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사상연구회 2003년 11월 월례발표회
온생명과 함석헌 생명사상
장 회 익(녹색대학 총장)
함석헌의 역사관과 생명관
김경재 교수는 최근 함석헌 선생(이하 존칭 생략)의 학문과 사상을 개관하면서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이 낳은 탁월한 자생적 종교 사상가, 우리글과 우리말을 다듬어 쓴 독창적 문필가, 인권 평화 시민운동가, 그리고 탁월한 종교시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헌을 학문적으로 말할 때는 그 무엇보다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남긴 역사철학자로 주목해야 한다.
라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으며, 다시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글을 끝맺음하고 있다.1)
≪함석헌 전집≫ 총 20권의 핵심 화두는 생명이고, 생명의 구체적인 역동적 실재가 역사이며, 그 나선형의 운동을 이끌고 가는 하느님의 고난의 동반자가 씨 곧 민(民)이기 때문에, 새로운 민의 정치시대가 열리는 한국현대사 전환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김경재 교수의 이 문장 속에 함석헌의 사상이 매우 잘 압축되어 있다. 김경재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또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준 책이 바로 ≪함석헌 전집≫ 제1권으로 편집되어 있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다. 이 책은 1930년경에 해마다 있던 겨울모임에서 믿음의 동지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성서조선(聖書朝鮮)』에 연재했던 내용이며, 그 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호로 출간되었던 책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같은 모임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이 책의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가 또한『성서조선(聖書朝鮮)』에 연재되다가 1940년 일제 경찰에 선생이 체포됨으로써 중단되고 말았다. 불행히도 이 글들은 선생의 체포와 함께 원고마저 분실되어 문명의 여명기까지 다룬 내용들만이 남아있다. 그러다가 1964년에 다른 몇몇 글들과 합쳐 출간을 보게되었고, 다시 1983년≪함석헌전집≫제9권[이하 “전집9”로 약칭]에 재수록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 두 권의 책은 여러 모로 서로 닮아 자매편이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용상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라 봄이 오히려 더 적절할 것이다. 사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 단순한 한국역사가 아니듯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세계사’로서의 단순한 세계역사가 아니다. 이 책에는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가 말하는 역사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제외한 인간만의 역사일 수는 없다. 김경재 교수가 위에 인용된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함석헌에게는 “생명의 구체적인 역동적 실재가 역사이며, 그 나선형의 운동을 이끌고 가는 하느님의 고난의 동반자가 씨”이기 때문에 생명과 역사에 대한 인위적 분리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권의 책,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통해 함석헌의 우주관과 생명관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우주와 생명에 대해 당시까지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신의 관점과 사상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생명에 관련된 함석헌의 이러한 사상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 이를 다시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이른바 ‘온생명’이라고 하는 생명의 모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가 이미 여러 곳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온생명’ 개념은 생명에 대한 단순한 형이상학적 고찰의 소산이 아니라 과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 과학적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며, 함석헌의 생명관 또한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이를 종교적 직관적으로 파악해낸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둘 사이에 일정한 동질성이 존재하리라는 기대 또한 가능하다. 이러한 작업은 어느 의미에서 함석헌 생명 사상의 온생명적 해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또한 그의 중심 사상을 이루는 ‘씨’ 개념에 대한 재조명 작업으로의 의의를 지닐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생명 개념 특히 온생명적 관점에 입각한 생명 개념에 대한 개략적인 논의를 마친 후, 이를 바탕으로 함석헌의 생명 개념을 살펴나가는 순서를 취하기로 한다. 이는 온생명이라는 개념의 틀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고 있는 필자로서 부득이 취할 수밖에 없는 관점이며, 독자 또한 필자의 논의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순서에 따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두 가지 의미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생명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하나는 현상으로 보았을 때 생명이 지니게 되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주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생명이 지니는 의미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많은 현상 가운데에는 생명 현상이라 불릴 독특한 현상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를 현상으로서의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생명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다른 여느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한편 삶의 주체 입장에서 보면, 삶의 바탕에 깔려 삶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일러 생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생명은 한마디로 산 존재의 ‘살아있음’을 대변하는 개념이며, 이는 단순한 객체적 고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존재 자신의 주체적 성찰을 통해서만 파악될 성격을 지닌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려 할 때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은 바로 생명이 지닌 이러한 이중적 성격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생명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생명 개념을 일단 분리하여 고찰한 후 이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객관적 시각에서 현상으로서의 생명이 지닌 성격을 구명한 후 이 안에서 어떻게 주체로서의 삶이 발생하는지를 살펴보고, 다시 이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생명이라 여겨지는 실체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나갈 필요가 있다.
현상으로서의 생명
현상으로서의 생명은 말하자면 자연의 기본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기왕에 생명 현상을 전혀 접해 본 일이 없는 가상적인 ‘우주인’들이 우리를 방문한다고 할 때, 이 우주인들의 눈에 비칠 우리 생명의 모습에 해당한다. 아직 생명이 출현하지 않은 우주의 여러 곳을 다니며 자연계의 존재 양상을 충분히 익힌 이 우주인들이 생명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우리 지구를 처음으로 방문했다고 할 때, 이들의 눈에 과연 우리 생명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는 다시 말해, 자연의 보편적 존재 양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 우리 생명은 어떤 특징적 면모를 지닌 존재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점은 이들은 우리 생명을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고 있는, 예컨대, 토끼 한 마리, 소나무 한 그루와 같은 개체 단위로 파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눈에는 토끼 한 마리도 신기하겠지만 토끼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주변 여건 또한 이에 못지 않게 신기한 것이어서, 토끼와 주변 여건이 어떠한 관련을 맺기에 이러한 신기한 현상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 관심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해되어야 비로소 생명현상이 이해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마치도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책 속의 글자 한 자 한 자가 무엇을 말하는가만 생각해서는 그 뜻을 알 수가 없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의미체계를 이루는가를 이해해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도대체 이 신기한 생명현상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물질들이 어떠한 여건 아래 어떻게 놓여있어야 할 것인가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자연의 기본법칙들을 통해 파악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해본다면 이들은 생명현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주의 어느 한 곳에 ‘온생명’이라는 형태의 물질적 구성이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온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예컨대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를 의미한다. 현대과학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적어도 태양과 같은 항성과 지구와 같은 행성 체계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 적정의 물질적 여건이 갖추어짐으로써 변이 가능한 자체촉매적 국소 질서가 형성되어 협동적 진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의미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구상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현상들이 그 특성을 유지해나가면서 존속해나갈 최소의 여건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파악했다고 할 때, 이 여건을 구비한 전체 체계가 곧 온생명이 되는 것이다.
온생명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체계는 높은 수준의 질서를 유지하고 창출하게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구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러한 체계를 유지 창출하기 위한 자유에너지를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정교한 체계 자체가 어떠한 물리적 과정을 통해 마련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 첫 번째 측면에 대한 해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뜨거운 태양에서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구로 에너지가 전달될 때 적절한 장치만 마련되면 전해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자신에게 필요한 자유에너지로 전환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쉽게 입증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명의 존재는 태양과 같은 항성과 지구와 같은 행성 체계 안에서만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정교한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는 에너지의 흐름이 존재하는 비평형 상황에서는 물질들이 요동치는 가운데 우연에 의한 자체촉매적 국소 질서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공간의 어느 부분에서 아주 작은 규모의 물질적 구조물이 우연히 형성되어 일정 기간 자신의 존속에 유리한 기능을 수행해 나가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하지만 단편적인 이런 구조물의 형성만으로는 높은 수준의 질서를 집적시켜 나갈 수 없다. 오로지 한시적 질서의 명멸만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일 이 구조물이 자신과 대등한 구조물을 형성시키는 데 기여하는 이른바 자체촉매적 기능을 지닌 것이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즉 그 어떤 우연에 의해 비교적 간단한 구조를 지닌 자체촉매적 국소 질서가 하나 나타나 이것의 존속 기간 내에 자신과 닮은 체계를 한 개 이상 형성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체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다가 전면적인 물질적 상황의 한계에 이르러서야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구조물을 우리가 ‘개체’라 부르기로 한다면, 이러한 개체들은 물질적 상황이 허용되는 지구의 전 영역에 걸쳐 계속 생성 소멸되면서 사실상 무제한의 존속을 유지하게 된다. 여기에 다시 변이와 선택이라는 이른바 다윈의 진화 메커니즘이 적용됨으로써 여전히 자체촉매적 기능을 지닌 변이 개체와 함께 서로간의 협동을 통한 상위 개체들이 형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거듭 반복됨으로써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개체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면 우리는 생명 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하게 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전체 체계를 ‘온생명’으로, 그리고 이 때 발생하는 각 단계의 개체들을 ‘낱생명’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편리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전체 체계 즉 온생명에 속하는 모든 낱생명들은 온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생존이 유지될 수 없는 의존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며, 더 이상 외부의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족적 성격을 지닌 온생명 또한 그 생존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루는 내적 구성요소들 간의 정교한 조화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낱생명과 온생명의 ‘건강’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낱생명의 건강은 낱생명의 내적 상황과 외적 상황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에 반해 온생명의 건강은 외계로부터의 특별한 충격이 없는 한 오로지 온생명의 내적 상황에만 의존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주체로서의 생명
이상의 내용이 바로 현상으로서의 생명이 지닌 모습, 즉 외계로부터 방문한 우주인들이 있다고 할 때 이들이 파악할 수 있는 우리 생명의 모습이다. 그런데 생명이 지닌 매우 특이한 성격은 이러한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식은 본질적으로 그 의식의 주체가 되어보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완벽한 지적 능력을 가진 외계의 지성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 이와 유사한 의식의 주체가 아닌 이상 이 의식을 이해할 방도는 없다. 오직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의 일부로 태어난 우리들만이 이 생명을 주체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외계의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또 한가지 방식으로 생명을 이해할 위치에 놓여있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 두 가지 생명 이해의 방식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대상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이해라고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이해 사이에는 서로간에 일정한 관계가 맺어진다. 우선 어떠한 의식이 어떤 범위에서 발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의식을 담아내는 신체의 물리적 여건에 의존한다. 사람의 몸에 마취약을 투여하면 의식을 잃고 마는 것이 가장 간단한 사례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까다로운 문제가 끼어 든다. 즉 이 의식과 물리적 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생명 현상을 물리적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 이것이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난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이 점은 의식을 담당하는 기구인 중추신경계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 것인가? 의식 주체의 이른바 자유의지라는 것도 실은 물리적 인과의 사슬에 묶여있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이 점이 바로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어려운 매듭이다. 우리는 분명히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신체의 일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나는 내 팔을 들어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미 물리적 필연에 의해 들어올릴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 것이라면, 내 의지로 들어올렸다고 하는 이 느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을 해명할 열쇠가 바로 “의식이 물질을 바탕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간단한 사실 속에 숨어있다. 내 의식이 물질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내가 어떠한 의식을 지닌다는 사실은 곧 내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이러한 의식을 가지도록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몸을 움직인다고 할 때에는 이미 내 몸이 이를 움직여낼 물리적 여건을 갖추고 그러한 움직임을 일으킬 여건에 당도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내가 자유를 느끼는 것만큼 내 몸이 이에 상응하는 여건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내가 보람을 찾고 행복을 찾는 경우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내가 보람을 찾게되고 행복을 찾게되는 것도 이미 내 몸의 물질적 바탕이 이러한 느낌을 일으킬 여건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 의지가 물질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질의 상황을 떠나 ‘내 의지’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지를 발동하여 몸(물질)을 움직인다”든가, 혹은 “내가 몸(물질)에 이끌리어 그러한 의지를 발동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나’라는 것과 ‘물질’이라는 것을 별개의 존재로 보는 이원론적 관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단 이러한 이원론적 전제를 벗어나 마음과 물질이 한가지 대상의 다른 두 측면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것은 전혀 문제의 소지가 되지 않는다.
생명의 두 측면 사이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형태의 물질적 구도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중추신경계 안에서 ‘나’라고 하는 의식이 발생한다고 하는 사실은 적어도 현대 물리학의 틀 안에서는 해명해낼 수 없는 커다란 하나의 신비이다. 물리학 그 자체는 사물의 물질적 측면에 대한 서술을 일관되게 해내는 것이며, 적어도 물질적 측면에 관한 한, 생명체라든가 심지어 사람의 의식을 발생시키는 중추신경계에 대해서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즉 그 안에 어떠한 물리적 질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기의 의지에 따른 주체적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물리학으로서는 전혀 예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신비한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우리 자신에 대해 오로지 경탄해마지 않을 뿐이다.
주체적 삶이 내포하는 ‘나’의 내용
우리의 이른바 의식이라는 것이 신체 특히 그 중추신경계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는 어느 의미에서 이러한 물리적 기구의 주체적 양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의식이 ‘나’라고 생각하는 주체의 내용이 이러한 물리적 기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의식의 주체로서는 자기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있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주체로서의 ‘자기’를 곧잘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이 상정하고 있는 ‘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의 일차적인 상식에 의하면 이것은 곧 '내 몸' 즉 의식을 일으키는 사람의 신체를 지칭하게 된다. 그런데 좀더 깊이 고찰해 보면 '나'라는 내용 속에는 신체로서의 내 몸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격체로서의 '나', 그리고 한 ‘삶’의 주체로서의 '나'가 더 중요한 내용으로 담기게 된다. 가령 누가 나를 힐난한다고 할 때에 내가 느끼는 불쾌감은 내 신체에 위해가 오기 때문이 아니다. 한 인격체로서, 한 삶의 주체로서 ‘나’가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위상에 손상이 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내용은 단순한 신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정신적 삶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의 존재성을 확보하게 됨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새 차원의 ‘나’라고 하더라도 신체적 의미의 내 몸과 완전히 결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를 느끼는 내 의식 자체가 내 신체를 통해서만 작동하는 것이며, 또 내 신체를 건강하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존하는 일 자체가 내 삶의 주된 관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적 삶이 내포하고 있는 ‘나’의 범위 안에 최소한 신체로서의 자신의 몸과 인격체로서의 한 개인이 포함되어야 하나 이것은 오직 최소의 요건이며 삶의 주체로서의 ‘나’가 지니고 있는 개념의 범주는 더욱 넓게 확장되어 나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확장의 첫 단계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곧 함께 살아가는 공동 주체인 ‘우리’라는 개념이다. 우리의 삶은 결코 하나의 낱생명인 단독 개체로 분리되어 이루어지지 못한다. 같은 목표를 지향하여 협동해 살아가는 다수 개인의 집단이 많은 경우 의미 있는 삶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렇게 될 경우 ‘나’의 범위를 넓혀 자신을 포함한 이 전체 집단을 새로운 하나의 삶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인식된 새로운 주체가 바로 ‘좀 더 큰 나’인 ‘우리’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확장은 비단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로서의 ‘우리’에 그칠 필요가 없다. 내 몸이 ‘나’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이유가 내 삶을 영위해 나감에 있어서 이것이 꼭 필요하며 또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 삶을 영위해 나감에 있어서 꼭 필요하며 또 보살핌을 받아야 할 다른 모든 것을 더 큰 의미의 ‘나’ 안에 포함시키는 것 또한 당연하다. 우리가 만일 이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가장 포괄적인 생명의 체계인 온생명을 ‘나’ 속에 포함시키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사실 이렇게 규정된 ‘나’야말로 ‘작은 나’ 또는 ‘좀 더 큰 나’에 대비시켜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유의할 점은 ‘나’의 개념을 이렇게 확장시켜나간다고 하여 보다 작은 ‘나’들이 해소되거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은 단위의 ‘나’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역할을 가지는 것이며, 여기에 더하여 공동 주체로서의 ‘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온생명으로서의 ‘나’가 함께 의식의 주체로 떠올라 우리의 삶을 다차원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 이것이 곧 개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역사의 주체로서의 삶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된다.
이제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생명에는 현상으로서의 생명 즉 객체적 측면과 삶으로서의 생명 즉 주체적 측면이 있다. 객체로서의 생명은 다시 자족적 단위로서의 생명 즉 온생명과 그 안에 의존적 존재성을 지닌 생명 즉 낱생명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해된다. 주체적 측면에서의 생명 또한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개체 즉 낱생명을 ‘나’로 의식하게 되나, 자신의 모습을 객체적으로 파악해나가면서 온생명이 참된 자아 즉 더 큰 의미의 ‘나’임을 알게 된다.
함석헌의 생명사상
우리가 이제 이러한 생명 개념을 인정한다고 할 때, 함석헌의 생명사상은 이와 어떻게 다른지 혹은 이와 어떻게 유사한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비교는 그 어느 쪽의 개념이 더 적절하고 덜 적절하다는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생명 이해를 좀더 심화시키고 또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이해의 폭을 넓혀보기 위해서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함석헌의 생명관은 현상으로서의 생명보다는 삶의 주체로서 이것이 지닌 의미를 추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우주와 역사 그리고 생명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따라 창조된 것으로 보면서, 이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고 그 안에 하나의 큰 삶이 흐르는 것으로 파악한다.
비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창조된 것이다... 귀한 것일수록 큰 준비를 요하는 것이다. 이 역사를 보고자 이 대우주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또 우리는 안다. 이 우주의 광대로 인하여 이 역사의 위대한 것임을.
그러나 이와 저는 서로 딴 것이 아니다. 이는 저의 안에 있는 것이요, 저의 꽃이요, 저는 이의 뿌리다. 이와 저는 하나를 이루는 삶 그것이다. 우주는 삶 그것이다. 자라는 것이다. 원시의 인간은 이것을 살았다고 했고, 산 것으로 대접했고 교섭했다. 과학은 이것을 죽은 것이라 하고 죽은 것으로 무시하고 약탈했다. [전집9, 33쪽]
함석헌의 이러한 생각은 생명이 낱생명 단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으로 존재하며 역사라고 하는 것을 이 안에 나타나는 주체적 삶의 한 양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여기서 "삶 그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우주는 그 규모로 보자면 온생명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과 관계되는 면에서만 보자면 사실 온생명과 크게 구별될 것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생명관은 온생명으로의 생명에 대한 직관적 이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낱생명만을 생명으로 보고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온생명을 파악하지 못하는 근대 과학의 생명관을 옳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지 않은 점은 살아있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공동의 주체로 보고 있는가 혹은 인간의 삶과는 다른 별개의 생명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히 그는 “원시의 인간”은 이를 별개의 존재로 보아 “대접했고 교섭했다”고 하고 있으나, 역사의 주체 곧 우주 생명의 주체임을 자인하는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역사는 그 무엇의 역사이더라도 구경에 있어서는 모두 “이 대우주를 꿰뚫고 흐르는 대생명의 역사”라는 점을 강조한다.
생명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내놓으면, 역사를 말하는 자로서는 분외(分外)의 일인 듯이 생각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에서만 생각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우선 수정되어야 한다. 역사는 결국 생명의 역사다. 국민의 역사이거나 인류의 역사이거나 문화의 역사이거나 천연의 역사[博物]거나 구경에 있어서는 이 대우주를 꿰뚫고 흐르는 대생명의 역사다.[전집9, 42쪽]
이러한 점에서 이 대생명의 역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리가 이를 다시 그 어떤 대상으로 보아 대접한다거나 교섭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린다.
한편 그는 이러한 세계 그리고 그 생명을 현상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의미적으로 대해야 하는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까지를 그 한 분자로 함유하는 세계에 대하는 태도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상적으로 대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의미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모든 설명은 다 그것을 현상적으로 다루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태도다. 원래 이 세계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요, 의미를 가지는 존재다... 롱펠로우의 유명한 구절이 가르치는 것같이, “눈에 뵈는 그대로가 사실이 아니다.” [전집9, 42쪽]
이 점은 곧 주체로서의 생명 그리고 삶으로서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며,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의 생명 이해를 말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당연히 생명의 기원 문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것 또한 의미로서의 존재 이유를 캐는 문제로 귀착한다.
사물의 기원이 다 그렇지만 더구나 생명의 기원을 찾는 것은 인간의 혼에서 나오는 요구이기 때문에 의미적인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저에게 있어서 생명의 기원은 곧 자기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는 있으나 이 생의 맨 밑에서 솟아 나오는 염(念)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생명의 성격이 어떤 것이며 그 존재이유가 무엇임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전집9, 44쪽]
이와 함께 그는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성격 즉 현상으로서의 생명 이해가 주체적으로 파악되는 생명의 주요 특성, 예컨대 “자유에 향한 노력”이라든가, “비약성을 가진 것”이라는 점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특히 이러한 생물학이 생명의 존재이유에 대한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함을 통렬히 비판한다.
생물학에서도 생명의 특질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 현상적인 그것은 여기서도 단순히 이화학적(理化學的)인 설명을 할 뿐이다. 탄소․질소의 복잡한 분자식을 가진 것이라느니, 성장을 하는 점이라느니, 영양을 취하는 것이라느니, 생식을 하는 것이라느니 하는 등이다. 그러나 생명의 의미를 찾는 자에게 이는 동문서답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혼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보다도 왜 생명이란 자유에 향하는 노력이라 하지 않는가? 왜 생명이란 비약성을 가진 것이라 하지 않는가?... 지자(智者)의 우(愚)는 이런 것이다.
생명의 존재이유에 관하여는 생물학은 전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기원을 말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집9, 44-45쪽]
종교적 직관과 생명의 존재이유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문제의 답을 어디서 찾으려는가? 그는 여기서 성서의 기록에 눈을 돌린다.
「창세기」는 그 첫머리에서 이 우주와 만물이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생겼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곧 저는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창조를 하신 것이다. [전집9, 46쪽]
우리가 우주를 주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즉 우주 안에 주체적 의식을 지닌 그 무엇이 존재함이 분명하다면, 왜 이러한 주체적 존재는 우리 자신에만 그쳐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다시 우리보다 상위의 주체적 존재로 신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존재가 자신의 뜻대로 생명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정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사실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일종의 종교적 직관이다. 함석헌은 이 직관을 수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절대자가 스스로를 “한정하여 만물 속에 거하심”으로써 사랑이 발생했고, 이것이 곧 생명의 존재이유가 된다고 보고 있다.
절대자가 자기 스스로 즐겨 자신을 한정하여 만물 속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사랑이다. 자기가 만일 영원히 자기를 주장한다면 영원의 죽음이 있을 뿐이요, 생명은 없다. 생명은 자기가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포기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사랑의 도가 우주의 도다. 그러므로 생명의 기원은 이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에 있는 것이요, 그 존재이유도 이 아가페로써 일하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다. [전집9, 47쪽]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생명이 물질적 기반과 그 역사적 과정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정신의 세계 혹은 영성(靈性)의 세계가 출현함에 있어서 인간이 지닌 두뇌의 존재가 그 물질적 기반이 되고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포유류가 영장류(靈長類)를 내고 영장류가 뇌를 발달시킴에 의하여 한 새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뇌는 오직 그 세계의 터가 될 뿐이다. 그 세계를 정신의 세계 혹은 영성(靈性)의 세계라 한다면, 뇌는 그 정신 그 영성의 숙소에 지니지 않는다... 그것을 해부해보고 분석해보아도 종래 동물에 있던 신경중추와 아무 다른 것 없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눈은 모든 것을 가 볼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시험관 속과 저울판 위에는 아니 남아도 사실에 있어서 본능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떤 딴 것이, 물질로 붙잡을 수는 없는 어떤 것이, 새로 덧붙여진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어떤 새 것이야말로 새 세계에 통하는 길이므로 한도 있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생명의 자기 내부에 통하는 길이므로 무한이다. 전자가 조건에 복종하는 순응자였던 대신에 후자는 자유의 세계에 발원하는 자유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라는 일점에서 두 개의 세계가 연접함을 본다. 위에 있는 영계(靈界)와 아래 있는 육계(肉界)다. 어떻게 되어서 그 연락이 되는지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과연 흙으로 빚은 것 속에 신적인 것이 들어 있다. [전집9, 71-72쪽]
그는 이러한 정신 혹은 영성(靈性)의 출현이야말로 생명의 존재이유를 구현해 주는 중요한 역사적 전기를 이룬다고 보고 있다. 아무리 하느님이 사랑으로써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하더러도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사랑으로 보답해낼 존재가 없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이를 확보한 인간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제 생명의 역사의 여명기가 왔다.... 의식의 시대가 시작된다. 정신의 생활이 시작된다. 영의 나라에 길이 열리려 한다. 엿새 동안의 창조를 끝맺는 아담․하와의 창조가 되고, 저의 입으로 만물을 명명하고, 온 우주가 그의 생활내용이 되어 저가 만물을 거느리고 그에 대한 책임자로 스스로 짐을 지고, 조물주의 앞에 서서 생활의 첫 걸음을 힘있게 내놓는 날이 온다. [전집9, 73쪽]
이와 함께 함석헌은 생명의 존재론적 성격 특히 물질과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직관적 통찰을 시도한다.
생명의 생명된 점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요, 물질적인 것이 아닌 데 있다. 저울이나 자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바로 생명적인 것이 있다. 그렇게 말함은 반드시 생명이 물질에서 떨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지상에 있어서는 생명은 영원히 물질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물질 그것은 아니다. 마치 광명이 암흑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으나, 그러면서도 결코 암흑 중에 있지는 않는 것과 같다... 생명은 그 본질로는 있는 자나 역사적으로는 항상 있으려 하는 자다. 그리하여 있으려 하는 데서 물질이 나오고, 식물․동물이 나오고 세계가 나온다. [전집9, 78-79쪽]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생명을 물질과 본질적으로 상호배제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이른바 이원론적인 관점과 구분되는 것으로, 본질과 역사라는 두 측면을 지닌 일원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 본질로 보자면 생명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나, 그 있으려는 성격을 통해 물질이 나오고, 식물․동물이 나오고 세계가 나온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유심적 일원론과 흡사한 존재론을 편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앞에서 소개한 생명에 대한 온생명적 성격에 매우 가까운 주장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이란 말을 아무 분별 없이 써왔으나 생명은 일양한 것이 아니다. 생명은 평면적인 것, 공간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시간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바늘 끝의 한 방울 물에 그 세계를 가지는 미생물로부터 믿음으로 인하여 새로 나서, 부는 바람과 같이 그 오는 곳도 알 수 없고 가는 곳도 찾을 수 없는 영에까지 이르는 생명의 역사는 진화론자가 보는 것같이 직선적인 것도 아니지만, 또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아무 관계없이 고정한 같은 평면의 세계에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다. 서로서로 제각기의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도약에 의한 상승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계단적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최종의 계단이 인류에 의하여 도달되었다. 저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질을 이기려는 힘이 최후의 일약으로 영계를 향하여 양쪽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최상점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전집9, 79-80쪽]
함석헌의 관점에 의하면 이러한 생명은 인간의 출현으로 인해 “일약 영계를 향하여 양쪽 날개를 펼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으며, 이것을 그는 생명의 “최상점”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이 인간을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그의 인간 중시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그의 씨 사상과 연결되는 마디를 이룬다.
함석헌의 씨 사상
아마도 함석헌 사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용어는 그의 씨 개념일 것이다. 이 개념은 특히 민중 속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 및 사회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개념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라 또한 그의 생명사상과 깊은 연관 아래 도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선 이 개념이 어디서 유래하고 있는지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씨이란 말은 씨라는 말과 알이란 말을 한데 붙인 것입니다. 보통으로 말하면 종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빌어서 민(民)의 뜻으로 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쓰이지 않으나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씨",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에게 보내는 편지-, 107쪽]
여기서 보다시피 함석헌은 씨이라는 말 속에 그 본래의 뜻인 종자(種子)라는 의미와는 별 관계가 없는 새로운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쓰게 된 단 하나의 구실은 이것을 자신이 창안하지 않고 이미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일이 있는 전례를 따랐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사실은 내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유 영모 선생이 먼저 하신 것입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풀이하시는데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뭄에 있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오래 되어 말이 좀 틀린 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민(民)을 씨이라 하셨습니다. 참 좋아서 기회 있는 데로 써 와서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씨",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에게 보내는 편지-, 108쪽]
그렇다면 함석헌은 왜 굳이 이런 생소한 용어를 채택하여 자신의 핵심사상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사상이 지닌 독창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용어를 채택할 경우, 기존의 용어가 이미 지니고 있는 한정된 의미규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는 인간에 대해 그가 이해한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 내용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그가 도달한 인간 이해를 의미하며,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민(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씨을 단순한 민(民)이나 민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각성된 인간, 온생명으로서의 ‘나’와 낱생명으로서의 ‘나’를 겸비한 인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고 했을 때, 이 씨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생각하는 씨이라야 삽니다. 씨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씨입니다. 생각 못하면 쭉정이입니다.
씨의 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하늘은 한 얼입니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이요, 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들어야 합니다. 생각을 자꾸 좁혀 넣어야 이 듭니다.
은 물질 속에 와 있는 정신입니다. 유한 속에 와 있는 무한입니다.
시간 속에 와 있는 영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들면 삽니다. 반드시 삽니다.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에게 보내는 편지-, 120쪽]
이 글을 다시 새겨보면 씨은 온생명적으로 각성한 인간이며, 인간은 마땅히 이러한 씨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온생명에 대한 이해를 명시적으로 떠올린 일은 없으나, 생명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통해 이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이해 속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씨이란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이 글에서 온생명적 관점을 바탕으로 함석헌의 생명사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 고찰을 통해 우리는 함석헌 생명사상이 지닌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이해를 이해의 단위에 따라 온생명적 생명이해와 낱생명적 생명이해로 구분하고, 다시 주체와의 관계에 따라 객체적 생명 이해와 주체적 생명 이해로 구분한다면, 함석헌의 생명 이해는 생명의 우주적,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생명적 생명 이해에 접근하고 있으며, 또 그가 철저히 의미적 관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객체적 생명 이해보다는 주체적 생명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주로 낱생명의 관점에서 객체적으로 생명을 파악하려는 ‘생물학적’ 생명 이해와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관점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가 생물학적인 생명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생명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면에서 그는 물질과 생명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으며, 생명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파악함에 있어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오직 그가 강조하는 것은 생명을 물질적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편 그 자신 온생명은 물론 여타의 전체론적 생명관에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낱생명적 관점에서 벗어나 전체론적 이해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사상이 지닌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명 이해는 실천적 함의를 듬뿍 품고 있는 각성된 삶의 주체 곧 ‘씨’ 개념에서 커다란 결실이 맺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그의 생명 이해는 생명의 근원을 신의 창조에 근거 짓는 종교적 차원과 연결된다. 이는 물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 역사”라는 그의 논의 주제로 보아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그가 말하듯이 “이 생의 맨 밑에서 솟아 나오는 염(念)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의 성품의 일면을 반영하는 일이기도 하다.
1) 김경재 “삶과 신앙 안에서 피워올린 깊은 민중사관”,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교수신문 엮음, 생각의 나무 (2003), 제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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