문화 속으로 제도화하려 한 데 반해 함석헌은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자유를 단지 선택의 가능성과 부정의 근거로 파악한다.
17) G.W.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I, Suhrkamp판, 49쪽 참조.
18) N. Elias, Über den Prozeß der Zivilisation, Frankfurt/M. 1ff.
19) Kant, 위의 글, 제 7 명제.
20) 박재순, 「함석헌의 문화사상」.
21) 소설가 박상륭이 일컫는 ‘양극을 지닌 타원체’는 함석헌의 씨을 닮아 있다. “‘생명’이 ‘상징’을 입을 수 있다면, 그러나 저 ‘양극을 갖는 타원형’말고 다른 무엇이 있을지는 나만은 모른다.(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상권 213쪽). 그는 보통 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원(虛圓)이라 하여 양극을 가진 타원형과 구별한다. 뿔을 가진 타원체는 원과 삼각형과 사각형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생명의 가장 압축적인 형태로 그는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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