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새교육> 525호(1998년)
[석학들이 본 전환기의 세계관] - ① 함석헌
-저항 정신을 중심으로-
이 치 석
한마디로 그는 시대에 저항한 인물이다. 아니, 시대가 그의 저항을 요구했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저항은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함석헌의 사회적 인격(persona)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저항의 대상이 있어서 하는 것 아니다. 근본을 말하면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하는 저항이다”고 했다. 아마 저항이 그의 삶 자체였을 것이다.
1.
돌이켜 보자면, 자신의 회고대로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일이야말로 그 저항의 첫 출발점이었다. 때문에 그는 평양고보를 자퇴했지만, 오산학교에 들어가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은 저항적 삶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강조하고 있다. 이어 오산중학교 역사교사로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썼는데, 안병무는 그것을 ‘반역자’의 관점에서 쓴 최초의 한국사라고 평한 바 있다. 그 ‘반역자’의 가치관은 일제 식민지 시절로 지속되어 당시로선 비록 소극적 저항의 형태이긴 하지만 계우회(鷄友會) 사건과 <성서조선(聖書朝鮮)>지(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민족적 저항의 의식에서 본다면, 아마 해방 후에 평안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던 그가 ‘신의주 학생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소련군에게 뭇매를 맞고 사형장까지 끌려갔던 일까지가 아닌가 한다. 아마 민족적 저항이란 테두리에서였다. 두 번 감옥을 드나든 끝에 주위의 권유로 부모와 자식을 남겨두고 38선을 넘었을 때, ‘마음의 선’도 넘었다고 한 바 있다. 그 후 나이 어린 악질 경찰한테 뺨까지 맞았던 사건, 즉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사상계] 기고문은 6․25의 비극 6주년을 기념한 논설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분단시대의 사상계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이야말로 ‘죽은 지식인’에 대한 반대 명제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논설이 발표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반성을 언급한 글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4․19 학생혁명이 터지자 함석헌은 새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하였다. 물론 박정희와 김종필의 5․16 군사쿠데타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 꿈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박정희 군사 독재와 유신체제의 등장 배경이야말로 ‘생각하는 백성’을 꿈꾸던 분단시대의 현실을 역설(逆說)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구를 이끌고 70세에 창간한 <씨의 소리>가 그 현실에 저항하던 ‘생각하는 백성’의 본보기였을 것이다. 이른바 ‘명동사건’도 그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요, 그 때 옛날 베옷을 입고 재판정에 선 이유도 ‘죽은 지식인’에 대한 ‘산 백성’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2.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란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저항론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농담으로 ‘Resistance’란 말이 없었다면 영어를 배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것처럼, 셸리를 읊고 간디를 사랑하고 샤르뎅을 배운 것도 저항의 세계였으며, 그 저항의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집단자아 ‘우리’는 함석헌의 전 생애 동안 언제나 적대적인 현실에 직면한 상태였다. 지난 100년간 우리는 일제 식민지와 분단시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되지 못했고, 또 우리는 둘로 분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45세에 맞이한 8․15 해방까지 45년간 그의 고뇌와 인식의 주체는 ‘나’였으며, 그것은 특히 기독교 정신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의 저항 의식은 개별적이며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그 ‘우리’의 현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란 개별 자아 ‘나’의 복수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를 말한다. 즉 기독교라는 개인적 신앙 이외에는 자신의 존재 주체인 ‘님’과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여타의 요소를 배제했던 것이다. 특히 식민지 시절의 <성서조선>은 개인 내면의 양심과 정치적 한계 상황 사이에서 함석헌 자신의 고뇌를 달랠 수 있었던 유일한 사회적 그릇이었는데, 기독교 윤리관에 바탕을 둔 그의 저항 의식은 현실적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던 중학교 역사교사에겐 보이지 않는 하나의 갈등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애 후반부에 정열을 쏟았던 민주회복투쟁의 강렬한 인상은 생애 전반부에 자신의 내면에서 부딪혔던 그 갈등의 깊이와 폭을 웅변한 것처럼 보인다. 이 때 그는 특히 반국가주의를 강조했는데, 반국가주의는 ‘나’와 ‘우리’를 파괴하는 인류사적 주범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인권투쟁으로 비쳐진 후반 생애는 ‘나’ 중심의 기독교 윤리 의식이 적어도 ‘우리’ 차원의 사회적 저항으로 거듭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바꾸어 말하자면 함석헌은 이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안목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게 된 것은 이 저항의 단계가 변화했다는 점을 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라는 질문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산 기독교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저항 의식은 생애 전체를 통하여 삶의 연속체로서 그 의미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우리는 이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씨사상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언급한 집단자아 ‘우리’도 따지고 보면 씨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항자여야 한다. 사실 이 씨을 가리켜 사회학자 한완상은 대자적 민중(對自的 民衆, pour-soi) 또는 창조적 다수자(creative majority)라고 했고,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성경에 나오는 오클로스(oxlos)로 해석했는데, 그것은 현실 부정의 저항의식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그 저항의 공간에서 “생각하는 백성”이자 가진 것 없는 “맨 사람”은 ‘우리’가 되어 만난다. 나아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역사의 담지자”이자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따라서 비젼(vision)이 빠진 저항은 저항 의식을 놓친다. 그러나 비젼은 과거에 있다. 샤르뎅의 용어를 빌리자면 ‘과거의 비젼’이요, 전통적으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함석헌이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비롯한 동양의 정신을 강조한 이유가, 또한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차원에서 현대의 문명을 비판한 근거가 거기에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가령 “새 삶의 길” “새 나라 꿈틀거림” “새 윤리” 그리고 “새 교육” 등 ‘새’ 자를 말한 함석헌의 논설들은 물론이려니와 새삼 ‘하늘 땅에 바른 숨’을 캐어 지성의 책상에 선사한 “옛글 고쳐 씹기”의 깊은 뜻도 그런 배경이 아니면 아니 나왔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서구 문명 위주의 현실을 비판하는 정신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노장사상에 대한 이해를 적극 권장하였다. 그 이유를 이렇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문명의 새 방향을 찾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모든 분야에서 서구 문명이 표준이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은 앞서 자주 언급한 것처럼 물질적 세속화로 타락했으며, 앞으로 이 인류의 운명이 거기에 맡겨질 수는 없다. 즉 동양은 동양이요 서양은 서양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둘째 전환기에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우기 위해선 의미를 찾는 동양의 정신이 아니면 안된다. 사람의 지혜는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아직 남겨둔 것이 있는데 그 점에서 동양 정신은 우선권을 가진다. 셋째 새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야말로 무(無)에서 나오는 유(有)인데 그 새로운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한 노장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서구 문명에 세뇌당한 우리 정신을 부정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토인비(A.Toynbee)도 인류사에 등장한 8개의 고등종교 중 아직까지 인류가 활용하지 않은 사상이 노장이라고 했지만 함석헌은 이 점에서 누구보다도 앞장 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의 이 ‘과거의 비젼’은 관념적이거나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세계적이다. 양차대전과 지역분쟁으로 최소한 1억 4천만명이 목숨을 잃었던 20세기 전쟁시대의 반인류적인 문명의 청산과 새 시대를 준비하는 현주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반문명적 도덕적 감수성의 세속화에 대한 함석헌의 지평은 전경적이고 역사적이다.
우선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전쟁이 끝나면 세계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브로델(F.Braudel)도 “역사가에게 가장 큰 관심은 변화”라고 지적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변화의 깊이와 폭이 큰 변화에 민감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전쟁에 대해 “살림살이는 벌써 각 나라가 원하거나 아니하거나 어쩔 수 없이 세계적으로 됐다.……그러고 보면 우리 눈앞의 문제는 씨 새롭게 함에 있다”고 했다. “비극이란 생명이 한 단계 더 높은 데 오르는 그 모양을 표시한 거”라고 남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삶은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관된 태도가 전환기의 삶에 대한 한 가지 본보기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개인의 운명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것은 넋은 빠지고 정책과 노선만 찾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그의 이런 정치비판은 가령 “양심의 혁명없이 정치혁명이 있겠나?”라고 한 것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나온 깊은 역사적 반성을 전제로 한 것으로 집단자아 ‘우리’에 대한 명백한 현주소를 일컫고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역사적 사실은 본질적으로 심리적 사실”이라고 갈파한 아날학파의 창시자 블로끄(M.Bloch)의 역사관과 일치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흔히 드러내고 있는 ‘생존권’ 주장과 정면에서 배치되는 경우다. 함석헌은 그것이 “과학의 격동으로 인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유산되어 나온 팔삭동(八朔童)이 철학에서 나온 소리다. 삶이란 권리가 아니요 의무다”고 비판한다.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인식 공간에서 접근해야 하는 ‘나’와 ‘우리’를 인식대상인 역사적 현실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일 것이다. 적어도 다가올 새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생존권’이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함석헌의 철학을 그냥 비껴갈 수는 없다고 본다.
이를테면 그의 저항 의식은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전환기의 현실과 맞서고 있다. 그 현실에 대해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국가관과 민족관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제 국가는 세계국가의 중간 과정에 있으므로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 관점은 헌 윤리라고 하였다. 둘째 남녀관과 결혼관이 깊고 깨끗해져야 한다고 점이다. 이것은 개인의 윤리의식을 말한 것인데, 성윤리의 타락을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파악하고 이미 제도로서 일부일처제는 무너졌다면서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본능의 정화를 겨냥하여 인간성 회복에 귀결시켰다. 셋째 종교와 종파 싸움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미 종교간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한 종교의 절대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라는 그의 비판은 우리 현실에서 새삼스럽게 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끝으로 기계를 바로 쓰자고 하였다. “기계는 볼 수 없는 정신의 무한한 능력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라면서 이제 “사람들이 만든 인조 인간에 새 종교의 성격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어쩌면 자신의 예감을 불안하게 여긴 것 같았다.
4.
그런데 오늘날 우리 언론과 정치권은 서구 문명에서 출생한 밀레니엄(milenium)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2년 후에 다가올 기원 2000년을 상징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원래 이 용어의 유래는 숫자 1000을 가리키는 라틴어 밀리아(milia)인데, 그 의미는 “최후의 심판 이후에 지상에 건설될 천년왕국(千年王國)”을 가리킨다. 역사적 사실로는 기원 5세기 말에 게르만 부족의 관습(La Coutume Germanique)과 기독교(Christianism)가 결합해서 출생시킨 1000년간의 새로운 서구 기독교 문명을 떠올린다.
돌이켜 보면, 서구 기독교 문명이 물질적 세속화의 길로 가속 페달을 밟게 된 17세기 이후부터였다. 이에 따라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서구 문명은 이제 세계를 서구 문명 중심으로 확 변모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돈’으로 대체되었고, 때문에 종교적 신성(Sacré)은 정신 세계의 세속화마저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욕망과 분배 때문에 빚어진 격렬한 정치적 이념의 갈등과 충돌은 그 이전엔 결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우리 인류에게 강요하였다. 그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병(病)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병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인간과 지역과 정신은 도처에 깔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약(藥)이든 병(病)이든 서구 문명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사상 분야에서 언제나 현대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표준을 제공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표준의 표준(standard for standard)’을 만들고자 경쟁하였다. 우리는 현재 이런 특징과 보기를 2진법을 상용화한 컴퓨터와 그 기술을 응용한 통신 분야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말하자면 총과 칼 대신 지식과 기술에 기초한 이 소리없는 전쟁은 심리학자 융(C.G.Jung)의 말대로 “대(代)를 이어 전승되는 형태”로서 비서구 문명의 구석구석까지 전장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년왕국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좌절, 도전과 응전이 반복되면서 전 세계를 서구화한 이 지칠 줄 모르는 의지의 대가는 결국 서구 사회를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인간성 상실이라는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만약 이 틈새에 출현한 한 줌도 안되는 작가와 예술가와 정치가와 역사가와 종교인들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위기와 불안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혹 밀레니엄의 모순이 아닌지 모른다.
이제 함석헌의 생애는 분명 과거완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도리어 현재진행형으로서 ‘과거의 비젼’이라고 믿는다. 한국 현대사 100년이 물질적 세속화로 물든 서구 문명에 길들여진 현실에서 함석헌의 발언은 바로 집단자아 ‘우리’의 정신태도(mentalité)와 정체성(identité)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방향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로 평생 인간성 회복을 외치다간 이 인문주의자는 생애 후반을 특히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에 정열을 다 바쳤지만, 전환기를 말하는 요즈음도 아직 서구 문명의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지 찾는 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능동성을 강조한 그의 비젼의 나무는 생생하게 자라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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