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2.05.24 19:0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4496.html
[아침 햇발] 한상대 검찰총장께
미뤘던 휴가는 다녀오셨는지요? 요즘 아침 신문을 볼 때마다 ‘검찰공화국’이란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검 차장검사의 말 한마디가 1면 머리기사로 대서특필되고 압수수색영장 하나로 정치판을 휘저어놓을 수 있는 조직이 달리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권한이 클수록 책임 또한 무거운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최근 일련의 수사를 지켜보면서 검찰의 두 얼굴을 보게 됩니다.
대검 중수부가 현 정권 임기 말에야 뒤늦게 그 말 많던 실세 두 사람, 최시중·박영준씨를 구속했습니다. 검찰은 그것도 어렵게 찾아냈다고 한다지만 5년 내내 제기돼온 숱한 의혹들에 비춰보면 8억원과 2억7000만원씩 받은 알선수재 혐의가 그리 무거워 보이지는 않더군요. 최씨의 양아들이라는 정용욱씨나 박씨 측근 이동조씨 모두 공교롭게 국외 도피 중이라면서요? 안 잡나요, 못 잡는 건가요? 아니면 골치 아프니 달아나도록 내버려두기라도 한 건지요?
이상득 의원은요? 보좌관이 구속되고 장롱 속에 있었다던 7억원에다 저축은행과 관련한 4억원 수수설까지 의혹은 무성하지만 여전히 건재합니다.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포스텍의 500억원 투자에 이 의원이 개입했다고 <한겨레>가 얼마 전 보도했는데, 내부 사람들이 확인해준 것이라 확실하다는군요. 대검 중수부 발표를 뒤엎는 내용이라 내부에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검찰은 조용하다면서요?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또 어떻고요. 증언과 접견 기록, ‘브이아이피 문건’까지 나왔는데 왜 미적거리죠? 청와대 민정수석실 컴퓨터라도 열어보면 한 방에 해결될 수 있을 텐데, 대통령에 대한 의리 때문인가요, 아니면 법무장관이 눈짓이라도 하던가요?
정치적 고려든 다른 이유로든, 살아있는 권력 비리에 자제와 신중, 그리고 적당히 못 본 척하고 있다면 그 반대편 야당이나 약자들에게도 무리하거나 탄압한다는 인상은 주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닌지요? 그게 검사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지키는 길 아닐까요?
그런데 어떤가요? 노건평씨 수백억 비밀계좌 소동을 한 검사의 영웅심리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저는 검찰 조직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거라고 봅니다.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는 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힘들죠. 권한만 행사할 뿐 책임을 우습게 아는 조직만큼 위험한 건 없습니다.
통합진보당 사건에 뛰어든 것도 이런 오만함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요? “국민 여망”에 따라 중앙당을 압수수색했다고 하던데, 정치인도 아니고 법률가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설사 고발이 들어와서 수사가 불가피했더라도, 비상대책위의 수습 상황을 지켜보면서 해도 되는데 왜 하필 출당 절차 시도 당일 그랬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책상 위에 있던 2000만원을 들고 나왔다”는 진술이 나왔는데도 모른체하던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때랑 검찰 태도가 너무나 대조적이네요. 그러니 정치적 저의를 의심하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요.
과거 검찰이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 시절, 그래도 생각 있는 검사들은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정작 정당한 권한이 주어지자, 이제는 인사권자의 뜻을 알아서 헤아리고 그 반대급부로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더군요. 그러다 임기 말엔 여론을 의식해 적당히 손보는 척하고. 검찰 조직과 검사 개인으로선 현명한 처신일지 몰라도 국민 눈에는 비겁한 조직이란 인상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검찰의 일그러진 얼굴이 좀 보이시나요? 검찰 총수로서 한 총장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김이택 논설위원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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