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소리> 2001년 1-2월 3-4월
'씨알 교육자 함석헌' 서설 이 치 석 (씨알교육연구회 대표) |
우리는 요즈음 '붕괴'라는 용어가 학교현장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원래 '붕괴'의 붕(崩)은 산(山)이 무너지거나 임금이 죽었을 때 사용했던 중대한 말이다. 그 옛말을 빌어 쓸 만큼 오늘날 우리 교육 문제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교육개혁의 차원에서 차라리 '붕괴'를 바라는 편이 나은지, 아니면 그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를테면 공교육(公敎育)의 위기라는 것이다. 사실 지난 20세기는 충돌과 내전과 분할의 연속이었던 전쟁시대(戰爭時代)였다. 이 시대의 비극은 일제 식민지와 분단시대를 겪은 한국사회를 기형화(奇形化)한 실체였으므로 교육계도 그 기형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고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전쟁시대의 우리 교육이 교육답고, 교육자가 교육자다울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 진실이야 말로 지금 '붕괴'의 대상이 된 우리 교육에 대해 그것이 공교육이었던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심판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작 문제는 위기에 직면했다는 공교육이 아니라 위기의 본질에 대한 관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공교육이란 무엇인지, 그 개념과 이념에 대한 역사적이고 본질적인 진지한 논의와 합의가 거의 없었다고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교육이 단지 사(私)교육에 대해서 또는 정부가 주도한다는 교육이란 뜻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그 위기의 실체는 물론 공교육의 원천적인 의미와 전혀 차원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역사적으로 근대 공교육의 기원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大革命)에 있었다. 즉 혁명주체였던 피플 자신이 혁명의 계승 방법으로 인류사 최초의 보통학교를 창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공교육이란 피플(people)에 의한 피플을 위한 공화국(共和國)의 교육을 가리켰는데, 오늘날 초등교사를 가리키는 인스티튜터(l'instituteur)도 혁명이념을 교육이념으로 삼았던 새로운 공교육 제도의 책임자라는 뜻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근대의 신화(神話)를 가져온 그 피플의 언어도 역사도 없었다. 단지 조선왕조의 백성(百姓)들을 시대의 어둠 속으로 끌고 갔던 일제의 황국신민(皇國臣民)만이 생존했을 뿐이었다. 신민(臣民)과 '국민(國民)'이 태어난 것도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국민'은 1945년 8월에 해방되기는커녕,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에 정착한 민족국가의 주어가 되었으므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과거지향적 의식을 주입하고 있는 인식론적 기호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지난 100년간 우리 교육사를 지배하고 있는 '국민교육'은 역사적으로나 본질적으로 우리의 공교육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이라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다녔다는 교육자 함석헌(咸錫憲)의 '씨 교육'을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교육자는 스스로 세계통일보다 더 중대한 사명"을 "우주 생명의 진화를 위해" 씨 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때 씨 (民)은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을 찾기 위해 우리의 '나'를 찾기 위해" 찾아냈던 순수 우리말로서 자신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교육관의 핵심이자 '국민'과 전혀 다른 차원의 피플의 세계관으로 현재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공교육, 즉 국민교육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함석헌은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말았다고 고백했지만, 자신의 생애 절반까지 교육현장에서 민족교육과 씨름했던 오산학교 교사이자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었으며, 민주화(民主化)와 인권투쟁을 벌이던 생애 후반까지도 '큰 학교 주의'를 버리고 충청도 천안 골짜기에서 민족과 종교와 '참 자유하는 인간'을 하나로 살리는 고등공민학교 교사이자 운영자였다. 그러나 '씨 교육'은 오늘날 용어조차 희미한 형편이며, 지난 20세기 우리 교육현장을 지배했던 것은 남의 나라 표준이었다. 남의 나라라니, 미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전쟁시대를 지배했던 강대국들이란 말이다. 그 영향 때문에 지금은 아예 남의 나라에서 자기 자식을 가르치겠다는 풍조마저 생겨나고 말았다. 거기엔 소매상(小賣商)처럼 남의 나라 교육관이나 교육이론을 소개(紹介)하는 '소개학자'들의 몫도 아주 단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원인의 문제를 동기(動機)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는다면, 지금 위기에 직면했다는 공교육은 오히려 우리 교육의 정체성 회복을 희망하는 징조인지도 모른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베를 짜다가 잘못됐을 때는 북을 놓고 우선 올부터 골라야 하는 모양으로, 세상이 잘못됐을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방법적인 개선책을 버리고 역사의 올부터 골라야 한다. 올이 어디 있나, 씨 의 마음 속에 있다.……올이 바로 서면 씨 쓰기는 거저 먹기다. 그래서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 올의 말을 가지면서 그 실(實)을 못가지는 민족은 그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른바 공교육의 위기를 진단하는 무수한 설명들은 우리 교육의 올을 바로 찾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치 올을 끊어놓고 베 짜겠다는 계집같이' 처음부터 붕괴 자체가 없었던 일을 몰랐기 때문일까? 아울러 실패한 교육자 함석헌과 '씨 교육'은 지난 100년간 우리 교육을 지배했던 '국민교육'의 칼 때문에 잘려진 올이 아니었을까?
1. 청년교사 함석헌과 日帝時代
평양(平壤)에서 오산(五山)으로 우리가 우리 교육의 올을 바로하려던 교육자 함석헌을 재발견하려면 무엇보다도 오산 시절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의 한 줌 양심 노릇을 했던 지성인들로부터 언제 어디서나 "선생님"으로 불리웠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교육자 함석헌의 모습은 오산중학교 청년교사 시절을 빼놓을 수 없고, 또한 그가 청년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산학교를 다녔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 처음 당대 교육현실에 대해서 반성을 일으키게 한 것은 3·1운동이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자유·평등사상을 이념기반으로 하여 독립·정의·평화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가장 큰 민족운동이었는데, 그 날 시위에서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섰던 평양고등보통학교 학생 함석헌의 경험이야말로 장차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다녔다는 자신의 일생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의 운명 순간 자기 아내와 정사를 벌였던 신혼의 간디(M.Gandhi)가 느낀 수치스러움이 비폭력저항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처럼, 또한 미사 도중 발작을 일으켰던 23세의 수도사 마틴 루터(M.Luther)가 그 10년후에 95개조항을 교회 문에 못박았던 것처럼, 일본 군인의 '발길로 채여'버린 3·1운동의 경험도 비록 그 주위에선 특별한 관심을 끈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받아야 했던 충격은 함석헌에게 씨 교육자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사 위의 외로운 섬"이 되었다는 3·1운동이 당시에 성공했다면, 우리 공교육의 탄생은 역사적으로 훨씬 장엄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좌우간 함석헌은 그 사건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감독 아래 있던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을 자퇴하였다. 그 2년 후에 사립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로 편입했는데, 그것은 청년 함석헌이 처음 민족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평생의 스승 남강(南岡) 이승훈과 다석(多夕) 유영모의 인격 속에서 민족혼을 일깨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가 교육의 올을 바로 해서 인생의 씨 쓰기를 시작한 함석헌의 새 출발점이었다. 이와같이 평양고보의 자퇴는 그 기회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었으므로 선택의 방향은 그의 회고대로 '다행'스러웠던 것 같다. 이 때부터 그에겐 '생각하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까지 뜻하지도 않았던" 교육자(敎育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기 전까지 그는 의사(醫師)를 지망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청년 함석헌이 개인적 희망이었던 의사 지망이 좌절된 것은 세속적으로 비관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퇴한 지 2년간 수리조합의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으로 보내면서 "속이 썩을대로 썩었"기에 어린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서 같이 운 적"이 많았다고 하였다. 그 함석헌을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로 배출시킨 오산학교는 곧 조선 사람에 의해서 조선 사람을 위해서 교육을 했으므로 본질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 공교육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60년 후에 실패한 교육자 함석헌이 남강의 혼 앞에서 자신을 '죄인(罪人)'이라고 고백할 만큼 그 때의 감격은 매우 큰 것이었다. 우리는 '한글' '배달' '한배'라는 말을 오산학교에서 처음 배웠다는 청년 함석헌이 단순히 관립 평양고보에서 사립 오산학교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세계가 민족 밖에서 민족 안으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의 인격체요 분신(分身)으로 보였다. 남강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한국교육사에 길이 족적을 남긴 민족교육자였다. 1907년 단 7명의 학생으로 문을 연 오산학교는 초라했지만, 1919년 당시 사립고등보통학교 7개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남강의 민족교육 이념 덕분에 '한글'이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고 다녔던 함석헌은 식민지 관리 배양을 목적했던 관립학교의 정신적 분위기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경(東京)으로 갈 때 함석헌이 그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오산학교 교사로 돌아올 때까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한 교육은 일왕(日王)의 '칙령 제229호'였다. 이에 따라 1911년 8월에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제1차 조선교육령개정은 "교육칙어(敎育勅語)의 취지에 바탕을 두고 충량한 국민(國民)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그것은 일왕의 신민 육성과 실용주의 위주의 직업교육 방침을 뜻했다. 따라서 1910년 일한병합(倂合) 이후 약 10년간 관립학교의 교육은 '사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친일관리를 양성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교육체제의 유형은 약 300년간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된 인도의 교육제도가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하던 간디도 학생들에게 학교자퇴운동을 요구하면서 그것은 인도인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고 격렬하게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공교육이라고 강변했던 영국 제국주의처럼, 일제 조선총독부도 조선의 관립교육을 공교육이라고 세뇌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이 다녔던 평양고보도 일제의 관제(官制) 노예교육이 분명했지만, 만약 3·1운동과 관계없이 그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더라면, 그는 희망대로 의사가 되었을지 모르며, 설사 되지 않았더라도 일제 치하에서 관립학교의 졸업생들이 누렸을 사회적 특권만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만세사건이 나던 1919년에 함석헌은 5개 뿐이었던 관립고등보통학교 학생 중 한 명으로 당시 식민지 한국사회의 극소수 지식분자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동경고등사범학교로 간다. 왜 일본으로 유학을 하게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단지 '대학공부'를 위해서 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매우 중요한 교육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그 때 일제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대학이라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것은 함석헌이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던 1924년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이었던 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 중심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가 벌였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비록 타협주의적이었다고 해도 조선총독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족의식에 눈을 뜬 함석헌이 '대학공부'를 하러 일본에 간 것은 단순히 '대학공부'만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품고 간 것'이 있었다고 하였다. 품고 간 것이 아니라 그 씨를 먹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대학공부'를 하지 못하고 "두고 두고 한스러웠다"는 '사범(師範)공부'를 했다. 입학한 것을 '후회'한 일본의 사범학교는 제국주의 길을 가던 서구식 제도를 본따서 1886년 '사범학교령'에 따라 설립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함석헌이 '두고두고' 비판했던 국가주의 교육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즉 소학교(小學校) 교원의 양성이 목적이었던 사범학교는 제국주의 길로 나서던 일본이 가장 중시했던 교육의 하나였으므로 국가 전략 기구로서 정예군사를 양성하던 육군사관학교나 해군사관학교와 동일한 차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비 면제와 기숙사 제도 아래 군사훈련을 정식과목으로 정해서 출발한 사범교육은 '학술 기예를 교수하고, 심오한 진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된 대학(大學)과는 뚜렷하게 구별하였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생긴 일 물론 그것은 대학 입시생이었던 청년 함석헌의 실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발길'을 각오한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후회는 학문적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 실수와 후회는 식민지 조선의 일개 청년이 초월할 수 없었던 전쟁시대의 국가주의 교육제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제도를 알았다고 해도 민족의 장래를 걱정해서 교육자가 되겠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 길 밖에는 없었는지 모른다. 학문과 교육을 일체화시키고, 함석헌에게 개인적 욕망과 시대적 사명을 만족시켜 줄 만한 대학은 당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장래 때문에 미술가 대신 교육을 선택했던 만큼, 그 '후회'를 감수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고 본다. 또 '후회도' 했지만 후회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도 찾아" 거기서 일생의 친구가 된 김교신(金敎臣)을 만나고, 그 김교신 덕분에 또 하나의 스승인 우찌무라(內村監三)의 '성서연구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장차 '인생대학'을 드나들면서 "뵈는 것보다 뵈지 않는 뜻을 말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제2의 요람이었다. 그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생활에 대해선 단지 입학과 졸업 이외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고등사범학교 학생 함석헌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성서연구회'에 참석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에 70세로 생을 마감한 우찌무라의 말년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성서연구회'는 함석헌이 태어나던 1901년 3월부터 시작되었고, 그 시작 동기는 우찌무라 자신이 발행하던 <성서의 연구> 독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함석헌은 그 '성서연구회'에서 평소 희망했던 '대학공부'를 한 셈인데, 그것은 내심 '훈장질' 공부에 대한 반박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대학공부'가 교육적으로 함석헌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까닭은 바로 기독교를 통한 인류사와 문명사(文明史)에 대한 제2의 공교육의 공간이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가령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는 회고처럼, 비록 우찌무라 덕분이었지만 '종살이를 했더라도' 인식주체로서 기독교 신앙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체험한 것을 더할 나위없이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족의 차원을 넘어 인류사 차원의 시야에 접하게 된 기독교의 세계관은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는 문제도 어렵지 않게 종교적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민중사상과 민중운동이 출현하던 이른바 '다이쇼데모크라시(大正民主主義)'시대의 분위기에서 사회적 진보를 고민했던 사회주의와 '결별'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우리는 그 '결별'의 무게가 우찌무라를 존경하는 마음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믿고 있다. 즉 기독교 세계관의 안내자였던 우찌무라는 존경의 대상이었지 자신이 지향할 뻔했던 선택 대상은 아니었으며, 기독교 세계관과 사회주의 이념 사이에서 선택과 '결별'은 안내자의 무게와 또 다른 차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재일조선인 6,600여명이 학살된 사건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직접 조사할 정도로 동경유학생들을 흥분시켰던 민족의식을 소화시키고도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의 말년에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도 이 기독교 세계관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는 1928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식민지 조선에 돌아왔던 것이다.
오산중학교에 출현한 '도깨비' 그 다음 달, 마침내 '평안도 상놈'은 오산중학교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 나타났다. 감격스런 3·1운동이 어느 덧 10주년을 앞둔 해였다. 취임하는 날, 나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렇게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이 오산학교 관습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27세의 청년교사 함석헌의 취임사는 아프리카 랑바레네의 성자 슈바이처가 27세로 1902년에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에 관한 취임 강의와 또한 1855년에 역시 27세의 톨스토이가 세바스톨에서 만났던 어린 병사들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절대자, 무한히 베푸는 자'에 대한 '어떤 흥분'을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이 곧 자신의 교육관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성서조선(聖書朝鮮)>지(誌) 창간호에 실린 "먼저 그 의(義)를 구하라"를 비롯하여 약 50여편의 에세이들은 '주(主)' '선지자(先知者)' '구세주(救世主)' '하나님' '순교(殉敎)' '의인(義人)' '그리스도' '신앙(信仰)' '예수' 등의 주제들인데 이 청년교사의 교육이념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며, 또한 '선한 목자'의 인식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족교육을 위해 오산에 돌아온 청년교사 함석헌의 올은 '선한 목자'였으며, 그것은 20대의 엄청난 정열과 함께 '성서적'으로 아주 확고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치 이 날을 기다리기나 했듯이 그는 자신이 '성서의 연구' 모임에 처음 참가했을 때 들었던 예레미야를 조선의 '미래의 역사'를 위한 '선한 목자'의 본보기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 '도깨비'로 불리웠다. 학생들의 혜안이라고나 할까, 그 '도깨비'는 실로 도깨비 장난같다는 한국현대사와 동일체의 인생여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말대로 "도깨비가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서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도깨비가 생긴다"면, 그 무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깜깜한 어둠이요, 그 시대의 어둠 속이야말로 오산 '도깨비'의 활동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어린 양들같은 학생들이 그 '도깨비'를 통해서 자각한 것은 당대의 어둠과 함께 개인의 무의식적인 양심이었을 것이다. 보기를 들면, 금지된 우리말과 우리역사 수업을 변함없이 했다든가, 문제학생의 부모가 되어주었다든가, 문제를 일으킨 '진범'의 자수를 요구하며 학생들의 귀가를 불허하고 밤 12시까지 추운 교실의 칠판 앞에 서 있었다든가, 교무실에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들에게 붙잡혀 어이없게 매를 맞았을 때도 자기를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는 등등의 수많은 토막 이야기를 통해서다. 그런가 하면 불탄 오산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함석헌의 모습은 친구조차 숙연케 하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는 이 과정에서 교육 '기술자'로서 함석헌의 독특한 교사상(敎師像)을 발견하는 것 못지 않게, 기독교 세계관으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민족교육자의 '기술'에 놀라게 된다. 그리하여 만약 자기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서구 기독교 정신의 '선한 목자'가 학생들에게 '도깨비'로 투사되었다면, 그 '도깨비'의 특별한 영역 만큼 청년교사 함석헌의 어떤 독자적 세계관은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서'와 국가주의 교육 사이에서 갈등했던 자신의 과거를 자기 인격의 일부로 승화시키면서 20대 청년교사가 지향하는 강렬한 도덕적 순수성의 씨를 민족교육의 이념으로 살려낸 '교육기술자'의 비밀이었는지 모른다.
제2차 조선교육령 시행기와 '황금(黃金)' 그런데 1928년 4월부터 1938년 3월까지 그 '도깨비'의 출현 기간 10년간은 우연히도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을 형식상 문화주의 통치제제로 삼던 제2차 조선교육령개정 시행기와 일치하고 있었다. 문화주의 통치란 '내선공학(內鮮共學)'의 정신을 구실삼아 '조선인'을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만드는 이른바 동화주의 정책(la politique d'assimilation)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할 때 구사하던 교육정책으로서 정치적인 지배 방법 대신 문화적 유인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기간에 모든 교과와 교과서 내용을 일본의 우위성과 천황주권의 국가체제로 구성하여 조선인 학생들에게 세뇌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에선 일본인 교사가 집중 배치되었고, 이른바 공립고등보통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선 전체 교원 중 일본인 교사가 최소한 85%가 넘은 상태였으며, 보통학교 교과목의 경우 일본어가 36%나 되었고, 조선역사와 조선지리는 멸시적인 태도로 일본사와 일본지리에 예속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관립학교 교육은 이미 민족교육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난 때였다. 특히 1935년부터 질적으로 다른 이데올로기 공세가 시작되는데, 그것이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가 황민화정책의 하나로 각급 학교에서 시행한 심전개발(心田開發)과 국민정신(國民精神)운동이었다. 그 때 청년교사 함석헌은 개인적으로 "너희들! 똑똑히 정신 차려야 한다"면서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교육은 사실상 사립학교에서도 위기에 처한 상태였으며, 오히려 밖에서 진행되던 격렬한 식민지 해방투쟁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간회 결성과 해체, 조선공산당 사건, 광주학생운동, 원산총파업, 이봉창(李奉昌)의사의 히로히도 동경 폭살기도, 그리고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홍구공원 쾌거 등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 위기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회고대로 아직 '적극적인 투쟁' 대신 '소극적인 반항'을 시도할 정도였으며, 전체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사람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 10년간을 자신의 '황금시대'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기야 어두운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도깨비라면, 상상컨대 '도깨비'의 '황금시대'는 도리어 어둠의 시대를 말하는 당대의 역설(逆說)일 것이다. 따라서 그가 '황금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교실 밖에서 벌어진 민족의 해방투쟁에 무관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는 믿음과 또 '있는 것을 다 붓고 싶은 생각' 만큼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던 함석헌의 고뇌가 '조선'의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산중학교 역사 선생의 확신은 제2차 조선교육령 시기에 민족교육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시도했던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였는지 모른다. "스스로 자기를 속임없이는 유행식의 '영광스런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조선역사>는 역사의 올을 바로 놓으려던 민족교육의 이념을 살린 교과서였으며, 그 기조였던 '고난'과 평화는 '절대의 한 측면을 촉각'한 '선한 목자'의 지성(知性)이 20세기 전쟁시대와 전쟁한 역사의식이기도 하였다. 당시 정치풍경은 1929년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과 경제위기, 1930년의 극단적 국가주의를 강조한 나찌즘의 등장, 1934년의 이념과 동족상잔 때문에 얼룩진 스페인 내전 등으로 세계는 자기파괴의 공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간 국제정치의 역학에 중심을 잡고 있던 서구 유럽 국가들 대부분의 학교에선 극단적인 쇼비니즘과 잔혹한 전쟁 이야기로써 어린 학생들을 미래의 병사로 현혹시켰던 전쟁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분단과 내전 이후에 학교현장에서 자행된 반공(反共) 위주의 '국민교육'은 슬프게도 이 전쟁시대 서구 열강들의 교육이 버렸던 쓰레기였던 것이다. 좌우간 <조선역사>는 조선총독부의 제2차조선교육령 시행기에 나온 당시로서는 반체제 역사교재인 동시에 청년교사 함석헌의 교육관을 유감없이 보여준 본보기였다. 실제로, "엄청난 독단에 의하여 서술"된 <조선역사>는 "역사서(歷史書)로보다는 차라리 수필로 읽어야 할" 책일지 모르지만, "민족을 역사의 하담자(荷擔者)로 보는 점에서……큰 테두리에서 볼 때에 민족주의사학에 포함시켜서 좋다"는 이기백(李基白)의 평가처럼, <조선역사>는 어김없이 한권의 역사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원칙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뒤틀리고 도치되고 배반하고 그리고 덧칠해진 농간으로부터 그 자신이 책임지는 문체"라고 했을 때, <조선역사>의 본질은 '위대한 거장(巨匠)'으로서 재기하기 위해 함석헌 자신이 "어떤 진술의 결과에 도달한 하나의 행동"인 동시에 민족교육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현실 극복의 한 가지 방법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유영모의 '씨 '(民)이 함석헌이 발휘한 탁월한 교육기술의 문체를 통해서 이른바 '대자적(pour soi) 민중'으로 다시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안병무가 지적한 것처럼 '반역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조선역사>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우리의 집단자아(集團自我) '우리'를 '수동적 우리'에서 '능동적 우리'로 전환시킨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민족교육의 올을 바로 놓으려던 함석헌에겐 <조선역사>가 하나의 황금(黃金)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굴원(屈原)을 생각하면서 그러나 함석헌의 탁월한 민족교육 기술도 정치적 현실을 초월할 순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준비하던 일제 군부의 파시즘 체제와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 때문에 학교는 사실상 준군사기관(準軍事機關)으로 변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산중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제2차조선교육령 시행기가 끝나고 제3차조선교육령이 시행되던 1938년 3월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교육방침을 정하고 '대국민(大國民)'다운 전쟁교육을 획책하고 있을 때, 조선은 '반도의 히틀러'였던 학무국장 도끼사부로오(鹽原時三郞)에 의해 황국신민(皇國臣民)이 "한 시대의 상징어가 되어 시대를 체현하고 사회적으로 맹위를 떨친" 지역이었다." 때문에 학교현장과 지식인 사회는 '국체' 관념의 주입을 목적으로 조선교육회 중심의 심전개발(心田開發)운동의 연장선에서 일본사, 일본어, 수신과라는 교과목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전염시키고 있었다. 이 사이에 천황직속 비밀 기구였던 '교육심의회'에선 1941년 시행할 제4차 조선교육령이었던 '국민학교제(國民學校制)'를 준비했다. 그 직전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그 직후엔 참혹했던 징병, 징용, 여자정신대 등이 강요되었다. 즉 학교는 이미 학교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국민학교제'가 만들어놓은 학교관습은 오늘날도 그대로 학교현장의 중요한 표준이 되어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를 '교육의 파멸기'로 규정한 이만규로부터 당시의 교사들의 유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민족적 양심을 행동으로 옮긴 교사로부터 친일파 교사까지 5가지로 분류하였다. 그 첫 번째가 "강한 민족적 양심이 일본인의 제도에 굴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며, 일본어로 교육하라는 학무과 지시를 듣지 않고 교육계에서 떠난 이들이니, 오산중학의 함(咸) 모, 중앙중학의 문(文) 모가 이런 예였다"면서 이들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때 함석헌은 널리 알려진 민족교육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교육사에서 이 치욕스런 시절의 행태들은 거의 반성의 기회를 가진 적이 없었다. 사실, '교육의 파멸기'에 함석헌이 체험한 그 절망적인 상황은 그의 전 생애 동안 청산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하수인으로 학교 현장에 남아있던 교사들은 '국민학교' 명칭과 함께 해방을 맞이해서도 그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없이 그대로 교육현장을 지배했으며, 교육계 내부에선 그 과거 자체를 그 후에도 그들의 교육경력으로 인정하는 풍토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함석헌은 굴원의 '어부사(漁父詞)' 외우며 지냈다고 하였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재상을 지낸 선비로 불의(不義)의 시대를 원망하여 가슴에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인물이다. 진(秦)이 천하통일을 이루기 6년전의 일이었다. 함석헌이 현실을 고뇌하던 옛 지식인의 죽음을 생각하던 때는 바야흐로 제2차세계대전의 검은 폭풍이 태평양을 막 덮기 직전이었다. 그 전쟁준비에 광분하던 일제치하 마지막 10년간은 분단체제 이후 북한 지도부를 형성했던 "혁명적 민족주의자"가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것만"을 생각했던 "엄혹한 시기"였으며, 반대로 그 정치적 환경에 굴복했다가 줄곧 문제가 된 남한 사회의 친일파(親日派)가 집단적으로 출생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 혁명가도 되지 않았지만, 지조를 일제에 팔아버린 친일파도 되지 않았다. 그 3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오늘의 천만의 학자나 도덕가보다도 하나의 굴원이 있었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함석헌은 당시 평양에서 '송산농사학원'을 경영하기 시작했다가 '계우회(鷄友會)' 사건으로 1940년 8월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이어 1942년 5월에 <성서조선>지 사건으로 또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는데, 출옥 후 그는 교육자가 아니라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양지쪽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는" 식민지 백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짐작컨대, 개인적으로도 3·1운동 이후 약 20년만에 맞이한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오염된 직업을 버린(?) 후에 "손에 고랑을 차고 용암포 거리를 끌려가도 누구 하나 아는 척 하는 사람"도 없었던 그는 옥중에서 부친의 부음(訃音)을 들었고, "깊은 밤…남 못듣는 대화"를 하던 친구 김교신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후 <전집>을 관통하고 있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함석헌의 아름다운 겸손은 혹시 그 피맺힌 상처로부터 피어난 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청년교사 함석헌이 장년에 농사꾼으로 변신한 것처럼, '전체(全體)의 자리가 아니라 개인의 자리에서 생각하던 삶'도 결정적으로 반전(反轉)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한 굴원은 개인적 삶 때문에 세상을 등진 인물이 아니었으며, "똥통을 메고" 해방(解放)을 맞이했던 그가 신의주 학생사건의 책임을 지고 소련군에 의해 총살 직전까지 갔던 현실참여도 "전체에는 이용당해도" 좋다는 신념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함석헌의 생애는 이 '전체'라는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했으며, 그것은 "성냥 개피 하나를 훔쳤어도 인간 전체가 들러붙어서 한 일"이라는 뜻으로서 진실을 위조(僞造)한 국가주의 교육과 사상전(思想戰)을 벌이는 '씨 교육'의 역사적 참호(tranch )가 되었을 것이다. 과연 그 전체란 우주와 생명에 대한 어떤 신비가 아니었을까…….
2. 분단시대와 씨알교육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첫 교육자 그리하여 해방이 왔다. 때는 바야흐로 자신의 생애 후반기가 시작되던 1945년 8월, 자기 고향에서 '이방 사람'으로 맞이했던 해방은 그를 하루 아침에 시골 농사꾼에서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으로 돌변시켰다. 이런 파격적인 모습은 격렬한 감동과 흥분이 지배하는 해방공간의 집단의식이 자기 자신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여론에 따라 "열심으로……믿을만한 뜻있는 사람으로 교육진영을 짜려"고 노력했는데, 그것은 한국교육사상 최초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공교육의 신기원(新紀元)을 이룰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였을 것이다. 즉 한국사람에 의한, 한국사람을 위한 교육이념과 목표야말로 진짜 우리 공교육의 참다운 모습일테니까. 그렇지만 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의주 학생사건 책임자로서 하루 아침에 한낱 죄수(罪囚)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투옥 당시에 50일간 300여편의 시를 썼을 만큼, 민족교육자로서 우리 공교육의 미래를 전망하는 대신 거꾸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위한 긴박한 순간을 보낸 심정이 어떠했을까……. 오십지천명(五十知天命)의 언덕을 넘기 전에 넘어야 했던 자신의 생사선(生死線)이었을 것이다. 함석헌은 분단에 대해 "우리를 산채로 허리를 자른 것은 미국, 소련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이데올로기"였다고 지적하였는데, 그 자신이야말로 해방공간에서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첫 교육자였던 것이다. 당시 평안북도 문교부장의 교육정책을 좌절시킨 소련군과, 1946년 8월에 미국인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하겠다는 미군정(美軍政)의 군정령(軍政令) 제102호의 공통점은 다같이 이데올로기의 신민(臣民)을 목적했다는 점이었다. 하기야 그 사건들은 "우리 몸을 둘로 가르던 날도둑놈"들이 우리 교육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마각(馬脚)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우리는 근대 한국교육사 50년 이래 분단교육에 매달려왔던 것이다. 그 역사풍경 속에서 함석헌은 농사꾼에서 문교부장으로, 다시 문교부장이란 권좌에서 총살 직전의 정치범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한 후 아예 교육현장으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사선을 넘고 또 민족의 "자아분열의 선"을 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그 상처(traumatism)야말로 그에겐 '씨 교육'의 완결편을 위해 준비된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예컨대, 함석헌의 모든 글과 말이 하나같이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씨 교육'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역사>를 쓰던 오산학교 역사선생과 땅의 생명과 직접 대화를 나누던 농사꾼 시절로서는 그것을 결코 완결지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세 번째 사건이 바로 분단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자신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는 남강(南岡)을 배우기 전에 먼저 일제의 노예교육기관을 떠났으며, 황민화 교육의 절정기였던 '국민학교제' 이전에 먼저 '고난의 역사'를 썼으며, 그리고 '자아분열의 선'을 넘기 전에 먼저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교육자였다. 그 후 교육계로부터 아주 멀어져간 함석헌의 겉모습은 언론인, 인권운동가, 한국의 간디, 싸우는 평화주의자, 반정부 인사 혹은 재야인사 등으로 불리워졌지만, 그런 별칭들의 행진 속에서 함석헌의 속모습은 일반 교육자가 아닌 씨 교육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思想戰을 벌이던 言論人의 속모습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첫 교육자의 이름이 교육계에서 자취를 감춘 후, 그리고 '자아분열의 선'을 넘은 후, 씨 교육자 함석헌에게 붙은 첫 이름은 언론인이었다. 물론 언론을 통해서 한국기독교를 비판하였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종교문제를 취급하는 언론인의 전범(典範)이 분명했다. 이미 잘 알려졌다시피, 1956년 <사상계>에 발표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로 어느날 갑자기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계로부터 추방당한지 10년이 지났으면서도 교육자 함석헌의 본질적 기능은 전혀 상실되지 않았다는 심리학적 사실이 새삼스러운 바가 크다고 하겠다. 즉 '기독교인'이란 이름으로 교회(l'Eglise)를 <사상계>에다 붙잡아 놓고 "38선이 갈라진 불행을 당하고 교회는 어떻게 했나?"라면서 아이의 잘못을 혼내는 선생처럼 한국 기독교를 추궁하는 장면은 당대 언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며, 그 언론인의 속모습은 역시 변함없는 교육자의 풍모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가 아니었으면 교육자 함석헌은 남한 언론에 데뷔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만큼, 언론인 함석헌은 장준하의 작품이지만, 역시 장준하의 <사상계>가 남긴 작품은 교육자 함석헌의 사상계 뿐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상계>에서 빛을 낸 함석헌의 가치는 글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글보다는 시간 즉 타이밍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함석헌의 글과 말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 역사적 가치는 아마 그를 능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타이밍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전쟁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전에서 열전으로 바뀌었던 내전 때문에 당시 한국사회는 전쟁폭력이 허용된 공간이었다. 함석헌이 공격한 것은 이 사회적 공간을 외면하던 도덕적 집단이었던 것이다. 전쟁폭력이란 엄정하게 말해서 합의(consensus)된 집단정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 기독교만을 비판하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적 특수성 때문에 도리어 그 사회적 도덕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지적해 준 것이었다. 즉 전쟁을 치른 특수한 사회적 공간이 함석헌을 언론인으로 만든 조건이었던 만큼 교육자의 그 속모습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함석헌의 어떤 측면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경계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 해설의 특수성이 혹시 설명자 개인의 견해를 드러내기 위해서 함석헌을 빌린 것이 아니라면, 함석헌 발언의 타이밍과 무관하게 특별한 영역을 반복해서 강조한 설명자들의 함석헌론은 함석헌을 씨 과 격리시키는 허구적 선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려던 교육자였지 이리저리 설명이나 해보자는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 연장선에서 6·25 내전(內戰) 직후 언론인으로서 함석헌의 태도는 역시 그 실천성에 있었다. 가령 내전의 한 원인이었던 분단에 대해 "역사적으로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 된 것이라면, 그 원인을 치밀하게 연구해 밝히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전투적(戰鬪的) 실천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까닭에, 전투정신은 청년교사 시절부터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던 기독교 신앙일 수밖에 없었지만 반드시 기독교적이어야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내전에 처한 집단정신(la mentalit collective)의 동향에 대해 엄격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던 첫 언론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교육자 함석헌을 언론인으로 변모시킨 실체는 전쟁분위기였다. <사상계>는 교육자 함석헌을 교육계로부터 언론계로 이동시켜 주었을 뿐이다. 이렇게 정치적 발언으로 변모하던 그 절정은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10년전인 박정희 유신 시절로서 오늘날 그에게 붙어 다니는 재야인사나 인권운동가의 별칭들이 생기던 때였다. 그것은 교육을 정치적 도구로 삼던 금기를 깨어가던 과정이었다. 가령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언론인이 무색할 정도로 날카롭게 비판하신" 것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글이 발표되기 전에 지성(知性)을 대표한다는 유명한 <사상계>에서조차 그 전쟁의 비극을 거론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代)를 이어 전승되는 것은 집단의식의 형태라는 심리적 사실이은 과거 '황민화' 시절의 시대 조류에 편승했던 지식인들 덕분에(?) 증명받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과 분단과 내전(內戰) 이후 지식사회의 정신 풍토(風土)는 도리어 해방 이전의 '국민교육' 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하루 종일 밭에 나가서 일하는 부모 대신 조부모(祖父母)와 함께 지내는 옛날 농촌의 어린이가 젊은 자기 부모보다는 도리어 늙은 조부모를 닮는다는 경우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함석헌은 '국민교육'에 세뇌당했던 아버지들보다 이 역사의 아이들이 자라나는 정신풍토를 더 많은 사랑을 품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점에서 사상계에 대한 공격수로서 오산 '도깨비'를 발굴해서 '타고난 언론인'으로 만들어낸 <사상계>는 전후 미국 편향의 지성들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에겐 역사의 청소년을 위한 이른바 '사이버 교육공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좌우간 그 만남이 있은지 4년 후, 역사의 청소년들은 마침내 4월혁명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역사의 흑판에 쓴 함석헌의 문장은 그 감격의 크기 만큼 언론인의 모습보다는 교육자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4·19는 혁명이다! 4·19는 영원한 씨 의 숨이다. 4·19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새벽 '우리'의 청소년들은 갑자기 두목 박정희(朴正熙)를 앞세운 '도깨비떼'로부터 가격(加擊)당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쿠데타(coup d' tat)의 충격이었다. 이 때부터 군복(軍服)입은 그 사생아(私生兒)들의 총구 앞에서 <조선역사>의 '반역자'의 후손들은 끌려가기 시작했고, '우리' 청소년을 기르려던 한국교원노동조합(韓國敎員勞動組合)은 이 '도깨비떼'가 휘날리던 깃발 아래서 학살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 청소년들을 추방한 교육계는 '국민' 일색이 되었다. 비단 교육계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7년만에 이루어진 그 '국민'의 의식화(儀式化)의 절정을 이룬 것이 쿠데타 7년만에 이루어진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이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1968년 12월 5일에 선포된 이 헌장은 1890년 10월 20일에 공포된 일제의 '교육칙어(敎育勅語)' 복사판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대착오적인 헌장은 각급 학교와 언론을 통해서 역사의 청소년들에게 '국민교육' '국민의식, '국민정신'을 세뇌시켰으며, 특히 1970년부터는 각급 학교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한 교육이념이었던 것이다.
'國民敎育'과 싸우던 <씨알의 소리> 보다 심각한 것은 이 헌장을 만들었던 박정희 시대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박정희 다음 시대와 나아가 교육민주화를 선도했다는 일부 교육학자 중에서 아직도 이 '국민교육헌장'을 무슨 교육의 전범인양 애써 설명하는 반시대적 행위다. 아마 그런 현실 자체가 교육의 영향력을 역설(逆說)하는 낡은 본보기가 아닌가 한다. 물론 1996년 3월 1일자로 고쳐진 '초등학교' 이름처럼, 모든 교과서 표지 안에 실렸던 이 헌장은 어느 날 갑자기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 때 우리 모두의 교육이념처럼 강요되고 달달 외우던 교육지표를 없애버렸으면서도 없앴다는 사실조차 발표하지 않는 현실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한 그것을 알면서도, 그 이념의 선동에 앞장을 섰으면서도 오히려 그 헌장이 사라져버린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태도의 배경은 무엇 때문일까? 알 수 없다. 다만, 단순하게 대답하자면, 그런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자체가 우리의 교육이념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요, 그런 줄 알면서도 한 때 교육이념으로 선전할 수 있으리 만큼 우리 교육계엔 거짓말과 속임수가 횡행해왔다는 뜻이 아닐까? 아니면, '난데없는 도깨비떼'에게 홀렸을 만큼 그들의 이성과 지성은 헛깨비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좌우간 '국민교육헌장' 시절의 함석헌은 이순(耳順)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과 싸우는 '오산 도깨비'는 역사의 청년이었다. 민족교육자로서, 역사의 농사꾼으로서, 그리고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었던 반국가주의자로서 반민족적이며, 반시대적이며, 반인류적이었던 이 전쟁시대의 교육이념을 묵과한다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자기 생애 전부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육공간을 독점하고 있던 군사독재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알교육자 함석헌! 군사독재 18년간 재야인사(在野人士)와 인권운동가로 불리웠던 그 '도깨비'의 본질은 아무래도 청년교사 시절에 간직했던 '선한 목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언론계를 오산학교 교실과 동등시한 '선한 목자'의 실천행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난데없는 도깨비떼'에 의해서 점령당한 4월혁명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투쟁이었으며, 또 하나는 '우리' 청소년들을 포로로 잡고 있던 '국민'과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역사적 참호(塹壕)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1970년 4월 19일, 4월혁명 10년만에 은인자중하던 함석헌은 드디어 <씨 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씨 의 소리>야말로 '국민교육'과 싸우기로 결심한 함석헌의 의지였기에 단지 반정부 민주화운동의 글들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창간호부터 고고학적 설명을 한 '씨 '의 개념을 '국민'과 대비시켰던 것이며, 비록 함께 실린 글들이라고 하더라도 함석헌의 글은 차별성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우리' 청소년을 위한 '자기교육 기구'라고 선언한 이유도, 그 후 10년간 '씨 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디 그 편지 하나 뿐이랴마는……. 정말 놀랍게도, 이 헌장의 선포 이후, 삼선개헌(三選改憲), 비상사태 선포, 유신체제(維新體制)와 긴급조치 시대, 그리고 1979년 10·26사건으로 이어질 때까지, 박정희가 '극소수'라고 지적했던 반체제 인사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민교육헌장'의 이념과 가치에 대적(對敵)했던 교육자나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대한교육연합회(現 韓國敎總의 前身, 이하 대한교련)가 발행하던 <새교육>에는 '국민교육헌장' 홍보에 적극 참가하는 학자들의 대담과 발언이 줄을 잇댄 실정이었다. 당시 대한교련은 교육계를 지배하던 유일한 관변집단이었으며, 그 잡지에 등장하던 지식인들은 우리 교육계에서 내놓으라는 인물들이었다. 좌우간 이 국민교육헌장은 국회에서 야당마저 동조한 결과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단지 한글학자 최현배 정도만이 이 헌장에 대해 명백하게 반대를 표명한 상태였다. 심지어 오늘날 민주인사로 알려졌거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일부 지명도 높은 사람들조차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에 공감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정신태도는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일부 교육자들마저 계승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군사정권을 반민주적이라고 외치면서, 그 정권과 수명을 같이한 교육이념을 극찬했던 지식인들의 이율배반적이면서 비양심적인 행동들은 그 헌장을 사라지게 만든 현실에서도 아무런 반성이나 저항없이 새로운 교육관을 역설하는 주체의 일부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심지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른바 386세대들의 반민주적인 속모습에도 우리의 주의를 기울려볼만하다고 하겠다. '국민교육'이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군대식 교육현장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좌우간, '국민교육'을 향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돌진한 <씨 의 소리>는 박정희를 이은 전두환 군사독재 때문에 결국 1980년 5월 그 날의 광주를 따라 학살되었다. 그 후 학교현장은 '전인(全人)교육'이란 이름으로 병영화(兵營化)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앞장 섰던 교육자들은 물론 이에 저항하던 전교조(全敎組)마저도 이른바 공교육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과연 그들에게 공교육의 도덕성(道德性)이란 무엇일까?
정보화 시대의 교육이념과 '罪의 文化' '붕괴'를 맞이한 교육현장의 진공상태는 '국민교육'에만 한정할 일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참교육을 주장했던 전교조의 도덕성마저 의심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9년 6월 이른바 화성 씨랜드화재 사고로 많은 어린이가 희생되었을 때, 한 어린이를 구하려던 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친 일이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건의 정신적 배경은 이름만 바꾼 채 집단훈련을 강조한 과거 '국민교육'의 잔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건은 그 교사의 희생정신을 기리자는 취지를 전교조가 자기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참교육'의 깃발을 올렸던 전국교직원노조(全敎組)가 의문을 사기에 충분한 이 도덕성은 '씨 교육'의 도덕성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교육지표'라고 선언한 '국민교육'의 도덕성은 분단체제를 전제하고 있었다. "반공(反共)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은 '자아분열의 선(線)'을 국가의 선(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면가치이자 분열(分裂)의 관념이었다. 게다가 그 헌장의 해설자들이 인용한 인물들엔 유럽 역사가들이 동원되었는데, 특히 피히테의 민족주의와 헤겔의 국민정신(Volks Geist)이 동원되었다. 이들 독일인들의 논리가 그 헌장의 내용과 같다고 강조하였지만, 그것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별개로 따져야 할 일이며, 중요한 것은 '국민교육'이 기치로 내건 민족중흥과 반공이념이 학교현장과 우리 사회에서 세뇌시킨 것은 과거 트라이치케가 '유태인은 우리의 불행이다'라고 한 것처럼 '공산주의는 우리의 불행이다'라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것은 선언적으로 박정희 권력에 편승한 지식인들에 의해 합리적 사고를 배척한 하나의 종교적 신화(神話)가 되었으므로 이런 세뇌교육과 진실의 부재(不在)가 가리키는 것은 정치적 미신(迷信)의 절대화 현상을 불러온 교육현장의 반교육성(反敎育性)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치적 도구의 하나였던 '국민교육'은 박정희의 절대권력과 반공주의 아래서 제식(祭式)의 종교처럼 무속적이고 환상적인 심리현상으로 인한 정신적 유치성과 자기찬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현상을 비판하면 함석헌이 비판했던 보복과 단속과 엄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분열의 관념으로 무장된 '국민교육'이 분단시대와 산업화 과정에서 기계적인 세계관을 강요한 것이라면, 반대로 '씨 교육'은 벌써부터 새 시대를 전망한 생명교육을 말하고 있었다. 즉 씨 의 유기체적 관계성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가장 결여하고 있는……진정한 공동체 훈련이며, 공동체적 삶의 존재방식"으로서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합리적인 사고 훈련을 지속하되 존재의 세계를 유기체적 연관구조의 그물망으로 보도록 하는 근대 이후의 세계관에 어울리는 정보화 시대의 교육이념"이었으므로 '씨 교육'의 이념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유기체적 관계성을 파괴하던 구시대(舊時代)의 정치적 미신에 사로잡혔던 '국민교육'의 비합리적 집단주의와 전선(戰線)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며, 나아가 '국민교육'의 기계적 질서가 빚어낸 사회의 내면적 아나키 현상에 대해 희망적인 처방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과거 전쟁시대의 복사판인 '국민교육'에 비하면 씨 사상을 통해서 우리 교육이념의 도덕성을 입헌적으로 제공한 '씨 교육'은 이제 그 자신이 벌써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양차대전 사이에 이미 컴퓨터의 등장을 예견했던 신부(神父)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표현을 빌린다면, 인류 가족의 평화시대를 준비하는 오늘날엔 도리어 "과거의 비젼"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또 인류적으로 모든 낡은 껍질과 찌꺼기를 청산해버리고 새 우주적인 시대를 여는 교육은 씨 에게 돌아가는 태도로만 될 수 있다.……씨 은 과거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거기서의 비약이다. 그 비약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가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생명교육(生命敎育)의 문마저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되고 시행되던 박정희 독재시절엔 개인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개별적인 상호관계에서 합리적인 사회질서의 형성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국민교육'과 싸우는 일이 되었다. 이에 비하면, 함석헌의 <씨 의 소리>는 매우 공격적었으며, 그 공격의 목표가 단순한 반정부나 민주화운동 차원이 아니라 한국의 지평을 보다 넓힌 세계의 시간과 인류의 평화 차원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全泰一)을 추모하는 일과, 비폭력 저항을 통해서 인도(印度) 독립운동을 해온 마하트마 간디를 기념했던 일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고 본다. 그 배경은 교육자 함석헌이 60년간 <성서조선> <영단> <성서연구> <말씀> <사상계> <부산모임> <친우회보> 그리고 <씨 의 소리>에서 한결같이 강조했던 기독교 세계관 차원의 죄 또는 속죄의식(贖罪意識)에서 그 도덕성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즉 '씨 교육'의 도덕성은 개인의 내면적 양심(良心)이 도덕적 행동의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문화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죄(罪)의 문화'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명동사건'으로 불리우는 1976년 3·1구국선언 사건도 75세였던 함석헌의 경우엔 단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일개 정치적 저항 수준이 아니라, "여러분이 보라고" 입었던 '굵은 베옷'을 통해서 죄 문제를 사회적 도덕의 극치로 삼은데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외재적(外在的) 권위를 앞세워 도덕적 행동을 '수치심(羞恥心)'으로 규제하던 '국민교육'의 도덕성과도 다르지만, 비록 '참교육'의 깃발을 들었더라도 역시 깃발은 그 나아가는 방향과 역방향으로 펄럭인다는 원리에 매여 있는 전교조의 집단주의 도덕성과도 또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왜 도덕 선생들만 모인 자리에서도 담배 꽁초는 버려져있다고 하지 않던가?
戰爭時代와 戰爭한 씨알교육 그 수치문화의 도덕성은 곧 20세기 전쟁시대가 배경이었으며, 그 배경 때문에 국가주의 교육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공교육을 말한다는 것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교육'으로 포장된 '국민교육'이 곧 국가주의 교육이며, 국가주의 교육의 결정판은 대량학살을 저지르던 전쟁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흔히 장관이 바뀌면 교육정책이 달라진다는 말은 마치 신발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隔靴搔 )처럼, 하나도 시원치가 않다. 솔직히 문제의 본질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장관 뒤엔 대통령이 있고, 대통령 뒤엔 국가가 있으며, 그 국가 뒤엔 국가주의가 있으므로 국가주의 교육의 청산없이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똑같은 말로 남에게 말하듯 불평하는 것 자체가 과거 '국민교육'의 소산인지 모른다. 거기엔 자신들의 책임의식이 간과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분단 이후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국민교육'에 대한 불평이란 것이 그 '국민'의 수준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며, 지식인들 특히 교육학자들도 이 문제와 관련된 근원적인 처방을 제시한 적이 거의 없었다. 20세기 전쟁시대와 관련해서 우리 교육의 이념 문제와 처방을 낸 경우는 오직 함석헌 뿐이었다. 예외적으로 함석헌 서거 후에도 교육계 내부의 저항을 무릅쓰고 이 문제를 전국적으로 제기한 경우는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곤 없었다. 전쟁시대! 함석헌의 삶이 시작되던 1901년부터 100년간은 전쟁폭력의 세계화가 진행되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우연히도 노벨평화상이 출현해서 존속하던 기간과 일치하고 있다. 이와같이 전쟁시대에 자신의 일생을 보내야 했던 함석헌은 과연 이 전쟁폭력 문제를 비껴간 적이 없었다. 전쟁폭력! 그것이야말로 함석헌의 표현을 빌린다면 '고난'의 인류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잠시 20세기 전쟁을 살펴보면, 그 숫자 하나만 갖고도 그 폭력의 현장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령,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날마다 각각 1300명과 900명씩 죽어야 했던 제1차 세계전쟁 때 교전국 전사자는 민간인을 제외한 군인만 약 1,000만명, 부상자수는 그 2배인 2,000만명에 이르렀다. 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라진 사람은 약 6,000만명인데, 대다수가 민간인으로 알려졌다. 그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1945년에 끝났지만, 토플러(A.Toffler)는 그 20세기 후반을 '전후(戰後)라고 일컫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즉 1945년부터 1990년까지 45년간 총 2340주(週) 중에서 전쟁이 전혀 없었던 기간은 단지 3주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사이에 민간인을 포함하여 모두 4,000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으므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단순하게 말해서, 지난 세기에 1억 2,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 숫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은 붙었지만 정신적 육체적 자유를 잃어버린 삶의 고통이야말로 인류의 고난을 여지없이 웅변해주는 것이었다. 그 폭력의 세계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분단과 냉전과 6·25 열전을 겪었고, 지금도 이른바 휴전상태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에 따른 희생을 치르고 있는 만큼, 함석헌이 고난의 역사라고 불렀던 한국의 역사는 이 전쟁폭력의 세계화 속에서 세계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함석헌은 이 전쟁을 국가주의의 타락이란 관점에서 보았다. 그래서 "국가없이 일어나는 전쟁이 있어요?"하고 되묻고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형편에 대해서 앨빈 토플러의 지적보다 훨씬 명쾌하고 간략하게 "지금 전쟁은 양편이 다 내 나라와 적국 국민을 이중으로 속이면서 영구히 서로 지배주의를 계속하기를 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그것이 씨 을 국가와 대립시킨 이유일 것이다. 즉 "지금 있는 것은 표리 양면으로 전쟁과 평화를 의논해가면서 세계 도처의 씨 들을 지배·착취하는 지배집단들과 그런 줄 알면서도 전면적 혼란이란 것 하나가 무서운 생각에 그 지배와 착취에 견디어가며 고민하고 있는 씨 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지배관계의 청산과 씨 의 정신적, 역사적 해방이야말로 인류 차원에서 말하는 '씨알교육'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전쟁 폭력의 의미는 무엇일까? 함석헌은 '혼(魂)의 힘'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았으며, 인류 역사 자체도 "뵈지 않는 혼의 힘이 어떻게 체력, 곧 폭력을 이겨내나 하는 기록"이라면서 "이제 우리가 하자는 교육은 이 교육"이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실제로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함석헌의 발언들은 전쟁의 폭력성과 씨 의 자기교육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간디의 길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공간을 벗어난 함석헌에 대한 설명들은 그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에 이 인류의 상처로부터 도망칠 사람은 당대에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석헌 역시 그 폭력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그 폭력성에 대해 외면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폭력을 빼놓고 함석헌의 평화주의(平和主義) 사상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학교교육과 학교문화(學校文化)를 지배했던 전쟁시대의 '국민교육'을 빼놓고 함석헌의 교육사상을 언급하는 것은 엄청난 넌센스일 것이다. 그럴수록 그 문장은 선언적이 될 것이며, 지식인들의 설명 때문에 함석헌은 도리어 씨 로부터 고립될지도 모른다. 아울러 '국민교육' 시대를 보낸 함석헌의 삶을 돌이켜 보면, '씨 교육'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교육철학도 아니요, 그렇다고 남이 생각한 것을 슬쩍 베낀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함석헌의 '몸'이며, 그 '몸'이 체험한 정신세계이자 교육사상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전쟁시대의 밤과 싸웠던 실천 교육자 함석헌의 교육사상은 한국의 시간에 제한받는 일부 교육소매상의 교육이론이 아니라 전쟁시대의 청산을 통해서 인류 전체의 구원을 전망(vision)하는 세계의 시간(le Temps du monde) 속에 있다고 하겠다.
나가는 글
현실적으로 교육자 함석헌의 실패는 개인적 비극 뿐만이 아니라 20세기 전쟁시대를 겪었던 기형적인 우리 교육사의 비극을 의미하였다. 오늘날 '공교육의 위기'의 근원은 그 전쟁시대의 교육인 국가주의 교육의 청산이 때늦은데 있는 만큼, 그 기형적인 우리 공교육의 올을 바로 놓기 위해 함석헌 스스로 '인스티튜터'로서 육화(肉化)된 '씨 교육'이 아니고선 공교육의 개념과 이념과 전망은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겨우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 '씨 교육자' 함석헌의 서설(序說)만 말하고 있을 따름이란 것이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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