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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려(律呂)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열두가지 메모


- 김 지 하 -


발제에 앞서 허망감이랄까 아쉬움 비슷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두 가지다. 하나는 지식인들과 종교인들 사이에 터부처럼 굳어져 있는 완강한 민족 부정이다. 일본 극우파의 재무부 소동과 미국 매파들의 제휴, 중국과 북한의 민족주의적 군사 돌출과 남한 정부의 지리멸렬, 그리고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민족 해체 조짐과 담론 부재의 적막강산 속에서도 유독 민족담론이라면 옥석 구분 없이 극도의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기이한 민족허무주의에 대한 우려. 또 하나는 마치 자본주의 속도생산 구조처럼 끊임없이 신상품을 찍어내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학시장의 덧없음에 대한 회의감이다. 첫 번째는 나의 오늘의 발제를 쇼비니즘으로 몰아 전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고, 두 번째는 긴 호흡이 필요한 율려 운동을 한때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부질없는 유행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이 발제에서 이상의 두 가지 위험을 가로질러가야 한다. 아마도 매우 힘들 것 같다. 여러분이 애써 돕지 않는다면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론으로 겉돌 가능성마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도한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은 바로 19세기 한반도 상황과 흡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 살면서 또한 대전환기의 흑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발제는 논리적 기승전결의 체제를 취하지 않는다. '율려 신학'이란 다만 내 뇌리에 떠오른 개혁적 담론일 뿐, 그 윤곽조차 모호하며 가능성은 더욱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모 형태의 단편적․분산적 접근법을 택한다. 가능하다면 확충법(擴充法)의 나선적 접근을 시도하겠으나 아마도 역부족인 듯싶다.


1.

기독교의 신학 토착화 문제는 여러 현명한 신학자들의 선진적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 전혀 제로상태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이것은 가히 한국 기독교 신학의 스캔들이다. 기독교 스스로 한국 신학의 담론 식민지상태를 장기간 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달리 이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정신에 대한 범죄적 거역이라고까지 생각될 수 있다. 가톨릭 문명사 쪽의 애기이긴 하나, 중국이나 한국에서의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등장은 세계사 전체의 대변혁을 가능케 할 수 있으므로 애써 이 방면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2.

그러나 새로운 신학 정립에 있어 그 한국 사상 쪽의 파트너십을 국수적 민족주의로 좁히는 일체의  경향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또 그런 경향들은 모두 실패했다. 다만 우주시대, 지구시대의 열린 민족담론에 대응해야 할 줄 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 또한 그 파트너십이 예컨대 유학의 경우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가운데 주리(主理)쪽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노력들 또한 그리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이른바 성(誠)이나 신(信) 중심의 로고스주의 신학 토착화가 그  예증들이다. 이제 도리어 주기(主氣)쪽, 그보다 더 나아가 '카오스기(氣)' 즉 '혼원지기(混元之氣)'나 '지기(至氣)' 측면을 선택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특히 아시아의 고대 회복이라는 동양적 카오스 우주론과 관련이 깊다. 요컨대 한국이나 동양의 그 어떤 사상과 접합만 했다고 해서 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동양, 특히 한국사상사 속에서 토착된 전 세계사, 전 우주사의 카오스적 대변동의 자취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


3.

세계사가 그렇지만, 동양사 특히 한국사 역시 지금이 바로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終萬物 始萬物, 즉 새로운 문화와 문명 창조의 땅으로서, '간태합덕(艮兌合德)' 곧 아메리카에서 절정에 이른 서양 문명의 정신의 진수와 합덕하고 중국과 일본의 보필을 받아 세계와 우주를 바꾸는 데 변혁의 첫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는 다름 아닌 ‘한 번 간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無往不復之理․周易)인 것이니, 약 5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先天開闢, 곧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출현 이후 최대 최고의 오메가  포인트에서 폭발하는 우주 에너지의 창조적 벡타가 바로 이 땅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 때에 드러나는 고대의 원형, 이 때에 출현하는 후천 세상, 후천 문화의 핵심이 무엇일까? 만약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면 바로 그것과의 파트너십 위에서 새로운 아시아와 한국의 새 담론, 즉 세계와 지구와 우주를 향하여 활짝 열린 민족담론의 가장 신령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 부위로서의 새 신학이 태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확신이다.


4.

목하 세계사는 인간 내면의 황폐와 사회경제적 대 불황 및 침체 그리고 지구 생태계 오염과 주변 우주의 기상이변이라는 세 층위의 대 혼돈(빅 카오스)에 대하여 인간․사회․자연의 天地人과 같은 세 차원을 관통하는 통일적 담론의 출현과 그에 자극되고 계발되는 우주적 신령과학 또는 신령한 혼돈학의 창조에 의해 대 문명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아우성 앞에 부딪쳐 있다. 이 절대적 요구에 대응하여 세계 지식인들의 눈은 동아시아 삼국에로 모아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무엇이 창조될 것인가? 지금 오늘의 발제는  이 흐름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 흐름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 신학과 무슨 관계를 갖는 것인가?


5.

다시 강조하지만 세계와 인류 그리고 주변 우주의 운명은  인간 내면의 큰 우주적 神性의 자기 성취에 있고 그것을 통해서 아시아와 한국 기독교 신학이 동양과 서양 문명, 문화 사이에 창조적인 제3원의 실천적 다리를 놓느냐 못 놓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아시아와 한국의 기독교 신학은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한가지 조언을 하겠는데  1879년부터 1885년 사이에 체험되고 정립되고 전개 공표된 김일부(金一夫)의  正易을 주의해 보기 바란다. 정역은 여러분의 경우, 즉 중차대할 바로  그 한국 신학을 정립하려는 여러분에게 가장 핵심적인 신비과학적 비전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역이 후천역(後天易), 후천개벽의 동양과학임은 잘 알려진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선천시대의 중국민족 역이요, 문자에 한정된 로고스와 코스모스 역이자 제왕과 군자 중심의 수직적 통치철학, 조화의 우주론인 주역에 대비하여 한국과 전 인류의 후천 우주역이요 만물의 역이자 민중의 역, 여성역, 청년역, 미래역이며 카오스역이자 神化易, 즉 깨달음과 신령한 직관의 과학임을 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역의 淵源은 공자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며 그 내력은 3천년간 덕을 쌓은 한민족의 조상 즉 고조선의 仙人들이다. 그런데 이 정역이 오늘 우리의 시대 경륜과 우주적 대 문명 변혁 및 인류 신령의 성취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은 한국과 미국의 합덕에 의해 새 문명을 건설한다는 시대 경륜과 無極․太極․量極 또는 天地人의 三極之道, 즉 고대 한민족의 근원 사상인 天符經을 바탕으로 유불선을 통합한 정역이 바로 그 우주 경영의 신령한 파트너로서 후천적 기독교와 깊이 맞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乾策數216과 坤策數144가 合하여 후천개벽曆인 360일이 된다는 것이니, 乾策數가 바로 한반도의 정역運이라면 坤策數가 바로 예수와 후천 기독교의 신비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렇게 건곤(정역․기독교)이 합덕하고 간태(한국․미국)가 합일해서 이루어지는 후천의 대유리세매라는 큰 변화의 본질과 그 운동의 모습이 무엇이냐에 있다. 그 변화의 體는 量極 또는 皇中人 즉 新人間, 신령한 우주적 인간, 聖人이니, 곧 弘益人間이요, 그 用은 律呂 또는 呂律, 곧 새로운 우주적 禮學이며 다름 아닌 理化 世界의 바로 그 理化인 것이다. 드디어 律呂 얘기가 나왔다. 우선 율려를  禮學이라고 했을 때 정역은 새로운 禮가 艮方 즉 한반도에서 탄생한다면 새로운 樂이 兌方 즉 미국에서 창조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 정확히 말해서 후천적 예술문화가 미국과 후천적 기독교에 의해 창조된다면 후천적 한국 민족담론에 의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과연 그런가? 여기에 그 순위나 지리적 창조 조건에 대한 역설이 바로 律呂를 도처에서 呂律이라고 뒤집어 부르는 정역의 기이한 終始規, 表裏規, 內外規, 倒逆規 등에 숨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 속의 미국, 혁신적 민족담론 속의 후천 기독교 신학과 律呂, 아니 정확히 말해서 呂律의 창조적 전개가 깊이 관련된다는 얘기다.


6.

이러한 정역의 律呂사상의 깊은 의미를 더 상세히 이해하자면 우선 漢書 律歷志이후 禮記, 樂記 篇이나 律呂新書 그리고 우리 조선조의 樂學軌範 등에 나타난 율려規를 약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약하자면 律呂는 12계절이나 5행과 같은 우주의 변화와 그 질서요, 그것이 실현되는 인간의 마음과 몸 그리고 사회 및 지구의 질서와 그 변화의 이치다. 율려는 모든 계량과 척도요 도량형의 기초다. 그리고 그 율려는 그 율려 중의 宮音 또는 本音 즉 중심음에 의해 조절되고 변혁된다. 율려의 본음이 흔들리면 세계질서에 혼란이 온다고 보았다.

3-4천년 전 중국 중심의 우주론에서는 그 율려의 중심음이 黃鐘이었다. 황종은 남성, 하늘, 陽, 제왕이요, 중국민족이며 로고스요 코스모스다. 이 황종척에 의해 세상을 다스리고 조절하고 변혁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황종이 지금과 같은 카오스 시대, 만인 성인의 성령시대, 민족 민중의 평등과 해방시대, 생태학과 지구적 환경운동의 가이아시대, 에로스와 페미니즘의 시대, 그리고 고대 부활의 우로보로스적 원 카오스 문화와 자기회기적 시간의 때에도 여전히 중심음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오늘의 중심음 또는 본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이 변화하는 후천우주, 고대 부활의 카오스시대에 율려와 그 본음을 찾아야 그것에 기초한 음악 예술로 인간의 마음과 몸을 다스려 병을 치유하고 나아가 사회적 예절과 도덕을 개조하고 또 나아가 그에 맞게 이론과 과학을 정립하여 정치․경제․사회 제도를 혁파하며 지구 생태계를 회복시키고 주변 우주질서를 재조정할 것이 아닌가?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찾는 것이 1년 전 율려학회를 시작했을 때에 세운 나의 목표요 과제였다.


7.

나라와 천하가 망하려면 먼저 음악과 시문학과 춤이 썩고 음탕해지고 폭력적으로 된다고 동양 고전들은  말한다. 그 역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크게 세상을 위해 뜻을 세운 자, 즉 聖人은 먼저 우주의 변화와 인간의 심신의 변화의 독특한 상관관계를 짚어 새 음악을 만든다. 곧 律呂다. 이것으로 병든 인간 사회, 자연 즉 모든 제도들을 고치고 혁파한다. 지금의 지구와 주변 우주, 지금의 인류, 지금의 우리 민족과 주변 민족들, 지금의 나 개인의 몸과 마음, 과연 건강한가? 행복한가? 우주 질서에  일치하고 있는가? 만약  일치하지 않고 소외되고 병들었다면 사회질병설에서와 같이 온갖 모순과 구조적 결합과 문화적 퇴폐를, 그리고 전지구적 생명파괴를, 우주절기의 뒤틀림을 하나의 크고 깊은 질병으로 본다면 그 질병은 치유할 의학  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바로 律呂다. 한의학과 동의학에서는 최고의 수승한 치유의 경지를 律呂라고 부른다. 강증산은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퇴폐한  민생 속에서 그래도 다가오는 후천개벽 천지공사를 집행하기 위해 치유 즉 의통, 의학으로서의 律呂운동을 제기했고, 그 律呂가 곧 세상을 통치한다고 공언했다. 이 말은 율려, 음악과 우주의 소리, 즉 天符가 세상을 다스렸던 고대의 평온과 생생화화의 화해로운 우주공동체, 하느님의 직접 통치가 되살아남, 바로 원시반본을 말해 가르킨 것이다.

律呂와 신학과의 관계를 모색함은 인간, 사회, 자연의 질병을 치유하는 의통, 의학으로서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하프트'로서 모든 것을 변혁시킴이요, 건강이라는 이름의 성스러운 평화에 이르게 함이며 고대의 하느님 직접 통치를 이 세상에 회복하려 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전 지구화하는 정보화의  핵심 내용으로서의 영적인 깊이에서 솟는 문화적 창의력으로부터 새 정치, 새 경제, 새 사회, 새 지구의 비전이 나와야 한다는 공론이 형성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리고 그 핵심원리로서 우주 사회적 공공성, 즉 하느님 마음인 天地公心이 시민 공공성의 핵심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환상적 요구가 아닌 것이다.


8.

현대의 카오스 우주시대에 있어서의 율려의 중심음, 본음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구체적 율려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탈중심, 다핵, 개체화, 분산, 해체, 다층위의 잡종적 운동시대, 비평형의 개방시대, 무한계열화, 복잡화의 시대에도 의연히 우주와 영과 몸의 중심음이 있는가? 있다면, 또 그것을 찾아 확립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화적 억압체제가 아닐 것인가? 율려학회의 논의는 분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결론에 도달했고 그쯤에서 우리는 중심음 논의를 종결했다. 그리고 그때 중심음 개념을 바탕음, 또는 본음으로 수정했다.

동양, 한국음악 특히 鄕樂, 신라 이래의 正樂 표준으로 보아 새 시대의 우주 본음, 바탕음은 바로 '黃鐘 자리에 들어가 있는 來鐘'이며, 그것이 다시 散調의 이른바 '本音'이란 것 속에서 끊임없이 분산, 복잡화하고 운동하며 계열화, 이동하는 속에 촉매하고 기축을 지키는, 움직이는 음들의 저마다의 속에 깔려 있는 한 바탕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黃鐘이 코스모스요 陽이요 남성이라면, 來鐘은 카오스요 陰이요 여성이다. 고로 '코스모스 자리에 들어간 카오스'이니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의 용어로 말한다면 '카오스모스' 또는 '카오이드' 또는 '카오스모시스'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양식 율려 또는 혼돈학은 바로 이 점에서 한계에 노출된다.

'黃鐘的 來鐘' '來鐘的 黃鐘' 또는 달리 말해서 乾坤, 天地, 陰陽, 여성성과 남성성, 카오스와 코스모스간의 二元的 상관은 제3의 주체적 생성, 즉 창조적 생성이라는 새 차원에서 '내면적 무궁 우주적인 삶의 창조'라는 성스러움을 획득해야만 치유의 의통이 되고, 혁명이 되고 개벽이 되며 '하프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天地와 율려의 주체인 사람의 聖性이 핵심이다. 그래서 天符經은 '人中天地一'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지점이 아마도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위치일 것이다. 이것을 나는 전통 민족 민중 미학적 개념으로 ‘흰 그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인간, 皇中人, 皇極, 홍익인간, 신령한 우주인간인 것이고, 이것이 바로 律呂, 理化世界이니 더 정확히 말해서 律呂인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陰이고 律은 陽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神化律呂, 神律呂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최고 미의식은 ‘흰’ ‘빛’ ‘광명’에 있다. ‘빛나는 그늘’ ‘흰 그늘’이다. 그늘이 바로 天地요 율려다.

바로 이것이다. 律呂 神學이 가능하려면 바로 이 지점에 착안해야 한다. 새 시대의 음악으로서의 카오스모스 정도로는 부족하다. 비틀즈나 스톡하우젠이나 제임스 조이스나 프루스토로는 부족하다. 거기 聖性이 실체가 아닌 무궁한 우주적 삶의 내면적 상상이 없다. 神人의 탄생 말이다. 오로지 '신령한 카오스모스'라야 한다. 그 신령함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변증법적 종합이 전혀 아니다. '아니다와 그렇다'. '不然期然', 즉 來鐘과 黃鐘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易' 변화의 그 드러난 차원 밑에서 숨겨진 질서, 근원적 차원으로서 숨어 움직이며 그 변화를 견인, 추동, 비판, 창조, 변화시키다가 오메가 포인트의 도래와 함께 차원 변화하여 마침내 새로운 드러난 질서로 현현하는, 즉 '레벨레이션', '계시'되는 새 차원, 제3의 신령 무궁한 내면성의 창조적 생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그 사람의 활동으로 생성 실현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드러난 차원간의 종합인 합명제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창조적 생성을 대강 말하여 律呂라고 통칭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마음과 몸, 사회, 지구, 지구 주변의 우주 질서의 뒤틀린 질병을 치유하여 변혁시킬 것이다. 사람과 세계의 치유와 변혁으로서의 율려요, 신령한 주체의 문화적 구원활동으로서의 율려다.

 

9.

성경은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민족 최고의 고대경전인 符都誌는 '律呂가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말씀은 그야말로 로고스요 코스모스다. 그러나 律呂는 카오스이면서 코스모스요, 파토스이면서 로고스다. 생명의 파라독스다. 그것은 해체, 분산, 복잡화, 탈중심, 개성화, 특히 여성성의 중심으로 되면서도 남성성이 배합되는 균형, 수평적 균형이 아닌 산 균형, '기우뚱한 균형'이다.

律呂는 우주의 소리, 天符의 本音의 생성인데, 그 안에 말씀을 포함한다. 그 생성 즉 音이며 神氣와 그 이치 즉 易數이며 理가 天符經 81字의 내용이며 天符經은 동시에 律呂 자체다. 天符經은 먼저 생성하는 신령한 카오스의 音의 체계이며 音으로부터 易數가 나오고 그 易數로부터 의미 즉 코스모스와 로고스의 말씀이 나온다.

 

10.

律呂가 天地를 창조한 첫 케이스가 1만4천년 전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에 있었다는 인류 시원의 문명인 麻姑城이다. 그리고 麻姑城의 주인이 최초의 영적 우주적 인간 즉 홍익인간인 麻姑다. 麻姑는 바로 그 시원인 1만4천년 안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즉 데카르트적인 홍익인간, 사유 인간의 5만년의 느린 진화의

역사를 함축한 최초의 신령한 우주적 인간, 홍익인간, 신 인간의 역사적 초과달성으로서의 원형이요, 원형적인 사회 및 우주적 생성의 삶의 시초다. 그리고 우리 민족과 온 인류의 영적 시원이다. 5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마고인간, 홍익인간 사이에는 수 차례의 '朕世(我世)'가 있고 몇 차례의 율려의 상실과 부활이 있다. 이같은 先後天의 반복에 대한 신학적, 신비과학적 검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반성인간과 우주적 영적 인간의 겹치기 출현의 비밀이 해명될 것이다.

麻姑의 이야기가 서쪽 수메르로 흘러가 에덴의 이야기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와 우리 민족의 원형적 신화가 되었다. 왜냐하면 포도를 먹고 병이 드는 '五味의 變'이야말로 善惡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병이 들고 민족이 갈라져 흩어지며, 우주의 신령한 율려가 바로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가 근원과 새 것을 서쪽에서 찾듯이, 서양인들이 그것을 동방, 오리엔트에서 구하는 것은 인류의 근원과 회복해야 할 고대가 바로 중앙아시아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마고의 후손인 黃穹氏가 天山에서 돌이 되면서까지 맹세했던 '麻姑複本', 마고성의 원형회복을 민족의 집단적 誓願으로 세운 독특한 민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년호인 '多勿'도 바로 '複本' 즉 원시반본을 뜻한다. 민족은 위기에 부딪치고 그것을 극복할 때마다 '麻姑複本'을 피흘리며 외쳤고 上古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항몽투쟁기의 一然과 李承休가 그랬고, 19세기의 崔濟愚와 金一夫와 姜甑山이 또한 그랬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그 과정에 있다.

지구 중력권 중심인 織女星과 태양계 중심인 南斗六星과 은하계 중심인 北斗七星의 三星이 直列하여 찬란하게 빛남으로써 민족과 인류에게 처음으로 삼신사상과 유목민적 우주관의 기원인 카오스적인 3元사상, 3極사상, 天地人사상, 또는 天符사상, 그리고 律呂사상을 잉태케 한 우주적인 파동과 조화의 대질서, 즉 '신령한 카오스모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 세계, 율려 세계를 '흰 그늘'의 아름다움의 때, ' '과 '한'의 때라 부른다. 태양이 높이 떠 밝게 빛나던 시절이다.

민족은 이제 위기 앞에서 다시금 '마고를 찾아' 고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새 질서의 비전을 찾아내 민족과 인류의 미래를 열려 함이다. 한국의 기독교 신학은 에덴을 회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을 마고를 찾는 우리의 '인류적-민족적-개인적'원형 회복 투쟁의 신비로 바꾸고 토착화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열리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새로운 호혜시장으로서의 神市, 전원일치적 새 직접민주주의로서의 和白, 초자연과 자연, 주관과 객관, 환상과 현실, 주체와 타자, 그리고 미래 인류 세계화의 문화적 삶의 모형인 다양한 정착적 노마디슴, 지역적 정착성과 세계적 이동성의 새로운 정착 유목적 삶의 이중적 비전을 고조선 사회에서 찾는 기쁜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민족 개개인의 다양한 집단 무의식의 표상으로서의 단군, '멀티단군'과 상고사의 올바른 회복을 위해 전민족의 노력을 통해서 비로서 열리게 될 것이다. 마고와 신사와 화백, 풍류와 정착적 노마디슴의 탁월한 비전이 16세, 17세 청소년과 젊은 지식인을 자극하여 꿈과 낭만에 찬 고대 열풍을 불러오려면 잘못된 상고사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그 문이 열린다. 이 모든 과정이 시작과 중간과 그 끝이 다 율려요, 율려 사상이요, 율려 문화요, 율려 운동이다.

 

11.

마고 시대의 율려는 呂律이었다. 그 비율은 6律 6呂와 6呂 6律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8呂 4律이다. 참으로 '기우뚱한 呂律'의 균형이다. 여성성이 인류와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파우스트의 외침은 헛소리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제부터 우리가 회복하고 재창조해야 하는 新麻姑文化의 呂律의 本音원리다. 남녀동권이

나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수평적 균형은 남성지배, 로고스와 코스모스 지배, 聖人과 국가와 법률과 종교가 성립되었던 질서와 조화의 理法 시대로부터 시작된 한정된 가치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 균형이요, 죽은 관념 속의 균형이지 살아있는 역동적 균형이 아니다. 살아있는 우주 생명의 균형은 언제나 기우뚱한 균형, 八呂四律의 律呂, 아니 呂律의 역동적 균형이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곳은 언제나 두 곳 뿐이다. 깊은 우주 무의식까지 들어가는 초월 명상 즉 원형을 찾는 마고 회복의 율려 명상과 마고성이 있던 흰 눈 덮인 天山 아래의 포도밭과 푸른 초원의 트루판, 그 중앙아시아 고대로의 르네상스 물결을 통해서 뿐이다.

우리의 갈 길, 빛나는 미래를 열기 위해 1만 4천년 전 고대의 마고로 돌아가자. '그리하여 그로부터 빛나는 미래를 열자.' 이 여행의 선두를 율려 신학이 인도하고 이 여행이 민족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참가로 이루어질 때 한국의 율려 신학은 艮兌合德과 乾坤二策과 더불어 인류와 세계를 근원에서 개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통일은 그때 수월한 덤으로 떨어진다.

 

12.

우리 민족은 본디 詠歌舞蹈 民族이다. 律呂는 맨 먼저 춤추고 노래부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우리 마음과 몸 속에 있는 神氣 즉 律呂가 움직이는 것이다. 노래와 춤, 미리 정해진 틀이 없이 명상과 호흡 끝에 내지르는 소리와 춤 속에 하늘이 말씀하고 神이 뜀뛴다. 한님, '한', 하느님은 天과 地와 人으로, 셋으로 나뉘되 다시 하나로 귀일한다. 그래서 三位一體로 생성한다. 그것이 곧 창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모든 울타리를 치워버리고 고정관념과 틀과 이치와 이념과 지식과 모든 담벼락과 민족 차별과 계급 차등과 지역 차이를 모두 치워버려야 한다. 허허한 빈 벌판, 텅 빈 거리에서 바가지 하나로 無碍舞를 춤추던 元曉스님처럼 다 비워버리고 함께 어울려 춤출 때 숨겨진 차원, 그 깊은 우주의 카오스로부터 터져 오르는 天地人의 새 말씀 즉 '한'님의 소리, 하느님의 산 소리, 바로 '한'이요, '셋'이요, '둘'이라는 天符本音이 있을 것이다. 생명의 율려다.

율려의 원리는 '無-化三'이다. 이것은 天府經의 중심 테마이며 아마도 八呂四律과 함께 律呂 神學 구성의 중요한 기본 원리가 될 것이다. 새 한님이 거기 나타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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