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려 사상의 신학적 의미와 평가
김지하 시인의 「율려 신학 가능성에 관한 열두가지 메모」를 읽고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한국 신학계에 대한 김지하 시인의 일침은 실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민중 부정과 서구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는 신학의 속도감 넘치는 모방력이 그것이다. 우리들 중에는 기독교만큼 한국 민족의 고난에 적극 개입한 종교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구원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민족 고난이었을 뿐 한 번도 민족의 주체적 역량 그 자체가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고려 된 적이 드물었다. 해서 시인은 신상품 개발에만 몰두하는 한국 신학계가 율려사상을 한때의 신학적 재료로 사용하다 관심을 옮겨갈 것에 우려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율려사상은 신학의 재료가 아니라 신학의 본질 그 자체인 바, 율려신학의 등장으로 세계의 대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신학자들이 거론하던 토착화는 이제 율려신학의 이름 하에 동서 문명을 새롭게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율려신학은 소위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하는 역 오리엔탈리즘을 거부한다. 그것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전혀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상 힘을 받아 온 주리론(主理論)보다도 주기론(主氣論)속에서 로고스 중심의 윤리 체계로부터 물리 세계의 카오스(至氣))에 주목하도록 권한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가 돌아가야 할 동양적 우주론(율려)의 모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율려신학의 담론 속에는 이렇듯 우주 및 문명 역사의 전환을 시대 필연적으로 인식하는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이 주체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룬다는 기독교적 종말론과도 다르며 객관적 우주 질서를 필연적으로 보고 변함없는 질서에 인간 삶을 맞추어 온 주역의 참찬론과도 입장을 달리한다. 우주사 전체의 대변혁이란 모진 고통을 감내하고 삭힌 인간, 곧 우주의 마음을 회복한 인간들에 의해 우주 자체가 바뀌어 진다는 후천개벽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바뀌면 우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천지공심 사상은 정역으로 일컬어지는 순수 민족 담론의 핵심으로서 시인이 오래 전부터 깊이 관심하고 있는 주제이다.
김시인은 오늘날 요청되는 영성적 인간, 곧 자신 속에서 우주를 보며, 우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이러한 우주적 휴머니즘의 비젼을 찾기 위해 동양의 고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가 정역에서부터 시작하여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깊이 연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러한 한국사 및 한국적 정치사, 종교사 속에서 전 우주의 대변혁의 흔적을 예감하는 것이야말로 율려신학의 근본 명제라고 하겠다.
주지하듯 정역은 비괘(否卦 / )중심의 주역과 달리 건곤의 위치가 뒤바꾸어진 태괘(泰卦, / )를 근간으로 하는바, 지난 3천년간 성인, 제왕들이 여성, 민중, 소인들을 지배해 온 군주 중심 역사를 바로 잡는, 소위 창조적 원시반본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反者道之動', 되돌아가는 것이 道의 운동이라는 노자 도덕경의 말처럼, 혹은 주역의 '無往不復之理'가 지시하듯 양의 사유가 극에 이르르게 될 때 음을 위하여 그 자리를 비워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5만년을 이어온 호모사피엔스의 역사(선천 개벽)가 지금 임계점에 이르러 새로운 인간 출현(후천 개벽)을 고대하고 있는데, 이 비젼을 한국 민족사의 고대 원형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김시인의 확신인 것이다. 다시 한번 코스모스에 대한 카오스, 로고스에 대한 깨달음, 직관이, 군주에 대해 민중이, 남성에 대해 여성이, 현재에 대한 미래를 중심에 놓은 정역은 후천개벽사상을 담은 그릇, 곧 동양 과학(동도동기)이라는 것이다.
김시인은 일부의 말을 인용하여 정역의 심원은 공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때의 하느님은 결코 어떤 지역, 이념 등에 제한된 존재일 수 없으며, 동서고금을 초월하는 분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반도가 정역의 운수라고 한다면 정역과 서구 기독교가 함께 만나 우주적 휴머니즘, 우주적 영성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한국이 서구 기독교 세계와 만나서 동서 문명을 재창출하는 데에 한국 기독교 신학의 역할이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김시인은 東道西器를 넘어선 東道東器論이 장차 同道同器論으로 전개 발전되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동서문명을 막론하고 문명의 발생지가 중앙아시아 마고성이었다는 공간적․지리적 관심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아무튼 이러한 일을 위해 한국 기독교 신학이 아시아 고대 원형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율려사상이 언급될 자리도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유승국 선생에 의하면 律呂는 본래 예술계 뿐 아니라 정치․사회․과학․교육 전반에 흐르는 문화의 중심 개념이라고 한다. 율려는 반드시 황극이라는 개념과 짝을 이루는데 황극이 體로서 비가시적 본체를 의미한다면, 율려는 用으로서 그것의 가시적 작용(氣의 세계)이라는 것이다. 본질이 있어야 작용이 있듯이 황극이 없다면 율려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황극을 태극이라고도 언명되는바, 이 太자가 사람의 깊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발음이듯이, 너무 커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궁극적 개념(太極而無極)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太極이 동시에 인간의 극치인 人極, 인간의 본래성을 찾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극에 이르면 너와나, 동서고금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간이 이런 본성대로 살 때 나오는 현상이 바로 율려, 우주적 인간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질서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인데, 이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음(音)으로 표현되고, 악(樂)으로 조직화되어 나타나는바, 바로 이러한 동양의 음악 구조를 율려라고 하는 것이다. 선천의 세계를 지배해 온 정치 사상 중 그 핵심에는 바로 율려가 자리하는데, 바로 음악에 나타난 우주와 인간 사이의 관계 변화를 통해서만 사회․문화를 포함한 우주사 전체의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성인이란 우주 변화와 인간 변화의 상관관계를 짚어 새로운 음악, 율려를 만드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김시인은 우주적 휴머니즘, 영성적 인간(성인)을 발견하기 위해 먼저 동양 고대의 기본음, 바탕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주역의 건괘, 곧 천존지비를 근간으로 하는 중국적 율려인 황종과 달리 향간들에 나타난 한국적 바탕음을 김시인은 협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코스모스(질서)의 자리에 들어가 카오스로서 황종적 협종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카오스적인 무질서한 음을 뜻하는 협종이 여기서 황종을 대신하여 주가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황종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와 더불어 제3의 창조적 생성을 이루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곧 남성성과 여성성, 몸과 마음(두뇌), 빛과 그늘 그리고 카오스와 코스모스 등의 종전의 이원적 관계가 협종으로 인해 전혀 새 차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태극과 황극을 함께 포함한 수운의 신체험, 음양과 삼재 사상을 결합시킨 천부경 속에서 새로운 율려의 징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시인은 황종적 협종을 단지 서구식의 변증법적 통합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문명의 극에 이르러 숨겨졌던 새 차원의 드러남(계시)인바, 거룩한 인간 내면성의 성성(聖性)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 내면성의 창조, 곧 신인간(홍익인간)이란 우주적 주체로서 비인격적 주체까지도 품어 안고 그와 소통하면서 공진화 해가는 존재로서 천지공심을 본질로 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천지공심이란 차원 변화의 임계점에 이르른 내면 의식으로서 창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신적 존재의 삶의 양태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김시인이 인간 중심에 天地가 통일되어 있다는 '人中天地一'의 천부경 사상이야말로 인간이 우주를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우주적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신인간의 출현이 우주적 그리스도로서 이해되는 것은 샤르뎅식 신학에 익숙한 김시인에게 있어서 당연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신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율려 운동은 이제 理化世界로서 언표 되어진다. 이화세계란 우주 변화의 새로운 이치를 가지고서 세계를 치유하고 변화시켜 피조물들을 탄식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서 김시인은 이화세계를 위한 율려운동을 접화군생(接化群生)이란 말로서 부언 설명한다. 접화군생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 우주 만물과 사귀어서 감동 감화시키고 변화시켜서 그것 모두를 완성시켜 내는 우주적 생명 운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 운동으로서의 접화군생은 천부경 속에 정신적 토대를 두고 있으며, 그 흐름이 풍류도, 정역 그리고 동학, 증산 사상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김시인의 새로운 발견이자 확신이다. 여하튼 우주적 영성을 지닌 신인간은 접화군생을 통해 이화세계를 이루어 나가며, 이로써 몸․사회․지구․우주 질서의 뒤틀림이 고쳐질 수 있다는 믿음이 흘러 넘치고 있다.
김시인은 이러한 율려, 천지를 창조한 우주의 소리가 시작된 시공간적 지평을 1만 4천년전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마고성으로 본다. 따라서 마고성의 인간을 최초의 영적 인간이라고도 확신한다. 인류 최초의 중앙아시아 마고의 신화가 서쪽으로는 에덴의 이야기가 되고 동쪽으로는 민족의 원형적 신화가 되었던 바, 이들 모두는 최초의 인류 비극이 동서를 막론하고 우주의 신령한 율려가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사라져 버린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마고성의 원형 회복을 위해 힘써 온 흔적을 갖고 있다. 민족과 인류에게 삼신 사상․삼재 사상․천부 사상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황종적 협종, 혼돈적 질서로서 율려는 이들 사상의 원근거인 것이다. 그래서 김시인은 에덴을 회복하려 하기보다는 마고성 속에 담겨 있는 인류적․민족적․개인적 원형(우주적 휴머니즘)을 회복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토착화 과제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파미르 고원의 마고성은 우주 씨앗으로 불리워지는 인류의 집단적 무의식의 영역이자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깊은 정신적 지평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동도서기를 비판하며 동도동기를 말했던 시인이 또 다시 同道同器의 담론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즉 정역과 기독교, 미학적 창조력과 서구과학, 그리고 한국과 미국 등이 만나 후천개벽, 이화세계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의 한국적 토착화, 곧 율려신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고성의 神市는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는 위대한 우주 문화, 참된 세계화의 전형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김시인의 율려 신학 담론에 대해 몇 가지 토론 거리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현시점을 문명의 임계점으로 인식하는 김시인과 달리 향후 21세기는 생명공학이 주도하는, 즉 아직도 양적 사유의 분량이 많이 남아 있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주지하듯 생명공학은 생명의 본질 자체를 해체시켜 전혀 새로운 유기체를 만들려 하는 일종의 발생술인데 자연 및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새 사유 체계를 밑바탕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예컨대 정보산업을 토대로 한 생명공학은 생명체가 지닐 수 있는 미래적 특성을 프로그램화해서 그것이 자연이 스스로를 조작하는 방법과 일치를 이룬다는 확신 하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체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주고 그 유기체로 하여금 인공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기체의 유전적 명령을 조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생명공학을 밑바탕으로 하여 전개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의 현실을 문명의 임계점이라고 하는 그 판단이 임의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둘째로, 김시인께서 말하는 이화세계, 접화군생은 우주적 영성을 지닌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생명 운동을 뜻한다.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용어로서 이러한 새 인간의 활동을 신학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생명 운동은 일방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비인격적인 것까지도 품어 안고 공진화 해 가는 주체로서의 신인간을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러한 신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주내의 온갖 존재들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과소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묻고 싶다. 실제로 자연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을 행하는 미물들의 활약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Gaia 이론)
셋째로, 여기서는 몇 가지 신학적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율려신학, 同道同器論 등의 이름 하에 김시인께서 한국 신학계에 던진 화두와 그 상상력에 깊은 감동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율려신학은 종래의 신학적 토대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드는 파장을 갖고 있기에 선뜻 다가서기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김시인의 율려신학은 --한끝을 상정하고 神의 재림을 믿어온 기독교 종말관 대신에 동양의 원시반본사상, 곧 순환적 진화의 역사철학을 말하고 있다. 인류 문명의 임계점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새로운 문명의 출발(질적 확산)이지 문명 자체의 끝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김시인은 종말론적 예수 또는 재림주의 개념을 율려신학의 틀 속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때의 우주적 그리스도는 우주적 영성을 지닌 새로운 인간의 출현, 역사의 끝에 이르러 드러난 인간의 내면성(천지 공심)을 뜻하는 것으로 역사 초월성을 결여하는 듯이 보인다. 그의 하느님개념 역시 人中天地一의 천부경의 언어로, 또한 삼일신고에 기록된바 하늘이 인간의 뇌 속에 내려와 살고 있다는 말로 해명되고 있다. 즉 인간의 명상, 뇌호흡 등을 통하여 뇌기능의 심화확대가 신적 의식과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김시인이 강조하는 신체 중심이면서 두뇌 중심적 인간의 전형적 모습(정기신)으로 생각되는데 아마도 기독교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상의 질문은 좀 더 심도 있는 토론을 위해 필자가 의도적으로 제기한 것인바, 필자로서는" 김시인의 문제의식을 신학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에 일단 깊이 관심 한다. 그 동안 동도서기론, 오리엔탈리즘 등의 이론에 빠져 있던 우리가 진실로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은 당위로 다가온다. 일부의 정역, 수운, 해월, 증산의 종교체험, 풍류도, 삼일신고, 천부경에 이르는 민족의 정신적 실체가 황종적 협종(무질서 속의 질서)속에 있다는 문명사적 통찰은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해서 우주적 영성을 지닌 새 인간이 한국적 토양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창하는 김시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싶다. 이점에서 기독교의 하느님과 정역의 하느님이 같은 분이라면 한국의 기독교가 민족의 정신사 속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재구성 할 수도 있다고 보인다. 해서 東道東器論을 인류 보편적인 同道同器論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중앙아시아 마고성의 이야기는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아직까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못하는 듯 싶다. 민족 역사에 대한 무지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하는가?
단군상 문제로 그 본질을 드러낸 한국 기독교계의 보수성이 어쩌면 율려신학이란 말 자체를 입에 담지도 못하게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김시인의 제안은 단군을 비신화화시키고 재역사화하여 민족 문화의 본질을 공론화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율려신학 논쟁은 이제 한국 기독교 학계가 떠맡아야 할 뜨거운 감자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
'마리선녀 이야기 > 마리선녀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념론 [觀念論, idealism] (0) | 2006.12.25 |
---|---|
형이상학 [形而上學, metaphysics] (0) | 2006.12.25 |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윤구병) (0) | 2006.12.21 |
골치 안 아픈 철학 이야기(윤구병) (0) | 2006.12.21 |
율려신학의 가능성(김지하) (0) | 2006.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