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4월 1일 마리선녀 씀 -
마틴기어의 귀향
들어가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그것, 나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과 나의 손길과 몸의 움직임과 숨결을 받아들이는 나의 배우자이다.
국내에는 '마틴 기어의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THE RETURN OF MARTIN GUERRE) >은 중세 봉건제도가 무너져 내리던 16세기 프랑스의 한 농촌에서 일어났던 실제 사건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또한 이 영화는 보통사람의 삶의 기록을 통해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배경을 돌아보는 미시사적 사료로서의 의미를 담은 영화이기도 해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영화에서 보듯 아르노와 베르트랑드는 내면의 자신을 현실 세계로 끌어낸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이들 둘은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이며, 죽음을 담보로 해야 가능한 모습이다. 아르노와 베르트랑드의 암묵적 합의로 부부 생활을 유지하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만 법과 제도를 무시한 이들의 삶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르노는 마르탱의 숙부와 재산 문제로 갈등하고 끝내 숙부의 의구심으로 정체가 드러나고 만다. 진짜 같은 가짜의 삶을 선택한 아르노의 심리적 내면과 현실에서의 내면에 충실한 삶이 주는 결과에 대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을 빗대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영화, 8년만의 만남과 이별
어느 날 마르탱 게르가 돌아왔다. 그가 고향을 등진 지 8년만의 일이며 마을 사람들은 돌아온 마르탱을 반기며 기뻐했다. 마르탱의 아내 베르트랑드는 남편이 없는 동안 정조를 지켜 왔고 그런 그녀에게 마르탱의 귀향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었다. 베르트랑드와 마르탱은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보다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몇 가지 이상한 게 있었다. 마르탱은 그가 어린 시절 내내 사용했을 바스크 말을 하지 못했고 칼싸움이나 곡예에 관심이 없었다. 마을의 구두장이는 마르탱의 발이 떠나기 전보다 오히려 작아졌다고 했다. 그러나 마르탱은 나무랄 데 없는 농군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토지를 임대하거나 매매하고 거래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마르탱은 상속받은 토지의 일부를 팔기 시작했고 숙부인 피에르에게, 자기가 떠나 있었던 동안의 회계 장부를 넘겨 달라고 했으며 자기 몫을 돌려받길 원했다. 피에르는 마르탱이 떠나 있는 동안 상속을 분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베르트랑드의 친정어머니와 결혼했으며 무책임한 마르탱을 대신해 가문을 통솔하고 조카의 처자를 보살펴 왔다며 마르탱의 요구에 마음상해 한다. 마르탱은 마르탱대로, 피에르가 탐욕스럽고 완고하다고 여겼고, 두 사람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때마침 동네 사람들의 의심은 늘어만 가고 삼촌인 피에르는 마르탱의 실체에 대한 진위를 파헤치며 맹렬하게 공격한다. 베르트랑드는 숙부의 강요에 못 이겨 남편의 고소인이 되고 만다. 결국 아내가 서명한 공소장으로 마르탱은 잡혀가고 그의 정체에 대한 재판이 열리면서 가짜임이 드러난다. 아르노는 아내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마치며
아내 베르트랑드는 정말로 가짜 마르탱인 것을 몰랐을까? 재판관은 왜 베르트랑드에게 동조의 죄를 집중적으로 묻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볼 수 있듯 두 남녀는 내면에 충실했고 그 결과 목숨까지 버리게 되는 불이익을 받았다. 진정 내면에 충실 한 것이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될까. 자기로 살기란 정말 어려운 것인가. 제도란 진정으로 인간을 위해 만들어 졌는가. 내면의 나와 현실의 나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영화를 마치면서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해본다.
중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프로테스탄트가 전파되고 있었다. 아르노는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으로 새로운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베르트랑드와의 위험한 결합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주변의 세세한 허락을 받아야 했을 그동안의 관습에서 허락이 필요 없는 프로테스탄트의 신과 관계는 먼저 아르노의 정신적, 종교적으로 자유로웠을 것을 짐작케 한다. 또한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자 했던 심리도 누구나가 그러하듯 이해가 된다. 물론 베르트랑드의 암묵적 동조가 없었다면 불가능을 했을 것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결합 이면에는 종교개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 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이 둘의 이해받을 수 없는 결합을 선행하도록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내면에 충실했으며 서로의 동조자가 되었고 그 결과 아르노는 교수형을 받는다. 자신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살리고 인간을 위한다는 법과 제도 앞에서 죽음으로 진실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지난날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새롭게 다시 살아보고 싶은 게 모든 이의 바램 일 것이다. 진짜 남편은 아니지만 진짜 보다 더 진짜같이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존중한 아르노의 모습과 재판장에 나타나 법적 남편의 권리를 주장하는 마르탱의 모습에서 베르트랑드에게 누가 더 필요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교수형으로 끝난 아르노의 삶을 보면서 사회적 모순이 인간에게 어떠한 결과를 주는지에 대해 영화가 끝난 지금에도 가슴 아픈 잔상으로 남는다. 두 남녀 주인공을 보면서 인습과 관습, 법과 제도에 눈치 보며 적당히 다수에 편승해 안주하며 사는 삶, 내면에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된다. 이 사건의 실질적인 문제는 누가 누구를 속였다는 단순 사기행각이라기보다 버림받은 베르트랑드의 새로운 삶과 아르노의 자기 정체성을 제고하려는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진 부분에서 암묵적으로 창안된 결혼 이라는 공모 가능성이 오히려 사건의 진실성을 더 크게 보여주는 것 같다. 나의 결혼은 나의 선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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