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5월 24일 마리선녀 씀 -
양심의 소리
바쁘게 보낸 금요일까지의 쉼을 위해 조금은 느끗하고 싶은 토요일이다.
세상과 거리를 둔 요즘, 나와도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중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연구원의 이야기는 잠재웠던 신경세포에 자극을 준다.
그의 글은 가슴 저 켠 울림을 주고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앎과 삶의 일치, 그것은 자신에 대한 정의이기에 참으로 중요하다.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는 행동하는가?
정의는 용기가 필요한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한 연구원의 사회를 향한 행동을 보면서 감동과 함께 알 수 없는 슬픔도 동시에 느껴진다. 왜 일까?
왜 정의로은 행동에 용기를 내야만 될까?
왜 정의로운 행동에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이 서글프다. "옳치 않은 것을 옳치 않다고, 옳은 것을 옳다" 하는 지극히 정직한 자기 표현인 것을....
나 역시 언제부터인가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매우 힘들게 느껴진다. 상충과 모순과 충돌을 피곤해 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다수의 주장과 다른 자신을 볼 때가 그렇다. 군중들과의 상이함에 피로를 느끼는가. 색깔을 슬그머니 외면한다. 어쩌면 '까탈스럽다'와 '유난스럽다'라는 말이 스스로에게도 기분 좋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주변에 대하여 자꾸만 무심하다. 그리고 부질없어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인다. 양심과 정직, 사회적 정의 등....앎과 행동, 그 실천적 삶의 원래의 목적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극단적 회의주의자가 된 것일까.
가만히 살펴본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원인을 내면이 아니라, 외부의, 즉 대상 속의 상황에 있다고 한다. 자연에 그 문제를 제기하고, 타인에서 , 타국에서 그 문제의 핵심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있어야 하고, 또한 자기 반성이 우선 돼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밖을 향해 있기만 하다. 더욱이 내부가 기준이 아니라, 외부의 기준에 맞춰가는, 아니 좇아가는 후발적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한반도 운하가 그 예가 된다.
앞에서 하는 대로 잘 좇아가면 순응이고, 통합이며, 상생이고, 예의 바른 것이며, 심지어 상대방에 대한 친절한 배려라고 한다. 또한 긍정적인 사람이고 안정과 평화를 지향하는 태도라고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스스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며, 말 잘 듣고, 착하고, 선한 사람이게끔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 고상한 단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미 많은 것을 소외 시키고 배제하고 있다. 또한 인간 고유의 각기 다른 개성을 즉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군주의 질서라는 미명 아래 홀로 독재하려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굴욕적인 노예근성을 강요하고 있다. 고유의 자신이 없는 획일화된 복제품, 즉 '하나'만을 요구하고 '통일'된 '일체'를 요구한다.
그것은 소수의 기득권층 즉 '힘 있는 자'의 군림을 옹호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음모이며, 권력이 권력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수의 서민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평화와 안정의 희구가 과연 그러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나는 단연 거부한다.
'평화와 안정'은 인류 전체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이며 목표적 단어임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과정의 결과여야 할 것이지, 과정이 없는 결과만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다양한 것들이 존중받지 못한 것이라면 그 '평화와 안정'은 진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다양한 것들의 상충과 모순 속의 충돌의 과정을 겪고 난 후 얻어진 결과여야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자유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억압이나 위협이 있어서는 안 되며, 공포나 두려움 또한 끼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다른 생각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목적을 향해 조율해 가는 과정이 평화요 안정이지 않은가.
우리는 과정을 무시하면서 결과만을 좇는 현 정부의 독선을 눈 앞에서 보며 분노하고 있다. 이에 정직한 양심이 용기를 내어 고발 하고 우리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현실 사회에서 참으로 보기 드물어서인가. 기쁘고, 가슴 뜨겁게 벅차다. 하지만 이렇듯 당연한 것에 대하여 기뻐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 또한 어쩔 수 없다.
외면하여 살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나의 중심 문제인 것 같다. 죤 롤즈의 사회정의론 '무지의 베일'을 다시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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