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네 집> 06.08.2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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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에 실린 향유네 귀농 9년 회고록 |
"농촌과 목회"에 저희 9년간의 귀농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신학생에서 농부로'인데, 저희의 귀농 후 지나온 발자취를 세밀하게 정리한 글입니다.
지난주에 교회 한 선생님이 우리 부부를 붙잡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향유네는 드디어 돈과 권력, 둘 다 손에 거머쥐었네......”
무슨 말씀인가 여쭈었더니 우리가 올해 땅 사고(돈?), 동네에서 새마을 지도자(권력?)가 되었다고 하신 농담이셨습니다.
돈과 권력... 생각해보니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같이 웃었습니다.
우리는 경북 상주에 귀농해서 무농약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향유네라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올해가 역사적인 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 같이 귀농한지 9년 만에 드디어 농사지을 내 땅을 장만하고, 마을에선 새마을 지도자가 된 해입니다.
내 땅을 샀다는 것이 단지 소유물이 늘었다는, 재산이 생겼다는 의미보다는 무엇보다 농부로서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를 9년 만에 마련했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마을에서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감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마을에서 우리를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셨다는 의미이기에 중요합니다.
농부가 마음 편히 자기 땅에서 자기 계획을 갖고 자기 방식대로 농사지을 수 있다는 마음에 너무 기쁩니다.
‘도지(땅 임대료)를 올려 달라'부터 ‘풀키운다', ‘포도나무 벌레 다 먹는다', ‘약 좀 쳐라', ‘약 안치면 내년에 밭 내놔라'. 등등 밭주인의 잔소리와 협박(?)에 밭주인의 눈을 피해 살아야 했던 설움들.....
“내년엔 이 밭에서 농사지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아무런 중장기 영농계획도 잡을 수 없었던 불안함들......
지난 8년간 마음 졸이며 남의 밭 전전긍긍하며, 이리 저리 뜨내기 농사를 지어왔기에 그 소중함이 더한 것입니다.
지난 8년 동안 포도밭뿐만 아니라 사는 곳도 여기저기 옮기면서 '외지인' 내지는 ‘뜨내기'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 붙었고, 촌에 살면서도 대문 밖 세상은 항상 낯선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동네 할머니들이 오가시면서 ‘코오피' 한잔 드시러 편히 드나드시고, ‘형광등 갈아 달라', ‘수도 물이 안 나오니 고쳐 달라', ‘테레비 안 나온다’ 등등 쥐뿔도 없는 내가 마치 맥가이버가 되는 양 이리 저리 편히 부르시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올 초에 젊은 사람이 마을일 좀 해보라고 새마을 지도자 자리를 내주신 것입니다.
귀농 9년차에 이제야 정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쉽게 정착하는 이도 있던데, 우리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지난 8년의 세월이 드라마처럼 흘러갑니다.
처음 귀농하게된 계기
저희 부부는 34살 동갑내기입니다. 원래는 침례신학대학, 같은 동아리에서 만나 제가 혼자서 아내를 짝사랑만 하던 사이였다가 구체적으로 귀농을 준비하던 97년 4학년 때 서로 뜻이 맞아 함께 귀농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학창시절 저는 하나님을 신앙하고, 신학하는 것에 너무 큰 한계를 느꼈었습니다. 머리에서만 논리정연하게 정리되는 관념적인 기독교,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파장되는 폐쇄적인 기독교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그것에 안위하며 고고한 척 어깨에 힘주어 사는 나의 종교적 위선에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허위와 위선을 버리고 하나님과 내 자신, 그리고 이 세상앞에서 진실되게 살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겪고 지나가는 열병 같은 젊은 날의 물음과 방황이었겠습니다.
93년 스물두살의 여름, 그 물음들을 품고 여행하던중 남원의 동광원 공동체를 찾아가게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몇몇 농부들을 만나서 몇일을 함께 지낼수 있었는데, 외모나 옷차림은 그저 남루한 촌 어르신들이지만 하시는 말씀들이나 행동들이 그저 평범치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농터에서 땀을 흘리며 생명을 일구는 농부들이 자신의 흘린 진실한 땀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정화시키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역시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마음 깊은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싹트기 시작한 농부의 꿈이 아무런 연고 없이 97년 여름 홍성에서 열린 정농회 연수회를 찾게끔 했습니다. 연수회에 가서야 동광원에서 만난 농부들이 바로 김복관 선생님을 비롯한 정농회 어른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농회에서 귀농본부를 소개받아 그해 가을 귀농학교 4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대전에서 4학년 마지막 학기였는데, 귀농학교 모임에 푹 빠져서 학교수업도 빼먹고 일주일에 몇 번씩 서울에 올라가 모임에 참석하고, 지금의 아내와 전국 각지에 귀농지를 찾으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귀농준비를 하면 할수록 앞이 막막했습니다. 도대체가 길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학생신분으로 최소한의 귀농자금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골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 농사경험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부모님께서 제가 귀농할 때 자금을 지원해주시기로 했었는데, 마침 그때당시 IMF가 터지고 제 부모님 사업이 어려워지시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저에게 있는것이라고는 귀농에 대한 뜨거운 의욕과 젊은 몸뿐이었습니다.
보통 귀농하는 다른 분들을 보면 연령층이 40-50대가 많고, 도시에서 어느 정도의 전세값을 가지고 귀농합니다. 농터와 농가를 구입하거나, 구입은 못해도 임대하면서, 1,2년 여유있게 지낼 정도의 자금은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때 저희 상황은 통장에 20여만원이 전부였고, 연고도 없던터라 독립적으로 농터와농가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막막한 상황중에 정농회 어른이신 김천의 김성순 장로님댁에 상담차 방문했습니다. 김성순 장로님은 포도농사를 45년간 연구하는 자세로 지어오신 유기농 포도농사의 원로격에 속하시는 어른이십니다. 그런데 대화 끝에 당신 농장에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살 집도 있고 약간의 생활비도 주실수 있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속에서 농사일도 배울수 있고, 최소한의 생활도 꾸려나갈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98년 2월달에 학교졸업식 바로 다음날로 김천으로 내려갔습니다.
김천에서의 머슴살이 3년
머슴살이 한다는 각오로 내려갔습니다. 호미, 낫 한번 잡아본적도 없던 저였기에 몸으로 밑바닥부터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제딴에는 열심히 일했고, 장로님댁에서도 젊은사람이 기특해선지 이것저것 잘 챙겨주시고 배려해주셨습니다. 처음 몇 달은 몸도 적응이 않되어서인지, 손발이 붓고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도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음한켠이 무거웠습니다. 함께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같이 귀농준비를 했던 아내와 결혼도 못하고 혼자 내려와 있으려니 아내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편치않았습니다. 제 부모님의 사정은 점점더 어려워지면서 경제적으로 의지할곳 없던 저로서는 결국 결혼식은 일단 미루고, 함께 같이 내려와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신 장로님댁에서 저를 부르시더니 결혼식은 치루는 것이 좋겠다시면서 300만원을 내주셨습니다. 가불조로 주신 돈이었지만, 같이 일하게된지 갓 한달지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배려였습니다. 그 덕분에 결혼식도 올리고 아내와 함께 내려와 살게되었습니다. 집도 한 집에서 같이 살면 저희가 불편해 할까봐 동네에 빈집을 얻어서 살수 있게끔 도와주셨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고, 저희에겐 평생 잊지못할 은혜였습니다.
일하면서 폭넓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기농으로 포도농사를 재배하는 방법부터, 가공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그리고 여러 생협들을 거래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협들의 흐름들을 파악할수 있는 눈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98년 귀농 머슴살이 첫해를 지냈습니다. 98년 한해안에 학교졸업, 귀농, 결혼이라는 인생의 굴직굴직한 일들을 준비가 않된 상태에서 한꺼번에 일궈냈으니 얼마나 복잡하고 힘겨웠겠습니까. 의존적인 학생신분을 버리고 주체적인 삶을 배워가는 과정, 농촌이라는 구조에 적응해내는 과정, 남편과 아내의 역할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 모든 것이 새롭고 익숙치 않은 것들이라 새롭게 배워가던 적응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99년 둘째해를 맞으면서 조금이라도 독립적으로 농사를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도지가 없는 600평 포도밭을 소개받았는데, 도지가 없는만큼 나무상태나 밭상태는 경상도말로 ‘서글픈’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에겐 첫 실험지라는 생각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장로님댁에서 일하고, 주말엔 따로 농사를 짓겠다고 조율한 후에 야심차게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야 포도농사에 필요한 예초기, 경운기, 분무기등 농기구들을 갖추었지만 그때당시만 해도 삽과 낫 한자루씩이 전부인 상황에서 거름주고, 풀베주고, 영양제치고, 수확하는 과정들이 참으로 어설펐습니다. 그래도 첫 농사라고 달밤에 일하면서도 힘든줄 몰랐습니다. 수확한 포도는 무농약 포도주 가공용으로 전량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첫수확에 마음 뿌듯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0년 셋째 해는 조금 더 독립해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진 장로님댁에서 일하고, 금요일부터 주일까진 따로 조금 더 넓혀서 900여평 포도밭을 농사지었습니다. 작년까진 주말농장격으로 실험삼아 해 본 것이지만 이젠 하나의 업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임대차 농지원부도 만들고, 무농약재배신고(지금의 친환경인증제도)도 해서 행정적으로도 신경을 썼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일은 아직 서툰 반면에 면적은 넓기에, 비오는 날 하루 쉬어본적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저희 부부일손으론 부족해서 양가부모님들까지 고생시켜드렸습니다. 자식, 사위 잘못둔덕에(?) 땡볕에서 땀 흘리시면서도 하나라도 일을 덜어주실려고 그때나 지금이나 애써주시는 양가 부모님들에게 어찌 말로 감사를 채울수 있겠습니까.
비가 많이 왔던 탓인지 농사실력이 모자라서인지 포도 작황이 좋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황보다 더 큰 문제는 판로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협들은 미리 생산지들을 확보해놓은 상태였고, 도시에서의 사회경험이 없던 저희에겐 거래할만한 단체나 개인 소비자들을 연결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급기야 트럭에 포도를 실고 김천시내에 나가서 ‘포도사세요’를 외쳐봤지만 한상자도 팔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결국엔 어쩔수없이 밭 전체를 포도즙으로 가공해서 아름아름 직거래로 판매했습니다.
이렇게 3년을 장로님댁 신세를 지면서 조금씩 독립연습을 했더니, 이제 완전히 독립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저희에겐 제 2의 귀농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새로운 정착지와 적절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3년전 처음 귀농할 당시와 지금의 상황과 조건을 비교해보니, 여전히 경제적인 면에서 부족한 것은 그때랑 비슷했지만, 농사경험과 연고 확보라는 측면에서는 자신감이 서 있었습니다. 과연 지난 3년간의 세월이 헛되진 않았습니다.
상주에서의 독립 3년, 그리고 지금까지.
마침 상주 모서에 장로님댁 제2 포도농장 2400평과 논1300평이 있었고, 그 농장을 저희에게 임차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첫 독립치고 규모가 너무 커서 많이 망설였지만, 판로가 명확치 않은 제 상황에서 생산포도 전량을 무농약 포도즙 원료로 납품할수 있다는 조건에 끌려 상주로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농장에는 살집이 없는 상황이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중, 아는 분이 마침 콘테이너집을 자재값만 받고 주시겠다고 해서 믿고 작년 농사로 벌었던 돈을 선불로 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겨울이 끝나가는데도 아무 소식은 없고 결국 부도가 났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는사람이라는 것 하나 믿고, 계약서 한장없이 저희의 있는 돈 전부를 내주었으니, 저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은 둘째 문제고 김천집의 새로운 입주자가 일주일 후에 들어온다는 결정과 동시에 영농철이 다가오면서 급히 이주해야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농장에서 조금 떨어진곳에 마침 빈집이 있었습니다. 집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5년간 비어있던 집을 수리할새도 없이 일주일동안 1톤트럭으로 짐을 옮겼고, 03년 3월 한달 가까이 추워서 잘곳도 없이 김천의 아는 형님네를 숙소로 삼고 밤마다 출퇴근하며 전기와 지하수를 끌어오고, 보일러와 난방배관을 새로깔고, 내부 수리를 했습니다. 집수리에 경험이 없던 저인지라 눈물이 쏙 나올정도로 힘겹게 귀농벗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고쳐갔습니다. 영농철은 다가와서 밭에 할 일은 많고, 계속 집은 손을 봐야하고... 우리 부부는 심신이 다 지쳐가고 있었지만 잠시도 긴장을 풀을수 없었습니다.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4월 농번기는 오고 이젠 농사일로 바빠졌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자꾸 몸이 힘들다고 하소연해서 검사해봤더니 임신6주였습니다. 지금의 우리 포도의 상징인 향유가 세상에 생긴것입니다. 포도농사, 논농사외에도 자식농사도 지어야하니 저희에게는 가장 큰 영농규모였습니다.
01년은 유난히 가뭄이 심어서 다들 물관리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저희 또한 부족한 논물로 쌀겨농법이 실패해 논바닥을 기어다니며 풀과 씨름을 해야했으며, 포도밭도 비가 안오니 일명 ‘거름발’을 받지못해 수세가 약해지고, 수정도 잘 않되고, 수확철에는 수분부족으로 송이가 건포도처럼 쭈글쭈글해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좋지 못한 품질상태에서 계약대로 전량 납품할 수는 있었지만, 납품받으시는 장로님댁에는 정말이지 죄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향유는 12월에 태어났습니다. 임산부가 환자취급을 받는 산부인과에서는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다는 아내의 의견에 동의하여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주위 친구의 조언으로 서울의 한 조산원을 찾아가 원장님과 상담 후 편한 마음으로 향유를 기다렸습니다. 향유가 태어나던날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향유를 위해 노래도 부르고 손도 꼭 잡아주며 향유를 맞이하였습니다. 향유가 태어나는 순간 분만실의 조명을 어둡게 해 주어 엄마 뱃속에서의 분위기와 많이 다르지 않도록 배려하였고, 향유를 곧바로 엄마 가슴위에 뉘어주고 탯줄은 제 손으로 직접 잘랐습니다. 아내는 향유를 가진 동안 민족생활의학을 공부하였는데 원장님은 그 방법대로 냉온욕과 100분 나체요법을 향유에게 해주셨습니다. 그 후 아내는 향유를 키우면서 모유수유는 당연하고 아이의 면역력을 위해 냉온욕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년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향유는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는 판로도 독립하기로 했습니다. 가공용 납품이란 것이 편하기는 편하지만, 농부로서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을 자기 소비자들과 나누는 기쁨을 갖고, 자긍심을 가지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정성을 쏟을수 있는 만큼의 영농규모, 내가 소비자를 확보할수 있을만큼의 영농규모안에서 알뜰하게 수확을 하고 포도품질별로 생과, 포도즙, 효소, 포도주, 식초 등 아기자기하게 생산하고 판매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향유포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무농약 인증을 받고 처음으로 생협과 직거래 소비자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소비자를 가진다는 것은 단지 내 물건을 판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나의 생산물을 소비자들과 나누면서 그분들이 주시는 격려와 위로의 말한마디는 내가 농사지면서 흘린 땀방울을 씻겨줄만큼 큰 힘이 되고, 내가 농사짓고 사는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게 해줍니다.
소비자들은 건강한 농산물을 받을수 있기에 저희들에게 고마워하고, 저희는 그것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갈수 있기에 그분들에게 고마워합니다. 물건만 오고가는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과 신뢰가 오고가는 것입니다. 이런 고마운 나눔들을 지금까지 꾸준히 농사와 함께 누리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겨울 농한기에도 나름대로 바빴습니다. 저는 가을걷이를 끝내고 재작년까진 경북 봉화에 가서 한옥집 짓는 목수의 조수일을 했었습니다.. 부족한 생활비도 벌고 언젠가는 짓게 될 내 집을 위해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02년 가을부터 가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흙집도 겨울내리 직접 손을 보았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넣고, 바깥에 잿간 변소가 있는 옛날 흙집인데, 보일러난방과 입식부엌, 수세식화장실이 있는 신식(?)집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집입니다.
좀더 자연에 어우러지는 집 구조는 저희의 생활방식 또한 바꿔놓았습니다. 버려진 폐자재를 얻어다 집을 고치고, 겨울동안 땔감할 나무를 구하고,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내가 누운 똥,오줌을 내손으로 치워서 소중하게 거름으로 쓰고...... 이제껏 전문가에게 맡겨지고 돈으로 해결되는 모든 삶의 과정들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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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해서 안정되게 정착하는 것이 귀농자 누구에게나 쉬운일은 아니지만,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 우리 부부에게는 더더욱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한해, 한해 농사지을때마다 한고비, 한고비 아슬아슬하게 가파른 고개를 넘듯이 힘들었지만, 그 과정속에서 하나님은 저희를 몸과 마음이 성숙되고, 단련될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아내는 농사를 짓게 되면서 하루 하루 하늘을 바라보고 날씨를 가늠하며 마음 간절히 드리는 기도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해가 반짝거려도 일체의 모든것이 감사하다고 합니다. 실로 농사는 삶의 근본인 동시에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귀농은 단지 도시에서 농촌으로 공간만 바뀐것이 아니라, 신앙과 모든 삶의 가치관, 그리고 생활방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의식주 영역을 넘어 교육, 문화, 신앙에까지 좀더 자연적이고 공동체적인 관점으로 대안들을 찾고 있고, 그런 찾는 과정속에서 소중한 스승과 벗님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제 정착의 첫단추를 끼우는 지금,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어 감사의 감격이 넘칩니다. 두발도 아닌 단 한발 한발 내딜만큼의 길만을 보여주시며 인도하신 하나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시는 스승님들, 주위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도와주셨던 벗님들, 그리고 저희가 농부로서 자부심을 가지게 해주신 소비자님들 모두에게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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