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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이성정)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1999년도 호남신학대학원 석사논문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이성정

                      
 1.서론
  가. 연구동기와 목절
  나. 연구 범위와 방법
2.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가. 함석헌의 생애
  나. 함석헌의 사상적 배경
     (1) 기독적 사상
     (2) 민족주의 적 사상
     (3) 동양사상
     (4) 과학적 사상
3. 종교이해
  가. 종교학에서 종교이해
  나. 함석헌의 종교이해
4. 함석헌의 그리스도교와 한국교회 비판
  가. 그리스도교 비판
     (1) 그리스도교만이 종교가 아니다
     (2) 그리스도교는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없다
     (3)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
     (4) 그리스도교의 속죄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 한국교회 비판
     (1) 교회가 하느님을 가두었다
     (2) 교회는 권위를 잃고 죽었다
     (3) 교회는 교회당만 늘린다
     (4) 보수주의 교회는 참교회가 아니다
     (5) 성직자는 민중을 속이는 위선자이다
5. 새 종교론
  가. 하나됨
  나. 합리성
  다. 뚫려비침
6.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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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가. 연구동기와 목적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끊임없는 개혁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을 볼수 있다.  이 개혁은 하나님을 떠나려하고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종교행위들로부터 회귀하여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살아있는 종교로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성경에서의 히스기아와 요시아의 종교개혁, 그리고 18세기의 종교개혁으로 크게 빛을 발하였고, 이와 같은 개혁은 어느 일순간에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문제제기와 개혁의 물결이 조금씩 조금씩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온전해진 신앙형태는 다시 형식화되고 습관화되어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대해 개혁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그 소리들이 모여서 개혁을 이루는 싸이클이 계속되어 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교회는 지금 어떤 단계에 있을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개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하나하나 쌓여져 가고 있다.  개혁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고, 대안들이 제시되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개혁을 이루어야 할 어떤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본인은 개혁의 목소리 가운데 한 목소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 땅 한반도의 믿는 이들에게 도전이 될 우리의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를 소개하고 함께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개혁의 시기가 앞당겨질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족하지만 위대한 신앙선배의 외침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바로 함석헌님의 새 종교론이다.

 

  나. 연구 범위와 방법

 

 함석헌님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대해서 먼저 기쁨을 표하고 싶다.  본인은 함석헌님의 종교사상 가운데 개혁의 입김이라 생각되는 '새 종교론'에 대해서 연구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의 전반적인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특히 종교적 영향을 받은 시기와 개혁의 정신을 갖게되는 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전개하려 한다.

  그런 다음에 새 종교론이 등장하게 될 이론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는 함석헌 스스로가 당시의 상황 속에서 그릇된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외침이다.  그의 철저한 상황 비판 속에서 종교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고, 그 대안으로써 새 종교론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송기득 교수의 글을 토대로 전재해 갈 것이다.

  그의 현 상황에 대한 비판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 새 종교론의 모습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피려한다.  우선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함석헌 자신이 '새종교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부분이다.  바로 하나되는 것, 합리적인 것, 뚫려비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그리고 개혁의 요소로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함석헌의 개혁의 정신인 새 종교론이 그의 비판에 대해 대안으로 제시되었음을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새 종교의 모습을 연결 지어 전개하고, 이것이 18세기의 종교개혁과 연결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가. 함석헌의 생애

 

  그는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사점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어머니 50세가 되도록 글을 몰랐으나 이상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함석헌에게 자유와 평등 씨알사상의 바탕을 놓아주었다고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는 삼촌인 한학자 함일형을 통해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된 원형의 이론을 체득했다.  함일형은 그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기도 하며, 이러한 영향과 인연 때문에 함석헌은 함일형을 그의 생애의 '맨 처음으로 정신적 스승된 이'라고 불렀다.  함석헌은 6세때에 함일형의 아들이 다니던 사립기독교 학교인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여 7년과정을 마치고 16세 때인 1916년 양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지만 3학년 때 3. 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가 사건이후 복교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일본인들에게 사과하기 싫어 평양고보를 중퇴하고 2년간 집에서 휴양을 한다.   1921년 그의 사촌인 함석규 목사를 통해 오산고보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우고,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학교로서, 함석헌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오산학교에서 그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사상은 남강 이승훈으로부터 깊이 형성되어갔고 또 한명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영모 선생으로 함석헌에게 "씨알"의 의미를 일깨워 주신 분이다.  1923년 오산 학교를 졸업한 그는 남강 선생의 주선으로 동경유학을 떠난다.  이듬해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역사, 윤리과목을 공부하던중 성서연구집회를 통해 내촌감삼(內村鑑三)을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내촌감삼에 대하여 오산고보 재학때 유영모 선생을 통해 약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문하생이 된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었으며, 내촌에게서 배운 것이 많다고 고백한다.  1928년 동경고등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모교인 오산고보에서 10년동안 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에 내촌감삼 성서연구모임에 나갔다.  6인의 신앙동지들이 모여서 무교회 잡지인 "성서조선"을 발간하였고, 1923 - 33년 경에 함석헌은 이 잡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제탄압이 극심해지므로 오산 학교를 사임하고 (1938) 2년간 오산에서 김혁이 경영하던 과수원을 인계받아 경영하면서 오산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1940년 8월 김혁씨가 "계우회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함석헌은 구속되어 1년간 구치소 생활을 하였으며 출감후 1년뒤인 1942년에는 "성서조선"사건으로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하여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농사에 전념하던 중 해방을 맞아 고향 용암포 자치위원장, 군(郡)자치위원장 자격으로 신의주에 파견되어 평북자치위원회 문교담당을 맡게된다.  8.15 해방이 그를 다시 역사의 무대로 끌어 낸 것이다.  옥고를 치르고 소련 사령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출옥과 재수감의 반복되는 생활과 스파이 활동강요에 못이겨 1947년 2월 26일에 월남한다.  6. 25동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에 1951년부터 매주일 종교집회를 가지게 되었다.  1956년 사상계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발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58년 "사상계" 6월호에 발표한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글로 자유당 치하에서 20일간 구금당한다.  함석헌의 후반기 생애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중 하나가 장준하이다.  장준하를 알게 되면서 한국적 사회상황과 "사상계"의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를 내면서 잘 우는 장준하 만큼 소리치며 가슴의 눈물, 머리의 눈물을 쏟곤 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 이후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발표하였고, 군사정권 비판강연회를 가졌으며 장준하의 옥중출마 찬조연설과 선거전, 삼선개헌 반대투쟁, 민주수호 협의회 활동 등을 하였다.  1970년에 "씨알의 소리" 지(誌)를 창간하였으나 정부인가 취소로 법정투쟁을 했고, 언론인 탄압속에서 상처받다가 1980년 군사정권 때 폐간되었다.  1976년 3월 1일 "민주 구국 선언사건" 소위 "명동사건"으로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후 노환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던 중 1988년 9월 입원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올림픽 평화대회 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2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나. 함석헌의 사상적 배경

 

김경재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의 사상을 요약한다.
그는 한국개신교 100년이 낳은 최고의 종교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동양종교사상을 몸으로 깊이 체득하면서도 서양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동시에 깊이 체득한 산 혼이다.  동서종교사상을 한 몸안에 융섭한 위대한 혼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해할 온 세게종교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연구해 볼 하나의 진주와 같다.  왜냐하면 함석헌이라는 한 큰마음 안에서 동과 서가 만나고,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노장의 자연주의와 성서적 역사주의가 만나고, 종교적 신비주의와 합리적 과학주의가 만나고 있는데 단순한 병존이나 천박한 습합이 아니라, 인류 미래 종교의 어떤 방향을 암시하는 실증적 범례를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함석헌 사상의 특징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데, 기독교적사상, 민족주의적 사상, 동양적 사상, 과학적 사상이다.

 

                         (1) 기독교적 사상

  함석헌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집안 어른들이 모두 기독교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 역시 기독교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그의 모든 사상의 근원이고 모태이다."

  그는 어떤 전통이나 제도에 억매이며, 그의 사상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앙 역시 장로교에서 출발하여 무교회로, 그리고 퀘이커교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살아가면서 순수한 신앙을 찾아가려는 그의 노력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의 장로교 신앙이 무너지게 된 것은 20대 후반에 내촌감삼의 무교회 신앙을 접하면서이다.  "함석헌이 내촌감삼에게서 배운 신앙은 제도, 형식, 과리, 전통을 부시한 순수한 정신적인 신앙이었다.  함석헌은 무교회 신앙에서 인간영혼의 지순한 차선과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앙의 깊이를 배웠으며 이 무교회신앙과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주체적이며 민족적인 민족혼과 만나면서 기독교적인 민족신앙을 구축한다.

  함석헌은 무교회 신앙을 통해 민족과 신앙을 연결시키며, 교회주의를 배격하고, 개혁정신을 갖게되었는데 이것이 함석헌 신앙의 특징적 요소로 남는다.  그러나 그는 지대한 영향을 받은 무교회 정신에서 차츰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끝내는 무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는 "말씀 모임"이라는 글에 무교회에 머물지 않은 이유 세가지를 얘기하고 있다.  첫째는 독립하겠다는 의지이다. "그가 독립의 사람이었으면 나도 독립이다.  선생의 은혜를 몰라서도 아니요, 선생님보다 더 큰 무엇이 있노라 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내 노릇을 해야 하지 않나?  둔하고 적지만 둔하고 적은 대로 나는 내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어진 일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둘째는,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모양은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것이다.  무교회 신앙은 우찌무라를 살리는 데 다 쓰고 털끝만큼도 남긴 것이 없다.  길이 길이 아니오 길 간 자리인 것같이 신앙도 살고 난 자리뿐이다.  그러므로 나를 살리는 내 신앙은 내게 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  셋째는, 그저 앞만 보고 싶어서였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허락하는데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앞이 무언지 모르지만, 모르면서도 그저 앞만 보고 싶었다.  뒤에 있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체로 막 나가는 것이 곧 종교인 듯했다.  내가 이런 생각 하는 것을 주제넘은 것이라 할 줄을 알았다.  알면서도 나는 그것만이 허락이 되고, 아니할 수 없었다.

  김경재는 함석헌이 퀘이커교로 가게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퀘이커사상은 모든 인간 속에 하나님이 거룩한 빛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강조한 점, 그리고 모든 허례의식과 신학적 추상론을 배제하는 신앙과 삶의 단순성과 간결성, 평등박애사상과 평화사상들이 그가 일생 추구해왔던 신앙의 유형과 체질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함석헌 사상의 기독교 신앙적 요소를 정리하면, 하나님의 큰 흐름은 전통적 장로교 신앙에서 찾을 수 있고, 내촌감삼에 의한 무교회주의로는 민족과 신앙을 생각하였으며, 다시 퀘이커를 접하면서 평화와 역사를 보게되었다 고 할 수 있다.

  덧붙여 함석헌의 평생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씨알사상"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유영모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오산학교에서 였으며, 오산학교 시절 유영모 선생으로부터 내촌감삼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듣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유영모의 신앙과 철학에서 초영향을 받았다.  특히 유영모의 존재와 사유의 일치에서 영향을 받는데, 나를 알고 나를 달성하는 것이 곧 참 삶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사상은 함석헌이 무교회에서 떠나는 제일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유영모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보면 나에게서 창조적인 말이 나온다.  이것이 체소리이다.  통서고금의 모든  경전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내가 나를 알았다는 것은 내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되었을 때 나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된다는 말과 내가 본다는 말은 강한 말이다.  칼을 갈아야 빛이 나듯이 나의 빛은 갈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된 자만이 나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존재와 사유의 일치이다.

 함석헌이 유영모에게서 배운 것 중에 중요한 것은 학문과 지식만이 아니고 진리와 참 생명을 체험하는 참 삶의 길을 익히고 배웠다는데 있다.

 

                        (2) 민족주의적 사상

  함석헌이 평생동안 간직하였던 저항정신과 민족정신, 자유정신은 그가 태어난 평안북도의 반골기질과 기독교 교육으로부터 배워온 자유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가 어두웠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교육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평안도 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평안도는 계급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고, 민주적인 서향이 강했으며, 여기에 기독교가 다른 지역보다 일찍이 교육해왔고, 또한 함석헌 집안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함석헌 사상에서 민족주의적 요소는 오산학교에서 확고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 이후 민족주의 정신을 깊이 하게 된 것은 내촌감삼, 간디, 그리고 마찌니의 영향등이 있다.  오산에서 기본적 민족주의 정신을 갖고 일본에 가게된 함석헌은 그 곳에서 내촌감삼을 만나면서 "민족과 신앙"의 문제를 배우게 된다.  함석헌은 내촌의 예레미야 강의를 들으면서 인생의 문제와 민족문제가 한데 얽혀 마음에 결정을 못했던 것을 강의를 들으면서 많이 풀렸고, 참 믿음이 곧 애국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내촌에게서 배운 감정에 따라 그의 마음 속에는 차차 나라와 민족의 살길은 믿음에만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함석헌의 민족적 사상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물은 간디였다. 비폭력, 무저항, 해방운동, 곧 평화운동을 실천한 간디의 정신을 받아들였으며, 그의 위대한 민족정신과 민족애를 자신의 삶에 체험하고자 노력했다.  함석헌은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로 민족에게 지나온 빛나는 역사를 가르쳐줌으로 정신을 깨서 통일의 불을 붙인 마찌니를 통해 민족교육, 특히 역사교육을 통한 민족정신의 일깨움에 관해서 뜻을 두게 되었다.

 

                        (3) 동양사상

  함석헌이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문명을 이끌고 나갈 새로운 종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그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 모순이 폭로된 이상 필연적으로 국가관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양의 근대화가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듯이 다시한번 인류문명이 새롭게 변신하려면 새로운 동양 고전연구의 필요성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정관사를 붙여 더 리포메이션(The reformation)이라고 할 때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    명이 합쳐야 됩니다.  이 형식대로 꼭 된다고 할 수 없지만, 이제 인류가 또 한번 고쳐나    려고 한다면 무슨 일로든지 생각이 달라져야 할 것 아니냐?  그러려면 서양의 고전은 써    먹을 대로 다 써먹었지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이 이상 더 써먹을 수 없게 되었지    요.  그러나 동양에는 수천 년래의 고전이 있지요.  다만 서양사람들이 동양에는 종교철학    이 없다.  이렇게 봤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줄 알고 찾아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요.  이    제 우리가 이것을 캐어내봐야겠다는 것이 2차 대전후에 내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본 적도 없고, 독학으로 한문을 공부했으니까 전문적으로 학구    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나 살아가기 위해서 동양사상을 생각하게 된거야

  함석헌이 동양사상에 심취하고 깊이 있게 탐구하게 된데에는 스승 다석 유영모의 영향이 컸다.  유영모는 성서와 동양 특히 중국의 고전을 함께 강의하였고 함석헌은 이 가르침을 통하여 성서와 고전에 대하여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박재순은 함석헌의 동양사상에 대한 동기를 그의 생애와 사상이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한반도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합류하는 시대에 함석헌이 태어났고, 동서문화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그의 사상이 태동되었으며, 그의 사상 자체가 동서문화의 창조적인 융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4) 과학적 사상

  함석헌은 종교 못지않게 과학을 사랑하였다.  그가 얼마나 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내가 아무리 종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내 믿는 교리 때문에 과학적인 진리를 나는 비겁하게 부인 할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둘이 되는 경우에는 교리를 내버리고라도 나는 과학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과학은 감정에 상관없이 실험에 의해 증명된 진리요, 그 과학에서만은 목숨 내 놓고 그것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만큼 과학이 되려면 많은 과학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서 순교해 죽었습니다.  그건 다른 것 아니고 순전히 진리는 진리대로 밝혀보자는 그 한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것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함석헌이 교리보다도 과학을 더 믿었던 이유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가 과학적 진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H.G. 웰즈의 Outline of History라는 책을 일본인들이 번역한 '세계문화사대계'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고, 웰즈가 철저한 과학주의자로 세계국가주의자였음을 발견하고서, 자신이 비록 기독교 신자이지만 진화론을 믿게 되었고 그것이 사상의 토대가 되었고 과학적인 진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일찍부터 꽉 박혀버렸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상은 그의 역사해석의 한 기반으로 작용하였음을 그는 언급하였다.

  김경재는 함석헌의 과학적 사상에 대해서 "함석헌의 민중사관에는 '개체와 전체의 사상'이 인도의 브라만과 아트만의 일치사상을 비롯한 모든 위대한 세계종교사상 속에 뿌리박고 있듯이, 민중의 역사가 세계사의 한몸을 이루려고 몸무림치고 있다는 '하나님의 철학'은 진화론과 특히 예수회 신부 떼이야르드 샤르댕의 사상적 흔적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3. 종교이해

 

가. 종교학에서 종교이해

  우선 "종교"라는 것의 어원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윌프레드 캔트웰스미드(Wilfred Cantwell Smith)가 그의 저서 '종교의 의미와 목적) (The Neaning and End of Religion)에서 종교라는 말의 역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religio mihi est 라는 초기의 구절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어떠 어떠한 것이 자기에게 religio가 된다는 말은 그것을 행하는 것이 자기에게 큰 의무가 된다는 뜻이다(반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의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마나", "터부", 성스러운 것 등의 경우에서 보통 나타낸다) 맹세, 가족의 재산, 그리고 의례의 준수 등이 각각 religio가 된다.  또한 그 역으로, 굳게 맺은 서약을 깨뜨리는 것도 religio가 된다.  이 경우에는 신성모독을 금지시키는 터부로서 religio가 된다.  또한 의례나 의식 그 자체로 religio라고 불리어진다.  라틴어에서 religio라는 말이 사용된 경우를 철저하게 조사해보면, 제의(rite)라는 뜻, 즉 특정 관행을 외면적으로 준수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인들이 성스러운 것을 의인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신의 reoigio 는 그 신의 사원에서 행하여지는 전통적인 제의 패턴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스미드는 종교를 제의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성스러운 것을 일련의 규범화된 행위로 인식하는 제의를 통해서 종교의 모습은 드러나고 이식되어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에서의 종교의 의미는 한자어로서의 "宗敎"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데, "宗敎"는 모든 것이 귀일하는 근본적 진리란 뜻에서의 "宗"과 이것이 각각의 상대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가르침으로 나타난다는 뜻에서의 "敎"의 합성어임에 분명하다.  곧 동양에서의 근본적인 진가 각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가르침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정신적인 면에서의 종교 모습을 말하고 있다.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첫째로, 경험적인 자연의 존재 질서와 초경험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 질서간의 차이점을 많은 "종교인"이 구별했다는 점에서 종교의 정의가 만들어지곤 한다.  둘째로, 종교의 존재를 성과 속의 구별하는 데에서 찾으려는 정의가 있다.  세 번째로, 인간에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와 가치를 갖는다고 인정되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중요성만 갖는다고 보여지는 것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입장이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정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되는데, 일반적으로 "종교적"이라고 인정되면서도 이 세 정의 중의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각각의 정의는 개념적으로 명확하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이 세가지 정의들은 모두 종교를 연구하는 데에 유용하게 생각될 수 있는 정의들이며, 현재 영향력 있는 학자들도 그 정의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정의들은 "종교"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그 근거가 되는 특정한 기준(초월성, 성스러움, 궁극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상호 배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하면서 인간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독특성을 지닌 인간의 활동 영역과 관심 영역을 나타내 준다.  이 세 가지 정의는 어떤 보편적인 본질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라, 인식 될 수 있고 또 우리가 관심을 둘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종류의 인간 활동을 대체적으로 지적해 주는 "눈금"(pointer)과 같은 것이다.

  결국 종교의 정의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개방된 시야와 유연한 태도로 임하는 수밖에 없다.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어떤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은 그 용어를 사용하려는 사람의 목적과 관심에 따라 달라진다.

 

  나. 함석헌의 종교이해

  무관의 제왕처럼 생각과 말에서 누구 못지않게 폭넓은 사상가요 자유인이었던 함석헌에게 어떤 칭호를 붙인다면 그를 다시 좁은데다 가두어놓는 셈이 될 것이다.  그래도 그의 이름자 밑에 가끔 괄호쳐지고 그 자신도 무관해한 타이틀이 "종교인"이라는 말이었다.  종교인 함석헌은 종교라는 상품을 팔아먹고 사는 직업적인 종교가가 아니고 종교 속에서 삶의 본질과 가치를 찾고 종교로서 역사와 문명을 해석하려고 했던 종교주의자였으며, 종교적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하려 했던 참 종교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란 본래 있는 것, 생의 토대, 생의 성격이어서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인간은 모두가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직접 "사람은 종교적 존재다. 사람은 종교적 존재라는 말은 정신이 주인이란 말이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종교는 사람 살림의 밑등이요 끝이므로 이것이 문제 중에도 가장 긴한 문제다.  앞으로 어떤 변동이 온다해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은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그토록 철저하게 종교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종교란 인간의 앞에 죽을 운명을 던진 신이 또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던지는 말씀의 생명줄이다.  저는 살려면 그 줄에 전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음에서 알수 있듯이 종교야말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외에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구원 할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모순을 푸는 것이요.  모순을 풀어 인간을 운명의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을 종교라고 말한다.  "모순을 느끼면서 풀려고 애쓰면서, 애쓰면서도 풀지 못하면서, 풀지 못하면서도 풀려 나가며 사는 것이 생명이요, 종교다.

  그의 종교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는 하나라는 사상이다.

  나는 공공연하게 한 종교의 특수성에 사로 잡힌 것이 아니라 보편주의에 선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지요.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자기네들을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생각은 성립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진리란 누구에게서도 완전히 표시될 수 없으니까.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잡교는 모르지만-라면 진리야 하나이고 같은 거지 다른 거 있을 리가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종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지요.

  그는 현재 종교의 상대주의적인 구분을 거부한다.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를 향해 서 있을 뿐이며, 이 '하나의 진리'를 담지한다는 차원에서 종교 절대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상에서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앞서 다른 종교학에서의 세 가지 정의 중에서 어디에 속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아마도 세 번째 정의에 속한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종교가 인간에 있어서 궁극적인 위치와 가치를 갖는다고 인정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함석헌의 종교 이해는 종교를 인간 삶의 토대로 볼만큼 궁극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높은 가치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4. 함석헌의 그리스도교와 한국교회 비판

 

  함석헌은 참을 찾는 이, 구도자, 그리고 참을 깨친 이이다.  그는 그가 깨친 참을 바탕으로 참되고 옳고 바른 것을 드러냈으며, 거짓되고 그릇되고 비뚤어진 것을 들추어 냈다.  그것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런 뜻에서 그는 종교비평가이며, 참 종교를 위한 예언자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그는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에서 내세운 것과 그 교회의 꼴에는 잘못된 구석이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가 꼬집은 그 잘못된 구석이 무엇인지, 몇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에 정리하게 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은 송기득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송기득 교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을 4가지로 정리하였고, 교회에 대한 비판은 5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본인이 보기에는 함석헌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은 한국의 상황에서의 비판이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은 한국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라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가. 그리스도교 비판

 

      (1) 그리스도교만이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교만이 참종교이고 그밖의 종교는 모두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이들은 그리스도교를 '종교'라는 낱말 속에 넣어서 생각하는 것 조차 꺼리는 쪽일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를 넘어서는 절대로움과 특수함을 지닌 것으로 믿고 있음이며, 그 믿음의 골짜는 그리스도교에서만이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이다.  이러한 자리는 자기 마음의 확실함을 드러낸다는 쪽에서 그 뜻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를 절대로 만드는 우상스러운 옹고집이며, 제 혼자 첫째라고 우기는 독선이요, 이러한 주장을 오늘날 우리는 극단의 배타주의라고 부른다.

  우리가 함석헌의 종교 이해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이러한 배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종교를 '하나' 그 알짬으로 삼고 있음을 앞에서 살핀바 있다.  모든 종교를 '하나'라고 보는 그의 사상이 그리스도교가 타종교가 대해 갖는 배타적이고 지배적인 성격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에서 보면 이러한 배타주의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종교전쟁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으며, 오늘날도 중동에서 그러한 상황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함석헌이 종교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좀더 살펴보자.  그가 종교를 하나로 보는 근거는 철저히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나님 한 하나님인데 종교도 한 종교일 것, 정한일 아닌가? 멀리서 보았을 때 서로 달리 보았지 턱 밑에 오면 그것이 그것일 것 아닌가?  남은 다 잘못 보고 나만이, 나 혼자만이 바로 보았노라는 것을 어릴 적의 맘이지, 하나되시는 아버지의 맘이 아니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 하나님은 한 분이요.  모든 종교는 그 하나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고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천지간에 말씀은 하나뿐이고, 하나님도 하나이고, 종교도 하나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아프리카 흑인이 죽은 제 부모의 살을 뜯어먹으며 찾는 하나님은 또, "이것이 내 살이요 내 피다"하고 주는 것을 먹는다고 성찬을 행하며 기독교도가 섬기는 하나님이지 딴 하나님이 있을 리 없다.  만일 둘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둘이 다 가짜일 수밖에 없다.  이사야를 일으킨 성령이 또 맹자를 일으키고 희랍의 성인을 일으켰겠지 누가 했을까? 동양도 사람으로 길렀겠지.  그랬기에 기독교 진리를 들을 수 있지.  유대인만이 홀로 하나님을 알았고 그 외 모든 이방은 몰랐다면 설혹 기독교가 유일의 종교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인권이 서로 말을 통할 수 있고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인종이 제각기 찾은 것이 다 한 하나님을 찾은 증거다.

  여기에서 함석헌은 모든 종교가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진도와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다.  즉 세상에 말씀이 전해 질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전부터 하나님에 대한 심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에도 이미 다른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요.  그러던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해지면서 더 확실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것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섭리하신 하나님 이해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인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갖추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함석헌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신학에서 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길을 이론으로 찾고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자기 믿음의 영성을 높이기 위해서, 또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다른 종교와 서로 깊이 대화하자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함석헌에게서 너무나 당연한 전제이다.  그 보다 그는 한 종교가 갖추어야 할 올바른 몸짓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참 종교는 완전한 부정에서만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만 참종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절대 진리이다' 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자기 "종교까지도 부정해야 종교이다."

  철저한 자기부정은 참 종교에 이르자는 것이며, 종교의 알짬인 '하나' 곧 영원한 말씀만을 밝히 나타내자는 것이다.  아니, '말씀'은 무한하고 절대로운 것이므로 항상 새롭고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독교만이 참 종교라고 생각하는 배타주의가 너무도 만연해 있지 않은가?  함석헌은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다.

 

      (2) 그리스도교는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없다.

  둘째로, 함석헌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까닭은 그리스도교가 사회의식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반사회 쪽으로, 반역사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그 길을 걷고 있는 쪽이 많다.  이른바 '복음주의'를 내세운 보수주의 쪽은 거의 그렇다.  1956년에 한국 그리스도교는 사회의식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다는, 함석헌이 내린 이 진단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라고 단언해도 가히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지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함석헌에 따르면, 그것은 한마디로 사회가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가 무엇이고 역사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 손을 내미는데 교회가 아무런 활동도 보여주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역사가 짊어지워준 그 사명, 그 책임을 다 못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못했던 까닭은 함석헌은 "그놈의 천당"에 돌리고 있다.  자기 혼자 천당에 가려는 욕심 때문에 사회와 역사를 모른 체 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소리를 들어보자.

  절대로 하늘나라가 없다는 말이요.  하늘나라 찾는 것이 잘못이란 말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하늘나라 바라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이 허공에, 죽은 후에, 있는 줄아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주의 기도에 보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찾는 것으로는 기도가 다 되지 않는다.  나라가 임하라 했지.  임한다니 공중에서 떨이지는 감 먹으려듯 입만 벌리도 있으라는 것 아니었다.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했지.  이루어진다니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으란 말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양식 달라고 했다.  구하는 것은 날마다 일해 벌어먹는 것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담 구절 보면 알지 않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핑계의 여지가 없다.  사회 없고 공동 역사 건설의 책임 없는데 우리가 어디 있으며 잘못은 무슨 잘못이며, 용서는 무슨 용서인가?

 이 한탄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늘나라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공에, 죽은 후에 하늘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있다는 것이다.  "하늘은 허공에 있지 않고 땅에 와 있다" 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사명에도 어긋난다.  하늘의 종교는 땅의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땅의 종교가 된다는 된다는 것은 함석헌에게서는 사회악에 과감하게 대든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악으로 하여 사람들이 너무나 모진 괴로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을 구원하는 길은 사회악을 없애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악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함석헌이 사회악이라고 한 것은 불의한 정치권력의 탄압과 부정한 경제의 착위 따위를 가리킨다는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것은 법으로, 제도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독제 정권이 그 주법이었으므로 그는 말로, 행동으로 거기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사회에 대해서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취한 것은 우스운 일이다"고 함석헌은 비난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우리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살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종교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하나의 환상(비젼)인데,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해방과 6.25라는 중대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덧붙여서 "새로 나라는 세우는 데 높은 이념을 보여준 것이 없고 공산주의와 만나서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을 발휘할 때인데 겁내고 미워하기만 했지 이긴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가 '신공안정국'에 동조하여 정치에 귀속되어 버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이기에, "자유당 10년에 반항 하나 한 것이 없기 때문에 4.19라는 역사적 운동에 아무 참여를 못했고, 5.16에 대해서도 정당한 책망 하나 못했다.  한일회담 때는 첨에는 상당히 강한 투쟁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명분 없는 월남전쟁에 대해서는 사실상 찬성을 한 셈이고, 남의 나라의 침력 속에 사는데 평화운동 하나 일으킽 것이 없고, 젊은이들이 그렇게 고민하는데 강제징병에 대한 양심적 거부 하나 지도해 준 것이 없지, 그리고 오직 하나 생긴 것이 있다면 교회 재벌이다."  라고 꼬집어 얘기한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총체적으로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해 '안 나가는 한국교회' 라고 평가하고 있다.

  1971년에 내려진 이 함석헌의 평가가 과연 오늘날에는 어떨 것인가?  본인은 미안하지만 오늘날에도 이 평가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월이 지나온 만큼 깨어지고 성장하였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교는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대해서 빈약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이 땅에 I.M.F가 다가온지 1년여를 보내면서도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렇다할 대안이나 그에 대한 외침이 없지 않은가?  실직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노숙자 문제, 가정 파탄, 사회불안에 대해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엄숙히 함석헌의 지적에 귀기울 필요가 있다.

 

            (3)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종교를 '온통(전체)의 종교'라고 했을 적에 역사에서 나타나는 '온통'은 바로 '민중'이다.  또한 종교라는 것이 현실을 건지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역사에 나타난 그 '현실'은 곧 민중이다.  "우리 현실이 무엇인가? 죽을 데 빠진 민중이다."  왜 그는 죽을 때 빠진 민중이라고 얘기하고 있을까?  38선은 밖에서 침노해 들어온 힘을 표시하는 것인데, 그 힘 때문에 본래 하나였던 나라가 갈라져, 이것도 저것도 다 거짓나라가 되데 되었는데, 잃어진 통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 정치가 썩었고, 경제가 파탄이 난 것, 외국 세력의 압박이 있고, 인권이 짓밟히고, 언론의 자유가 막히고, 등등의 것들이 다 한말로하면 민중이 죽었다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그래서 함석헌은 종교(그리스도교)가 할 일은 죽을데 빠진 민중을 살려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민중을 살려내는 길은 "민중의 성격을 다듬어 세우는 일에 있다."  그 성격은 공통된 목표와 원리를 갖추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민중의 성격을 다듬는 일을 저버리고, 오히려 민중을 성격이 없는 무리(군중)로 버려두었다.  그리소 현실을 피해서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꼬집었다.

  현실을 피하고 구원은 없다.  현실의 고통은 문제 아니된다는 소리는 민중을 속여 영원한 압박에 비겁하게 굴복케 하면서 그들의 피땀으로 수고한 결과를 짜먹자는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는 종교가만이 하는 소리다.  미국의 구제품의 아편을 조금씩 뿌려주며 이 개 돼지 같은 벼슬아치들의 장난으로 인해 오는 고통과 모욕을 한때한때 그냥 넘기도록 위로하는 기독교가 있는 한은 구원은 절대 없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미워하지 말란 것은 나를 죄악적으로 대접하는 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지 죄악 그것에 대해 하는 말은 아니다.  죄악을 극히 미워하고 겨뤄대는 것이 종교다.  그것은 구원을 주마 하지 않고 민중으로 하여금 제 구원을 제가 싸워 얻게 한다.  제가 얻는 것이, 다시 말하면, 살아난 것이, 참 생명 아닌가?...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지금까지의 한국 그리스도교는 민중의 구원은 절대 없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가 그대로 귀귀울여 새겨 들어야할 하늘의 소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민중을 섬기고, 민중을 위해 싸우며, 민중 스스로가 일어서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함석헌은 이처럼 한국 그리스도교가 민중을 섬겨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역설하는데, 여기에는 그 만의 독특하고 뚜렷한 신학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민중을 섬기는 것이 같다는 이론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하느님과 민중,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있다.  거룩한 하느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을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일수록 민중을 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따라서 함석헌은 민중 스스로가 자신의 종교를 찾을 것을 호소한다.  민중은 제 길을 제가 연다.  "대중의 종교는 누가 줄 것이 아니다.  대중이 스스로 찾아낼 것이다.  대중이 곧 종교다. .......... 대중의 가는 길은 마치 탱크의 나가는 것, 눈 덩어리의 구르는 것 같이 제 길을 제가 곧 연다.  제가 곧 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낡은 종교를 가지고 대중을 이리해라 저리 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새 종교의 필요성이 있으며, 그 새 종교는 "예수도 석가도 대중에게 종교를 준거시 아니었고, 대중 속에 뛰어 들어 대중으로 생각하고 대중으로 믿고 대중으로 덩어리로 전체를 살았"던 것처럼 민중 속에 뛰어들고, 그들과 생각하고, 그들을 믿고, 그들과 하나되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그리스도교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교의 속죄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함석헌은 '속죄'에 대해서 많이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왜 십자가의 속죄를 말하지 않느냐? 고 시비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대해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그 까닭을 밝히고 있다.

  첫째, 속죄 소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말마다 십자가요 속죄다.  물론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겠지만, 말을 많이 한다고 반드시 힘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너무 그렇게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한 개 관념으로 돼버렸고 아무 힘이 없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러고 입으로는 부르짖는데, 그러면 부르짖는 그 사람이 실지로 십자가에서 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느냐 하면 아무것도 없다.  지극한 진리는 본래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면 도리어 가리어지는 법이요, 말이 많은 것은 깊이 알지 못하는 증거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될 수록 십자가 소리 아니하기로 했다.  내가 아니하더라도 저마다 하는 십자가 설교는 어디서 들어도 들을 것이니 나까지 할 것은 없고, 그보다는 잊어버리는 부분을 들어 깨워주는 것이 유익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속죄란 체험돼야 할 것이지 교리로 알 것이 아니다.  교리로서의 속죄는 주일학교에만 몇 시간 가면 곧 알 수 있는 것이나, 그것으로 속죄가 되느냐 하면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접했나 못했나에 있지 결코 교리를 배웠나 못 배웠나에 있지 않다.  문제는 생활경험에 있기 때문에 그 발표되는 형식에 거리낄 것은 없다.  문구로 싸우면 큰일인데, 실생활, 생명에 들어가면 종교, 종파의 대립이 무의미해진다.  유대 민족이 '속죄'라고 표시한 생명의 지경은 어디가나 반드시 '속죄'로 표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체험이 주요, 사실이 주지, 교리의 학습으로 생명이 나오는 것 아님은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속죄설은 그만두기로 했다.  정말 죄의 고민이 없어지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면, 내가 입을 닫고 있어도 냄새로라도 속죄가 전파될 것이다.

  셋째, 내가 속죄론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아무래도 자주적인 인격관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만 아니라 현대인인 다음엔 누구나 완전히 해결했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다 어느 정도, 이 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격관이 새로이 전개되든지, 속죄관이 다시 새로운 표시로 나오든지, 어떻게든지 되기 전은 거기 아무래도 불안이 없을 수 없다.  이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려 해도 소용없다.  이성은 일시 속이거나 누르거나 할 수는 있으나 아무도 그것을 영구히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 속죄론은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키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가 밝아지려면 이성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물론 종교적 진리는 이성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도 만족시키지 못하고는 영적 진리가 될 수 없다.  이성의 위에 초월을 하기 위하여 이성은 완전히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석헌은 속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속죄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속죄가 되느냐하는 이유에 대하여서다.  성경에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가 속이 됐다는 주장은 있으나 그것이 어찌하여 가능하다는 이유에 대하여는 충분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사도시대에는 살아 있는 사실이 있었고, 전도는 말로 된다는 것보다는 인격적인 접촉에 의해서 되는 것이므로 서로서로 넘치는 감격에서 나오는 간증이나 권면이 있었을 뿐이고, 아무 토론적인 설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설명이 없거나 약간 있을 뿐이라고 자답하면서, 체험은 감격으로 인한 것이요,  감격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럴 듯한 이유의 수긍되는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고, 교부시대에 들어오면서 차차 토론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덧붙여 말하기를 죄란 것이 만일 양심의 깊은 속의 문제라면 그것을 처분하는 속죄의 사실도 말로는 표시할 수 없는 맘의 지성소(至聖所) 안의 일일 것이라 하였다.

  둘째는 자유의 문제다.  자유 정신에 볼 때 십자가의 공로로 대속이 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문제로, 십자가의 대속을 절대진리로 인정해놓으면 자유의 정신을 희생을 하고라도, 그것을 믿어 살려야 할 것같이 생각되는 점도 있으나, 자유정신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면 그것도 성경에서 온 것이요, 또 자유 없이 속죄란, 문자로나 있었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 입장에 설 때 대속이란 아무리 호의로 했다 하더라도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속이란 대신하는 것인데, 예수의 경우 인격으로 인격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신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 인격이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며, 각각 가지는 인격에서 하면 어디까지 저는 저요, 나는 나지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유가 곧 인격이요, 독립이 곧 생명이라는 것이다.  제가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은 인격적인 윤리적인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는 현대인에게서 뺄 수 없는 주장인데 거기서 보면 십자가에 의한 대속이라는 사상은 많은 의문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면서, 네가지를 얘기하고 있다.  첫째, 도덕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이 정말 무죄자를 죄지은 자의 대신으로 벌을 할까?  둘째, 또 그 때문에 죄지은 자의 죄가 정말 없어질까?  셋째, 만일 그 두 가지가 이치로 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러고도 대속이란 것은 그럼 일종의 외교나 방편 아닌가?  넷째, 참의 하나님이 기술적 외교나 방편을 쓸 수 있을까?  이런 것은 다 자유정신을 토대로 하는 인격주의의 인생관에 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모순이라 말하고, 교회는 이에 대해 진실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아이가 어른의 문제를 풀어줄 수 없고, 아이를 지나 자란 어른이야말로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권위시대의 윤리를 가지고 자유의 문제를 풀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 한국교회 비판

 

                   (1) 교회가 하느님을 가두었다.

  첫째, 함석헌이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하느님을 그 안에 가두어 놓고, 그 하느님을 독점하여 그 이름을 팔아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비판한 것과 비슷하다.(요 4:20-24)

  함석헌도 예수와 같은 자리에 선다.  한국교회는 이미 자본주의와 타협했을 뿐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자본주의화 했다는 것이다.  하느님 대신 '돈'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어 맘몬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맘몬을 겸해 섬기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건만,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탈을 쓴 맘몬은 환영해도 좋은 줄로 착각"하고, "전에도 천당이 화가 됐던 것처럼 이번에는 달러가 화근이 됐다" 는 것이다.  한 해 예산의 80-90%를 교회 운영에 사용하고, 이웃에 대해 돌려지는 것은 많아야 10-20%로  그것도 건축한다.  상황이 어렵다하면 제일 먼저 삭감되고 다른 분야로 넘기어  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교회 건물 키우기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는 오늘의 '대형교회' 과연 하느님은 뭐라 하실까?

 

                   (2) 교회는 권위를 잃고 죽었다.

  그가 '죽었다'고 한 것은 교회가 이미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요,  기백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는 본래 사람의 살림 전체에 걸쳐서 절대의 권위를 가지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입니다.  그런데 "종교 그 자체 안에서조차 종교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기독교 교회가 서 가는 것은 기독교 때문이냐, ......... 결코 아닙니다.  이 경제 때문이요. 이 정치 때문입니다."  종교가 기업가들에 의해서, 정치 권력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가 없어졌으니 죽은 것은 당연하다.  함석헌은 역설로 교회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믿는 이의 믿음도, 그 믿음을 믿는 사람도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를 기백이 없다고 함석헌은 평가한다.  그것은 사회악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천당만 찾고 있기 때문이다.  교세 확장과 자체 안보에만 급급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가? 함석헌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교회가 왕성하는 것을 따라 가진 것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기백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함석헌은 그 방법을 첫째는 기도요.  다음은 노력이요, 다음은 실전에 나서는 용기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비겁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싸울 것을 요구한다.  싸울 때는 바로 지금이며 싸울 것은 사회의 밑바닥이다.  "사회의 밑바닥에 내려가면 그 싸움은 언제나 있다.  그 인간의 찌거기, 역사의 하수도에 내려가 그들을 정보하는 것이 그 싸움이다.  그들은 옛 도덕 옛 종교 옛 전쟁법을 가지고는 정복하는 방법은 그들과 같이 먹고 마셔 다만 그들과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되는 데만 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민중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고 지배계급, 중류계급을 위한 교회가 되어버렸다.

 

            (3) 교회는 교회당만 늘린다.

  함석헌은 먼저 교회당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은 무슨 현상일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교회당은 무엇으로 그처럼 늘어갈까? 라고 질문하고, 자답하기를 돈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돈의 출처에 대해서 함석헌은 외국, 주로 미국에서 오는 원조와 부정매매라고 말한다.  외국의 원조로 예배당을 짓고 거기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잘못이요, 사회의 정치, 경제의 조직이 권력 없는 자의 소득을 부당하게 빼앗아서 상층계급에게 주도록 되어 있는 체제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의 노동의 결과를 빼앗아서 된 것이지 결코 정직한 의미의 땀이란 있을 수 없기에 부정매매로 교회당을 짓게 되었다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교회의 경영에 있어서의 문제다.  주로 장로급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말발이 센 것은 돈 많은 장로들이다.  "장로란 결코 신아의 계급이 아니다.  돈의 계급이지."  결국 교회가 '돈'에 의해서 운영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교회를 '맘몬의 교회'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 고 힘주어 말한다.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4) 보수주의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함석헌은 한국교회 가운데서도 특히 '보수교회'에 대해서 비판의 화살을 당긴다.  그것은 보수교회일수록 '재벌교회'를 지향하면서 자체의 안전과 풍요만을 도모할 뿐, 역사의 문제는 우연스러운 것으로 돌려 모른 체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비인간스러운 모순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로 하여 잘 풀릴 것이므로 그것의 개혁을 위해서 실천에 앞장 설 필요가 없다는 변(弁)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참교회라면 역사의 변혁을 위해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보수교회를 비판한 것은 보수교회일수록 교파싸움에 달려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로회가 수많은 교파로 갈라지고, 또 교회당 안에서 두 파가 대립해서 예배를 드리고, 경관을 출동시키고, 교회당을 차압하고 하는 짓 따위가 있는데, 이것을 함석헌이 좋게 볼 리가 없다.  그것은 현세의 권력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려고 한 데서 나온 결과인데, 교파주의자들은 "대적은 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권한다.

  이것에 곁들여 교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이른바 '성령운동'을 나무란다.  "성령은 그 성격이 윤리적인 데 있지 결코 마술적인 능력에 있지 않다" 고 보기 때문이다.  성령에 미쳐 날뛰는 것은 " 한때 불고 지나가는 바람일 것이다." 고 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평소에 진리를 가르쳐준 것이 없는 교역자(敎役者)의 잘못이며, 그들이 신앙이라면 그저 능력을 얻는 것으로만 가르쳤고 복 받는 것으로만 말했고 윤리적인 노력을 하는 것을 지도하지 않은 고로 오늘의 병증(病症)이 나타난 것" 이라고 지적한다.

 

            (5) 성직자는 민중을 속이는 위선자이다.

  함석헌은 신부나 목사들과 같은 성직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함석헌의 예언자다운 사자의 소리를 듣는다.  그가 포효하는 대상은 거의 신부와 교황, 그리고 카톨릭이 주류를 이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50년대 중간 무렵에 있었던, 윤형중 신부와 서창제 교수의 도전에 대한 응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포효는 목사들과 신교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우리는 함석헌의 외침을 직접 들음으로써 자체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외침에 무슨 해설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신부들)은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존엄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제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무슨 종교요, 진리가 무슨 진리일까?"

  "교황 따위가 그 금관을 벗어 나를 주고 신부 따위가 그 법의를 벗어 나를 준다해도 내가 침을 뱉겠지만, 민중 네 손에는 죽는 것이 즐거움이다.  그 금관이나 법의는 피를 빨고 신경을 뽑아, 삶고 졸여서 된 것이지만 네 욕과 때림은 참과 의를 사랑함에서 난 것이요, 나를 너의 하나로 믿어서 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카톨릭은)"죽은 제도를 지키려고 사람의 양심의 자유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카톨릭밖에 나라도, 민중도, 진리도, 생각 않기 때문이다."

  "카톨릭에 가라 할 맘 없어진다.  거기는 의인의 모임인지 몰라도 죄인을 오라 하는 것 아니다.  천재가 믿을 종교인지 몰라도 민중의 종교는 아니다.  우리는 역시 카톨릭의 으리으리한 성당을 내버리고 바닷가 산골짜기로 가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고 딩구는 예수에게로 가리라!"

  이상의 함석헌의 나무람은 주로 1957, 8년도에 쏟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1983년의 함석헌의 태도는 좀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나 믿으면 그만이지 남 아니라고 할 것 없다고 생각했지요.  지금은 오히려 카톨릭 편이 좀 나은 편이고 개신교는 아주 규모가 없고 법이 없어요.  제멋대로야.  신부는 탈선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목사라는 사람들 형편없이 보수적이고 모자라는 인간들이 많은 걸요."  이같은 함석헌의 태도 변화는 카톨릭이 보여준 그동안의 '사회참여'를 옳게 평가한 탓으로 보인다.  민주화 운동,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한 싸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남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보다 자기 믿음의 성실한 것이 더 좋다는 그의 초연한 자세도 깃들여 있는 것이다.

 

  5. 새 종교론

 

  함석헌의 새 종교론의 출발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는 늘 새로워 질 수 밖에 없다는 원칙 속에서이고, 또 하나는 병든 세상의 치유책과 구제방책으로서 이다.  전자는 역사에 대한 그의 이해와 더불어 발생한 것으로 "역사가 항상 새 종교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종교가 종교이기 위해서는 자꾸 새로워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  내용으로는 어떻게 고상한 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절대 진리다"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요, 남의 보기엔 어떻게 열심 있는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 믿음은 절대 정신(正信)이다" 하는 순간, 곧 불신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그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신구 양교가 적대하면 둘이 다 하나님은 잊어버린 것이다.  종교개혁은 피차에 기뻐할 일이다.  그것이 역사의 당연한 법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종교의 개혁은 한편 역사의 결과면서 또한 역사의 원인이 된다.  새 시대의 종교란 말을 여기서 하게 된다." 하고 덧붙인다.

  후자는 종교를 문명의 알짬이요 그 동력 또는 기본 구조로 보고 이 문명과 세계의 잘못되어온 책임을 종교의 타락에 돌리는데,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는 단적인 증거는 전쟁병과 군신(軍神)이 재배하는 국가 지상주의로 보고, 종교는 따라서 치유책과 구제방책을 제시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새 종교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지금의 종교로서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낡아가는 종교, 늙은 교회에 대한 얘기도 제시될 수 있다.  종교가 낡아가고 늙어 간다는 것은 과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시대를 통일해 가는 것은 종교인데, 그 종교 자체가 자라는 때까지는 역사도 나아가나 종교가 모체로서의 자기완성을 다하고, 열린 교회가 되지 못하고 닫힌 교회가 되는 순간 자기통일을 완성하는 동시에 역사를 통일해 갈 실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곧 정신적 침체를 의미한다."

  함석헌은 현 교회의 낡아가는 종교로서의 증상을 다섯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첫째는 교리의 완성이다.  교리는 교세가 이미 상당히 나가서 밖에서 역습해 오는 사상과 싸우는 때에 내적으로 경험된 것을 체계적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데서부터 발달하게 된다.  공세적이기보다는 수세적인 시기의 산물이다.  이제 기독교 교리는 이미 다 완성된 것이요 거기 새로운 무엇이 생겨날 여지가 없다.  이것은 이 교회가 벌써 자라기를 정지한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점점 제도적으로 되어가는 점이다.  이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문제 아니요 이미 얻은 영토를 지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행정이 중요한 일이므로 점점 제도적으로 완비되어 교회는 한 개 행정체로 화했다.

  셋째, 따라서 공세적이 되지 못하고 수세적이다.  지금 교회는 사실 세상을 건지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유지해가는 것이 관심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세력과 외교를 잘 타협한다.

  넷째, 점점 더 피안적(피안적)이 되어가는 점이다.  산 종교는 결코 문제를 눌러버리거나 미래로 밀어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새로 일어날 때는 결코 현실 문제와 내세 문제나 서로 떨어져있지 않다.  금세와 내세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새 윤리를 가지는 것이 언제나 신흥종교의 특색이다.  천당 지옥 소리만이 높은 것은 그 종교가 실인간에서 차차 매력을 잃는 증거다.

  다섯째, 내분이 심하다.  새 영토가 점점 넓어져 가는 때에는 내부의 싸움이 있을 리가 없다.  내부에 쌈이 있다는 것은 외적이 없는 증거요, 외적이 없는 것은 그 종교가 세계정복을 잃었기 때문이다.  종교란 원래 선교적(선교적)인 것이다.  전세계를 정복하자는 것이 그 기개다.  이제 그것을 잃었다는 것은 늙음을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근래의 교회 내분은 그 동기가 전연 세속적 물질적인 데 있다.  세력 싸움, 재산 싸움 이런 것들이다.  이것은 교회가 정신적으로 자라기를 전연 그만두고 노쇠해가는 증거다.

  그렇다면 새 종교는 어떤 것일까? 함석헌은 이 질문에 대해 "이처럼 궁금한 것은 없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새 종교가 나오지만 그것은 나오는 때까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새 종교를 내놓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 자신이기 때문이며, 종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것이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 하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미래의 종교는 새 종교를 절대 알 수 없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이 시대는 새 종교를 낳을 '그때'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표시해 주는 두서너 사실이 있다."  "그 첫째는 현대의 전쟁의 성질이 과거와 일변한 것이다."  과거에 비해 전쟁이 발발하면 그 지역 혹은 전투병력에 국한된 전쟁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협하며 모든 인간을 위협하는 전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는, 원자학의 발달이다.  갈수록 원자학은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큰 변동을 일이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원자만이 아니고 그것으로써 암시되는 자연 전체에 어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추측을 할 수 없이 무한하게 있는 힘이다."  "세째로 생각할 것은 세계관 문제다."  세계관의 변동으로 오늘 세계에 대한 이해의 확대 등이다.

  새 종교의 모습은 이와같은 현재의 종교의 부정적인 양태의 비판, 극복 과정의 끝에 오는 결과로 일단은 볼 수밖에 없다.  비판 속에 어느 정도의 대안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이치는 불교에서 중시하는 나없음(無我)과 빔(空)의 원리들에 잘 드러나 있다.  일상적인 나의 부정 속에 참 나(진아)가 들어 있고, 기존의 종교들의 무실(無實空)함을 폭로함으로써 참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새 종교를 알 수 있나? 알 수 없다.  절대로 알 수 없다."고 자문자답하면서, "그것은 어디까지 계시오 은총적으로 올 것이요, 올 때에 받아들일 것이지 미리 알 수 없다."  고 말한다.  "막을 미리 들춰서는 아니되는 것이요.  미리 들춰서 본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정말 보여주려는 극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미리 조급해서는 못 쓴다." 라고 말함으로써 기다릴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서 하는 말이고 지식에서 말할 때는 문제가 다르다." 고 하면서, 이 말이 모순 같지만 그렇지 않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는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잔 맘을 가지고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알 수 있는 것을, 안 후에야 믿음이 생기지.  그렇게 일어난 믿음이 참 믿음이지, 즉 앞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산 믿음이지, 이지로 알 수 있는 것도 알려 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미신이다.  그것은 게으름이요 욕심이다.  내게 준 힘을 완전히 사용해서만 자유와 순종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종으로서의 일을 진심껏 한 때에 아들의 자격이 시작이 된다.  자식으로 알 수 있어서 알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이외에 알려주시는 것을 받은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식 탐구는 기도다.  새 종교를 만들 맘으로가 아니라 기다리는 맘에서, 졸지 않고 깨는 일이 곧 새 종교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그렇다.  그림을 그리는 맘, 꿈을 꾸는 맘만이 졸지 않을 터이요, 졸지 않은 자만이 신랑이 올 때는 그리던 모든 그림을 내던지고 일어나 맞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것은 오시는 님이 꼭 그대로리라고 믿어서도 아니요 그렇게 생겼기를 바라서도 아니다.  다만 그리는 맘에서 그리는 것뿐이다.  그리움은 그림으로만 그릴 수 있고 그리움이 극도에 가면 오실 것이다.  그린 모양은 내 생각으로는 가장 참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하다 하는 데까지를 그릴 뿐이요, 오시면 그 이상일 줄을 안다.

  이제 함석헌이 그린 그림의 세계에 들어갈 시간이다.  그는 과연 새 종교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함께 찾아가 보자.

 

 가.  하나됨

    함석헌이 말하는 새 종교의 모습 중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그 얼굴의 테두리를 말한다면 둥글 것이다.  하나란 말이다.  앞날의 종교는 하나일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함석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한 하나님인데 종교도 한 종교일 것, 정한 일 아닌가?"  "세계의 모든 인권이 서로 말을 통할 수 있고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인종이 제각기 찾은 것이 다 한 하나님을 찾은 증거다."  하나님은 어느 때, 어느 곳이라는 시공(시공)에 갇힌 좁은 하나님이 아니고 어디서나, 옛적부터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임해온 존재이다.  우리말의 "한"의 복합적인 의미(一, 大, 天)가 하나님의 절대성을 잘 가르킨다고 본다. 옛날 전달자로 의인화(擬人化)했던 것보다는 앞으로는 공자, 노자가 말한 도(道), 인도의 브라만(Brahman)처럼 비인격적인 것이 오히려 더 종교적이 될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천지간에 말씀이 하나이기 때문에 또한 새 종교는 하나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천지간에 말씀은 하나뿐이다.  한국말로 하고 영어로 하고, 에스키모 말로 해도 말씀은 한 말씀이다."

  여기에서 함석헌은 새 종교의 모습이 어느 기성종교로 세계 종교를 통일하는 그런 모습은 결코 아니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기존 종교(특히 기독교)가 각기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속에서 자신들의 종교에 귀속해야 한다는 "종교적 제국주의를 받아들이고, 자기 종교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는 "종교적 배타주의"를 미화시켜온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파악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종교의 특수성을 가지고 보편성을 무시하는 종교의 모습이었다.  함석헌은 모든 종교가 다 하나라 하니 어느 것을 믿으나 일반이란 말이 아니라, 어느 종교가 다 그대로 완전하단 말도 아니요, 진리를 나타내는 정도에 차이 있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언급한다.

  예수의 말씀대로 "구원이 유대에서 나왔다."  그것은 사실이며, 이것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예수께서 무어라 하셨나?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예배하는 때가 온다 하지 않았나?  유대에서 나왔으면, 왜, 예루살렘이겠지 아닌가?  이제부터는 참과 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다 높은 종교 아닌가?  노자의 말을 하고 공자의 말을 하는 것이 왜 귀에 거슬리나?  모욕 같아서 인가?  영토를 침범당하는 것 같아서인가?  보다 완전한 기독교를 버릴까 걱정스러워선가?  절대로 걱정없다.  예수의 하신 말씀, 희미하게나마 저 남양 토인의 말 속에도 있더라 할 때 "참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 기쁘지. 무슨 걱정이 있나?  기성종교의 신앙에서 그릇된 선민사상(選民思想)과 충성주의의 관념을 빼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중심주의의 변태밖에 되는 것 없다고 하였다.  사실 이날껏 종교가 인심지도(人心指導)도 해왔지만 역사를 비참하게 한 것이 종교 아닌가? 모든 비참의 원인은 종파심에 있다.  좁고 교만한 종파심이 봉건귀족을 압박자로 만들었고, 민족사상을 배타적으로 만들었고 독재자에게 구실을 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주의(主義)라는 미명하에 전쟁을 하지 않았나?

  이러한 '하나된 종교'의 강조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특징도 내포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종교적 안목의 제약성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상대방의 안목에서 배울 것은 배워 나 자신의 안목을 깊이 하고, 또 내가 가진 것으로 상대방의 안목을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상대방에 공언하는 상호의존, 상호보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하고 지향하지만, 함석헌은 '상호의존, 상호보존'의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새로운 종교'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파, 종교의 연합, 혼합으로 통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각 종파를 연합 통일하자는 것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것은 지나가는 시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소수 계급이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시대착오다.  새 시대에는 새 종교가 있을 것이다.  전에도 그런 것 같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새 것은 보다 높은 것이어야 한다.  있는 것을 다 합해도 높은 것은 못된다.  새 종교는 언제나 '죽일 놈'만이 들고 나오지 않았던가? "천한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廢)함으로써" 과거에 세계를 늘 구원하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그렇게 또 구원하실 것이다.

  그가 말하는 새 종교의 모습 중에 '하나' 된다는 것은 또한 세계가 하나 될 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세계는 하나 될 터이요.  그것을 위해서 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그것 못되면 세계는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정말 세계의 장래를 생각하는 맘이라면 새로운 한 종교를 주십사 기도할 것이다."  함석헌은 기성종교에는 만족을 못하는 진실한 맘들이 차차 국가와 민족과 종파에 관계없이 모든 종교에 대해 널리 이해하는 심정을 가지고 대해가는 소식이 들리기에 세계는 유망하다고 말한다.

  함석헌의 새종교의 모습 중 하나된다는 것은 18세기 종교개혁의 모습과 분명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으로 18세기의 종교개혁은 철저히 기독교 안에서 발생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 안에서도 하나되지 못하고 구교와 신교 둘로 나누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독교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은 세계를 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8세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자신의 개혁에 불과한 것이요,  세계를 향한, 세계를 위한 개혁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의 종교개혁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이후에 전 세계로 눈을 돌리고 확산되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고, 여러 나라말로 예배를 드리며, 세상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가는 삶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의 하나되는 종교는 전 세계를 향한 개혁의 소리이다.  지역적으로, 시간적으로 국한된 개혁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개혁의 소리라는 것이다.  어는 한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를 통털어서 개혁의 함성을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제 전 세계를 향해 외쳐야하는 우리의 의무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혼자 살자고 구조개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는 개혁하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함석헌의 새종교론 중에서도 하나되어야 한다는 함성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가치라 하겠다.

 

      나. 합리성

  합리성은 그 얼굴(새 종교)의 빛깔이 무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종교들이 각기 진한 빛깔, 즉 감정에 호소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종교도 점점 이성적으로 되어 간다는 것이다.  결국 이성적인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적인 종교란 감정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면을 몰라서도 아니다.

  감정이 중요한 일을 하는 고로 그것을 이성이 빛으로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요, 영계(靈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일은 감정으로 취해 감정의 고조된 것을 영으로 속단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아니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은 이(理)라는 글자가 표시하는 대로 개개의 현상을 초월하는 힘이다.  그런고로 인격적 생명이 발전하는 것은 이것으로서 될 것이다. ........ 이성이란 다른 것 아니요, 나 외에 남이 있음을 알고, 물질 외에 정신이 있음을 알고 이제 외에 과거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존재 외에 절대가 있는 것을 아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 아니고 종교를 생각할 수는 없다.

  왜 함석헌은 새 종교가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것은 현상을 초월하여 원리적인 것에 이르러 그것으로써 사물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이성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앞으로 인간이 발전할 시야는 이성적인 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새 종교가 온다 해도 이 방향은 변할 리 없을 것이라고 본다.  덧붙여서 종교의 역사가 점점 감정적인 면이 떨어져가고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종교의 역사를 3기로 나누어보는데, 제 1기는 맹목적 의지의 종교시대, 제2기는 감정의 종교시대, 제 3기는 이지(理智)의 종교시대 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성과 종교는 상대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이성을 무시하여야 신앙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함석헌은 이러한 생각들을 철모르고 달라붙기만 할 줄 아는 감정 이라고 경멸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성이 나 외에 남이 있음을 알고, 물질 외에 정신이 있음을 알고 이제 외에 과거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존재 외에 절대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이기에 이것 아니고는 종교를 생각할 수 없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성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함석헌은 서로가 필연적으로 상존하는 관계로 보고 있다.

  원래 이성과 신앙이 대립하는 것은 인간의 이면적(二面的)인 존재성격에서 나온다.  한편은 유한하면서 한편은 무한한 것, 상대계에 살면서 절대계를 그리는 것, 생은 힘인데 힘은 두 곳에서 온다.  하나는 아는데서 또 하나는 믿는 데서, 상대계에서 살아가는 데는 지(知)가 있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  그 아는 주체가 이성이다.  그러나 사람이 상대계에만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저는 분명히 죽는 인간임을 알면서 무한히 살기를 바란다.  자기 이성이 한계가 있는 줄 알면서 천지의 근본과 만사 만물을 다 알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격은 반드시 장벽에 부딪치고야 한다.  그것이 인생문제란 것이다.  거기 가면 이성은 이미 손을 거두고 할 수 없음을 자인한다.  그럴 때 생명은 자기 본래 가기고 있는 영성(靈性)에 의하여 그 장벽 밖의 세계를 직감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그럼 신앙는 어떻게 취할 수 있는 것일까?  함석헌은 신앙은 주어지는 것이요 자기의 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와 그 유한 밖의 세계를 한 가지로 성립시키는 영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써 지와 신의 세계(이성과 종교)가 수직적으로 연접하게 된다고 하였다.  지는 비록 신이 아니지만 참 신앙으로 인격이 완전히 통일된 자각을 가지게 되면 신에게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지임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는 신앙이 영으로 받아 얻은 세계를 다스리는 행정관이며, 종교가 이성을 배척하는 것은 이따금 그 행정관이 제멋대로 하는 일이 있고 역모(逆謀)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행정관을 내쫓고 그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성이 반항 혹은 역모를 하는 것은 도리어 신앙이 감정의 꾀는 노래나 참소하는 말을 듣고 졸거나 너무 편협하여져서 일일이 내정간섭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성은 제 분야를 완전히 허락하고 신뢰하는 맘으로 쓰면 충실한 행정관이라고 하고, 사실 이때까지의 종교에서 한 지(知), 신(信)의 싸움은 그 책임의 대부분이 종교 편에 있다고 하였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은 결국 이성 편에서는 새 지경을 넓혔는데도 불구하고 종교에서 그것을 허하지 않는 데서 생긴 불화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는 이성을 반대할 것이 아니요, 도리어 완전히 자라도록 자유의 분야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새 종교에 요구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신앙보다 이성의 역할이 보다 주도적인 작용하는 합리적인 종교의 모습이 새 종교의 특징인 것이다.

  여기에서(이성과 종교의 문제를 다루면)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신앙과 과학, 종교와 과학의 문제이다.  함석헌은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서로 딴 세계에 속한 것처럼 알았는데, 근래의 과학이 보여주는 것은 두 세계가 둘이 아니요,  하나 아닌가 하는 예감이라고 말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하나로 본다.

  과학도 종교도 다 생명의 자라가는 일면인데 이날까지 반대 방향에서 서로 욕을 하며 파들어간 셈이다.  종교에서는 정신이라는 광맥을, 과학에서는 물질이라는 광맥을, 그러면서 서로 저쪽은 잘못이야 하였다.  그런데 지금 알게 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에서 서로 뚫은 것이 결국은 맞구멍을 뚫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최근에 와서 물질관은 점점 정신적이 되어간다 하지 않나?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알 수 없어진다 하지 않나?

  여기에 대해(종교와 과학이 하나된는 것) 위험한 것이라고, 종교의 분야가 좁아지는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걱정의 소리에 대해 함석헌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한다.  오히려 더 넓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기고 지고의 감정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쏘아 붙인다.  과학이 이긴 것도 종교가 진것도 아니다.  영원무한의 세계에 들어갈 때까지의 종교요 과학이지, 들어가면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앏과 믿음이 하나인 것이다.  결국 종교든 과학이든 이 세상에 있을 때에 필요한 것이지 하늘나라에 가게되면 둘다 필요치 않다는 얘기이다.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는 종교와 과학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되면 하나님을 믿기 위해 교회, 신학이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신가를 알기 위해 따로 실험하고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종교와 과학이 모두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가기 위해서 이성과 신앙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다.  뚫려 비침

  이것은 얼굴을 보는 인상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바로 내면적, 성격적인 문제다.  함석헌은 스스로 말하기를 먼저 본 두 조건, 즉 하나되는 것, 합리적인 것을 전자는 신관에 관한 문제, 후자를 세계관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이것은 인간관에 관한 문제다 라고 말하면서 세 번째 조건에 대해서 피력한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셋 중 가장 중심적인 문제다.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자연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데 가서 맺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인간에 대해 어떤 해석을 붙이는가 그것을 보면 그 종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 인상이라고 비유했다.

  이 세 번째 새 종교의 모습은 장차 오는 종교의 인상에 대한 것인데, 함석헌은 한 마디로 "뚫려 비친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종교상의 모든 문제는 영과 육, 안과 밖의 문제였고, 이 둘을 갈라놓고 그것을 조화 통일해 보려고 긋는 명암다양(明暗多樣)의 복잡이 곧 종교 교리요, 율법이요, 계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열된 인격을 재통일하는 새 인간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뚫려 비친다고 한 것이요,  육이 영의 거침이 되는 것이 아니요, 영이 육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함석헌이 1985년 10월 27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강연한 내용 중에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를 예로 들면서 마음을 열어야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는데 그 내용을 잠깐 들어보자

  그러니깐 딴 말이 나와요.  그게 이제 중요한 대목이야요.  마음을 제가 여는거.  그적에    도 여자가 만일 "별 소릴 다한다.  당신 길이나 가시오" 그랬다면 영 말이 끊어지고 마는    건데.  그러고 나서 예수가 비틀어 가지고 "이년아, 말 안 들을 거냐!"(웃음)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말하리만큼 해서 안 되면 내버리는 거지만,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여자 그게 제일 문제가 돼.  '남편'소리만 하면 언제든지 가슴이 두근두근 대.  누가 알    지나 않나?  보지나 않나?  업신여기지나 않나?  그래, 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그 얘길 하    니까 그담에 항복을 거고, 무조건 항복한다는 건 가슴이 열린 거고, 가슴이 열리니까 그제    는 이제 말이 들어가요.

  예수님이 고거 하나를 보자 해서 그런 건데, 솔직하게 "예, 나는 죄인입니다" 그말하고 같    애요. '당신은 예언잡니다. 선지잡니다. 저 말하지 않은 걸 다 아시는 걸 보니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그러구 이제 항복을 하니까 그적에는 허락을 한 거야요.

  그러니까 고 대목이 이제 내가 '새 사람'이라고 그래.  오늘 새 사람 - 종교개혁 할려면은    새 사람이 되고야 하지.  낡은 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

  결국, 마음을 열어야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새 사람이 되어야 종교개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 인간관이 성립될 때 새 종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 인간관의 모습은 뚫려 비친, 통일된 모습인 것이다.  함석헌은 언제나 새 종교가 나올 때는 인간을 재통일한다고 말하면서, 이 재통일은 죄인들을 '알아주는 동정심'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살아날 수 있다고 하였다.  반대로 언제나 종교가 낡아갈 때는 극단으로 제도적으로 계율적으로 그리하여 죄악에 대해 심판적으로 나가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였다.

  '알아주는 동정심' 그것도 무한한 동정심을 가진 이를 예수라 하였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 이는 분명히 종교에 지친 인생의 심경을 동정해 부르신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조직체로서의 종교를 건지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사실 예수는 종교를 조직하잔 것이 목적이 아니요. 가엾이 자아분열에 쓰러지는 인생을 위로하고 고무하잔 것이 목적이었기에 경우를 따라 이리 말씀하고 저리 말씀하여 오직 심령을 살려내려 했을 뿐이고 교리나 인간 철학을 짜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가 어떻게 말씀하시든 그 말씀 중에 인생은 항상 살아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듣는 자가 "영생하는 말씀이 주께 있다"고 했고, 그의 앞에 설 때 인생은 환하게 뚫려 비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오늘의 교회가 마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서 소라가 제 몸에서 분비한 물건의 굳어진 껍질에 제가 갇히우듯 이 시대의 물결이 오고가는 역사의 바닷가에서 교회는 제가 살고 남은 교리를 고정시켜 그 속에 늙어버렸고, 교회당의 탑이 높아갈수록 교회 안과 밖은 분명히 구별이 되어갔다고 하면서, 교회의 내외가 갈라진 것, 오늘 세계가 정치적 두 진영으로 대립을 하여 그것이 세계적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을 인생의 내외가 분열된 표시로, 인격의 분열로, 영. 육의 대립의 표시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른 예언은 못하더라도, 이 인격의 통일이 되어 현대인의 인생관이 통일되지 않는 한 세계의 통일 평화는 결코 올 수 없으리라는 것만은 단정해 말할 수 있다." 고 한다.  "맘을 구하는 자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요.  인격을 통일하는 자가 우주를 통일할 것이다.  그리고 맘을 구함은 인격의 자아분열을 없이해서는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만약 인격이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면 어찌 될 것인가?  함석헌은 인격을 분열시키는 것이 무기로 전쟁으로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살인이라고 말하면서, 맹자의 얘기,즉 전국시대 혼란기에 있어서 천하는 어디 가 정해지느냐 하는 데 대답하여서, '일'(일)에 가 정한다 하고, 누가 '일'을 하느냐 하는 데, 사람 죽이기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일을 한다 한 것은 하늘말씀을 전한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결국 장차 오는 종교가 뚫려 비치는 종교여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함석헌은 말한다.

  이상으로 함석헌의 새 종교의 그림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함석헌은 이러한 그의 그림, 새 종교의 모습은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곧 새 종교란 꿈을 꾸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론은 새 종교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림을 그려보고, 꿈을 꾸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인간으 유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 종교가 어떤 것일지 누가 아느냐?  새 종교의 꿈을 꿀 뿐이지.  새 종교란 그러나  다른 것 아닐 것이다.  새 종교를 꿈꾸는 것이 곧 새 종교지.  아브라함의 꿈속에 가 나안이 있었고, 가나안의 꿈속에 애굽이 있었고, 나일 강가의 꿈속에 시내산이 있었고, 시내 산 불꽃 꿈 속에 갈릴리 바다가 있었고 갈릴리 바다 어선에서 꾸는 꿈속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지 않았나?  그럼 새 시대의 종교의 꿈을 그려보자!  거기 무한이 있다.

 

 6. 결론

 

 우리는 이상에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그의 종교이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그의 비판, 그리고 대안으로서의 새 종교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가 함석헌의 이러한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서론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땅에 종교개혁의 한 외침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귀기울임으로 인해서 이 땅에 교회가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로 거듭나고, 개혁되는 역사를 이루어가야 함을 깨닫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깨닫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개혁되는 역사가 하루 앞당겨지기를 염원하는 맘이 그 안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족하지만 본인은 함석헌의 새 종교론이 그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서 제시되었음을 얘기하고 싶다.  어쩌면 어거지 맞추기 식의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분명 이 땅의 잘못 되어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새 종교가 필오하다고 외쳤다는 것이요.  그 새 종교의 모습은 이러해야 한다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새 종교의 모습으로 대안 제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서술하려고 한다.

  먼저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 중에 "그리스도교만이 종교가 아니다"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그의 "종교는 하나다"라는 사상 속에서 나오게 된 비판이다.  즉 하나님이 한 분이니 종교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속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새 종교의 모습은 "하나됨"이다.  그는 하나님도 하나요. 종교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될 터이니 당연히 새 종교는 하나됨이 종교일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만이 종교가 아니다"라는 그의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그리스도교는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 대해서 등돌리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이며, "나 혼자만 천당"이라는 극히 이기주의적인 구원관의 결과로 함석헌은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그려진 새 종교의 모습은 "뚫려 비침" 이다.  "뚫려 비침"은 인간, 인격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히 영과 육, 성과 속,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갈라서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당만을 생각하고, 나는 선택되었기에 거룩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더러운 세상, 더러운 사회, 구원받지 못할 역사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돌아서버리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써 "뚫려 비침"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 번째 비판은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이다.  이 비판은 "종교는 현실을 건지자는 데 있고, 그현실은 곧 민중"이라는 그의 사상 속에서 제시된 것이다.  곧 종교는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종교가 할 일은 민중을 살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섬기고 민중을 위해서 싸워야 함은 당연한데,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려진 새 종교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됨"이다.  함석헌은 그가 새 종교의 모습으로 "하나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 종교는 언제나 '죽일 놈'만이 들고 나오지 않았던가?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함으로써' 과거에 세계를 늘 구원하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그렇게 또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새 종교를 이룩하는 주역으로 그가 제시하는 무리가 곧 민중이 아닌가?  그가 민중을 새 종교 이룩의 주역으로 보고 있는 것은 곧 종교가 민중을 위한 것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민중을 위하지 않는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고, 새 종교는 민중에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비판 마지막은 "그리스도교의 속죄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속죄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속죄는 교리로 이루어 질것이 아니라 체험으로만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합리성"이다.  속죄는 철저히 체험되고 경험되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얘기하는 이지 또는 과학적 사고에 대한 존중의 사상이 충분히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제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다.  첫 번째 비판은 "교회가 하느님을 가두었다"이다.  이 비판은 교회가 하느님을 독점하여 그 이름을 팔아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것으로, 자본주의와 타협한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의 모습은 "하나됨"과 "뚫려 비침"이다.  새 종교의 주역이 민중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됨"이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새로운 인격으로 교회가 거듭날 때 교회가 맘몬과의 타협 관계를 청산하고 하느님께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교회는 권위를 잃고 죽었다"이다.  교회가 왜 권위가 없고, 기백이 없을까?  그것은 교회가 기업화되어 정치권력과 담합하기 때문이요, 천당만 찾다보니 사회악과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해 기백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하나됨"이다.  민중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화되고 정치권력과 손잡게 되었기 때문이며, 영과 육을 구별하기에 사회악에 대해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교회는 교회당만 늘린다"이다.  이 비판 역시 앞의 두 비판과 비슷한데 바로 자본주의 와 손 잡은 교회, 민중을 등진 교회에 대한 바판이다.  덧붙여서 돈으로 교회 경영도 좌지우지되는 한심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됨"으로 민중에 대해 생각하고, "뚫려 비침"으로 새 인격을 형성해서 자본주의와의 관계 청산은 물론, 교회 경영을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 갈 수 있게 된다.

  네 번째는 "보수주의 교회는 참교회가 아니다"이다.  보수교회일수록 교파싸움이 많다는 것과 '재벌교회'를 지향한다는 것인데, 이데 대한 대안으로는 "하나됨"이다.  교파싸움은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에 역행하는 인간의 욕심이요, 내 교회만 생각하는 지교회 중심주의가 '재벌교회'를 지향하게 한다.  따라서 "하나됨"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다섯 번째는 "성직자는 민중을 속이는 위선자이다"이다.  교회가 민중을 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민중을 속이고 있다는 이 비판은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비판의 대안으로는 "하나됨" "뚫려비침"이다.  민중을 교회의 주인으로 생각하게 될 때, 성직자가 민중을 속일 수 없을 것이요, 성직자가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되면 민중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서술 내용이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함석헌의 비판 내용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외쳐지는 음성임에 부인할 수 없다는 것과 그가 그리는 새 종교의 모습은 그의 비판 내용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제 함석헌의 새 종교론이 과연 18세기의 종교개혁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8세기의 종교개혁이 당시의 완악해진 교회의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에서 이루어졌음에서 개혁정신의 전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단계면에서 보면, 18세기의 종교개혁은 개혁의 완성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함석헌의 새종교론은 그 과정단계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불연속성도 있다.  또 18세기의 종교개혁이 유럽이라는 국한된 곳에서의 개혁이라고 한다면, 함석헌의 새 종교론은 전세게를 향한 개혁의 밑그림을 설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함석헌도 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바라보고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정신의 전승, 기독교의 끊임없는 개혁의 측면에서 본다면 역시 함석헌의 새 종교론과 18세기의 종교개혁을 연결지어 연구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위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면서 개혁되어야 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이 고여 썩을 대로 썩어있고, 부패할대로 부패해 있다고 판단해도 결코 무리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30여년 전부터 고쳐야 한다.  개혁해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신앙 선배 가운데는 우리가 본받고 쫓아야할 훌륭한 선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그래도 기분 좋을 것이고,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신앙 선배들의 외침 하나하나에 귀기울일 때이다.  그들이 도대체 뭐라고 외쳤었는지 한 마디 한 마디 다시 찾아내고 깊이 살펴봐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지 않으면 이 땅의 외침이 그대로 묻혀버리게 될 것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땅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어떤 학자가 미래에 대해서 한 말들은 귀가 솔깃하면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우리의 신앙 선배가 하는 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러보내는 과거의 잘못들을 우리는 다시 답습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땅에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겸허한 자세로 우리의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무시하거나, 외국에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단지 우리 민족에게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음성은 이 땅의 백성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삶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의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찾고, 그 분들이 물려주신 신앙 유산들을 캐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거기에서 오늘 우리의 잘못들을 발견하고, 개혁의 흐름에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이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