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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사색

생태적 삶을 찾아서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 2005년 4월 29일 마리선녀 씀 -

 

생태적 삶을 찾아서

- 생태, 다양성과 순환 -




‘생태’를 찾아들어가며


“명사. 생물이 자연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


국어사전이 담고 있는 ‘생태(生態)’의 어의적 의미이다. 뭔가 똑 떨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추상적이다. 그런데 시중에는 이런 ‘생태’라는 말을 바탕으로 해서 쓰이는 말이 매우 많다. 생태정치, 생태신학, 생태신앙, 생태영성, 생태건축, 생태환경 등등이 그것이다. 이 말은 기존의 ‘정치’, ‘신학’, ‘신앙’, ‘영성’, ‘건축’, ‘환경’과 어떤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인 ‘생태적 삶’이란 또한 무엇인가? 이 난해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현주의 설명부터 들어보자.


“생태적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저 아담에서부터 인류 존재 전체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살고 있음을 머리로만 '아, 그렇지' 하고 인식하지 말고 우리의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 그 지혜와 지식이 배어 들어감을 말합니다.”


꽤나 종교적이요 현학적(衒學的)인 수사(修辭)로 차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구체적인 삶의 양식과 거리가 있는 설명 때문에 그런건 아닐까 싶다. 사실 느낌을 말로 표현하면 10분의 1이나 표현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글로 표현할 때에 어느 정도나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될까?


이에 대한 곽노순의 표현은 이현주보다 쉽게 들린다.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는 것이고, 부자연한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며, 우리가 대자연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인식이 동트는 것이며, 대자연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은 몸으로 그 의미를 듣게 한다. 어느 정도 이해되는 말이다.


한편 이렇게 좋아 보이는 ‘생태’라는 말이 다분히 왜곡되어 쓰이는 경우도 있다. 작년에 괴산군청에서 내가 사는 괴산군 장연면 지역에 골프장 건설을 추진하였는데, 골프장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던진 설득 논리 중의 하나가 역시 ‘생태’였다. 친환경적, 생태적인 골프장을 조성하여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설득이 주효하지 않아서 골프장 건설이 중단되었지만 왠지 씁쓸한 기억만 남는다.


이처럼 ‘생태’라는 용어는 상당 부분 오염되어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럴수록 바른 ‘생태’의 의미를 찾고, 참다운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나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생태적인 삶은 무엇인가? 이론적인 설명이 아닌 나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태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생태적 삶에 대한 오해?


박병상은 웰빙, 유기농산물, 채식주의, 정수기와 공기정화기, 약수터, 생태주택과 전원생활, 애완동물, 아이와 어른들의 체험과 놀이문화, 장묘문화, 귀농 느리게 살기 등의 주제를 통해 일상 속에 숨겨진 ‘생태적 삶’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기적 웰빙은 다 ‘오해’라는 것인데, 그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웰빙, 웰빙, 요즘 장안의 화두는 단연 웰빙이다. 웰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저 웰빙이다. 물도 공기도 먹는 것도 웰빙이고, 옷도 집도 웰빙이다. 웰빙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세상, 웰빙은 이 시대 상업주의의 절대가치로 등극했다. 어떻게 살아야 웰빙일까. 항균제품, 명품, 수입생수, 유기농 채소, 친환경 실내장식, 생태기행, 생활한복, 클래식, 와인, 골프, 스킨스쿠버, 애완동물, 쇼핑, 헬스클럽, 양주, 홈시어터, 명상, 아로마, 스파, 반신욕, 유비쿼터스, 전원주택과 같이, 문명의 해택아래 살면 웰빙인 것일까. 최근에는 자연을 실내에 옮겨다 놓은 친환경적 생태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데, 그게 웰빙일까.”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자기만의 웰빙은 불가능하다고. 내 웰빙은 내 삶을 지탱하는 이웃, 생태계, 문화, 환경이 두루 편안하지 않으면 결코 지속될 수 없다고. 맞다고 생각된다. 유기농 채소만 보더라도 힘겨운 유기농업을 감당하는 농부가 있어야 할뿐 아니라 그러한 농산물을 신뢰를 바탕으로 소비자에게 연결해주는 매장이 주변에 있어야 내 식탁에 유기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지 않은가. 결국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웰빙을 넘어 이웃의 웰빙을 먼저 도모해야 한다. 그 이웃에게는 사람은 물론, 동식물과 그들의 건강한 생태계도, 선조로부터 이어온 문화와 전통도, 후손의 건강한 생명도 포함될 것이다. 결국 박병상의 설명은 자연에서의 공동체적 삶으로까지 뻗는다. 즉 이 시대 ‘생태적 삶’의 극한인 귀농을 말한다.



귀농(歸農)?


세상의 모든 화두가 ‘돈’을 지향하는 어지러운 경쟁사회에서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결론은 귀농으로 모아진다. 설사 귀농까지 아니더라도 이웃을 돌아보며 안부를 묻고 위로와 격려와 희망과 행복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느린 삶을 추구하고 싶어진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회색도시에서 쫓기듯 살아가던 도시인일수록 문득 자신을 돌아본 후 느리게 살거나 귀농을 결심하며 가족을 설득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귀농한 이후 먹고사는 일에 매몰되기 십상이고 유기농산물 재배와 관련하여 본의 아니게 이웃 간의 불편함이 생겨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관행농업을 하는 기존 주민들의 완고한 비협조로 생태적인 삶이 어려워지고, 이웃을 상실하여 생기는 외로움으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먼저 귀농해 자리잡은 사람 주변으로 모여 공동체를 조성하려 애쓰지만 대부분의 귀농인들은 도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또 그들의 자식이 농사짓겠다고 하면 기분이 흔쾌하지 못하다. 농사짓는 도시인의 삶을 엉거주춤유지하느라 몸도 마음도 예전보다 훨씬 더 지치곤 한다.


작금의 농촌은 중앙 집중적 생산력주의에 매몰돼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동원해 밭떼기로 농사짓고 나 몰라라 판다. 찌들대로 찌든 농협 빚에 의존해 하루하루 연명한다. 그들에게 유기농업 전환은 파산을 의미한다. 유기농산물을 재배하는 귀농인들은 어렵더라도 관행농업 농부에게 꾸준히 희망을 불어 넣는다. 도시의 유기농산물 소비자들은 생명이 순환되는 농촌을 살리기를 위해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농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안전한 먹거리를 유지하는 길이요, 국민 건강을 지켜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 식대로 살기!


나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으로 귀농(歸農)했다. 이제 3년째이지만 이렇게 농촌에서 내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적같이 느껴진다. 물론 농사를 짓느라 힘들고,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 경제적으로 쪼들리지만, 그렇더라도 나의 마음은 윤택하다. 아마도 도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시대의 귀농(歸農)은 “산업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문명으로서의 귀농이자 인간과 자연이 상행하는 자연친화적 삶”이라는 어려운 설명이 붙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내 식대로 사는 마음을 드러내본다.


우선, 나는 자유롭고 싶다. 나를 제약하는 그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어쩌면 모든 구조적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는 아나키즘의 생각이 내게도 있는 모양이다. 그 최상의 가치인 정신적 자유의 회복(?)을 위해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치장하면서 산다. 어떤 이들은 무능력하고 적응력이 없는 사람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생활은 나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충만하게 해주고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둘째, 자연의 편안함을 누리고 싶다. 어렸을 적 냇가에서 물장구치고, 물고기 잡고, 산딸기 따먹고, 누렁이와 뛰놀았을 때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 대자연 속에 놓여있다는 느낌을 다시금 느끼고 싶은 것이다. 물론 도시의 환경재해와 황사에서 나만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일단 자연 속에서 땅을 밟고 있다는 자족감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셋째,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그다지 많은 비용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2년간 이곳 괴산에서 농사지으며 살다보니 들어가는 비용은 별로 없었다. 일단 쌀이나 감자, 고구마, 채소 등의 기본적인 먹거리가 해결된다. 나는 이곳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쌀을 생산하고, 고추농사를 짓는다. 문제는 그리 큰 돈이 되지 않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문화비용에 애를 먹게 된다. 이는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넷째, 단순하게 살고 싶다. 나의 가치관과 무관한, 형식과 허례허식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꾸며내는 삶은 의미가 없다. 정작 필요한 부분 이외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불필요한 삶을 행복과 편안함이라고 치부하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래의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신나게 살고 싶다.


다섯째, 자립적으로 살고 싶다. 스스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립적인 인간이어야 생각도 가치관도 자립적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우리 선조들은 만능인이었다. 자신이 집을 짓고, 공구를 만들어내고, 농사를 짓고, 자녀들을 키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어느 것 하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이른바 전문가가 생겨서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본래 인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여섯째, 공동체적 삶을 살아내고 싶다. 마음과 가치관과 삶의 양식이 흡사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삶을 나누는 구조 또한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음이 주변으로 널리 확산되면 더 좋을 것이고...



결론


말로 표현하자면, 결국 나도 생태적인 의미의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생태적인 삶은 마음가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생태는 다양성과 순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양성은 개성이고 순환은 평등이다. 내가 아니라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이웃, 그 안에서 순환도 다양성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웰빙을 기획 취재한 어떤 신문기자는 “우유를 먹는 사람과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웰빙족에 가까울까” 묻곤 정답이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우유를 앉아서 먹는 사람에 비해 배달하는 사람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걷거나 뜀으로써 충분한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도 대자연 속에서 내 몸을 움직여 먹거리를 거두고, 마음의 씨를 뿌릴 것이다. 마음과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정착할 그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