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08-03-11 오전 8:02:03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세계&article_num=40080302003830
오바마 스토리 <중> 흑인으로 산다는 것
오바마가 자신은 흑인이고, 흑인은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된 계기는 기습적으로 찾아왔다.
새아버지 롤로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살던 9살 무렵 주 자카르타 미국대사관에 들렀을 때였다. 오바마는 대사관 도서실에서 미국 잡지 <라이프>를 뒤적이다가 충격적인 사진을 보게 된다. 피부색을 하얗게 만들려고 화학수술을 받은 한 흑인 노인의 사진. 수술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었으나 실패하고 결국에는 후회 속에 생을 보내는 이의 모습이었다.
오바마는 피부색이 희면 행복이 보장된다는 광고를 믿고 그런 수술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수천명이나 된다는 기사를 읽으며 백인인 어머니에게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백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왜 미국이 이런 곳이라고 설명해주지 않았는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 태연했는지를 따지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오바마는 "새로 발견한 이 무서움을 도무지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들은 흑인들의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흑인 남자는 모두 최초의 흑인 판사였던 서굿 마샬이었고,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시드니 포이티어였다. 흑인 여자는 모두 민권운동 지도자 패니 루 해머나 흑인 여배우 레나 혼이었다. 흑인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유산과 특별한 운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얼마든지 강인해서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짐을 진 것이라고 어머니는 가르쳤다.
그러나 <라이프>의 그 놀라운 사진을 보고 돌아온 그날 밤 오바마는 발가벗은 채 거울 앞에서 읊조렸다. "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은 다 미쳤다."
돌아온 고향 하와이, 우울한 세월
오바마에게 이제 세상은 전과 같지 않았다. 아마도 콜롬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시카고로 가 공동체조직가로 투신할 때까지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보면 청소년기 오바마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은 오직 흑인, 흑인, 흑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술과 담배, 마리화나에 손을 댄 것도 흑인으로서의 열등감,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었다.
10살이 되어 자카르타에서 하와이로 돌아와 명문 푸나호우 아카데미 5학년에 전학한 오바마에게 인종주의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버렸다. 오바마가 오기 전까지 흑인이 단 한명밖에 없었던 푸나호우에서 그는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고, 스스로 쌓은 벽 안에 갇혀 허우적댔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농구였다. 푸나호우 농구부 선수가 된 오바마는 대학 코트에서 만난 흑인 선수들을 보며 열등감을 털어버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농구장에서 그는 "존경심은 자기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했다.
흑인에서 소수자로…넓어지는 시야
흑인 문제를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그리고 이민자, 여성, 피정복민 등 소수자 전체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LA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였다. 오바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해 미국 기업들이 남아공에서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투자 철회 운동'에 가담하면서 흑인의 문제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분노와 절망과 동정을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 오바마는 인종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서 출발한 정체성에 관한 고민의 끝에 하나의 개념을 발견했다. 공동체다. 그는 "나와 흑인 친구들이 범죄와 관련된 통계를 접할 때 함께 느끼던 절망, 농구 코트에서 친구들과 나누던 하이파이브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정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검증할 만한 그런 공간", 즉 어떤 공동체를 염원하게 됐다.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24살이 되던 해에 시카고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것은 공동체에 대한 동경과 갈망 때문이었다. 욕망의 도시 뉴욕에서 할렘과 부유층 거주 구역을 보며 목도한 문제, 즉 인종과 계급이 얽혀서 만들어낸 차별과 억압을 공동체를 통해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공동체조직가가 되기로 결심한 오마바의 혼잣말을 보면 지금 오바마가 내걸고 있는 '변화'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게 이 무렵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독백은 매우 급진적이다.
"레이건과 그의 앞잡이들이 더러운 짓을 벌이는 백악관에 변화가 필요하고, 양처럼 고분고분하고 부패한 의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미친 듯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나라 안의 분위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풀뿌리에서만 나온다."
공동체조직가(community organizer)는 원래 있던 말이 아니었다. 오바마도 그걸 하겠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막연했다. 그러나 도심의 흑인과 외곽의 백인을 묶어 제조업 일자리를 마련하는 일, 시청의 지원을 받아 직업 창출 및 훈련 센터를 만드는 일, 저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개발하는 일, 공공아파트에 노출된 석면 문제를 해결하는 일, 대선 유권자 등록 운동 등을 닥치는 대로 해 나가면서 그는 공동체조직가의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물론 그것은 그저 헌신성과 착한 마음만 있으면 되는 봉사활동 같은 게 결코 아니었다. 소수자 집단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분열과 반목을 치유하기 위해 남다른 수완이 필요했고, 차별받는 이들의 삶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들이었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로즈랜드 커뮤니티와 앨트겔드 가든이라는 넓지 않은 지역에서 벌이는 일이었지만 미국 사회의 근본 모순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과격한' 투쟁이었다. 권력자들, 권력 브로커들, 투자은행가들이 오바마의 싸움 상대였다.
번뇌 그리고 행운
시야가 확장되면서 흑인으로서의 열등감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의 열등감이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모순에서 초탈해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푸른 눈을 가지고 싶어 미용 렌즈를 낀 흑인 여성, 흑인을 '깜둥이'라고 비하하는 흑인 지도자를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오바마는 끝없이 번뇌했다.
오바마의 내면은 흑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백인에 대한 증오, 그리고 흑인 민족주의 사이를 부유했다. 그러나 자존심을 갖는 것만으로는 마약 복용, 10대 미혼모, 흑인이 흑인들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이걸 '질병'이라고 표현했다-를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백인에 대한 증오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맞지 않았다. 흑인 민족주의 역시 오바마를 온전히 설득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공동체의 꿈을 잃지 않게 해 준 '행운'은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특유의 담담한 인내심와 노력으로 그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우선 공동체조직가로서의 활동 자체가 그에게 행운이었는데, 석면 노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국과 싸우면서 오바마는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뒤늦게 얻게 된 종교(UCC; United Church of Christ)는 결정적인 축복이었다. 오바마는 '희망의 담대함'이란 설교를 듣고 흑인들의 시련은 보편적인 인간의 것이라는 위안과 희망을 얻게 됐다. '희망'의 담대함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 그리고 미국의 미래 비전을 담은 그의 평론집 제목이 됐다. 아버지의 땅 케냐에 다녀와 정체성의 뿌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한때 우상이었다가 부서져 버린 아버지와 마음으로 화해한 일도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흑인에서 소수자로, 소수자에서 미국 사회로
희망을 품은 오바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988년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간 뒤 흑인 최초로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이 됐다. 91년 졸업한 오바마는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민권변호사로 활동했고, 결혼과 동시에 시카고대학에서 헌법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시카고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바마는 사우스사이드 전역에 만연한 부패의 흔적, 더욱 남루해진 사람들의 삶, 벼랑 끝에 몰려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사회 구조의 모순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더없이 성숙해져 있었고, 흑인으로서의 자폐적 자의식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란 흑인이든 백인이든 미국이라는 공동체에서 모든 이들의 권리와 주장을 실현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었다. 8년에 걸친 주 상원의원 활동, 그리고 2004년 일리노이주 역사상 최대 표차로 당선되며 입성한 연방 상원에서의 활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 말콤 엑스, 2차 대전 당시 억류된 일본인들, 착취당하던 러시아 유대인 아이들, 멕시코 국경 지대의 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오는 허기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오바마의 희망은 소수자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참의미를 되새기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기조연설 전반부에 압축됐다. 그 연설로 오바마는 일약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 나라의 가능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졌던 내 부모님은 나에게 '신의 은총'이란 뜻의 버락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것은 관대한 나라 미국에서 이름은 성공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내가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대한 나라 미국에서는 꼭 부유하지 않아도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오늘 밤 하늘나라에서 나를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오늘 내가 물려받은 다양성에 대해 감사하고, 내 부모님들의 꿈이 내 귀여운 두 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 서 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품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고, 내가 먼저 살았던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내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고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밤 우리는 우리나라의 위대함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미국은 마천루의 웅장함이나 군사력, 경제 규모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200년 전 독립선언문에 나온 대단히 간단한 말은 우리가 가진 자긍심의 기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미국의 정신이다. (…)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의 미국도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미국은 오직 미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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