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6월 4일 마리선녀 씀 -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자의 삶
목차
1. 들어가며
2.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의 증가
① 신자유주의의 등장 배경과 목적
② 신자유주의 시대의 무한경쟁과 국민국가의 역할
③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불안 이데올로기적 노동현실
④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노동시장의 비정규직 실태
⑤ 비정규직, 그 대안으로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3. 나가며
1. 들어가며
인간은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시작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부담을 안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직업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직업은 기본적인 생계유지의 수단이 되며,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특히 자본이 모든 가치에서 우선하는 오늘날에는 ‘어떠한 일을 하느냐’가 ‘어떠한 사람이냐’로 귀결되기까지 하므로, 안정된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곧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 충족의 수단을 선택하는 일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직업의 선택은 어떤 것 보다 신중하게 고려해야할 부분이다.
그러나 현 정세는 동구권이 무너지고 세계는 빠르게 자본주의화 되어 갔고, 급기야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시장경제체제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다. 자본의 자유로운 국경 이동과 국민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작은정부’는 시장의 자율적인 경제를 통해 인간욕구를 충족시키려한다. 이러한 기류는 우리 일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그 중 직업 선택과 그에 따른 권리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즉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노동자에게서 경영자ㆍ자본가에게로 그 권한이 이양됐다. 따라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기보다 자본가의 필요에 의한 선택 당함이 그것이다. 뭔가 평등하지 않은 계약 같은, 이렇듯 전도된 선택의 결과는 직업의 원래 목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바로 오늘의 주제인 ‘비정규직의 증가문제’ 또한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사회구조 안에서의 비정규직의 증가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더욱이 정규직은 ‘유능한’, 비정규직은 ‘무능한’이라는 식의 직업 상태가 인간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린 현실이고 보면, 개인의 자율적 직업선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 같다.
이렇듯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히 고용안정의 문제를 넘어, 사회구조적인 의식문제와 함께 최소한의 주체적인 인간이길 바라는 본질회복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고급 석ㆍ박사의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문제, 대량정리해고 등 모두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비정규직을 양산하게 되는 외부적 요인으로서의 국제정세, 그와 맞물려있는 국내의 자본력과 권력의 암묵적 합의행태 등, 이러한 결과들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지 생각하고자 한다. 아울러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주체적 인간으로서 좀 더 평등한 자본주의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펼쳐 보기로 했다. 모든 이의 평등, 그날이 오길 바라면서.
2.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의 증가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은 그 위력을 앞세워 온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회와 직장은 물론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삶을 초토화시키는 그 기세는 마치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과도 같다. 이러한 자본의 무한경쟁은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와 서민대중은 대량해고와 비정규직, 나아가 대량실업 등으로 빈곤과 불안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사회적 제어장치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선택과 권리마저 빼앗겨 절망과 상실로 살아가야 하는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자유주의의 등장배경과 목적, 무한경쟁의 국제정세와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따른 비정규직 증가문제 등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① 신자유주의의 등장 배경과 목적
신자유주의는 20세기 들어 두 번째로 겪게 되는 경제 불황이 서구 자본주의에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되면서 이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 보려는 목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복지사회와 사회보장제도 등 삶의 질을 우선하는 것이 대체적인 사회적 합의였으며, 완전고용이나 노동조합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것 등은 정부의 몫이자 목표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 후 불황을 타계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이러한 합의와 구실이 축소되고 해체되어 갔다. 해결 방법의 하나로 기업가에게 이익을 많이 주고, 그 이익으로 재투자를 하게하고 다시 생산과 고용을 늘려 소비를 촉진하는, 즉 순환적 경제방식을 채택하여 불황극복을 타계하려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곳곳에서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기업가와 자본가에게 이익이 더 많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금을 낮춰야 했고, 고용의 유연화로 기업비용을 최소화하는 등 정부정책의 기조를 자본가에게 맞추게 되니 사회보장제도나 완전고용, 노조 권리 등 다수의 서민대중을 상대로 하는 복지비용의 축소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러한 결과는 전 세계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되었으며,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에게 타격으로 돌아가 ‘양극화’ 현상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물결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은행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이른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통해 그 정책기조를 세계시장으로 확장 및 관철 시켰다. 이는 다른 나라 시장을 빼앗기 위해 나가는 것이므로 밖으로 진출하려면 남들이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 첨병이 바로 ‘국제통화기금(IMF)’이니 ‘세계무역기구(WTO)’니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행보는 자국의 불황은 물론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제질서의 우위를 선점하는 등 경제 외의 여러 이점을 확보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통용되는 ‘세계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세계 각 나라가 투자한 주식회사인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이 거부권을 쥐고 있어 다른 나라들이 꼼짝 못하게 되어있다. 제국화 된 미국은 대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전 세계적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사회적ㆍ구조적 양극화의 원인국이 됐다. 이러한 상황은 부의 세습과 가난의 대물림, 고용불안 등을 초래하게 됐고, 미래에 대한 상실감과 부자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 등으로 잠재적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사회는 더욱 불안하게 되고, 이는 많은 사회간접비용을 지불해야 함을 뜻한다. 결국 고용불안은 단순히 두 집단의 이질적 간극을 넘어 사회 전체의 악순환을 잇는 연결고리가 됨에 그 중요성이 크다 하겠다.
② 신자유주의 시대의 무한경쟁과 국민국가의 역할
우리나라에서는 ‘세계화’란 말이 김영삼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는데, 결국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관철을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해 놓은 수사에 불과하다. 미국은 군사력에서 세계 1위고, 세계경찰을 자임하며 전쟁을 계속 벌이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바로 ‘제국’임을 알 수 있다.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모든 나라가 미국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자본의 세계화 역시 ‘선출되지 않은 권력’, 그러니까 다국적기업들의 자기 모국의 힘을 믿고 다른 나라에 자유롭게 진출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은 ‘세계화’가 되면 개인의 자율성이 늘어날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본력을 전제로 하는 경쟁이므로 가난한 나라에게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애초부터 모국의 경제적 힘에 따른 경쟁이기에 그에 따라 거대한 나라의 기업과 시민들만이 세계를 마음대로 누비는 특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다국적기업이 제국주의적 힘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작은 정부론’이란 게 결국 민족국가의 틀을 약화시키고, 제국의 힘을 키우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국적기업의 힘이 강해지면 국민국가의 힘을 능가하게 되고, 정부는 축소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 자율에 맡기자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국민국가가 다국적기업을 엄청나게 지원하고 있고, 국제 정세는 제3국을 향해 국민국가의 약화를 강요하는 등 후진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작은정부’의 지향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우리와 외국(선진국) 사이에는 사안의 관점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암묵적 사회 합의를 전제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세금도 확보하지 못한 실정에서 정부의 제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계화의 ‘작은정부론’ 지향은 분명 그 바탕부터 선진국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무한경쟁시대의 국제정세는 개발도상국을 이제 막 벗어나려는 우리나라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많은 필요 요소가 먼저 선행 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유무역체결(FTA)'과 비정규직 양산의 원인이 되는 '고용의 유연성'을 우선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 한 것으로서 사회적 약자의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 오늘 이 시각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가난과 힘겹게 싸우는 농민ㆍ노동자, 그외 사회적 약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투쟁적 시위를 벌리고 있는데 이는 생존 문제의 해결 통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불안 이데올로기적 노동현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사회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금융계통에서 은행에 앉아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봐도 쉬이 알 수 있다. 일은 정규직보다 더 많이 하면서 봉급은 그에 절반 수준인데다, 사회보험 혜택도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국가기관을 포함한 여타의 공공기관과 대기업, 중소기업 등 여러 곳에서 이미 일상화 되어있다. 일부에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을 일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10%밖에 안 된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이 10%는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들고 자기 권리조차 옹호하기에도 바쁘다. 그들은 나머지 90%를 위해 뭔가 해낼수 있는 힘도, 방법도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이 자기 봉급을 깎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다. 도리어 어떻게 하면 비정규직을 조직화하고 그들과 연대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그도 노조 조직률 10%라고 하면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인데, 이들이 자기와 관련된 대기업에는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문제에서는 힘이 되지 못하다.
그렇다고 그들 역시 정규직이라 안심할 수 없다. 80년대만 해도 평생직장이었던 정규직조차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4~50대의 정년퇴직을 지칭하는 ‘사오정’이 옛말이 되는 것이, 요즘은 20대 퇴직자 백수들을 가리켜 ‘이태백’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민주노총으로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어떻게 거론되도록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은 것 같다. 현장에서는 비정규직 조직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고, 법체계 역시 ‘경제살리기’를 내세워 사실상 한쪽 의견만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노동계에서는 어떤 틀이라도 얻어내려고 한 것이 ‘노사정위’ 복귀가 아닐까.
그런데, 노동운동에서는 노조가 힘이 셀 때에만 자기 권리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부의 노동정책을 보면 노조하고 긴밀하게 상의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건 노조가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힘이 약할 땐 타협이 별 소득이 없다. 이건 역사가 증명한다. 약자 층을 대변하는 유일 단체인 민주노총 상층부의 적극적인 태도를 주문해보지만 현실적으로 노동자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과거 정권이 ‘안보 이데올로기’ 를 퍼뜨렸다면 지금은 ‘불안 이데올로기’ 인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노동운동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 정체성보다는 자본주의적 심성에 이미 포섭되어가고 있다는 듯이기도 하다. 즉 현실을 타파하기보다 이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택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유럽에서조차 신자유주의로는 더 이상 실업문제를 해결 하지 못함을 인식했지만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사회복지도 덩달아 후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더 이상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사회학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수명이 다해간다고 예측한다. 신자유주의를 먼저 시작한 선진국 쪽에서 서서히 무너질 것이고, 이러한 현상은 후진국으로 전이되어 빠른 해체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짐은 그 폐해로부터 시작되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후진국에서는 선진국보다 더 심한 빈부격차를 격고 있으며, 실업자도 많다. 또한 외국 자본의 횡포가 심해 이미 반발이 거세지고 있고, 결국 세계적인 민중연대가 진척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신자유주의를 이끄는 미국의 힘은 군사력인데, 미국은 계속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고, 이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세계반전운동까지도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의 일환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조짐으로 보아 머지않은 미래에 신자유주의는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는 여전히 서구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잡고 뒷북을 치고 있다.
④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노동시장의 비정규직 실태
국제정세에서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다고 하는 평가가 대체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국가경쟁력향상이나 외국인 투자유치에 많은 장애를 안고 있어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특히 국제통화기구(IMF)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같은 국제경제기구를 비롯하여 외국인투자가나 우리나라 경제계는 이를 빌미로 10여 년 간 지속적으로 고용관련 규제완화를 정부에 요구해 왔다. 그 중 근로기준법상의 정리해고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 경영상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 실태를 살펴보면 외환위기 이후 빠르게 유연화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시장은 매우 유연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자영업자나 무급가족 종사자들의 노동시장은 이들보다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볼 때, 노동시장의 경직성이기보다 노동의 양극화 현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최영기 원장에 따르면, “국제기준으로 보아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경직성의 근거로서 OECD 28개 회원국의 고용보호법제에 대한 비교자료에 보면, 200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12위에 놓여있다. 이 순위로만 보아도 평균치 이하는 아닐진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시장의 유연성 정도에 대한 객관적 비교는 고용관련법제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되면 각 나라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회구조와 관행이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유연성을 평가할 때 직무중심으로 짜인 횡단구조를 갖고 있으며, 노동조합은 기업 내에서 매우 강력한 직무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즉 기업 내부에서 직무 간 인력이동이 쉽지 않기 때문에 중도채용과 해고가 자유로운 제도와 관행이 발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기업중심의 종단구조를 갖고 있다. 즉 외부노동시장과의 유출입이 경직적인 반면, 기업 내의 인력운영은 훨씬 유연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시장의 특성을 무시한 채 어느 한 시점에서 비교한 고용보호법제만으로 전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비교 평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유연성 실태를 파악해주는 지표로 사업장 규모간 조직ㆍ비조직 사업장간 노동이동률 추이가 있다.
<노동이동률 추이>
(단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30~500인 기업 (유노조, 무노조) |
38.2 (33.2, 41.3) |
38.9 (31.4, 42.8) |
38.4 (34.6, 40.2) |
33.9 (30.4, 35.7) |
500인 이상 기업 (유노조, 무노조) |
22.2 (17.4, 33.8) |
20.5 (16.7, 31.2) |
20.1 (17.7, 26.5) |
14.3 (11.7, 21.0) |
평균 이직률 |
31.6 |
31.7 |
31.4 |
26.1 |
자료: 한국노동연구원 노동페널데이타
위의 표를 보아 3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만 보더라도 노동이동률은 평균 30%를 선회할 정도로 우리 노동시장은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실재로는 상당히 유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제계의 법제화 요구와 상관없이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이뤄졌고, 이는 전통적인 노동시장의 관행으로 보아 자본가의 주도적인 고용이 이미 실행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고용 불안을 초래하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의 가장 큰 이유로 노동시장의 유연화임을 이 도표는 잘 말해주고 있다. 즉 비정규직은 개인의 무능력 차원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⑤ 비정규직, 그 대안으로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갖고 있는 우리 정부는 ‘참여복지’라는 말을 기치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 무엇을 대변하고 있는지, 복지정책을 보면 모호하기만 하다. 사회의 기본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나름의 의무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부정부패를 없애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참여복지’를 위해 정작 함께 해야 할 그 대상자들과는 함께하지 않는다. 문제의 한 가운데 있는 노동자와 그들 조직의 힘을 빌리고,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외면하고 적대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괴리의 간극을 과연 좁혀나갈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누구를 위한 통치인가. 또는 사회복지인가. 노동자를 대량 해고와 비정규직의 증가 그 이후 사회복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부의 기업 쪽에 기울어져 있던 노사관계의 균형을 바로 잡고, 양자의 대등한 관계를 기본적으로 유지해 가면서, 문제의 사안을 풀어가야 한다. 경제대국이든, 참여복지든, 그 수혜자인 대상은 결국 국민이다. 그 국민 속에 다수의 서민들있다. 이들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결코 말이 쉽지 않은,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입법에 따른 대대적인 고용구조 변화의 국면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은 어떠한 입장과 실천을 모색해야 할 것인지 몇 가지 일반적인 과제를 대안으로 제시해본다.
첫 번째, 사회운동 차원에서 상시업무의 정규직화를 보다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합리적인 직무분석이나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또는 직무급을 도입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직군 세분화와 직무급제 도입을 용인하거나 이를 차선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현행법상 간접차별 기준을 적용하기 매우 어려워 차별을 고착화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물론 당사자들의 판단이 중요할 수 있지만 이는 사업장 내의 문제로, 사업장 내 노사 관계에 따라 현실적인 대안으로 직군 세분화를 통한 정규직화가 추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판단’은 차별적 요소가 얼마나 타 사업장으로 확산될 것인지, 향후 ‘합리적 고용수준’에 대한 행정해석과 법률적 판단이 어떤 세부 기준들을 마련해 나갈 것인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ex/ 하나은행 FM/CL 직군분리에 대해 노동부는 간접차별로 시정명령하였으나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됨.)
세 번째, 다양한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차별적 정규직화, 외주화 사례를 모아내어 그 심각성을 사회 여론화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일한 비정규직 내에서도 새로운 위계서열이 형성되는 현상이나 그로 인한 피해가 특히 사회적 약자나 여성에게 집중된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또 사회적 대응이나 법률적 대응을 가능한 집단화해서 간접차별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과 관련된 유리한 행정해석과 판례를 축적해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네 번째, 정규직노조의 경우 우선적으로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을 추진하여 함께 대응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왕 비정규직을 정규직화로 포함한 고용구조의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비정규직을 노조로 포섭하여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에게 보다 유리한 교섭조건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에 대해 기존 노조의 인식은 미흡한 상황으로 보인다.
다섯째, 기존의 여성노동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객관적인 직무분석과 평가가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한 단위 사업장 수준에서라도 노사합의를 통해 적정한 기준을 마련해 보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것이 향후 산별노조의 핵심적인 의제로 제기되고, 노조 차원의 연구개발과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절실하다. 더불어 여성노동 관련 사회단체 및 학계에서는 해외 사례 등을 통해 합리적인 직무분석 프로그램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여섯째, 국민의 생활정치 참여의 필요성도 간접적으로는 비정규직 양상에 영향을 준다. 즉 올바른 지도자를 뽑으므로 원하는 것을 수월하게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적인 정권이라 할지라도 그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의 계급적(대다수가 사회적 약자 층을 이루는 노동자와 농민 등 서민대중이 그 지지 세력들이다.) 한계로 인하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가 있다. 자신이 선택한 지지자에 대하여 연속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격려가 되므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게하며,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펴나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 정치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권리는 강하게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이 속한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은 지지하지 않는 지극히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기의 판단이나 생각 없이 여론몰이에 휩쓸려 엉뚱한 세력에게 지지를 보내는 등 의식부재의 행태는 노동현실의 변화를 막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3. 나가며
지금의 암담한 현실에 대해 나는 여전히 희망을 갖는다. 그 이유로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요, 살아있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사람이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수익성 위주로만 가는 현재 방식에 언젠가 규제를 가하게 될 것이고, 생태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결정에 더 많은 사람이 주체자로 참여하는 형태로 갈 것이다. 복지국가가 되살아나면서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많이 참여하고, 계획성이 더 많이 도입되는 자본주의가 되지 않을까. 복지국가의 개념에서, 기본적으로는 자본가가 주도권을 갖겠지만,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가 되지 않을까.
과제 주제인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도 어렵지만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를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공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권의 서민 대중을 자기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다수의 노동자 계급, 노동조합의 조직된 힘과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기업도 개혁해 나가고, 전체 사회도 바꿔나가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시대,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약지 못한 많은 대다수의 민중들의 생존에 무엇보다 정치권은 겸손하게 귀 기우리는 자세야 말로 해결의 첫 번째 실천이지 않을까. 인간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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