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사색

나이 50에서 나를 묻다

by 마리산인1324 2010. 9. 29.

- 2008년 5월 12일 마리선녀 씀 -

 

 

나이 50에서 나를 묻다 
 

지천명(知天命)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인데, 글쎄다. 나는 하늘의 뜻을 알기는 커녕, 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아니 왜 사는지 모른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계시던 윤구병 선생은 작년 어느 강연에서 '15년의 철학과 교수 제직시 단 한명의 학생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며 서운함을 피력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직 잘 사는 법을 모르고 있노라며 내심 교수 제직시 그러한 질문을 기다렸다고 했다. 지금까지 계셨다면, 나는 꼭 물어보았을 것이다. 아주 진지하게. 
 
나이 50인 지금, 나는 그 물음을 끝임없이 하고 있다. 때로는 스스로에게 감정적인 질문과 그에 걸맞는 대답을 할 때도 있고, 그러다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스스로 답을 만들어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판타지 같은 꿈을 꾸기도 한다. 나의 바램, 즉 나의 욕구를 현실에서 이뤄진냥 혼자서 논다. 
 
나는 나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가. 나의 만족이 다른 이의 불만족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나의 인생을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행복한가.
이러한 물음은 수시로 나의 뇌리를 지배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라기보다, 나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의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나에 대한 질문이다. 살아가는 이유, 즉 존재의 이유를 내게 묻는 작업이므로 나는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추구이다' 라고 했다. 헤겔 또한 행위의 목적은 도덕적 행복이라고 했고, 플라톤 역시 이데아의 세계, 즉 최고의 선을 인간의 궁극적 목표라고 했다. 니체가 그러했고 실용주의자인 흄도 동정심을 통하여 도덕적 행복을 설명했다.
 
이 추상적인 궁극적 목표와 상관없이 결핍에서부터 충만이 생겨나듯 나의 혼란으로부터 나의 평정심이 올까. 나는 잘 사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그 기대와 바램이 깨달음으로라도 느껴졌으면 좋겠다. 아주 미세한 느낌이라도 좋다. 간절히.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50의 지천명, 나를 향한 하늘의 뜻은 무엇일까. 하늘에 뜻이란 필연을 받아들이는 운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굳이 노력이고 뭐고 할 필요가 없음이 전제가 되는데, 또한 그러한 결과는 반드시 자족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난 인정할 수 없어진다. 나를 향한 하늘의 뜻(필연)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에 나로 하여금 자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하는 나와 선택당하는 나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의 인생을 볼 뿐이다. 조그만 돌부리에도 아파하고 그로 인해 피하려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을 확인할 뿐이다. 
 
나는 '나의 지금'을 '나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