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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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1999년 3,4월
씨알의 뜻과 그 이상(理想)
장 기 홍
경북대교수·지질학
신천(信天) 함선생님은 씨 을 역사의 주체, 불멸의 혼, 새시대와 부활의 씨앗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하셨는데 이는 모두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요청과 주문이다. 나는 이것을 '당위(當爲)로서의 씨 '이라 불러본다. 씨 사상은 이 당위로서의 씨 과 관련된다. 그러나 본래 씨 의 개념은 단순히 民이란 뜻에서 출발했다. 그이 자신, 영어로 people이란 말이 씨 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씨 대신 인민, 민중, 백성 등 여러 가지로 불러볼 수 있지만 인민은 공산주의를, 민중은 군중심리를, 그리고 백성은 봉건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부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씨 에 해당되는 말은 역시 民이다. '민으로서의 씨 '이다.
"민이면 다 민인가 민이라야 민이지." 그렇다. 신천은 우리에게 '씨 '이란 화두를 남겨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그런 점에서 씨 이란 말과 사상은 이미 공로가 있다. 그러나 단순한 '民으로서의 씨 '과 어려운 '당위로서의 씨 ' 사이에는 긴장이 있고 문제가 있다. 신천은 일제와 군사정권 아래에서 일생을 살고 또 국사를 공부하면서 정치란 본질적으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수탈의 방편이라는 인상을 얻어 그 선입견에서 늘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적으로 민주화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차별이 없어지므로 정치가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본 그의 견해는 타당치 않게 된다. 불의에 '대듦'은 씨 의 조건이었다. 이 조건은 오랫 동안 타당한 것이었다. 데모가 필요하던 시대가 있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야당이 오랫만에 집권한 지금 아직도 데모는 '씨 '의 조건인가? 앞으로도 늘 데모가 있어야 할 것인가? 늘 데모가 필요하려면 늘 불의가 있어야 한다. 옳지 않은 시위, 집단이기적 시위가 하고 많은 지금, 시위는 결코 씨 의 속성이라 할 수는 없다.
악은 기회만 있으면 어디서나 틈타게 마련이고 이 세상은 언제나 악과 선의 씨름의 장이리라. 그러나 정치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말하자면 민주화는 그런대로 극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구미 몇 나라의 정치에서 현실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도 정치적으로 발전하여 민주화가 고도로 실현되면 정치는 신천이 생각하던대로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신천은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가 마침내 이상적 정치를 가져오리라는 신념에는 투철하지 못했다. 그는 이상적 세계의 도래를 믿지 않았다. 이 불신이 지나쳐 이상적 민주화도 믿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다. 민주화를 믿지 않았다면 왜 민주화 투쟁을 하셨던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신천은 여전히 구시대의 인물이었으며 정치를 계급적인 틀에서만 보는 폐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씨 이란 용어와 사상은 명백히 피압박 민중계급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종교집회를 통해 오랫 동안 가르치던 과정에서 자연히 어떤 교육목표, 곧 사람은 어떤 존재라야 하겠다 라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을 그는 '씨 '이라 했는데 그의 씨 은 분명히 '정치에 때묻지 않은' 그리고 아무 것에도 때묻지 않은 민짜 사람, '맨사람'을 의미했다. 그는 '돈때가 묻은' 것에 관해서는 덜 자주 언급했지만 아마도 돈 밖에는 여염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씨 에서는 거리가 멀 것이다. 예수는 부자는 하늘나라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고 가난한 사람이라야 '천국이 저희 것'이라 했는데, 마찬가지로 신천의 씨 도 가난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 최소한 야당 사람이라야 씨 의 자격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그는 아직도 씨 인가, 아닌가? 가난하던 사람이 재벌이 되었다 하자. 그는 아직도 씨 인가? 그의 그러한 씨 개념 속에는 정치와 돈은 늘 더러워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었던 셈이다. 씨 과 씨 아닌 것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는 민주화가 실현되면 씨 이란 용어와 개념은 버려야 할 것인가?
정치에 능력이 있고 좋은 뜻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사회 건설에 이바지해야 옳다. 과거처럼 정경유착을 통해서만 재벌이 되는 시대가 아닌 미래에는 만일 운이 따르고 능력이 있어 부자가 되면 그후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좋게 쓸까 하는 과제만이 남는다. 만일 정치를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사람들은 투표도 말아야 하고 세금도 내지 말아야 하고 마침내 민주시민됨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니 민주제도 자체를 부정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만일 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선입견만을 심어 준다면 이는 옳은 교육방침이 아니다. 신천은 우리에게 '씨 여러분' 하고 불렀다. 그 부름을 듣고 그것이 나를 향한 부름이라 수긍하는 사람들끼리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에는 누구까지가 씨 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의 부름은 '씨 ' 아닌 사람들을 예상하고 '씨 ' 밖의 사람들을 전제한다는 뜻에서 폐단의 씨가 그 속에 있다. 구체적으로 누구는 '씨 '이고 아무개는 '씨 '이 아니라고 하는 차별화를 일으킨다면 가뜩이나 대립과 분열이 많은 이 사회에 병폐를 하나 더 추가하는 일이 되지나 않을까.
씨 은 도덕적인 존재이므로 한 개인도 하루는 씨 이었지만 그 이튿날은 씨 의 자격이 없을 수 있다. 그러다가도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면 씨 로 복귀된다. 그러므로 김 아무개는 씨 이고 이 아무개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신천은 차별을 그토록 싫어하고 평등관을 철저히 실천하려했던 분이었다. 그 점에 비추어보면 '씨 '의 개념은 뜻하지 않게 그의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 글에서 현재와 같은 소승(小乘)적 씨 은 신천의 사상에 위배된다고 보고 이를 승화시켜 대승적 씨 사상으로 높여야 하리라는 생각을 펴는 바이다. 小乘과 大乘은 파고 들면 어려운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소승불교는 출가자들의 불교였다. 그러다가 불교는 마침내 대승불교라는 보편성을 띠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불교의 요지가 된 것이다. 씨 사상도 이처럼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불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생사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식 인생목표이다. 불교식으로 말해 보면 깨달음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걷는 사람이야말로 씨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가여래는 씨알에 해당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 佛不說衆生이란 말 그대로다. 중생이 중생이라는 말을 썼지 부처는 모두를 부처로 볼뿐 부처와 중생의 구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모두가 씨 이어야 한다. 석가, 예수, 사도 바울,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소크라테스는 일찌기 '씨 '에 엄밀히 해당하는 용어를 쓴 적이 없다. 이 세계역사상 매우 이색적인 '씨 '이란 호칭에 대하여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간디가 인도의 최하계급인 불가촉천민에 대하여 '하리쟌'(신의 자녀들)이란 용어를 만들어냈을 때 그 말은 그지없이 좋아보였고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후 차츰 많은 인도사람들은 "그러면 우리는 신의 자녀가 아니란 말인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되었다. 또 불가촉천민 자신이 이 말을 꺼리게 되었다 한다. 왜냐하면 불가촉천민이란 말이나 하리쟌이란 말이나 똑 같이 천한 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말은 오늘날은 사용되지 않게 되기에 이르렀다고 나는 현지에서 들었다. '신의 자녀'라는 좋은 뜻의 하리쟌이 욕된 말로 전락하였으니 말을 만들어 사람에게 적용함이 이토록 문제가 많다는 좋은 보기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용법대로 가면 신천의 추종자들은 곧 씨 이라는데 이를 전망이다. 아마도 신천의 추종자들은 자타가 보기에 '씨 들'로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용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천의 교도란 뜻에서 '씨 '이 쓰인다면 이는 그가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창시자가 된듯한 그릇된 인상을 주기 쉽고 또 그의 사상을 펴고 그가 밝힌 진리를 전도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쉽게 말하면 우리 곁에 가까이 오는 것을 사람들은 꺼릴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씨 함석헌'이라 부르기도 했다. 스승에게 씨 이란 타이틀을 전가하고 마치 자기네들은 씨 됨에서 벗어났다는 듯이 보이기도 했고, 혹은 자기네는 제이 제삼의 함석헌이기 때문에 씨 들이라 자처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신천을 '씨 선생'이라 부르는 예가 있는데 '씨 '이 그의 아호가 되어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이 모두가 혼선이다. 우리는 '씨 '이란 말 속에 이렇듯 잘못될 방향이 잠재해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만 민초(民草)이기만 해서 씨 이라 한다면 왜 씨 사상을 일컬으며 연구하며 고민해야 하는가? 씨 정신이 없는 어떤 사람도 씨 일 수 없으므로 씨 은 곧 씨 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는 '씨 정신'이란 뜻으로 '씨 '이란 말을 쓰도록 하자. 씨 정신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이상(理想)일 터이므로 우리는 이 이상을 추구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천(信天)이 그렇게 기대했던대로 새시대의 씨앗이 되고 새시대를 맞을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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