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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시·글

[시] 幽人日記 /정상일

by 마리산인1324 2014. 1. 30.

* 대금 명인 원장현 선생의 음반 <유인일기>에 수록된 정상일 시인의 詩

 

 

幽人日記 

 

                    정상일

 

정신차리고 살기가 싫구나

눈 똑바로 뜨고 세상 이치 헤아리며

분명한 얼굴로 이승 살기는

저승보다 싫구나

 

아무런 욕심 없이

몽유(夢遊)의 그늘에서

한 오백년 떠 가는 구름처럼

그냥 흐르고 싶은데

 

그 때 점잖은 소나무 아래

너는 가만히 웃고 있고

오라고 오라고 손짓하면

허리 구부리고 깔깔대며 너는 슬프게 웃고

 

나른한 피로에 젖어 나는

버들가지나 꺾어 호드기 물고

세상 일은 다 잊은 척 눈둑 길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이나 불러보다가

 

어느 사이 꽃구름 아래

깜빡 잠든 너를 안고

돌개울에 내려가 발이나 씻기다가

해 저물면 한 그릇 밥을 찾아

욕심없이 누운 오두막을 돌아 오는데

 

너는

세상이 너무 적막하다고

당신은 그렇지 않느냐고

짐짓 투정도 부리다가

청솔가지 분질러 아궁이 타는 불

무릎 모아 쥐고 앉아 어깨를 기대면

세상은 멀어 산 속은 고요하고

저녁 연기는 낮은 목청으로 세상을 뜨리라

 

밤 내려 등불 밝히면

봄나물도 향기로워 너는 다듬고

비스듬히 누워 발장단이나 치다가

하도 심심하여 네 발가락이나 만지다가

 

만지다가 까르르 웃고 너도 따라 누워

까마득히 먼 곳에 말을 달리고

스스로 외로워 아무도 말이 없을 때

가끔은 세상 생각도 날 것인데

 

세상 그리워 가끔은

너도 울고 나도 울어서

밤새 눈물 닦아주다 발도 닦아주고

살아온 날이 저 혼자 예쁘고 딱하여 또 울다가

 

그것이 사실은 설움이라고

가만가만 귀 대어오는 네 말을

나는 또 몰래몰래 마음에 심어둘텐데

 

흙 냄새 자욱한 방은 삼 칸 방,

심어둔 마음이 애틋하여

쓸쓸한 몸을 다시 만지고

 

우우 밤바람은 불어

문풍지 울리면

 

그제서 두고 온 세상 생각날까

누구도 먼저 말하지 못하고

더듬고 만지며

외로움 쓰다듬다가

 

잠이나 들까

잠이나 들까

그 때도 몽유(夢遊)의 슬픔으로

잠이나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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