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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인간 함석헌과 사회운동(이해학)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마당> 1998년 4월

 

 

인간 함석헌과 사회운동

이해학

<성남 주민교회목사>


1. 나와 함석헌

   

제 부끄러운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1963-5년 저는 감성이 풍부한 한 신학교에 열성적으로 빠졌습니다. 그곳에서 김영록, 이영일 등 나이 많은 동료들과 함께 함석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 실린 사진을 펴놓고 그 분 글을 읽고 토론하였습니다. 우리는 목욕탕으로 가서 함께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며 순 복음의 뿌리를 썩게 하는 한국 신학대와 연세대 신학교를 성령의 불 칼로 없애달라고 기도를 하던 내가 그곳을 빠져나가서 한신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함석헌 선생에게서 역사신앙을 장준하 선생에게서 민족주의를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한신의 김재준에게서 생활신앙을, 박형규에게서 참여신앙을, 문익환에게서 통일의 열정까지를 맛보며 자랐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훌륭한 선생님들의 자양분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을 행복하게, 그 선생님들에 비해서 너무도 못난 저에게는 항상 부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 함선생에 대해서 말하라 할 때에 참으로 당황하고 기획하신 분들이 실수를 하셨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함선생님을 먼 발치로 좋아하던 사람일 뿐, 그 분의 사상을 연구해 보지도 못했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생애를 걸고 진념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기라성 같은 수제자들 앞에서 증언을 하라니 그저 떨리기만 할 뿐입니다.  다만 제가 만난 함석헌을 말하라면 아주 단편적인 경험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74년 긴급조치 1호를 치고 들어갔을 때, 장준하 선생과 함께 마지막 옥살이를 하면서 함 선생에 대한 얘기를 나눈 것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생애를 오늘의 나로 전환 시켜준 분은 함석헌 선생이시다"라고. 그러기에 저도 감히 숨어있는 골찌 제자라고 자부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조명은 그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합적인 이해를 하고 역사적 평가를 하기에는 저는 너무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통감하며 인간 함석헌의 배경사와 그의 의지적 응답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2. 인간 함석헌의 배경사          

함석헌(1901∼1989)은 기독교 문필가, 사상가, 민중운동가로 1901년 평북 용천 원성동에서 출생하였다. 용천은 압록강이 서해로 떨어지는 곳으로서 중국, 일본, 러시아의 침략이 자행된 곳이며 다른 지역보다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발달된 곳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원성동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원성동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사람은 집안에 숙부가 되는 함일형(咸一亨)과 그의 아들 함석규(咸錫奎)였으며, 그는 어려서 한학자이며 민족주의자인 숙부 함일형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으며 컸다. 그가 다녔던 원성동의 서당  삼천제(三遷齊)와 덕일학교는 그의 집안에서 세운 학교였고, 덕일학교에서 수학 후, 양시 공립보통학교에 편입, 1916년에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학교에 입학, 3학년 재학 중 3·1운동을 맞았다. 양시는 중국과의 무역이 성행한 국경지역 도시였으며 합방전후에는 일제에 대한 시장세 불납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항일의식이 팽배한 곳이었다.

함일형의 차남 함석은(咸錫恩)은 평양숭덕학교 교사로서 평양의 3·1만세 시위운동에서 학생동원의 책임을 진 인물로서 사촌동생 함석헌에 민족주의 이념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함석은은 후에 서간도에 건너가 서간도 대한청년단에 가담하여 무장 독립운둉을 전개하였고, 그는 여러 차례 감옥에 갇혔고, 일생을 독립운동에 가담 만주에서 죽었다.

함석헌은 평생 독립운동에 생명을 바친 형에 대한 정신적 부담을 안고 살았다. 함석헌은 평양고보 재학 시 함석은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평양시내에 뿌렸으며, 이 만세시위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 고향에 돌아와 2년을 보낸 후 1921년 정주 오산학교에 편입하였고 오산학교 재학 시, 이 무렵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 민족주의 교육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23년 오산을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입학 준비를 하던 중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를 만나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면서 피압박민족의 식민지적 상황을 뼈아프게 체험하였다.

1924년 동경 고등사범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역사, 윤리등을 전공하였고, 1928년에 졸업하였다. 동경고사에 재학 중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內村鑑三)의 성서집회에 참석하였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선 등 신앙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1927년 동경에서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성서조선은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라는 표어처럼 기독교와 민족을 접맥시켜 기독교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롤 부임하여 남강 이승훈을 모시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대항하면서 오산의 강단을 지켰다. 그 시기 오산학교는 기독교이념으로 뭉친 독립군 양성소였으며,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정주 용동은 기독교적 사회주의 이념의 공동체가 이루어져 있었다. 오산학교 역사교사 시절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집필하였다.

1938년 교사직을 사임하기까지 그는 수차불령 학생운동사건에 관련하여 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곤 했으며, 이 시기 일제는 기독교이념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철저한 민족이념을 가진 자들로서 공산주의자는 피부병과 같다면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은 그 병이 뼛 속 골수에까지 파고 들어간 자들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1983년 학교를 떠난 후 2년간 오산에서 과수원 농장을 돌보면서 학생들을 배후에서 지도하였으며, 겉은 전도활동으로 위장하였다.

1940년 그는 평양 송산으로 옮겨 김혁과 함께 송산 농사학원을 인수, 공동생활과 생산을 겸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송산 학원은 남강의 용동공동체를 모델로 하였다. 그러나 그 해 8월 김혁이 독립운동을 하는 지하조직인 은우회에 사건으로 체포되자 그 연루자로 구속되어 대동경찰서에 연행, 1년간 구류되었다.

1942년 용천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던 중,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1943년 석방되어 향리에 은거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그는 용암포 자치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사건으로 연루, 소련군사령부에 체포되어 두 달간 구금되었고, 그 후에도 한차례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총살형 직전까지 가는 위기일발의 순간을 경험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이듬해 서울 YMCA강당에서 일요성서집회 모임을 시작하였다. 이때 시작된 성서집회는 6·25전쟁이 일어나는 피난지 부산에서도 계속되었다.

3. 사회운동의 발전

함석헌의 사회운동은 이후 3가지 측면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단독으로 전개한 강연 언론을 통한 사회 비판적 활동이며, 둘째는 제자들 또는 신앙동지들과 함께 한 공동체운동, 셋째는 지식인들과 함께 재야세력을 구성 정치권력에 도전한 정치참여운동이다. 그리고 이 3가지 운동이 종합적으로 결집된 운동이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통한 씨알모임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회운동의 사상적 배경은 기독교, 민족주의, 이외에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평화사상 등이 있으며, 사회운동의 뒷받침이 된 조직이나 집단으로는 천안 씨알농장 그룹, 휴전선 부근 안반적 씨알농장 그룹, 그리고 씨알의 소리를 간행하면서 모여든 씨알모임 등이 있으며 이러한 조직들은 성서집회에 참여하였던 그룹, 그의 언론투쟁 과정중 독자가 되어 개인적인 사제지간을 맺으면서 모여든 그룹, 그리고 1970년대 반 유신독재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재야 세력들이 있다. 이들은 사상계를 중심으로 장준하가 결집시킨 지식인 집단과 씨알의 소리가 간행되면서 반체제운동의 재야 종교인, 정치인, 학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나의 저항운동에는 뒷받침해줄 조직도, 집단도, 교단도 없다고 했으며, 단지 있으면 씨알(민중)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회운동 구성체는 그 자신이 조직한 것이 아니라 그는 들사람(야인)으로 참을 외쳤고, 그 소리를 듣고 공명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이상과 같은 조직체가 생겨나고, 운동의 지도부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친우회의 퀘이커 모임은 신앙운동의 공동체였으나, 그가 노년에 가장 강경하게 전개한 군축·반핵 평화운동은 종교 친우회를 통한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퀘이커는 기독교 안에서 소수집단이나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전개한 종교세력이었으므로 국제적 배경을 가진 퀘이커도 함석헌의 사회운동과정에 한 지원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산농장, 씨알농장, 안반덕농장, 장준하와 함께 한 구화고등공민학교 등은 남강의 용동 공동체에서 체험, 기독교사회운동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다. 뜻있는 젊은이들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헌신적으로 피 땀흘려 이스라엘의 협업농장과 같은 공동노동, 공동생산을 통해 공동체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개인과 전체를 한 가지로 인식하였다. 개체와 전체는 하나다. 개체로서 개인의 각성 자아확림과 함께 전체안에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사회운동으로서의 그의 공동체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가도 없는 고지대에 씨알의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땀흘려 일한 공동노동의 체험은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인재들의 양성이요, 훈련이었다.  1957년 천안 씨알농장은 기독교적공동체운동이었으며, 예배공동체는 밥상공동체이면서 같이 농사하는 공동작업을 통한 생산공동체였다. 그들은 노동 못지 않게 말씀을 연구하고 뜻을 깊게하며, 성경연구, 동양의 고전사상에 이르기까지 학문을 섭렵하면서 건강한 신앙적 인격을 키우는데 전력하였다. 또한 60년 초반 제자들이 중심이 된 간성의 안반덕 씨알농장은 비무장지대가 가까운 휴전선부근 같이 살기 위한 운동이었다. 작은 묘목 나무 한 그루를 심기 위하여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팠으며, 감자, 고구마, 옥수수로 식사를 대신하면서도 물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 자연 안에서 배울 것을 찾았고, 뜻 공부에 매진하였다.

70대 초반, 종교인우회 중심의 평화운동은 군사독재, 유신체제에 맞서서 인류는 같이 살아야하며,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씨알들이 동아리져 예수사상, 간디사상으로 뭉쳤다.

함석헌의 공동체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에는 성서의 평화사상, 정의사상과 함게 예수의 저항정신이 밑바탕하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공동체운동의 실제에서는 완성을 이룩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은 뜻이 전파하는 그 본래의 목적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성공, 실패와는 큰 관계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1970년 4월 19일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씨알사상을 사회전체에 전파하는 새로운 언론을 통한 사회운동을 일으켰다. 이 시기 이 땅의 지식인들은 역사를 이끄는 힘은 민중들의 깨달음에서 일어난다고 믿었다. 민중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저마다 생각을 가는, 민중들의 정신을 갈고 닦는 농사일에 나섰다. 김재준 목사는 「제 3일」을, 신학자 안병무는 「현존」을, 김훙호 목사는 「사색」을 간행하였다.  이 잡지들은 각각 인권회복,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정신운동 등 각각의 전선에서 투쟁하였지만, 씨알의 소리는 마침내 반체제 지식인 집단에게 동지적 유대감을 형성시키는데 큰 일을 해내게 되었다.

1971년 3선 개헌 반대투쟁위원회, 민주수호 국민협의회가 조직되었고, 이러한 모임은 종교인, 재야정치인들을 결합시켰고, 1974년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그리고 1976년에는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케 하였다. 재야 민주단체가 조직되어 민주화투쟁이 줄기차게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를 방패처럼 앞세우고 주먹을 쥐고 노도와 같이 굽이쳤던 당시의 저항전선 전면에 우뚝 선 그의 존재가 컸던 탓도 숨길 수 없다.  1970년 4월 19일 4·19학생혁명 10주기를 기념하여 「씨알의 소리」가 창간된 후 폐간·복간을 거듭했지만, 한국의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100회가 넘도록 발간되었고 「한국의 지성」을 결집시키고 씨알들을 조직화하였다. 잡지를 통한 그의 사회운동은 역사상 아주 독특한 사상운동이었으며, 그 힘은 마침내 1997년 12월 50년만에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힘이 되었다.

4. 사회운동의 평가

함석헌은 월남 이상재 선생을 기념하는 언론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언론인이 아니였지만 언론활동을 통하여 전개한 그의 사회운동이 크게 평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각 시대 모든 언론인을 전부 모아놓고도 못할 소리를 질렀던 것이었습니다. 1950년 말 자유당의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였고, 5·16은 군사쿠데타라고 갈파하면서 1960년 군사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1970년 80년대에 이르러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전두환의 광주민중학살을 비판하는 대중강연과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사에 참소리를 외치는 예언자로서 정치권력의 잘못을 질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인, 지식인들이 입을 열지 못하는 두려운 침묵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글쓸 수 있는 기회, 외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물러서지 않고 그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지위도 재산도 없었습니다. 빼앗길 것이 없었고 기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단이나, 교회에 직분을 갖지 않았습니다.군사정보가 서면서 신문은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역사를 왜곡하거나 침묵에 일관했습니다.

1950년 말 이승만 독재권력의 횡포는 더욱 가중되었고,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사태가 야기되었습니다. 자유당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는 그 할 일을 망각하였습니다. 경직된 사고, 새태의 혼란으로 기성종교들은 혼미하여 제 구실을 못했습니다.  통일교와 전도관 같은 기독교계 신흥종교가 물의를 빚고, 대처승과 비구승이 서로 싸웠으며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의 내용과 역대상을 울린 박인수 사건등은 사회적으로 성 모랄의 파탄을 여실히 드러내었습니다. 민족은 방향감각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서 민족의 이성을 회복하라고 외쳤습니다. 반공 교육선전이 어느 때보다 요란했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전쟁에서 받은 훈장을 형제를 죽이고 받은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고 질타했습니다. 오늘도 감히 그런 주장을 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당시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은 감옥행을 자초한 내용이였습니다. 그는 민족사의 치부를 가차없이 폭로하였습니다. 한 시대의 바닥을 탁류처럼 무섭게 흐르는 풍근에 맞서 혼신의 힘으로 언론을 통한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는 국민 전체에게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남북 상호간에 괴로정권만 있을 뿐 우리 모두는 나라없는 백성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비판으로 이러한 그는 반공법을 실증법적으로 위반하였습니다.

함석헌은 강한 민족주의 분위기와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종교인, 사상가로서 제도권 속에 역사교사는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을 상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교사로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사회적 부도덕, 기성종교의 위선, 독재정치 등을 비판하면서 무엇보다 병든 정신 문화 속에 참된 민족사의 사명에 이탈된 민족의 현실을 고뇌하였습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처음에는 단독으로 싸웠고, 1960년대에는 장준하와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러 민주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의 많은 투사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과정에서 독재와 불의에 저항하고자 하는 그를 따르던 씨알모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으면서 한국의 역사기조는 고난인 것을 찾아내었고, 한 민족의 삶을 고난공동체로 규정하였습니다.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이 있듯.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고난이라 외쳤습니다.

 

민족사 안에서 고난을 걸머진 세력은 씨알이었습니다. 씨알은 목숨을 걸고 힘을 겨루는 저항을 시도하였고, 민족사 안에서 씨알들이 함께 나눈 공동의 역사적 체험, 그 고난의 체험은 민족사의 정체성을 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회운동은 씨알운동이었습니다. 씨알들은  한 마음 안에서 굳게 섰으며 한 뜻이 되어 힘을 합쳤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그 결과물로 정신적인 씨알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민족사에 책임을 진 씨알 공동체는 뜻의 공동체였지, 어떤 정치조직도 종교단체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적인 민심, 뜻을 지닌 사람이면, 또 민족적 자아에서 개체와 전체를 발견하고 깨달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씨알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 그는 정치적 해방보다도 한민족의 정신적 해방, 민족의 사명을 깨닫는데 희망을 두었습니다. 씨알을 역사의 주인으로 내세웠고, 씨알을 통해서, 씨알의 각성으로 역사는 변화된다고 믿었습니다. 일의 성패는 하늘에 있으니, 명을 모르는 자, 법을 알지 못하는 자, 무리한 자들과는 싸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회운동은 정치투쟁은 아니었으며, 신앙 고백적 양심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삶의 철학처럼 씨알공동체가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한 이민족, 사회에는 뜻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