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 끝없이 샘솟는 의문
맑게 갠 가을 날 밤하늘을 쳐다보세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지요? 이 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몇십 억, 몇백 억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별이 우리 눈에 보이게 되기까지 그 별빛은 빛의 속도로 몇십 억, 몇백 억 년 동안 허공을 가로질러 왔고, 그 별빛이 우리 눈에 닿는 순간, 또는 닿기 전에 이미 그 별은 우주 속에서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과연 이 우주에는 끝이 있을까요? 만일 우주에 끝이 있다면 우주 밖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크기를 가진 물체는 무엇이나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몸은 무수히 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들은 무수히 많은 화학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 화학 물질들은 무수히 많은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소립자들을 또 나누면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는 모든 물질이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봄철에 들판에 나가보면 민들레 씨앗들이 산들거리는 봄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그치면 아무리 가벼운 솜털도 결국에는 무게 때문에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무게를 가진 모든 것이 결국에는 공중에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중력의 법칙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저 시냇가에서 있는 미루나무를 보세요. 어느새 저렇게 하늘 높이 발돋움했을까요? 무게를 가진 모든 것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구의 중심을 향한다는데, 저 나무는 어떻게 해서 중력의 법칙에 반대해서 하늘로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천체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지금부터 약 50억 년 전쯤에는 소용돌이치는 불덩어리였던 것이 차츰 식어서 굳어지면서 지구의 모습을 갖추고, 햇볕과 우주선과 탄산가스 같은 것이 한데 섞여 화학 변화를 일으켜서 최초로 단백질이 합성되고, 이 단백질에서 생명체가 나타나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상의 삼라 만상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부터 몇천 년 전에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이 우주와 지구와 지구 위의 삼라 만상과 그 삼라 만상을 지배하는 인간을 창조해 낸 것일까요?
몇 해 전에 중학교 3학년 학생이 고민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난 일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나에게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항상 나에게 친구와 사귀지 말라는 슬픈 말만 하시는 분……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있고 행복한 거잖아?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이 글에는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많은 낱말들(철학자들은 이 낱말들을 개념이라고 부릅니다)이 들어있습니다. 이 학생이 "난 인간인데"라고 말할 때 의 '인간'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또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또 인생관이나 가치관이라는 말로 이 학생은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을까요? 더 나아가서 이 학생은 삶을 소중하다고 느끼면서도 왜 죽음을 택했을까요?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거기에 대비되는 죽음이란 또 무엇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개똥밭에 굴러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 고 생각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가치 없는 삶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까요?
이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의문이 샘솟게 되는데, 모든 종교와 윤리와 철학 사상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바른 대답을 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앎에 대한 사랑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 아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느냐? 이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대화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시겠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둘 다 알려고 들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를 터이니 무엇인가를 알려고 들 턱이 없을 것이고, 모든 것에 대해서 환히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알고자 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를 알려고 애쓰는 사람, 다시 말하면, 앎을 얻고자 애쓰는 사람, 곧 앎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기에서 '철학'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번역한 말인데, 이 필로소피아 라는 말은 '필로스(사랑)'와 '소피아(앎)'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필로소피아, 곧 철학은 앎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앎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라는 질문을 '철학자는 누구일까요?'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앎을 사랑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곧, 자기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배워 왔습니다. 말도 배우고, 걸음마도 배우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법도 배우고, 헤아리는 법도 배웠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비밀을 전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기도 곤란합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것은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알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가 앎을 사랑하는 사람, 곧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끊임없이 모르는 것을 새로 배워 알게 된다고 해서 우리를 철학자로 부르는 사람은 없으니,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앎의 사랑(철학)'에서 뜻하는 '앎'이란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앎과 딴판인 앎이 아닐까요?
어느날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은 델포이 신전에 가서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슬기로운 사람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델포이 신전의 신관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슬기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카이레폰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가 있냐고 생각합니다. 아테네 안에만 하더라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뛰어난 정치가, 예술가, 과학자들이 즐비한데, 맨날 맨발로 장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조무래기들과 입씨름으로 하루 해를 보내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라니, 이 델포이 신탁 속에는 분명히 엄청난 수수께끼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자기보다 더 슬기로운 사람을 찾아 냄으로써 카이레폰의 신탁 해석이 틀렸음을 밝히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아테네에서 가장 슬기롭다고 알려진 많은 사람들을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아무도 자기가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신탁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델포이 신탁이 소크라테스를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나 그 밖의 똑똑한 척하는 다른 사람들이나 모른다는 점에서는 꼭 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데에 견주어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으니,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뜻이라는 것을 깨우친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플라톤의 대화록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본디 델포이 신전의 담벼락에 씌어 있었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즐겨 인용했기 때문에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곧 소크라테스를 연상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라.그래야만 너는 비로소 참된 앎을 찾아 나서는 출발점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네가 정작 아무것도 모르면서 뭔가 아는 척하는 동안은 너는 그 거짓된 앎이나 쥐꼬리만한 단편적인 앎에 만족해서 참된 앎로부터 등을 돌리고 셈인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거짓된 앎을 지니고 있는 것보다 열 배, 백 배나 훨씬 더 낫다." 고 해석한 것이지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만이 알고 싶은 절실한 소망을 갖게 되고, 이 앎에 대한 간절한 사랑만이 우리를 참된 지식으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는바, 철학이란 아까 이야기했듯이 바로 이 참된 자식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은 결핍을 느끼는 데에서 출발하는데,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 없는 것, 곧 앎의 결핍이고, 이 결핍상태를 가득 채우고자 하는 욕구는 곧 앎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앎
'앎에 대한 사랑'이 철학이라고 할 때의 '앎' 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얻게 되는 잡다하고 단편적인 지식으로서의 앎은 아닙니다. 이 앎이 어떤 앎을 뜻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앎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삶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납니다. 이제부터 갓 태어난 어린애가 삶과 앎을 어떻게 관련짓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엄마의 뱃속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나온 어린애는 맨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 가운데 가장 먼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구별하는 것은 촉각, 곧 살갗이 느끼는 감각입니다. 고등 동물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감각은 모두 이 촉각에서 발달해 온 것이라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외부 세계에 대해서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삶의 조건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지요.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물은 늘 어머니의 체온과 같은 온도를 유지함으로써 아이의 몸을 보호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영원히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영원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목숨을 위협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겨울에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극심한 온도의 차이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중앙 아시아의 어떤 유목 민족처럼 갓 태어난 아이를 차가운 강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는 풍습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다면 더 큰 온도의 차이에 직면하게 되겠지요.
이처럼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기의 삶에 대립하는 외부 환경의 위협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첫 사흘 동안은 이 외부적인 자극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게 됩니다. 아이는 이 사흘 동안은 추위를 느끼지 못합니다. 탯줄을 잘라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흘 동안, 그리고 그 뒤로 백일 동안 아이는 가장 큰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처럼 편안하게 지내려고 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는 이제까지 잠재되어 있던 여러 가지 감각적인 능력을 일깨우게 됩니다. 아이의 살갗은 급속도로 몸에 와닿는 여러 가지 외부 자극들을 느낌으로 구별해 냅니다. 이것도 죽음의 위협입니다. 아이는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음을 느낍니다. 이것도 또한 죽음의 위협입니다. 아이는 그때마다 커다란 소리로 울음을 터뜨립니다. 제 힘으로 죽음의 위협을 극복하기 힘든 아이가 어머니의 도움을 청하는 구원의 외침입니다.
감각적인 느낌도 앎의 일종입니다. 이 앎은 우리의 몸과 뗄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의 앎입니다. 그러나 이 느낌의 텃밭에서 두루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갖가지 앎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이 죽음에 맞서서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죽음에 올바로 대처하는 방편으로 생겨나고 발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에 아이의 살갗에 타오르는 불길이 접근할 때 아이가 뜨거움을 못 느낀다면 아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위장이 텅 비어 있어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 공복감을 울음으로 표시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살아남기 힘듭니다.
이처럼 죽음과 싸워 이겨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채 의식하기도 전에 우리 몸의 감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분화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는 죽음과 삶의 맞서는 모순된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여러 감각의 도움을 얻어 이 모순을 극복하면서 삶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 몸이 죽음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감각을 개발하고 세분화시켜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느낌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의식)도 느낌이나 마찬가지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필요에 의해서 싹트게 된 것입니다. 다만 느낌과는 달리 생각은 자기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여럿이 한데 모여 이루는 공동체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서 생겨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삶과 일
만일에 사람이 일을 몸에 익히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오늘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원숭이는 이 세상에 나타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숭이로 남아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코끼리도 마찬가지고 돌고래도 마찬가지고 사자나 호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일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왔습니다. 맨 처음에 지구 위에 나타난 사람은 영장류 원숭이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빙하기에는 다른 짐승들처럼 적도를 중심으로 오글오글 모여 살면서 나무 열매를 따 먹거나 풀뿌리를 캐거나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아 끼니를 때웠겠지요. 그러다가 간빙기가 와서 점차로 대기의 온도가 높아지자 얼음이 녹아 조개를 잡던 개펄은 물 속 깊이 잠기고 이제까지 풀밭과 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던 적도의 자연 환경은 덩굴 식물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열대 식물이 뒤엉켜 자라는 정글로 바뀌게 되어 점차로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이제까지 얼음에 덮여 있던 온대 지방은 여러 가지 식물이 자라는 산과 들로 바뀌었을 것이고, 그 식물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들이 적도 지방에서 옮아 와 살거나 새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어떤 무리는 적도의 바뀐 자연 환경에 적응해서 그래도 눌러 살기로 했는가 하면 다른 무리는 넓어지는 초원과 나무숲을 따라 온대 지방으로 옮아 가기로 결심하고, 그 가운데 어떤 무리는 짐승들의 무리를 쫓아서 한 대 지방까지 나아갔을 것입니다. 적도 지방에서 살다가 온대 지방으로 옮아온 생물들은 이제까지 적도 지방에서는 겪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적도 지방에서는 늘 거의 같은 기온이 유지되기 때문에 따로 겨울을 날 음식을 갈무리해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대 지방에서는 먹을 것이 대체로 가을 한철에 집중되어서 생깁니다. 따라서 다람쥐가 되었건, 개미나 벌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온대 지방에사는 동물들은 삶에 필요한 온갖 먹이들이 눈과 얼음 속에 묻히게 되는 겨울철을 날 음식을
따로 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적도 지방에서는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했던 동물들이 온대 지방으로 삶터를 옮기면서 한 해를 두고 살아갈 방법을 쁹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열대숲으로 바뀐 적도 지방에 남아 있게 된 동물들도 새로운 환경에 재적응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네 발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동안은 오늘날 고릴라나 침팬치처럼 몸뚱이의 크기에 견주어 머리통이 작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무거운 머리통은 네 발로 걷는 데에 커다란 방해가 되었을 터이니까요. 그러나 사람이 두 뒷발로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의 모습은 바뀌게 되었을 것입니다. 척추가 꼿꼿해지면서 어지간히 큰 머리통의 무게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두 앞발을 놀려서 일하는 동안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손가락들의 기능이 분화되어 운동신경이 부쩍 발달하게 되면서 이 분화된 손의 운동 신경은 두뇌의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쳐 커진 머리통 안에 담겨 있는 대뇌 피질의 골은 더 깊게 패고 더 많은 골이 생겨서 머릿속에 기억의 용량을 엄청나게 늘렸을 것입니다. 또 여럿이 한데 모여 힘을 합해서 일하는 동안에 의사 소통의 필요에 따라 얼굴의 굳었던 힘살이 풀리게 되어 무한히 풍부한 표정을 지니게 되고, 음식을 익혀서 부드럽게 만들어 먹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송곳니와 어금니의 생김새도 바뀌고, 세 치 혀를 놀려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 동안에 구조도 차츰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일을 통해서 오늘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꾸어 온 것이지 다른 동물처럼 이 땅에 나타나면서부터 오늘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람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다만 자기 자신만을 바꾸어 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도 바꾸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나무 열매나 바닷가의 조개 같은 것을 줍고 비교적 굼뜬 짐승들을 잡아서 겨우겨우 살아가던 사람들은 차츰 곡식과 짐승을 기르고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어 나무를 베고, 짐승을 잡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 몸에 걸치기 시작했습니다. 연장을 만드는 방법도 점차로 세련되어 갔습니다. 돌로 돌을 때려서 칼도 만들고 창도 만들었습니다. 연장을 써서 일한다는 것은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다른 짐승과는 달리 날카로운 송곳니도 지니고 있지 못하고, 두꺼운 살가죽을 찢을 만한 발톱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몸을 따뜻하게 감싸 줄 털도 없고, 위험한 순간에 멀리 달아날 수 있는 잽싼 발놀림도 타고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 몸 안에 갖추고 있지 못하는 이러한 신체적 능력들을 몸 밖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가을이 오면 시골 아이들은 장대를 써서 갑을 땁니다. 장대의 길이만큼 팔이 늘어나는 셈이지요. 소방수 아저씨가 고가사다리에 의지해서 높은 빌딩에 난 불길을 잡습니다. 고가사다리만큼 다리가 길어진 것이지요. 몇 시간 전에 제주도에서 전화를 걸었던 신혼 여행 떠난 고모가 벌써 대문 안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비행기는 고모의 날개가 된 셈입니다. 이렇게 따지자면 한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타고난 신체적인 기능으로 따지면 다른 어떤 동물보다 뒤떨어지지만 일을 통해서 어떤 동물도 감히 꿈꿀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일과 앎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곧 일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을 통해서 집을 짓고 땅을 일구고 다리를 놓고 수레나 배를 만들고 강둑을 쌓아 자연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대신에, 다른 짐승들처럼 자연에 적응해서 살기에만 급급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화나 문명은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일하는 동물이 사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미도 일하고 벌도 일합니다. 벌이나 거미가 집 짓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집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것들이 어디에서 배워서 저렇게 정교한 육각형 벌집이나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거미집을 지을까요? 우리는 거미나 벌이 태어나면서부터 집 짓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벌이나 거미에게 그렇게 집을 짓도록 가르쳐 준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이나 거미는 본능에 의해서 그렇게 훌륭한 집을 지을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집 짓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집을 지으려면 아무리 간단한 움막을 지으려고 해도 누구에게서든지 집 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도 집 짓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아주 옛날에는 동물들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한겨울을 땅 밑에서 나는 여러 동물들의 생태를 보고 움집을 짓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맹수나 여러 가지 독충들을 피하여 나무 위에서 지내는 짐승들이나 새를 보고 나무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익힌 기술은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동안 점점 더 세련되고 정교해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후천적으로 배워 익힌 집의 설계도를 먼저 머릿속에 그리게 됩니 다. 벌이나 거미는 실제로 아무리 훌륭한 집을 짓더라도 그 집의 모습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 불 수 없는 데 견주어, 사람은 아무리 서투른 목수라도 완성된 집의 모습을 미리 머릿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진 그 모습에 따라 집을 짓는다는 데에서 사람으 l일과 동물들의 본능적 활동은 판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완성된 집의 모습을 미리 머릿속에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그것은 집의 구조를 안다는 말입니다. 집의 구조를 안다는 말은 동시에 집의 쓰임새를 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일정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일정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끼와 칼은 서로 다르게 생겼습니다. 이와 같이 형태와 구조가 다른 것은 바로 도끼와 칼의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연장을 써서 일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물들의 구조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집 짓는 데 쓸 나무를 구하려고 산에 올라간 사람이 기둥감으로 적당한 나무들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박달나무고 또 하나는 백양나무였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차례로 이 나무들에 도끼질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렵쇼! 백양나무는 도끼로 몇 번 찍자마자 금방 넘어가는데, 같은 굵기를 지닌 박달나무는 도끼질을 몇 곱절이나 더 해도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겉보기와는 달리 백양나무는 무르고 박달나무는 단단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이때 겉은 드러난 모습이라고 해서 현상이라고 불리고, 속은 숨어 있는 본질이라고 불립니다.
겉보기에는 같아도 속 알맹이는 다른 것도 있고 겉보기에는 달라도 속 알맹이는 같은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칠판 한쪽에는 경찰 복장을 한 사람이 검은 안경을 끼고 사복을 입은 사람을 오랏줄로 묶어서 끌고 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칩시다. 겉보기에는 이 두 사태는 정반대가 됩니다. 곧 이 두 그림은 정반대의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한쪽 그림은 진짜 경찰이 정복을 입고 절도범을 연행해 가는 것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한쪽은 꼭 같은 경찰관이 검은 안경에 사복을 입고 잠복 근무를 하다가 경찰 복장으로 변장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절도범을 잡아 연행해 가는 것을 그린 것이라면, 본질은 같은데 현상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도덕 시간에 이런 그림을 그려 놓고 현상과 본질의 차이점을 설명하다가 곤란을 당한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 까닭은 왜 하필이면 경찰이 오랏줄에 묶인 그림을 그렸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다시 나무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오리나무와 소나무를 보고 이 나무들의 나이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칩시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리나무의 밑둥치가 소나무의 밑둥치보다 두 배는 더 굵어서 오리나무의 나이가 소나무의 나이보다 갑절은 더 많을 것같이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알 수 없지요. 자, 어떻게 해야 이 나무들의 나이를 정확히 파악해서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나이테가 새로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이 나이테를 근거로 삼아 두 나무의 나이 차이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일을 통해서 자연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물질을 가공함으로써 자꾸자꾸 물질 세계의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여 날이 갈수록 더 넓은 범위에 걸쳐 더 깊은 지식을 쌓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일들은 실천이라고 부르는데, 실천은 곧 앎의 어머니인 셈입니다.
윤구병/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대표이며, 주요 저서로는 '사람 사는 세상은', '몸 가는 데 마음 간다' 등이 있으며, 현재는 전북에서 대안학교 겸 인간과 자연을 조화시키는 삶을 실천하고 계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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