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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인 이야기/마리산인 마음

박종철, 그리고 박종운

by 마리산인1324 2009. 6. 19.

박종철, 그리고 박종운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가 맞닥뜨리는 변절의 곡소리는 이미 여러번 들었지만 이 사람 박종운의 경우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그는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경기도 부천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박종철은 뭔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죽어야 했는가?

인생은 결국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오늘밤을 넘깁니다.

아,,, 인생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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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씨 20주기-우리는 잊지 못한다]“민주화는 필연”

 

▼박종철 씨가 목숨 던져 지킨 대학선배 박종운 씨▼

“시장경제- 민주화 이루는 게 종철이의 정신 올바로 잇는 것”


고 박종철 씨가 경찰의 고문에도 끝내 행방을 밝히지 않았던 동아리 선배 박종운 씨는 “시장경제를 지키고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제공 박종운 씨


“‘종철이가 목숨을 던져 살린 네가 어떻게 보수 세력인 한나라당에 입당할 수 있느냐’는 주위의 거센 비판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지키고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20년 전 경찰이 물고문으로 박종철 씨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행방을 알고자 했던 박종운(47) 씨. 경기 수원시 경기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9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박 씨를 만났다.

그는 2000년, 2004년 총선에서 두 차례 떨어진 뒤 현재 한나라당 부천 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과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끄집어내기 싫은 기억을 묻는 괴로운 인터뷰일 수 있는데 뜻밖에 그는 막힘이 없었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인터뷰에 응했다.

박 씨는 당시에 숨어 있던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독서실에서 1987년 1월 16일자 본보 보도를 보고 후배의 죽음을 알게 됐다.

숨진 박종철 씨와 같은 대학 동아리인 대학문화연구회 3년 선배(사회학과 81학번)인 그는 1985년 10월 일어난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으로 수배된 상태였다.

박 씨는 “당시 수배 상태에서 독서실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잡힌 선후배들이 다들 배후로 나를 지목하면서 신출귀몰하다는 인상을 경찰에게 줬다”며 “경찰이 나만 잡으면 학생운동을 잠재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무리수를 두다 종철이가 희생됐다”고 말했다.

1987년 1월 8일 박 씨는 제헌의회그룹(CA) 사건으로 와해된 조직을 복구하고자 박종철 씨 집을 찾아 그에게 연락책 역할을 부탁했고 6일 후 경찰들이 박종철 씨 집에 들이닥쳤다.

두 대학생의 운명은 이처럼 ‘작은 선택’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엇갈렸다. 그는 “집 밖에 나와 바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는데 만약 걸어 나왔다면 주위에서 망을 보던 경찰에게 내가 잡히고 종철이는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끌려간 박종철 씨는 정말로 박 씨의 거처를 알지 못했다. 박 씨는 “당시 내가 찾아 달라고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댔다면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종철이는 그러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박 씨는 이후 박종철 씨의 죽음으로 촉발된 6월 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수배가 해제된 1988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기관지 ‘노동운동’ 편집위원을 지내는 등 활발한 사회 참여를 했다.

하지만 이후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 붕괴로 인해 인식의 대전환을 겪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서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시장경제가 가장 민주주의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결혼을 하고 군대에 다녀온 후 학원 강사를 하다 민주당에 참여해 민주개혁정치모임 청년위원회 운영위원, 서울시 강동구청장 비서실장, 자치경영연구원 연구위원, 세종리더십센터 연구위원을 거쳤으며 2000년 고진화 의원 등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박 씨는 “나를 변절자라며 매도하지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반시장적 반민주적 처사들을 극복하는 것과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변절자라고 욕할 때나 선거에서 낙선하는 등 인간적으로 힘들 때마다 종철이를 생각한다”며 “민주화를 이뤘으니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치열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글도 열심히 쓰게 만드는 힘은 종철이에 대한 의무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종철이가 ‘형, 너무 추워 보여요’라면서 누나가 짜준 털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 주고 지갑에 달랑 남아 있던 1만 원을 내 손에 쥐여 주던 그때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동아일보> 2007-01-11 03:00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1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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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10) 경기 부천오정 한나라당 박종운 위원장 [조인스]

“盧정권 심판의 바람 불 것”

박종운 상세정보 보기

“지구당을 없애려면 중앙당도 함께 없애야 합니다. 국회 중심으로 가되, 정당은 미국처럼 지역협의회·전국협의회 식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 채 지구당 위원장만 사퇴한다는 건 말이 안돼요. 결국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만 강화될 뿐입니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신인으로 꼽히는 박종운(43) 부천 오정 지구당 위원장은 당내 일부 소장파 의원들의 지구당 위원장 사퇴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여야 합의에 따른 총선 전 지구당 폐지엔 찬성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중앙당이 남아 있는 한 낡은 정치가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우선 정당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SK 비자금이 한나라당에 유입된 것으로 드러났을 땐 “천안연수원이든, 중앙당사든 팔아서 대선자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당 지도부를 질타하기도 했다.

스스로 꼽는 장점은 경쟁자들 중 가장 박력 있고 부지런하다는 것.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투명성 확보가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중앙당과 도지부의 후원회는 당연히 없애야죠. 하지만 정치인 후원회 폐지는 안 될 말입니다. 소액다수의 후원으로 민주정치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짓밟는 거예요. 유권자 매수는 철저히 차단하되 소액 후원은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나라사랑도 가족사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박종운 위원장. 90년말 결혼한 박종운 위원장은 서른이 꽉 찬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 중 얻은 아들은 ‘장군감’이란 어른들 말씀처럼 씩씩하게 자라주었고, 둘째로 딸을 바랬던 박 위원장은 ‘이쁘기 한량없다’고 딸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구시대적인 ‘관성’ 이 우리 정치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 역시 80년대식 낡은 코드에 사로잡혀 시대착오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톤을 높였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경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개혁 피로감이 쌓이고 있습니다. 그런 데도 이 정부는 여당을 갈라놓은 것도 모자라 야당과 죽고 죽이는 ‘겁쟁이(치킨) 게임’에 몰두하고 있어요. 노 정부는 개혁에 대한 비전도 책임의식도 없습니다. 수구 우익도 문제지만 수구 좌익도 문제에요. 80년대 코드는 이미 수구 논리로 변질됐습니다. 내년 총선에선 꼭 세대교체와 정권 심판의 바람이 불 겁니다.”

그는 낡은 정치의 온상은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강변한다. 따라서 책임총리제·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출신인 박 위원장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386이다. 85년 서울대 반독재 민주화투쟁 학생운동본부 위원장, 민주화추진위 학생운동담당 지도위원이었던 그는 당대 학생운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핵심이었다. 그의 지도를 받은 후배들 틈에 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된 고 박종철씨도 끼어 있었다. ‘박종철 치사사건’의 바로 그 사람. 문제의 사건은 당시 박종운 위원장을 쫓던 공안 경찰이 박종철씨를 연행해 그의 행방을 묻던 중 발생했다. 박종철씨는 선배 의 거처를 끝내 말하지 않고 쓰러졌다. 죽음으로 선배를 지켰던 것. 쫓기던 선배의 목에 털목도리를 둘러주며 지갑에 달랑 남은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주던 후배는 박 위원장의 가슴에 애틋하게 남아 있다.

그는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후 노동운동을 거쳐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당한 후로는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21세기 기획위원장, 중앙당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중앙당 정책위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등원의 기회가 왔다. 그는 당시 사고 지구당이던 부천 오정 지구당을 수습해 뒤늦게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패자였지만 페어플레이를 한 그에게 지역구민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돈 안드는, 깨끗한 정치에 기울인 노력이 평가 받으며 팬클럽이 생겼다. 그의 이름 끝자를 딴 ‘운(雲) 좋은 사람들’.
그는 등원하면 국가발전전략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어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땀을 쏟고 싶다고 말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야 합니다. 민주화를 이뤘으니 이제 자유롭고 부강한 선진국이 돼야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열정으로 정치개혁과 당 쇄신에 앞장서겠습니다.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주 진 월간중앙 정치개혁포럼 기자
 
<중앙일보> 2003.11.29 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