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08.04.1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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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세력은 크게 위축됐다. 곳곳에서 민주화의 맹장들이 낙선하고 전체 의석수는 거의 반토막 나고 말았다. 수도권 참패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더 뼈아픈 것은 진보담론 전체의 진정성에 대해 민심이 냉정하게 외면한 것이다. 그동안의 독선에 대한 질책이라고 자성하면서도 막막해 보이는 앞길에 대한 불안은 숨길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희비쌍곡선이 너무나 선명해서 일각에서는 일본 비슷한 보수의 장기 집권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젊은 층의 정치 무관심과 보수화 경향은 사회 전체의 보수화를 예증하는 실례로 거론된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이 대의민주제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하고, 쟁점이 부재한 선거판이 한국 정치를 퇴행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이처럼 보수의 헤게모니는 압도적인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긴 호흡으로 보면 보수의 완승이 오히려 보수의 총체적 위기를 동반하고 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17, 18대 총선을 비교할 때 보수정당 의석수는 대폭 증가했지만 총유권자 수 대비 보수정당 득표율은 미미하게만 높아졌을 뿐이다.
힘믿고 독주땐 금세 위기 맞아
반면 범진보정당들의 의석수와 정당 득표율은 대폭 동반 추락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도 진보의 실패가 보수 승리의 가장 큰 원인인 것이다. 보수가 잘해서가 아니라 진보가 못해서 보수에 승리를 헌납했다는 얘기다.
국민은 진보에 대한 환멸 때문에 신임을 거두어 보수에 다시 기회를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국민들의 이념 분포도가 대략 진보 30%, 보수 30%, 중도 40%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도 성향 유권자의 향배는 매우 유동적이어서 집권한 보수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류 보수가 내건 실용의 기치는 양날의 칼로 작동한다.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놓을 때는 좀 낫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국민의 지지가 쉽게 철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세계 상황은 집권세력의 가시적 업적 획득을 쉽지 않게 만들고 있다. 철옹성 같은 지금의 보수 우위 정치지형이 의외로 빨리 균열될 수도 있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보수로 기울어져 있는 분단 체제하에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외연을 넓히던 진보개혁세력이 큰 타격을 입고, 실권했던 보수가 재기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사회 특유의 역동성이 창출한 실천의 공간 때문이다. 전승되어 온 정치지형의 영향력을 무시해도 곤란하지만, 지형 자체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주체들의 실천 능력도 심대한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진보가 절망할 필요는 없다. 쓴 약이 몸에 좋다는 게 오래된 교훈이듯, 각고의 노력으로 진보의 재구성이 이루어질 때 민심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날이 훨씬 앞당겨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민의를 간과하거나 자기 갱신에 소홀한 보수는 바로 퇴락의 길로 빠져들 수 있다.
진보 전열정비 재기역량 충분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과 채 두 달이 안 되는 짧은 집권 기간에도 그런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 준 바 있다.
보수의 전성시대가 역설적으로 보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급하게 실적을 내야 할 이명박 정부가 힘만 믿고 독주할 때 보수의 위기가 시작될 것이다. 예컨대 논란 많은 경부대운하는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만약 전문가들의 검증과 국민의 뜻을 묻는 과정을 경시한 채 대운하 사업을 강행한다면, 그것은 한국 보수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가능성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 빚은 진보의 전성시대는 오히려 진보의 화근이 되었다. 4·9총선이 선사한 보수의 전성시대는 보수에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가 될 것인가.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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