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이야기/시·글

김재진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by 마리산인1324 2013. 10. 27.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김재진 (지은이) | 시와 | 2012-07-02

 

 

序言 

빈방

 

내 안에 있는 평화를 위해 노래합니다.

 

내 안에 있는 진실과

내 안에 있으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문 닫힌 사랑을 위해 노래합니다.

 

아무도 없는 내 안의

불 꺼진 방을 위해 노래합니다.

 

작은 식탁과 낮은 책상

마음의 조명을 밝혀야 볼 수 있는

사랑스런 불빛 따라 노래하며

내 인생의 따뜻했던 순간들을

손가락 뻗어 만져봅니다.

 

자물쇠 하나 채워놓지 않은 방 안에 있으면서도

방문 열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여리디여린 사람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내 가족과

세상 모든 다친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보냅니다.

 

 

 

사랑을 묻거든

 

사랑을 묻거든 없다고 해라.

내 안에 있어 줄어들지 않는 사랑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사랑했냐고 묻거든 모르겠다고 해라.

아파할 일도 없으며 힘들어할 일도 없으니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거든

나를 적시며 흘러가 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해라.

 

 

 

노래

 

떠오르는 그 순간

말하라.

늦지 않도록.

내 마음속에 그대가 있다고 말하라.

버려도 버려도 내 안을 맴도는

버릴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하라.

늦지 않도록 말하라.

바람을 타고 흘러가 어젯밤

내가 부르던 노랫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전에.

 

 

 

토닥토닥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

너는 나를 토닥거린다.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

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

너는 자꾸 토닥거린다.

나도 자꾸 토닥거린다.

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토닥거리다가 잠든다.

 

 

 

만남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통째로 그 사람의 생애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아픔과, 그가 가진 그리움과

남아 있는 상처를 한꺼번에 만나기 때문이다.

 

 

 

꽃을 버리며

 

오늘 아침 꽃병의 꽃을 버리듯

만약 버림받는다면 나는

나를 버린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도 나처럼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나를 버린 것인지 모른다.

내가 배고플 때 나 대신 아무도 밥 먹어줄 수 없듯

내가 버리지 않았는데 나 대신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설령 나를 버렸다 해도

그것은 그를 더 이해하는 기회일 뿐

우리는 단지

세상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조금 더 이해받고 싶은 것이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먼저 버리려 한다.

 

 

 

능소화

 

능소화가 핀다.

저 꽃이 피기까지 나는

몇 벌의 옷을 갈아입고

몇 번의 식사를 했던 것일까?

지금 피고 있는 저 꽃은

눈앞에 있지만 다시 보면 없다.

다만 피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숨 쉬고 가끔 사랑에 빠지는 그대여

그대가 느끼는 그것 또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우리는 어디에도 없다.

 

 

 

짧은 봄

 

인연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연이 다했다고 말했다.

함께 바라보던 등대의 불빛은 꺼지고

바다는 어두웠다.

표선으로 가는 길에 봄이 짧았다.

 

 

 

멀리 가는 강처럼

 

이제 내 마음의 순결이 조금 더 굳어지기 전에

모르는 누군가를 더 받아들이고 용납해야지.

죽음을 앞둔 노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눈 속에 깊이 담긴 삶의 진실을 조금 더 이해하고

끌어안아야지.

어쩌면 한 번쯤 더 사랑을 하고

한번쯤 더 고통 앞에

멀리 가는 강처럼 소리 낮춰 소용돌이친다 해도

마음의 근육 조금 더 굳어지기 전에

상처 받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다독거려야지.

용서하기 힘든 일도 내려놓으며

가보지 않은 길이라도 익숙한 사람처럼

성큼성큼 두려움 없이 걸어가야지.

이제 남은 시간 더 어두워지기 전에

화분에 물을 주고 장미꽃 향기를 들여놔야지.

 

 

 

세상의 꼬리

 

무심코 걷던 스승은 돌연

이빨 드러내며 달려오는 맹견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두려움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때

어디로 피하는가 그대는?

사자의 꼬리만 봐도 사자의 포효를 떠올리는

유약한 상상력이 우리의 두려움이니

세상의 꼬리 하나 밟고 서서

세상의 거대한 몸뚱이를 봤다 소리치지 마라.

스승의 속도에 놀란 맹견이

꼬리 내린 채 달아나는 잡견으로 변하듯

꼬리 세운 세상 향해 온몸 내던져

정면으로 돌진하라.

 

 

 

 

치유

 

나의 치유는

너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

모든 치유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 모두였고

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

 

<중앙일보> 2012.06.29 00:48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609021

 

당신의 상처가 내 시를 어루만진다

김재진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출간

 

정강현 기자

 

김재진 시인은 요즘 하모니카에 푹 빠졌다. 방송에선 ‘가슴에 남는 음악’도 진행한다.

“음악이 시가 되고 시가 음악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사진 시와]

 

김재진(57)은 치유의 시인이다. 그의 시는 사람들의 아픈 구석을 어루만진다. 이를테면 그는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의 아픔부터 눈에 들어오는 시인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통째로 그 사람의 생애를 만나기 때문이다/그가 가진 아픔과, 그가 가진 그리움과/남아있는 상처를 한꺼번에 만나기 때문이다.’(만남)

 그의 신작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시와)에서 고른 시다. 이번 시집은 6년 만이다. 위로와 치유의 시 80편이 담겼다. 그는 순간적으로 시를 터뜨리지만, 시집은 더디 묶이는 편이다.

 “시는 제작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죠. 주체 할 수 없이 시가 쏟아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잠잠할 때도 있죠. 시가 제게로 오는 것이지, 제가 데려오는 게 아니니까요.”

 

이번 시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시가 올 4~5월에 한꺼번에 쓰여졌다. 시가 떠오르면 아이폰 메모장에 시를 쓰고, 그 시를 카카오톡으로 곧장 전송했다. 그는 “오랫동안 응축돼 있던 시적 정서가 폭발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한국 문단의 공식적인 성공 문법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음대(대구 계명대)에서 첼로를 전공했던 그는 어느 날 음악적 한계에 부딪혔는데, 그 탈출구로 문학을 택했다. 197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가 그의 공식 데뷔다. 하지만 문예지를 중심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가는 성장 절차를 외면했다. 그러곤 81년부터 10여 년간 KBS·불교방송 등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로 일했다.

 그런 와중에 문학의 질병이 또 다시 발병했다. PD로 일하던 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95년엔 돌연 방송국을 떠나 전업작가로 나섰다. 여전히 문단과는 거리를 뒀지만, 97년 발표한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가 20만 부 넘게 팔리면서 대중성을 갖춘 시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문단에선 대중적이라는 말이 폄하의 뜻으로 쓰이지만, 저는 대중적이란 말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시, 그런 애매모호한 시는 일반 독자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습니다.”

 이번 시집에선 지금껏 한국 시인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실험을 했다. 시 낭송과 영상을 결합한 ‘시 뮤직 비디오’를 선보였다.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이다. 시집 출간 전에 유튜브에 먼저 공개된 이 뮤직비디오는 한달 만에 조회수 5만 건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출간된 시집에도 5개의 시를 뮤직비디오로 만든 QR코드를 삽입했다.

 “제 시가 마치 노래처럼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가만히 읽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는 명상과 치유를 돕는 인터넷 방송 유나(http://una.or.kr)의 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그러니 다정(多情)도 병이다. 이 시인을 보라. 그의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만진다. 아니다. 그의 시는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낫게 한다. 아니다. 그의 시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한다.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을 자꾸 토닥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