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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를 두고 이 시대의 성인(聖人)이라 부르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는 15세에 기독교를 접한 뒤 스스로를 정통 그리스도교 신자로 생각했지만, 22세 이후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영향도 제법 받고, 마하트마 간디, 우치무라 간조 등의 영향도 받으면서 기존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다른 길을 간다. 무엇보다 유불선(儒佛仙)을 넘나들면서 그는 기존 흐름에 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종교 실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42년 1월 4일 52세 때, 일생일대의 종교체험을 한다. "마침내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한 것이다. 물론 이 '아버지'는 제도 종교 그리스도교의 신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절대 의식, 절대 인격이다. 유교의 천(天), 도교의 도(道), 불교의 열반(涅槃)과도 통하는, 요즘 용어로 범재신론(凡在神論)적 신이다. 이런 신관 위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다양한 종교사상에 대한 포용적 시각, 진지한 수행의 삶을 살아갔다.

일좌식 일언인(一坐食 一言仁)

그의 면모를 가장 특징지어주는 것은 저녁 때 하루 한끼만 식사한다는 것이다. 그의 호가 다석(多夕)인 것도 아침, 점심까지 겸해 저녁 한끼로 하루의 식사를 해결하는 데서 비롯된다. 저녁 석(夕)자 세 개를 합쳐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식(小食)에 그것도 주로 채식(菜食)이었다. 그렇게 먹고도 서울에서 인천까지 종종 당일로 걸어 다녀오고, 개성에도 갔다 오곤 했다. 그는 늘 걸었다. 구기동 자택에서 성서강의를 하던 종로 YMCA까지 수십 년을 늘 걸어다녔다.

오산학교 교장 시절(1931년)에는 교장실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톱으로 잘라버렸다고 하니, '걷기'는 물론 '바로 앉기'(正坐)에도 힘썼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여기에다가 51세 때(1941)는 앞으로 부부간의 성생활을 끊겠다는 의미에서 해혼(解婚)을 선언한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음욕과 관계된 행위는 거절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그의 수신(修身) 방식이다. 그저 동반자로 지내겠다는 것이다. 이런 자세 속에 그의 철학이 모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자 김흥호는 이렇게 정리한다:

선생의 도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좌식 일언인(一坐食 一言仁)이다. 일좌(一坐)라는 것은 언제나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것이다. 이를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정좌(正坐)라고도 한다. 일식(一食)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일언(一言)은 남녀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인(一仁)은 언제나 걸어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금욕적인 자세들이다. 이 점에서 그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졌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억지춘향식 고행만도 아니고, 육체를 죄악시한 결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단식, 단색 등으로 금욕을 통해 죽음을 연습하고, 죽음의 연습을 통해 절대자유와 생명을 이루려는 수신(修身)의 길을 철저히 추구했다는 것이다.

유불선을 포용하다

그는 이러한 삶의 실천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은 무엇이나 받아들였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 소화해냈다. 여기에는 유불선(儒佛仙)이 모두 들어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 경전도 먹고 불교 경전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에서 빌어먹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맷감량(飽和量)으로 소화가 안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여러분이 내 말을 감당할른지 모르나 참고삼아 말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성경을 보나 희랍의 철학을 보나 내가 하는 말이 거기에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한아님이 하여주실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교, 불교, 유교는 다 다른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낙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기존 제도 종교로서의 예수교, 불교, 유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부처, 공자가 가르치고 실천한 일종의 본원적 진리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본원적 차원에서 종교들은 다 같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나의 것과 다르다 하여 함부로 이단 운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영모의 입장이었다. 그는 경계한다.

알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예수교 믿는 사람은 유교를 이단시하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예수를 비난한다. 유교를 나쁘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불교를 욕지거리하고 무엇을 안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남을 모르면 자기도 모른다. 자기가 그이(君子)가 되려면 다른 그이(君子)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참 멍텅구리시대다.

가르침을 살다

물론 유영모가 여러 종교들에 포용적인 자세를 견지한 것은 그저 종교 연구 자체에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뿐이었다: "나 유영모가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자를 말하는 것은 공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처럼, 공자처럼, 간디같이, 톨스토이같이 한아님의 국물을 먹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비슷하게 그 짓하려고 말한 것뿐이다. 공자, 석가, 예수, 간디를 추앙하는 것은 우리도 그들과 비슷하게나마 한아님의 국물을 먹으려는 짓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예수를 "참으로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훌륭한 스승, 곧 덕사(德師)"로 모셨다. 그와 닮아보려고 무던 애썼다. 그는 말한다: "내가 참으로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예수를 신처럼 높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신(聖神)이다." 예수 역시 '미정고'(未定稿)이지 '완전고'(完全稿)는 아니다. 완전고는 절대신 뿐이다. 그리고 이 절대신은 "없이 계시는 이"이다. '있음'라는 말 속에 갇히지 않는 '없음'이다. 그런 '있음'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를 동양적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의 일환이 전혀 아닌, 완전한 공(空)/무(無)로서의 '절대', 모든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하나'를 추구하되, 유교적 실천 원리에 입각해 그렇게 했다. 유교랄 수도 있고, 불교랄 수도 있는, 그런 독자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온 몸으로 살아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과 실천이 그를 정통 그리스도교인으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를 그리스도교인의 범주에 넣으려는 태도 자체가 그를 왜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만큼 독창적이고 넓고 깊다. 그는 인류의 스승, 우리 시대의 성인인 것이다.


2002-05-25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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