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을 보라
-이원규-
앞만 보지 말고 옆을 보시라.
버스를 타더라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앞만 보며 추월과 속도의 불안에 떨지 말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보시라.
기차가 아름다운 것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창 밖은 어디나 고향 같고
어둠이 내리면
지워지는 풍경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들.
언제나 가파른 죽음은 바로 앞에 있고
평화로운 삶은 바로 옆에 있지요.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를 밟고 가는 이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아야지요.
누군가 등 뒤에서 꼭같이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르니
앞서는 이에게 미혹되지도 말고
뒤에 오는 이를 무시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일로매진의 길에는 자주 코피가 쏟아지고
휘휘 둘러보며 가는 길엔 들꽃들이 피어납니다.
평화의 걸음걸이는 느리더라도 함께 가는 것.
오로지 앞만 보다가 화를 내고 싸움을 하고
오로지 앞만 보다가 마침내 전쟁이 터집니다.
더불어 손잡고 발밑의 개미 한 마리,
풀꽃 한 송이 살펴보며 가는 생명평화의 길.
한 사람의 천 걸음보다
더불어 손을 잡고 가는 모두의 한 걸음이 더 소중하니
앞만 보지 말고 바로 옆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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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속도
덧나는 상처도 없이
어찌 봄이랴
섬진마을의 매화가
지기도 전에
젊은 황어때가 지리산에 오르고
잠시 산수유꽃이
잉잉거리는가 싶더니
화개동천의 십 리 벚꽃도
파장
아무래도
봄은 속도전이다
피고 지는 꽃이 그러하고
어이쿠,
무릎 한 번 치시더니
입적하신 노스님이 그러하니
나는 그저 어지러워
눈 코 입 귀를 틀어막을 뿐
만마디
척추 속에 차오를
늦은 고로쇠 수액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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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자세
코스모스 길을 따라 그대에게 갑니다.
그대도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노래를 부르며 이리로 오고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코스모스 꽃들이 저리도 흔들리겠습니까.
지리산 반달곰은 반달곰의 자세로,
섬진강 쏘가리는 쏘가리의 자세로,
천년의 주목은 주목의 자세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본 사람은
십리 길이 어째서 십리 길인지,
백리 길은 어째서 백리 길인지 압니다.
걷다가 한 번쯤은 꼭 쉬게 되는 거리가 바로 십리이며,
하루 종일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바로 백리이지요.
오래 걷다 보면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고,
또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조차 멍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그리워하다 보면
문득 그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 그 순간이 기다림의 절정입니다.
기다림은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누군가에게로 가는 것.
그리하여 봄꽃들이 피면서 북상할 때
꼭 사람의 걸음걸이로 올라가고,
단풍이 남하할 때에도
꼭 사람의 속도로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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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를 기른다
잡초들을 뽑으려고
밀짚모자 쓰고 나섰다가
그대로 둔다
하나같이 어여쁘지 않은 게 없다
텃밭에 열무를 심어놓으니
비름이니 애기똥풀
더 무성하다
어허라.
저희들도 무슨 뜻이 있으리니
차라리 잡초를 기른다
뒷집 할머니가 혀를 차며
열무를 뽑아다 물김치를 담가와도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잡초를 바라본다
열무 아닌
애기똥풀꽃을 찾아
먼 길 달려온
나비 한 마리 생각한다
이건 맛이 없어.
저건 독초야
솎아내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잡초는 저희들끼리
열렬히 몸을 섞어
제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자란다
저리도 무성한 풀들
설사
금지된 사랑이면 또 어떤가
지금껏 잡초라 믿어왔던 생각들도
더 이상 뽑아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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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獨居)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뗴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 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며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옛 애인의 집’(솔),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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