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사색

프랑스 68혁명의 교훈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3.
  - 마리선녀, 2004 -

프랑스 68혁명의 교훈



1. 들어가며


1968년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민중운동의 해였다. 즉 그것은 정권을 정복시킨 사건은 아니었으나 정치권력이 작용되지 않은 소수의 힘없는 학생과 노동자, 농민집단의 사회운동을 통하여 사회변혁의 물꼬를 연 해였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1968년 운동은 사회 제도적으로 억압된 인습과 문화를 넘어 인간 해방적 성격까지 담아내고 있다. 그리하여 이는 단발성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큰 의미를 지닌 ‘혁명’으로 규정해도 합당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또한 후대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건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68’혁명의 역사적 규명을 통하여 변화되는 ‘나’를 들여다보는 것도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2. ‘68’혁명의 동기

 

  프랑스 ‘68’혁명은 1956년부터 60년대까지 계속된 자본주의 경제 호황과 물질적 안정으로 인해 나타난 ‘소비’지향적인 사회와 그러한 대해본질적 질문을 던진 사건이라 할 것이다. 즉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 소유 여부가 아닌 인간적인 측면에 따라 삶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나아가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소외인간되찾고자 했다. 따라서 권위와 복종, 사회적인 위계질서, 전통적인 문화등 모든 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분출하게 되었으며, 남성중심의 사회를 위해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여성을 열등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 흑인은 소득과 교육, 지위 모든 면에서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습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호소하게 이른다. 더불어 도시와 지방의 균등발전, 의료의 확충, 교육의 기회 균등 확대 등 인간의 계속적 가치추구에 대한 요구도 하게 되었다.


국제 정세로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혁명이 각광을 받게 된 때였다. 즉 이집트를 비롯하여 신생 아프리카 나라들의 반식민주의 사상은 서구 지식인들의 연대의식을 불러왔다. 특히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은 강자의 지배와 이에 대한 약소국의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1968년 2월, 베트남의 미국개입에 반대하는 ‘범 유럽행동 회의’가 열렸고, 프랑스 대학생들은 그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외부적 사건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권위적인 드골정권의 사회적 침체는 국민적 저항의 누적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기존의 제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게 되었다. 


3. ‘68’혁명의 진행


그해 5월에 파리에서 발생한 혁명적 사태의 진원지는 빈민가에 위치한 낭테르 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파리 교외의 빈곤 지역에 급히 세워진 대학으로서, 1960년대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몰려와 살던, 수돗물도 없고 도로도 없는 황량한 지역이었다. 젊은이들은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세밀히 분석하고, 취약하고 위선적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분노했으며, 또한 전국학생연맹(UNEA)에서는 조직에 가입한 적은 수(전체학생의 10분의 1)의 학생들이 시위와 바리케이트로 격렬한 항거를 하였고, 결국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 비판의식은 학생사회에서 넓게 퍼지게 되었다.


  1968년 초부터 교육개혁의 요구는 거세졌고, 반베트남전 운동을 벌이면서 3월과 4월의 낭테르 대학은 뜨거웠다. 도서관부족 등 시설부족에 따른 시설확충, 교육 분위기 개선과 교수 비율의 향상, 기숙사 남녀 학생 왕래 등 교육여건과 질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와중에 대학 행정건물을 점거하던 학생 지도자인 다니엘 콩-방디는 체포되며, 이에 교육당국은 5월2일에 학교를 폐쇄시킨다. 학교당국의 그같은 엄격한 조치로 인해 시위장소는 변두리에서 파리 시내 한복판인 라탱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여러 다른 집단들과의 연대를 가져왔다. 학생들의 시위는 정부의 탄압, 노동자들과의 연대, 전 사회적인 분노 그리고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로 이어졌고, 노・농・학 연대로 확대된다.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대는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베트남 전에 반대하며, 드골주의를 공격했다. 또 프랑스 주요 노조들도 총파업을 촉구하며 교육개혁과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했으며, 언론계의 파업으로 신문들은 배포되지 못했고, 공장, 백화점, 병원 등 사회 곳곳에서도 혁명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68’혁명은 학생운동에서 시작하여 사회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에 대한 문화적 전통까지 바꿔놓았다. 특히 혁명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여성문제에 대한 보수적 사회가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결국 5월의 외침은 소수의 권리 찾기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회귀의 요구였던 것이다.


4. ‘68’혁명의 세계적 영향


  프랑스 ‘68’혁명은 소수 정예 집단이 다수를 향해 던지는 엄청난 폭탄이었다. 프랑스 전 사회는 물론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미국과 서독, 이탈리아,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 등의 서유럽 지역에까지 거센 사회적 항의가 일어났다. 특히 ‘68’혁명은 인도, 일본, 멕시코, 브라질 등지의 사회에도 연쇄적으로 불을 질러버렸다. 미국 서부의 버클리, 영국의 런던경제대학, 파리의 소르본대학처럼 운동의 진원지가 대학인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다. 그러나 정권의 성격은 우파였으나 정치적・사상적으로는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다. 좌파는 철학적으로 정당한 방향을 제시하였고, 많은 젊은이들은 좌파를 선호하였다.

  ‘68’년 5월의 시위와 파업은 조직적이지도, 사전에 미리 준비되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관하는 사상을 내세우기는 어렵지만 2천여명 정도인 소수의 신좌파는 사상적 측면에도 프랑스와 전 세계에 큰 힘을 보여주었다.


5. 68혁명의 교훈


1968년 5월 시위는 당장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정치문화와 노동문화, 여성의 의식 변화에 이르기까지 큰 자극과 도전의 계기를 마련해준 성과를 가져왔다.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68’혁명은 전 세계의 인권문제와 민중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권리의 지표가 되고 있으며, 고착화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세계 모든 인권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68’혁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전통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 다른 사회적 문제도 ‘나’의 문제로 인식하게 됨으로서 이제는 방관자가 아닌 삶의 주체적인 인격으로 살아야 함을 자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