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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사색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y 마리산인1324 2007. 6. 17.

 - 2007년 6월 4일 마리선녀 씀 -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 글머리에서

                

전혜린,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불타는 것 같다. 정열을 불태우다 사라진 여인,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여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여성 등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다니는 많은 수식어가 그녀의 짧은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상징하는 여러 수식어가 전혜린의 사후 세계를 왜곡하고 박제화 시키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든다. 그녀가 정작 살고 싶은, 아니 ‘어떤 사고의 인격체인가’를 생각해볼 때, 그녀는 진정한 자신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없이 자신의 본질을 찾으려는 몸부림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그토록 치열하게 찾으려던 ‘자기’를 발견했는지, 더 이상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생을 마감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 ‘답게’ 그가 ‘원’하던 삶을 살다 갔다.   


2. 전혜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① 전혜린의 출생, 그리고 열정의 시간들

전혜린은 평남 순천에서 1934년 1월 1일에 전봉덕(田鳳德)의 8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후 중간에 독일로 유학, 뮌헨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법대 교수와 이화여대 강사, 성균관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56년에 당시 법학도인 김철수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1964년 이혼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1965년 1월 11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막달레나’ 라는 영세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교는 카톨릭인 것 같다. 그녀의 사후 직업란에는 번역가, 수필가로 불리 운다.


그의 생존의 작품으로는 압록강은 흐른다 (2000, 범우사), 목마른 계절 (1994, 범우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89, 민서출판사),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1989, 민서출판사)와 그 외 여러 편의 평론서와 번역서를 남겼다. 특이한 것은 작품 중에 ‘H.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번역하면서, 자신의 자서전적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89, 민서출판사)의 동일한 제목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후에 그녀의 일기 내용 중 “내가 번역하고 싶은 것은, 1. 내 야심을 만족시키는 것, 2. 혹은 나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것, 이제 이 두 가지 방향으로 좀 더 노력해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을 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즉 번역을 하면서 평소 자신의 생각과 사상적 갈망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풀어내려 했다. 다른 예로는 “오늘 파스테르나크의 멋진 시를 발견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점점 나에게 친근해진다”라는 표현을 보며 다른 작가의 글에 흠뻑 빠져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인 같다.


② 전혜린, 그녀와 그 시대

전혜린의 유년기는 근대화를 기점으로 서구열강들의 식민지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을 즈음이었으며,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놓여있을 때이다. 당시 일제 고등문관 시험 사법·행정 양과 합격자인 천재적 지식이며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맏딸인 전혜린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모든 뒷바라지에 전력을 다했으며, 맏딸에 대한 극단적인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부모는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훗날 전혜린은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겐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나를 무제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라고 회고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며 정치ㆍ사회적으로 대 혼란의 격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중에도 그녀는 언제나 극점(極點)을 추구하였고, 평범한 일상이 주는 권태를 못견뎌 하면서, 언제나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 그 찰나, 충만함이 고조에 이르는  순간"을 갈망했다. 초극하기 위해 처절한 고투(苦鬪)의 정신은 "전혜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그런 그녀의 광적인 모습에 대하여 일부는 물질.인간.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관념.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철저한 두 세계의 분리적 사고에 대해 "영아기부터 싹트고 지금까지 붙어다니는 병"이라고까지 한다. 그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때 홍역처럼 전혜린 신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울법대 입시에서 수학 과목 0점을 받고도 합격한 일화는 오늘에까지 유명하다. 과락이 있는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터라 전혜린은 사정 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되었다. 수학 과목의 0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전혜린은 이렇듯 인문학에 관한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수학이나 과학,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호감은 전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교육철학에 대하여 1959년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학교 점수는 아이의 장래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들의 우스꽝스러운 허영이다. 그것을 나는 증오한다 .나는 부모님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왔다. 공부를 하는 것이 나에겐 마음에 들었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우선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에서 지금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라고 고백한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전혜린은 경기여고 시절의 단짝 친구가 다니던 문리대에서 ‘오든’이나 ‘엘리어트’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盜講)했다. 법학 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 그리고 온갖 종류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③ 페미니스트 전혜린의 삶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전혜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한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여성의 심리로서 분석되는 등 관심의 대상으로 지속되어 오고 있다. 그녀의 수필이나 그의 번역서를 보면 거의가 정신세계 즉 본질을 향한 갈망을 그리고 있다.


1950년대 후반기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이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던 때였으나, 그녀는 해방기를 맞아 아버지의 늦은 법학과 법조계 입문을 통하여 사회적 통념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아버지의 절대적인 후원이 전혜린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에 후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결혼 그리고 이혼의 과정을 보면, 그녀의 가정과 다른 새로운 세계와의 충돌이 있었음직하다. 같은 법학도와 결혼은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요했을 것이고, 개인의 인격체에 대한 자유로운 활동에 많은 제약이 뒤따랐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결혼은 여성에게 있어 전적으로 남성을 위한 존재로 바뀌는 순간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다소곳한 여성상과 현모양처의 여성이 최고의 여성으로 인정받던 시대임에 그녀의 현실은 그녀로 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도저한 페시미스트이자 동시에 순간순간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생의 찬미자 전혜린은 ‘평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의 패배자이기도 했다.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경험에서 행복을 느낀 모순의 존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광휘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맞은 성급한 죽음이 아닐까.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전혜린에게 민족적 역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의 차원으로 떨어졌거나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그 가운데에 놓인 당대의 현실이라는 차원은 생략돼 있다. “인생이란 고되고 이익 없는 일만으로 이루어지고, 최후의 휴식을 주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래, 오래 발을 끌며 걸어야만 하는 잿빛의 암담한 풍경처럼 나에게 보였다”에서 세상을 향한 그녀의 고백을 통하여 시대의식을 엿볼 수 있다.


④ 아름다운 삶, 전혜린

“나는 절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생은 나에게 평범과 피상의 것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중세와 대리석을 동경한다. 그릴파르쳐의 '절대 세계'를 나는 동경한다. 무섭게 깊은 사랑, 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 죽고 싶은 환멸 등, 일상생활의 평면성이, 내용 없는 인간들이 나를 질식시킨다. 나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다. 깊은, 핵심을 뒤흔드는 체험, 그것을 이제 곧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생명을 세계로, 눈부신 햇살 속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무겁게 책임감을 느낀다. 그 작은 생명에게 맹렬한 의무감을 느낀다”-일기 중에서


그녀는 출산을 앞두고 자신이 고뇌하는 세상에 대하여 아이가 느낄 그것에 가슴 저린 염려와 의무감을 느낀다. “난 그 애에게 완벽하게 행복한 생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저 그 애가 최소한 사랑에는 굶주리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도록 노력하길 다짐할 뿐이다. 그밖에는 어쩌면 좋을지 난 알지도 못하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교육? 아니다. 난 나 자신을 교육시키고 형성시켜야 한다. 난 정말 아직도 너무나 불완전하다. 내가 어떻게 한 생명을 명령하고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안 된다. 안 된다! 그저 난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병이 들면 기도를 드리고, 괴로워 하면 울고……. 난 착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아무런 요구 없이 희생만 치르며 난 사랑할 것이다.”-일기 중에서


전혜린, 그녀의 모성은 이 땅의 모든 여성과 같다. 그러나 다르다. 그녀는 아이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과 희생만을 주려한다. 그리고 한 생명에 대해 소중하고 진지하고 겸허하다. 그것이 오늘의 많은 여성과 다른 점이다.


3. 나가면서


안녕, 나의 일기장아. 넌 내 친구가 되어 버렸어. 고독 속에서 키터가 안네 프랑크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난 너에게 내 가슴을 샅샅이 털어 놓을 수 있다. 내가 괴로워할 때 넌 나를 비웃지 않고 내가 기뻐할 때 넌 날 시기하지 않는다. 난 미치게 너를 사랑한다.-일기 중에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저마다 다르면서도 비슷비슷하기도 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 그 것에 관하여 '이렇게 사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전혜린의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 유리같이 투명하고 솜사탕같이 달콤한, 숲 속의 아침이슬같이 투명한 영혼이 내게는 보인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전혜린이 불꽃같이 살다간 아름다움이 오늘에까지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이유를, 그리고 지금 나의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의 깊은 고뇌와 그녀의 고뇌를 비교하면서, 본질을 향한 그녀의 몸부림이 나의 몸부림인냥, 나와 그녀를 일치해보기도 한다. 어쩌다 일상의 지루함에 못 견디어 할 때, 나는 그녀의 열정적이며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떠올려 본다. 획일화된 세상, 자기의 존재조차 부정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며 사는 세상에 전혜린, 그녀의 순수는 나의 삶에 이유가 됐다. 나는 얼마나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