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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사색

인도로 가는 길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 2005년 4월 22일 마리선녀 씀 -

인도로 가는 길



1. 들어가면서


“세계인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환상의 나라 ‘INDIA’ !” 제3차 '2005 인도생태공동체탐방을 떠나려는 단체(크리스찬아카데미와 평마 공동주관)의 여행안내 구호이다. 우리에게 있어 인도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하는 실감나는 말이다. 이렇듯 ‘깨달음, 도, 명상, 환상, 신비…’ 따위의 낱말과 짝하여 ‘인도’보다 더 맞춤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사실은 ‘파블로프의 개’와 다를 바 없다. 다분히 ‘조건반사’의 성격이 짙다는 얘기다. ‘인도’는 ‘종소리’요, ‘깨달음’ 따위의 연상은 종소리를 듣고 흘리는 ‘침’이라고 할까...


이러한 인식은 여행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방송에서도, 문학에서도, 영화・연극 등 예술분야에서도 거의 예외없이 동일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 인도는 어떤 나라일까? 우리 문학의 메타포를 지나서 인도로 들어가 본다.


2. 한국인이 인식하는 인도/인도인


작가 송기원은 「인도로 간 예수」를 통하여 아주 노회한 방법으로 대부분 사람들의 길들여진 사고를 자극한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인도로 간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라니, 편협한 종교인들에게는 묘한 상상력까지 발동하게 함직하다. 추측건대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으레 이런 상상부터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작가는 순진한 독자의 소박한 기대마저 저버린다.


진짜 인도가 아닌 자칭 도사들이 사는 지리산 어디쯤인가인 ‘인도’에 도착한 작중 화자인 ‘나’는 ‘청도’를 따라 수련한 끝에  석달만에 가부좌를 한 채 공중으로 튕겨 오르는 경지에 이른다. 드디어 진지한 ‘나’의 성찰과 더불어 ‘나’는 ‘내 자신을 그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뿐. 간신히 예수와 인도를 ‘구도자’와 ‘깨달음의 경계’로 ‘은유’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그나마 거칠기 짝이 없다. 섣부른 일반화로 문학적 승화에 실패한 작품이 된 것이다.


송기원식의 글의 인용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도는 마하리쉬,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등의 현자요, 도인들의 이름만이 유난히 들먹여진다. 그게 인도의 추상화된 형상이다. 그뿐 아니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인도 사람들은 지저분하고, 사회의식 없고, 과거를 먹고 사는 룸펜들이다. 그런 땅에서 그들을 위해 인생을 다 바친 데레사 수녀의 훌륭한 삶이 존경의 극을 달리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네 조선조 양반사회가 지향하던 반상(班常)의 차별은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카스트 제도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도의 이미지는 더 먹칠되기 일쑤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크게 4개 계층으로도 모자라 이른바 수천만의 불가촉천민 집단을 남겨두게 된다. 그들을 인도공동체로 품으려던 간디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하리잔’으로 바꿔 부르지만 스스로는 암베드카가 붙인 ‘달릿’ 즉 ‘짓밟힌 자’로 일컫는다(공식적으로는 Scheduled Castes).1) 누가 그들을 안아주었나, 간디인가 암베드카인가?


더욱이 인도를 여행한 사람들의 인도에 대한 평가는 거의 균일하게 나온다.2) 인도의 장점으로는 여유롭고, 낙천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초탈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점 등을 거론한다. 반대로 게으르고, 위생관념이 없고, 끈질기며, 호기심이 강하다는 것 등을 단점으로 일컫는다. 하지만 장점이 곧 단점이 되는 현실이 인간사회가 아닌가? 즉 여유로운 생활인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에도 다른 시각으로 보면 게으르다고 평가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인도에 가본 사람이나 가보지 않은 사람이 인식하는 진짜 인도의 실체는 무엇인가, 추적해본다.


3. 자신의 모습을 가진 인도/인도인


2003년 10월에 우리는 꽤나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대우상용차(옛 대우자동차 군산 상용차 공장)가 인도 최대 재벌인 타타그룹에 매각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3)타타그룹이라는 이름이 생소한 것은 물론, 더구나 그것이 인도의 기업이라는 데 대해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타타그룹은 인도를 대표하는 최대재벌로, 직물과 자동차, 철강, 기계장치, 금융업, 정보통신 등 25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다국적 기업으로서, 대우상용차와 쌍용차 외에 한보철강 인수에도 참여할 것으로 전해졌다.4)이처럼 인도는 산업정보기술이 발달한 나라로써, 일찍이 인공위성과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였고, 특히 질적으로 최고 수준의 정보산업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도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인도가 아니다. 그간 너무나 잘못된 편견으로 그들을 봤기 때문이다. 꾀죄죄하게 땟국물이 흐르는 나라도 아니고, 그저 산 속에서 벌거벗고 요가수행을 하는 요기들의 천국으로만 인식되던 인도도 아니다. 10억의 인구가 살면서, 옛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보화 사회를 일구어 나가는 나라로서의 인도가 우리에게 대두된 것은 우리의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씌워졌던 너울을 벗고 인도의 모습을 제대로 봐야만 하며, 문화의 차이를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1) 서구의 너울 - 제국주의적 시각


역사적으로 인도는 하나의 국가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천 년 동안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이 완전한 통일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정치적 명칭이 아니라 유럽이나 아프리카

와 같이 단순히 지리적 표현일 뿐, 통일된 국가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다수의 국가와 전통사회가 고유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혼성된 민족단위라기 보다는 한 대륙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종족사회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종족간의 문화적 경계 역시 한 시대의 정치적 경계와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도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통일된 국가로 보기보다 하나의 대륙이라는 의미로 볼 때 인도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도에 대하여 지난 18~19세기의 유럽 동양학자들은 유독 인도의 종교와 철학적 유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힌두교와 불교 및 힌두철학 등 인도의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나아가 이러한 고대의 경전을 기초로 하여 당시의 인도사회를 이해하거나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19세기의 영국 식민정부는 정치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인도사회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 그들은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단순히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산물로 취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인도의 기본적인 사회구조 원리가 카스트제도이며, 이 카스트제도는 힌두교를 토대로 하여 성립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영국식민정부는 이처럼 인도사회를 카스트체계에 따라 살아가는 종교적 신비로움에 빠져 있는 동양사회로 외부사회에 알리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한국인의 인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도 일찍이 영국인들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들이 만들어놓은 왜곡된 시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카스트제도와 힌두교를 중심으로 인도사회를 신비롭게 만들려는 태도는 문명인인 서구인은 인도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인도 사회를 연구한 대부분의 초기 학자들은 인도 사회는 정체되어 있고 그 중심에 불변의 카스트제도가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Max Weber)는 “카스트 질서의 불변성이 재산 분화를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기술 변화와 직업 이동에 대해서는 방해할 수 있었으니 이들은 카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이거나 의례적으로 위험한 것들이었다.” 이에 관한 한 역사를 물질 중심의 변화로 해석하고 있는 유물론주의자들의 상당수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그것은 마르크스(K. Marx)가 설정해 놓은 동양사회 정체론이라는 잘못된 가설 때문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와 베버의 분석은 많은 편견과 왜곡의 결과일 뿐 인도 사회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이후로 많은 서양인들은 인도는 근대 경제 체계로 발전할 수 없는 나라, 그리고 그 이유는 불변의 카스트 구조라는 견해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5)


하지만 인도의 카스트 체계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대로부터 심한 변화를 겪어 왔고, 그것이 경제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 적은 결코 없다. 인도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카스트’에 대한 정확한 용어 사용에서부터 출발한다. 인도 전통사회의 신분을 의미하는 용어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카스트(caste)라는 어휘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인도 고유의 사회 조직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2) 문화의 차이 - 똘레랑스


앞서 예시를 들었던 것처럼, 흔히 ‘인도에는 다른 사회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식의 신비적 기대가 인도사회의 왜곡을 부추기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더더구나 전문  인도 연구자나 관광객들까지 인도가 지닌 특수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사회와의 유사성은 간과된다. 사실 대부분의 인도인 역시 여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처럼 부와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도 흔히 알려져 있듯이 신비롭고 종교적인 성격만 강조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인도의 실체에 접근조차 못하고 말 것이다.


한편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난날 서구가 비서구를 연구할 때 흔히 범하였던 ‘서구의 문화가 비서구 문화보다 더 우월하다’는 시각을 비판해왔다. 문화 간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타문화를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똘레랑스(tolerance)6), 그것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신이다.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정신이라면 더 이상 인도의 문화와 풍토에 대한 비아냥은 금물일 것이다. 예컨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습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전통과 습속에서 이루어진 것일테고, 우리 눈에 게으르게 보이는 것은 열대지방의 일상적 풍토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일 수 있다.


3) 단일성과 다양성의 공존


수천 년 동안 인도 사회는 침략, 기근, 종교적 박해, 정치적 격변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인도만큼 길고 생생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흔치 않다. 또한 인도는 너무나 많은 대립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는 나라다. 서로 다른 민족, 언어, 종교, 지리, 전통을 가진 나라는 많겠지만, 스케일과 다양성 면에서 인도와 경쟁할 수 있는 나라는 드물다.


인도는 고통을 잘 견뎌내는 만큼 역동적이기도 하다. 사회 조직 곳곳에 현대 과학 기술이 응용되면서 피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반면, 시골 지역은 수백 년 동안 거의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 나라만큼 삶의 모든 면이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특히,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서구식 논리를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들에겐 ‘인도의 논리’가 이상하고, 복잡하며, 심지어는 분통이 터질 수도 있지만, 이 논리는 전체론적이고, 나름대로 조리가 서며, 독특한 우주론을 담고 있다.


가장 강력한 인도 고대 문명들도 현대의 인도 영토 전체를 망라하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인도는 단일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나라이다. 오늘날의 인도는 과거 식민주의 굴레를 벗어 버리려는 국민적 열의가 최근 일어나기 시작했다.


4. 나가면서


델리에서 기차로 하룻밤 거리에 있는 바라나시는 시바신의 탄생지로 힌두교 최대의 성지이다. 인도인들은 갠지즈강을 '강가'라고 부른다. 그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며, 갠지즈에서 화장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그중에서도 바라나시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을 위한 곳이다.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재가 되어 떠내려가고, 그 옆에선 수영을 하고, 목욕을 하고, 이를 닦고, 암베드카가 명명한 달릿들이 힘겨운 빨래를 한다.


죽음이 가까워 온 노인들은 이곳으로 몰려든다. 죽기 위해, 갠지즈 강가에서 죽어 그곳에서 몸이 식기 전에 화장을 하고 강물에 뿌려지기 위해... 먼 곳에 사는 이들은 수명을 다한 부모를 기차표만 쥐어주고는 바라나시로 혼자 보내기도 한다. 동냥을 해가며 기어이 이곳까지 와서 죽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되리라고 믿는 탓이다.


「깊은강」에서 엔도 슈사쿠는 오오츠를 이곳 바라나시로 보낸다. 가톨릭 신부이면서도 힌두교도들의 아쉬람에 기거하는 그는 그렇게 갠지스 강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와서 쓰러져 있는 천민들의 시체를 강가로 옮겨서 태우는 일을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듯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들을 돌보며 그들의 영혼을 끌어안는다. 엔도 슈사쿠가 추구한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부자도 거지도, 힌두교인도 기독교인도, 인도인도 한국인도 결국 존중받는 한 영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갠지즈 강을 사이에 두고 한 편은 삶과 죽음, 거지와 관광객, 구도자와 장삿꾼이 법석인데 다른 쪽에서는 평온한 숲이 펼쳐져 동그란 해를 조금씩 내놓고 있었다.


 

 

<미주>


1) 

http://www.sogang.ac.kr/~bksorel/이명권.hwp “암베드카와 현대인도불교”


2) 쁘리띠의 개인 배낭여행 웹진-떠나볼까, 인도에 대한 33가지 답변보기,

   http://www.prettynim.com/india/event1-01.htm


3) <동아일보> 2003년 10월 23일


4) <매일경제> 2003/11/28(금)


5) 이광수, 김경학, 백좌흠, “인도의 근대사회변화와 카스트 성격의 전환”, 「인도연구」제2권(1996).


6)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1995), 288ff. “똘레랑스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절충해서 합일점을 찾는 타협이 아닙니다.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서로 다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똘레랑스입니다.”

 

 


<참고 자료>


* 쁘리띠의 개인 배낭여행 웹진-떠나볼까, 인도에 대한 33가지 답변보기

  http://www.prettynim.com/india/event1-01.htm

* 이명권, “암베드카와 현대인도불교”(http://www.sogang.ac.kr/~bksorel/이명권.hwp)

* 한국인도학회, 「인도연구」 2,3,4,5,8권

* 송기원, 「인도로 간 예수」(창비, 1995).

* 엔도 슈사쿠, 「깊은강」, 이성순 옮김(고려원, 1994).

* 이광수, 김경학, 백좌흠, “인도의 근대사회변화와 카스트 성격의 전환”, 「인도연구」제2권(1996).

*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