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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무정부주의 Anarchism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empas>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41315#

 

 

무정부주의 [無政府主義, anarchism]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

 

개요

 

국가나 정부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정부나 통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연유한 이 말은 일찍이 영국 청교도 혁명에서의 수평파(水平派 Levellers)나 프랑스 혁명기의 앙라제(Enragés:전투적 급진파)를 비난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법규를 부인하고 재산을 압제의 수단으로 간주하며 죄란 사유재산과 권력에 따르는 사회적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인간이 법과 사회체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원리를 실천하게 된다면, 사회성과 타고난 기질의 자유로운 발전에 기인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해왔다(→ 법철학).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사상가에 따라 각양각색이지만 주요한 차이는 첫째, 이상사회에 있어서 집단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둘째, 사적 소유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셋째,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3가지 관점에서 발생한다. 무정부주의의 종류에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프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등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와 미하일 바쿠닌으로 대표되는 집산주의적(集産主義的) 무정부주의 그리고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가 있다.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경계로 해 공상적 무정부주의와 과학적 무정부주의로 나누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이론에 치중되어 있는 철학적 무정부주의와 정치·사회적인 실천방법까지 구상하고 있는 혁명적 무정부주의로 대별된다. 이밖에 19세기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이 있는데, 노동조합의 직접행동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으로 라틴 제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무정부주의 사상가

 

정치권력에 대한 부인의 전통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스토아 학파와 퀴닉 학파에까지 소급되며 중세의 카다리파 등 이단 세력이나 종교개혁기의 재세례파(再洗禮派)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간혹 현대의 무정부주의 작가들은 이들을 무정부주의의 원조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물질적 세속으로부터 영적 은총에로의 피정(避靜)을 통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적 무정부주의가 다음의 내용을 공통분모로 하는 정치적·사회적 무정부주의와 양립할 수는 없다. 정치적·사회적 무정부주의의 논리는 첫째, 권력을 기반으로 삼는 현존 사회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며 둘째, 강제력이 아닌 협력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사회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셋째, 새로운 사회질서를 유도해내는 방법론을 포함한다.

 

무정부주의 공동체의 윤곽이 최초로 드러난 것은 영국의 청교도혁명 직후 제러드 윈스턴리에 의해서였다. 신을 곧 이성으로 파악한 그는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Truth Lifting Up Its Head Above Scandals〉(1649)에서 무정부주의의 기본원칙들을 정립했다. 권력은 부패하고 부(富)는 자유의 이상과 배치된다. 권력과 부를 모태로 죄악이 잉태된다. 지배하는 자가 없고 생산과 분배가 공동으로 이루어지며 구성원들이 위로부터의 법규가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사회에서만이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유토피아). 윈스턴리는 무정부주의 이론의 개척자인 동시에 선구적 실천가이기도 했다. 사회적 불의는 대중들 자신의 행위로써만이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한 그는 1649년 디거스(Diggers) 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일단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의 산기슭을 점령해 자유주의적 공산사회를 형성했고 지주들의 공격에 소극적인 저항을 고수했다. 이들의 공동체가 지역주민들의 반발로 와해된 후 윈스턴리는 생사가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으나 그의 이론은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전통을 이루었으며 훗날 윌리엄 고드윈의 저작 속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고드윈은 알렉산더 그레이 경(卿)이 "무정부주의의 본질을 가장 완전하게 집약했다"고 평가한 바 있는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1793)에서 권력이란 자연에 역행되는 것이며 사회악은 인간이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전제한 뒤, 소규모 자치공동체(parish)를 기본단위로 하는 지방분권적 사회를 설계했다. 이와 같은 공동체에서는 정치적 절차가 최대한 배제되는데, 다수에 의한 지배도 억압의 일종에 불과하며 투표나 선거방식은 개인의 책임감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타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제공한다고 하여 부의 축적을 비난했고 필요에 따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느슨한 경제체제를 구상했다. 고드윈은 기술적 진보를 예견한 인물이기도 했다. 산업의 발달은 근로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사람들이 단순화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 것이고 결국 권위없는 사회로의 전이(轉移)에 도움을 줄 것이다. 윌리엄 워즈워스, 윌리엄 해즐리트 등 수많은 작가들이 고드윈의 사상에 빚을 졌으며, 특히 퍼시 비시 셸리의 〈매브 여왕 Queen Mab〉·〈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Unbound〉는 무정부주의 시라고 할 만하다. 그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는 로버트 오언을 중개자로 영국 노동운동의 기반을 형성했으나 무정부주의자들이 고드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에 들어서이다.

 

무정부주의 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었다. 이미 2월혁명(1848) 무렵에 급진적 언론인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 Qu'est ce que la propriété?〉와 〈경제적 모순의 체계, 빈곤의 철학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ère〉을 집필해 사회주의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돌연 "나는 무정부주의자이다"라고 선언한 프루동은 무정부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카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등과 교류했고 2월혁명의 체험으로부터 자유주의 이론을 도출해 〈연방제의 원리에 관하여 Du principe fédératif〉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역량 De la capacité politique des classes ouvrières〉을 저술했다. 방대하고 다양한 저작을 남긴 프루동은 어떠한 정치체계나 정당으로부터도 자유롭기를 바랬지만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등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진정한 비조(鼻祖)로 평가되었다.

 

프루동이 설파한 무정부주의 이론의 골자는 상호주의·연방주의·직접행동주의로 요약된다. 먼저 상호주의란 평등주의에 기초한 사회공동체의 건설을 뜻했다. 부(富)를 도둑이라고 한 그의 언명은 결코 공산주의의 옹호가 될 수 없으며 재산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서 남용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프루동은 생산에 필요한 토지와 도구에 대한 지배권인 '소유'를 자유를 위해 불가피한 하나의 보루로 간주했다. 그가 마음속에 그린 사회는 자영농민과 독립적인 장인들로 구성되고, 노동자연합체가 공장과 공공시설을 운영하며, 이 모든 요소들이 인민은행의 상호신용체계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경제공동체였다. 프루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대신해 계약과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자치적 지역사회 및 산업연합체들의 연방을 제안했다(→ 연방제도). 연방체제하에서는 법원이 아닌 중재의 방법이 채택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관리·경영이 관료제를 대체시키고 이론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인격교육을 실시하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사회질서가 끊임없는 압제의 모태가 되는 혼돈에 불과하다면, 그가 설계한 체계는 자연 그대로의 사회공동체를 의미했다.

 

프루동의 노선에 동조하는 노동자 세력은 1830년대에 그가 리용에서 가입했던 비밀결사의 이름을 본따 스스로를 '상호주의자'라고 불렀다. 1864년 프루동이 사망한 직후 일단의 상호주의자들이 영국의 노동조합운동 세력 및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제휴해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창설한다. 상호주의자들은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카를 마르크스 진영과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으나, 실상 마르크스가 경계해야 했던 대상은 미하일 바쿠닌의 추종자들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정치적인 국가전복활동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쿠닌은 혁명가로 전향한 러시아 귀족으로 일찍이 슬라브 각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해오다가 1840년대에 프루동의 사상을 흡수했다. 1868년 인터내셔널에 참여할 즈음에는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인 '사회민주주의동맹'을 결성하고 이탈리아·스페인·스위스 그리고 론 계곡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루동주의를 수정해 자신의 집산주의 이론을 창출해냈다. 그는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직접행동원칙을 수긍하고 노력에 상응하는 분배를 요구했지만, 제한된 소유권의 개념은 비현실적이므로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두 사람의 또다른 차이점은 혁명 방법론에 있었다. 기성 사회 내에서 이를 대체할 상호주의적 연합체를 형성시킬 수 있다고 본 프루동이 혁명적 폭력수단을 거부한 반면, 바쿠닌은 "파괴의 열정은 곧 창조의 열정이기도 하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선배 이론가의 소극적이고 단편적인 개혁노선에 반대했다. 프루동의 개인주의와 비폭력주의가 무정부주의 전통의 일부를 이루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제1인터내셔널 시절부터 1939년 스페인 내란의 종식과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 그 주류를 형성했던 것은 바쿠닌의 집산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론이었다. 마르크스와 바쿠닌 사이의 반목은 제1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들의 불화는 엄격한 규율을 가진 공산당에 의한 혁명과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봉기에 의한 혁명이라는 방법론상의 충돌인 동시에 타협될 수 없는 두 사람의 인성차(人性差)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인터내셔널이 마침내 와해되었을 때, 바쿠닌 세력은 스페인, 이탈리아, 남프랑스, 불어권 스위스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되었고 유럽의 무정부주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873년 바쿠닌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된 인터내셔널은 1877년까지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고, 이 무렵 집산주의자보다는 무정부주의자라는 명칭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바쿠닌이 저술가이기보다는 실천가로 살았던 반면 그의 후계자인 페테르 크로포트킨은 이론에 출중했다. 1876년 공작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가가 된 그는 프랑스 지리학자인 엘리제 레클뤼의 사상에 힘입어 고유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레클뤼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제자였다. 크로포트킨은 생산수단의 공유뿐만 아니라 16세기에 토머스 모어경이 〈유토피아 Utopia〉에서 그렸던 것과 같은 공산주의적 분배방식을 주장함으로써 미하일 바쿠닌의 집산주의를 넘어선다. 〈빵의 정복 La Conquête du pain〉(1892)은 자유로운 공산주의 세력의 연합인 혁명적 사회공동체를 서술한 것이며, 〈상호부조:진보의 한 요인 Mutual Aid:A Factor in Evolution〉(1902)에서는 생물학적·사회학적 접근법을 취해 경쟁보다는 협력이 인간에게 더 자연스러운 일임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다. 〈토지, 공장, 작업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9)은 무정부사회에 합당한 산업의 분산을 논한 것이다.

 

사회운동으로서의 무정부주의

 

페테르 크로포트킨은 이론적으로 무정부주의의 앞날을 조명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새로 덧붙여진 내용이란 거의 발견할 수 없지만, 그당시 더 큰 중요성을 가졌던 것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 싹튼 '행동선전이론'이었다. 1876년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이와 같은 신조를 "사회주의 원칙을 확고히 하기 위한 폭동은 가장 효과적인 선전수단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농촌지역에서 몽매한 대중을 선동하려는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정부적 직접행동주의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개인 차원의 항의형태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테러리즘). 그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권력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냄으로써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희망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1890~1901년에 상징적인 암살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 프랑스의 카르노 대통령,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 스페인 총리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 등은 그 대표적인 희생양들이었다. 이제 무정부주의자는 제정신이 아닌 파괴분자로 낙인찍혔지만 과격행동이 유발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스페인·러시아 등지에서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1890년대에 무정부주의 사상은 프랑스의 전위적(前衛的) 화가 및 작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예를 들면, 귀스타브 쿠르베는 이미 프루동의 제자가 되어 있었고,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폴 아당, 옥타브 미르보, 로랑 타일라드, 스테판 말라르메등이 이에 동조했다. 이무렵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는 무정부주의자임을 자처하고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사회주의적 인간의 영혼 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1891)을 집필했다.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무정부주의의 속성은 구체적으로 개인주의적 색채였다. 1890년대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의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부각된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해방문제가 도외시되어왔다는 비판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은 평등한 개인 각자의 자유로운 요구들을 온전히 반영하면서도 전체 사회의 결속을 다져야 한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청년 헤겔 학파 출신으로 〈유일자(唯一者)와 그의 소유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를 펴낸 막스 슈티르너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모든 사회적 행동규범과 제약을 거부했다. 심지어 크로포트킨이 설파한 사회적 무정부주의 원칙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조차도 행동의 자유를 위협하고 사회제도로 굳어질 우려가 있는 혁명적 조직의 결성에 조심스러웠다. 이결과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규모의 무정부주의자 대회가 개최되었지만 효율적인 조직의 창설로 이어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무정부주의가 팽배해 있던 국가에서도 연합체들의 존재는 미미했고 소규모의 상투적인 조직체들이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고 테러 행위에 대한 공중의 반감이 무정부주의 운동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던 프랑스에서 대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거래소(bourses du travail)를 비롯한 노동조합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의 지역연합체인 노동거래소는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지방분권이라는 무정부주의의 이상에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1892년 결성된 전국 노동거래소동맹은 1895년 페르낭 펠루티에, 에밀 푸제, 폴 델레살을 주축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른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란 이들에 의해서 발전된 노동자 직접행동주의의 이론과 실제이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더 나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전통적 기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의 전복에 주력하는 급진적 조직체였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공공시설을 접수하고 그 운영을 담당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중요한 2가지 기능을 발휘하는데, 그 하나는 혁명 뒤의 행정기구로서의 역할이다. 급진·과격 성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투쟁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며 총파업은 그 핵심에 해당한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대대적인 비협조운동이 자연스럽게 혁명을 유도해낼 것이라고 믿었으나, 제한된 목표를 설정한 부분적인 총파업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 일시에 사회질서의 전면타도를 획책했던 적은 없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프랑스 이외에 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위세를 떨쳤는데, 열악한 근로조건하에서 정부와 자본가들이 노동운동을 유혈진압했기 때문이었다. 1902년에는 프랑스 노동조합총동맹(CGT)이 창설되었고 무정부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정부주의와 마찬가지로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총파업의 의미를 사회적 신화에까지 올려놓은 조르주 소렐의 〈폭력론 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은 이즈음에 씌어진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소렐). 한편 순수 이론가들은 생디칼리슴 조직 내부의 위계질서가 혁명적 사회에서 확고한 지배구조로 정착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무정부주의자대회에서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이 쟁점을 놓고 청년 생디칼리스트인 피에르 모나트와 격론을 벌였으며, 이결과 무정부주의의 개인주의 성향은 대규모 조직체에 대한 반감으로 역사적인 귀결을 이루었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대중적인 기반을 얻게 되었다. 1922년 생디칼리스트들은 '국제노동자협회'를 창설하고 베를린에 본부를 두었는데, 스톡홀름으로 옮겨 현재도 활동을 벌이고 있다. 생디칼리슴은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을 탄생시켰고, 영국의 길드 사회주의 운동도 그 맥락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한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치열한 투쟁양상을 보였으며,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슴은 비로소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스페인 최초의 무정부주의자인 라몬 데 라 사그라는 프루동의 제자로서 1845년 세계 최초의 무정부주의 잡지 〈포르베니르 El Porvenir〉를 발행했다. 그뒤 프루동의 상호주의 이론은 Pi y 마르갈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연방주의 지도자로서 프루동의 여러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던 그는 1873년의 혁명기에 지방분권적(cantonalist) 정치체제를 수립하려고 애썼다. 1860년대로 접어들자 스페인 무정부주의에 바쿠닌적 색채가 짙어졌다. 미하일 바쿠닌의 제자였던 이탈리아인 주세페 파넬리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방문하고 인터내셔널의 지부를 설치했다.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지방의 노동자들과 안달루시아에서 부재지주제도(不在地主制度)로 곤궁에 빠져 있던 농민들에게 무정부주의는 바람직한 급진주의의 양태로 다가왔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처럼 반란과 테러리즘으로 점철되었는데, 군부와 자본가들에 맞서 싸운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이 전문적인 청부살인조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은 프랑스의 CGT에 자극을 받아 생디칼리슴 조직인 노동자동맹(Solidaridad Obrera)을 설립했고 카탈루냐 지방 전역으로 순식간에 세력을 떨쳤다. 1909년 군부가 카탈루냐의 보충역을 모로코에 파병하려는 계획을 입안하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비극의 1주간'에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고 50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었다. 1910년 세비야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대회는 대책을 숙의한 결과 전국노동조합동맹(CNT)을 발족시켰으며 1927년에는 급진론자들에 의하여 이베리아 무정부주의자연합(FAI)이 탄생되었다.

 

CNT는 지방분권주의와 반(反)관료주의에 충실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국가수준의 조합체가 아니었고 특정지역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신디카토스 우니코스(노동조합)였다. 중임금지(重任禁止)의 원칙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국대표자회의의 위원은 매년 상이한 지방에서 선출되었고 일반회원들은 해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스페인 내란기까지 회원수가 200만 명에 육박했던 이 거대한 조직은 단 한 사람의 유급 서기관을 채용했을 뿐이었으며 나날의 일과는 동료회원들에 의해 지명된 노동자들이 이용해 틈 수행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체는 소외된 인텔리겐치아가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이었으므로 이론보다는 실천과 행동영역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뒤 본격적인 공개투쟁에 돌입한 CNT는 1931년부터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1936년까지 몇 차례의 봉기에 실패했으나 스페인 내란이 발발한 후에는 스페인 동부지역을 사실상 점유했으며 이를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노동자위원회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공장과 철도를 접수했고 안달루시아에서 토지를 장악한 농민들은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이론대로 자유주의적 코뮌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 내란기간 동안 실패하게 된 이유는 장기전을 수행할 만한 규율을 가지지 못해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국제여단에 필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했으며 1936년 12월 프란시스코 카바예로 정부에 입각한 4명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도 좌파 전체주의로 기울어진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1937년 5월 무정부주의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유혈충돌을 빚었다. 중앙정부는 집산화된 공장들을 점령했고 프랑코가 안달루시아에 진입함에 따라 수많은 코뮌들이 파괴되었다. 리스터 장군이 이끄는 공산군은 아라곤 지방을 휩쓸었다.

 

이무렵 기타 지역의 무정부주의 운동도 러시아 혁명과 우파 전체주의 정권의 등장에 따라 분쇄되어갔다. 합법정당인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이 바쿠닌주의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던 러시아에서는 무정부주의가 따로 번성했던 적이 없었다. 혁명 후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크로포트킨은 어떠한 동조세력도 얻지 못했다. 내전기간을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눈부신 게릴라전을 수행했던 N.I.마흐노가 망명길에 오른 뒤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는 근절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CGT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이탈리아 무정부주의 운동은 1920년대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았으며 나치당은 무정부주의 운동을 공격했다. 일본의 무정부주의는 크로포트킨의 이론을 흡수한 사회주의 지도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에 의해 소개되었다. 1911년 천황암살음모에 연루되어 고토쿠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처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흑단(黑團)과 생디칼리스트 연합 등 조직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만주침략 후 일본 정부는 좌익세력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서 비밀결사인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당'이 해체된 후 1935년 일본의 무정부주의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저시아 워런, 리샌더 스푸너의 작품과 〈자유 Liberty〉를 펴낸 벤저민 터커 등이 특유의 비폭력주의 전통을 일구어 놓았던 반면, 유럽 이민들인 요한 모스트, 알렉산더 버크만, 에머 골드만 등은 행동주의를 주도했다. 모스트는 〈자유 Die Freiheit〉지의 편집자였고 버크만은 강철왕 헨리 클레이 프릭의 암살을 시도했다. 특히 골드만의 〈내가 사는 삶 Living My Life〉은 세기말 미국 급진주의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903년 의회는 외국 무정부주의자들의 입국을 금하고 국내에 잠입해 있는 외국 운동가들을 색출·추방하기 위해 관계법안을 제정했다. IWW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가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고 버크만과 골드만 등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20세기의 무정부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전의 무정부주의 세력과 연합체들이 되살아났지만 자유주의 사상이 이들을 압도했다. 1970년대는 러시아 혁명 이후 무정부주의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무정부주의 운동 자체로 볼 수는 없었으며 조직적 영속성을 별반 강조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의 본질로 미루어 볼 때 이같은 발전양상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무정부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사회적·윤리적 사상들은 대개 모든 사회운동 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레오 톨스토이는 무정부주의자임을 자처하지 않았을 뿐 평화적 급진주의와 이성적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국가 및 온갖 형태의 정부를 부정하고 도덕적 재생을 위해 생활의 단순화를 주장했으며 재산의 사유 대신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옹호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은 무정부주의 운동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남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전개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은 톨스토이나 소로의 사상에서 착안한 것이며 크로포트킨의 영향 아래 자치적인 촌락 코뮌을 기본단위로 하는 지방분권화 계획을 수립했다. 비노바 바베, 자야 프라카슈 나라얀 등 간디 사상의 계승자들은 '사르도바야 운동'을 추진했고 토지공유화(gramdan)를 통해 목표달성에 힘썼다. 비록 지방분권화 계획이 그 비현실성으로 인해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은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장 인상깊은 발자취를 남겼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정부주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반체제 학생들과 좌익 일반 사이에서 세력을 구가했는데, 점차 기계적으로 되어가는 인류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젊은 세대의 반문화(反文化) 경향을 예견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이러한 면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1932)에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초래할 반지성적이고 물질적인 사회공동체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확실한 지방분권화와 생활의 단순화, 그리고 크로포트킨적인 정치운용만이 현대사회에 내재된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헉슬리의 후기저작들은 기존사회에 대한 평가기준으로서 무정부주의의 유용성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다. 1950년대에 무정부주의는 미국 시민권 운동의 형태로 발현됨으로써 더욱 유행하게 된다. 시민권 운동가들은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도덕성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제도화된 경로 이외의 방법론을 추구했다. 1950년대말 미국·유럽·일본 등지에서 성행한 새로운 급진주의는 시민권 운동의 편협한 주제에서 벗어나 현대산업사회의 엘리트주의적 구조와 물질적 목표에 의구심을 표명했다. 새로운 급진주의의 이면에는 전통적 무정부주의 사상이 다소간 재현되어 있었다. 미국 작가 폴 굿먼이 갑작스런 인기를 누렸고, 영국에서는 세련된 〈애너키 Anarchy〉지가 월간으로 발행되어 일반생활 속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조명했다.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 비정통 심리학, 신비주의적 요소, 신(新)불교, 톨스토이류의 그리스도교정신 등이 한데 어우러진 무정부주의는 이데올로기보다는 혁명적 분위기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독일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이나 일본의 급진적 전학련[全學聯:全日本學生自治會總聯合]을 의미에 충실해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들은 다같이 마르크스, 바쿠닌, 체 게바라의 숭배자들이었으며 현존 정치구조뿐 아니라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의 정당성에까지도 의구심을 표명했다. 자발적인 행동, 이론적 융통성, 삶의 단순성, 사랑과 분노를 포함하는 무정부주의 노선은 사회기구의 비인간성과 정당의 이해타산에 염증을 느껴온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지방분권주의와 지역자치의 원리는 참여민주주의 이론에 도움이 되었고, 1968년의 파리 폭동을 전후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선언들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현대에도 타당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급진주의자들은 직접행동주의를 받아들여 장외투쟁과 정국대치상황을 유도했으며 미국·일본의 일부 학생세력은 미하일 바쿠닌의 범(汎)파괴주의를 흡수해 타락한 기성사회질서는 타도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절대적인 폭력이 역설적으로 완전한 평화를 창출해낸다는 바쿠닌류의 세속적 예언사상은 폭탄 테러와 도시 게릴라 활동 등으로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상으로서의 무정부주의

 

톨스토이나 간디의 맥락에서 사회개혁에는 도덕적 재생이 선행되어야 하며 점진적인 방법으로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다 자유로운 사회공동체를 위해 도시개혁을 제안한 폴 굿먼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떤 부류들은 다양한 유형의 공동체를 시도함으로써 이상사회에 접근하려고 애썼는데, 이와 같은 일들은 무정부주의의 전 역사를 통해 항상 재발되어왔다.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평화주의 시위가 전개되었고 미국의 경우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일단의 현상들이 1970년대에 나타났다.

 

자유주의자들이 꿈꾸어왔던 완전한 무정부사회는 경험에 의존해 말하자면 실현이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허버트 리드의 마지막 작품인 〈성실예찬 The Cult of Sincerity〉(1968) 속에서 진정한 무정부주의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인류 문화사에 있어 이상사회란 사라져가는 수평선상의 한 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쪽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열정으로써 순간마다의 투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무정부주의 관점이 유용한 것은 현실세계를 평가하는 시금석(試金石)으로서, 이상으로서이다. 체계화된 대규모 조직과 복잡성에 대한 반동으로서 그것은 인간정신의 파동과 같은 편력과정(遍歷過程)에 맞물려 있다. 무정부주의적 통찰력은 도시 및 농촌계획, 참여에 의한 공동체 관계의 발전, 인격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드가 "의무교육과 개인적 수양으로 성취되는 개체화 과정"이라고 불렀던 영역에서 가장 큰 효용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정치 이데올로기라기보다 사회적·윤리적 신조였다. 그것은 거대한 국가권력과 법인에 대해 지역적 이해관계와 애향심의 가치를 항상 일깨워준다.

 

G. Woodcock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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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무정부주의

 

중국 무정부주의운동은 1900년 이후 프랑스 및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여 반군벌·반봉건·반제국주의 사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유학생 리시쩡[李石曾]·장징강[張靜江]·우즈후이[吳稚暉] 등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파리 그룹을 형성하여, 서구의 사회사상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1907년 6월 이들은 파리에서 크로포트킨과 장그라브 등의 영향하에 〈신세기〉를 간행하여 각국의 중국인과 학생들에게 무정부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신세기〉는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반전통주의·반종교주의를 표방했는데, 이는 유교적 전통의 부정을 통해 자유·평등사회 실현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고, 또한 중국사회 저변에 깔려 있던 노장사상의 무위자연(無爲自然)·무치사상(無治思想)과 일맥상통했다.

한편 도쿄에서는 쑨원[孫文]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 〈민보〉에 사회주의와 더불어 바쿠닌과 러시아의 아나키즘 사상가 크로포트킨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동맹회원인 장빙린[張炳麟]·장지[張繼]·류스페이[劉師培]는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오스키사카애[大杉榮]등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강습회를 만들어 기관지 〈천의보〉 등에 크로포트킨을 소개했다.

 

중국 국내에서는 신해혁명 전야에 테러리스트였던 류스푸[劉思復]에 의해 무정부주의 운동이 주도되었는데, 그는 1912년 광저우[廣州]에서 회명학사(晦鳴學舍)를 만들어 무정부주의 사상의 대중화에 주력하면서 크로포트킨·바쿠닌·프루동과 에스페란토어의 선전에 힘썼다.

 

한편 1911년 파리 그룹의 리시쩡·장징강·우즈후이 등이 귀국하여 1912년 덕진회를 조직했다. 덕진회는 정치개혁에는 기본적 사회개혁이 수반되어야 하고 신사회의 건설에는 신도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리시쩡은 푸르동주의가 중국의 전통사상 중 무치를 이상으로 한 노자·장자의 도가와 유사하다고 보고 패도에 해당하는 법가의 강권정치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와 러시아의 볼셰비즘이며 중국에서는 이사·상앙·진시황이 여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에는 광둥[廣東]에서 아나코·코뮤니스트가 결성되었다.

 

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의 주된 슬로건인 반통치·반국가·반군국은 봉건적인 전통사회에서의 부패한 관료지배와 전제정치의 폭정에 대한 비판이었고 군벌지배와 일본제국주의의 대두 앞에서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기본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군벌지배를 유지하려는 낡은 윤리도덕을 공격하고 전통적 권위의 철저한 부정을 통해 국민성의 개조를 표방했던 5·4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한국의 무정부주의운동은 1920년 무렵부터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생·노동자들 가운데서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으로서 싹트기 시작하여 점차 국내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의 운동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 등은 1923년 베이징[北京]에서 자유의지·자주연합에 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노선에 합의했다. 특히 이회영은 독립운동상의 불미스러운 분파나 혼란은 모두 개인적 영웅심리에서 생긴 권력욕이 원인이므로 권력을 배격하고 자유평등론적 원리로 해나가면, 독립운동의 분열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그들은 1924년 4월 리시쩡 등 중국 무정부주의자들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정의공보〉는 임시정부 내의 민족주의진영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노선을 논박했다. 또한 신채호〈조선혁명선언〉(1923년)에서 의열단의 강령·투쟁목표·정치이념을 무정부주의의 사상으로 이론화했는데, 그는 민중의 역량과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면서, 독립운동의 개념을 무력에 의한 혁명으로 규정하고 모든 비폭력적 민족운동을 독립운동의 범주에서 배제했다.

 

베이징에서는 1924년 북경민국대학의 유기석(柳基錫)·심용해(沈龍海) 등의 조선 및 중국학생들이 무정부주의사상의 연구·보급, 공산주의 비판을 목적으로 흑기연맹을 조직하고, 〈동방잡지〉를 발행하여 무정부주의 사상을 보급했다. 유기석·심용해 등은 1926년 9월 크로포트킨 연구 그룹을 만들고, 1928년 10월경에는 베이징에서 아나키즘 연맹을 조직했다. 한편 1928년 4월 신채호는 톈진[天津]에서 중국 및 대만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으며, 여기서는 전세계의 무산대중과 특히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을 국제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대결시키고 무산대중의 해방을 위한 만국노동자의 굳은 결속을 호소하는, 신채호가 기초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만주지역에서는 1929년 7월 이회영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김종진(金宗鎭)이 김야봉(金野蓬)·이강훈(李康勳)·김야운(金野雲) 등 동지를 규합하여 1929년 7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김종진이 책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김좌진 등의 신민부는 삼부통합의 실패 후 사회주의 운동이 흥기하자, 반공노선에 입각하면서 사회주의와 대결하기 위해 무정부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특히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는 김좌진 등 신민부 인사들에게 독립운동의 방향을 어떤 주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보다 200만 재만동포의 생존권 보장에 중점을 두고 농민의 경제적 협동체로서의 농촌자치조직과 교민교육의 강화에 힘쓰는 운동계획을 제기했다. 이에 김종진과 김좌진이 합의하여 신민부를 개편하여 재만한족의 정치적·경제적 향상 발전을 도모하는 자치단체로 한족총연합회를 만들었다. 사회주의진영에서는 이 한족총연합회가 사회개량주의로 전화된 반공노선이라고 비난하며, 1930년 1월 20일 김좌진 암살을 시작으로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 및 한족총연합회 파괴테러공작을 실행하여, 김야운·김종진 등을 암살했다. 결국 만주에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략 이후 거의 만주관내에서의 운동기반을 상실하고, 상하이·베이징 등지로 들어왔다.

 

한편 1930년 상하이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은 남화한인청년동맹으로 개편되어 산하에 남화구락부를 두어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국내·만주 지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에 따라 1931년 10월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이회영·정화암·왕야추이[王亞椎]·화쥔즈[華均實] 등 한국·중국·일본 3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이 구국연맹 행동부는 친일화한 왕정위(王精衛)의 저격, 아모이[厦門]의 일본영사관폭파사건으로 세칭 흑색공포단으로 알려져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뒤이어 남화한인청년동맹에서는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진주 일본군사령부와 아라요시[有吉明] 공사가 중국정부 요인의 매수공작을 위해 중국 요리점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베푸는 기회에 기습공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또한 남화연맹은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협력하여 친일부역자들의 처단에 주력하여, 1933년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내통한 옥관빈(玉觀彬), 친일분자 이용로(李容魯) 등을 처단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동년 11월 안휘성 남부 상요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중합동유격대를 조직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1938년부터 이 유격대는 중국군 및 연합군과 협력할 목적으로 2개의 한국청년전시공작대를 편성해, 학도병 귀순공작과 포로구출공작을 담당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이 공작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42년 항전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자 유자명(조선혁명자동맹)과 유림(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임시의정원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전민족 통일전선운동에 참가했다. 이처럼 중국·만주 관내의 조선무정부주의운동은 일제는 물론 세계의 모든 강권주의·군국주의의 폭정을 부정하고 자유와 독립이 보장된 자유연합의 평등사회를 이상으로 하면서 투쟁수단으로 폭동과 암살 등 테러리즘을 채택했다. 나아가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단일 공동전선의 수립을 급무로 인식하여 민족해방전선과 계급해방전선을 서로 융합시켜 제 계열의 통합에 주력했다.

 

일본에서의 운동

1920년 11월 박열·조봉암(曺奉岩)·김약수(金若水) 등이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인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했다. 이 흑도회는 무정부주의를 기초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도 혼합되어 있는 사상단체였다. 그러나 1922년 12월 흑도회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박열계열의 흑노회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김약수 등의 북성회로 분립되었다. 흑노회는 다음해 2월 흑우회로 개칭하고 기관지 〈불령선인〉(제2호를 발행하고 〈현사회〉로 개제)을 간행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일본의 사회주의 동조세력과 조선인 박멸의 구실로 이용하여 '불령선인'이 불온한 계획을 음모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했으며, 박열과 그의 애인 가네코[金子文子]를 일본왕암살미수범으로 검거했다. 박열과 가네코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열은 1945년 10월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석방되었다. 박열사건 이후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은 도쿄와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흑우연맹·동흥노동동맹, 기타 각종 무정부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흑색신문〉·〈자유코뮨〉 등의 기관지들을 발간하면서 조직운동을 전개했다.

 

국내에서의 운동

1923년 〈조선혁명선언〉의 발표와 박열사건 이래, 국내에서는 서울·대구·평양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각종의 무정부주의운동단체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무정부주의운동은 1924년 이후 서울의 흑기연맹과 대구의 진우연맹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924년 12월부터 서천순(徐千淳)·곽철(郭徹)·신영우(申榮雨) 등이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기연맹을 조직하고 서울과 충주지방에서 동지규합에 나섰다. 1925년 3월 서울 수문사(修文社)에서 취지서와 강령을 작성하고 5월초 창립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경찰에 의해 무산되고 이들은 검거되었다. 그해 1월 〈동아일보〉에 당시 서울시내에 '허무당선언'이란 비밀 출판물이 배부되었다는 기사가 발표되었는데, 허무당선언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적인 단체 허무당의 영향으로 유자명이 작성한 것이었다(→ 허무당선언사건). 허무당선언은 반강권과 민중의 직접행동에 의한 혁명론을 제시한 무정부주의 사상의 선언이었으며, 신채호의 의열단선언인 '조선혁명선언'에 영향을 받았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서동성(徐東星)·방한상(方漢相)·마명(馬鳴) 등이 진우연맹을 조직했는데, 박열도 포함된 비밀결사였다. 방한상은 그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복역중이던 박열 및 가네코를 위문차 방문하고, 귀국 후 구호금을 모집·송금했다. 이밖에도 경상남도 하동에서는 1926년 도쿄의 제성회(諸聖會)와 하동의 정찬우(鄭燦雨)가 일본왕 암살계획을 서신 교환한 제2의 불경사건이 발생했으며, 1927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김호구(金豪九)를 중심으로 하는 흑전사(黑戰社)가 조직되었고, 1928년 진주 및 마산·창원의 무정부주의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에서도 우리계(宇利契)운동으로 무정부주의운동이 일어났는데,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제주도에 건설하고자 했다.

 

관서·관북지방에서도 1926년 이래 원산청년회, 원산 본능아연맹, 원산 일반노조, 평양·안주·철산·단천 등 각 지방의 흑우회가 조직되었다. 관서흑우회는 자유연합의 조직원리에 따라 노동자·농민을 조직하고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잡지 〈흑색전선〉 지국을 운영하면서 사회생리연구회·소년회·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했다. 관서흑우회는 평양 최갑룡(崔甲龍)의 집에 사무실을 두고 연락처로 삼아 서울의 흑기연맹 사건의 관계자 한병희(韓炳熙)와도 연락을 가지고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의 관서흑우회는 신간회의 사회주의자와 이론투쟁을 전개했는데 노동운동에서는 자유연합주의와 조합간의 상호부조정신에 따른 조합운동을 전개했으나, 사회주의적 조합운동에 비해 열세에 몰렸으며, 또한 그리스도교 세력이 강한 평양 등 관서지방에서 반종교의 무정부주의운동은 환영받기 힘들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이홍근(李弘根)·최갑룡 등이 펑톈[奉天]의 유화영·유림 등과 연계하여 국내와 만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시킨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으나, 1931년 7월 간부 13명이 검거당했다. 1928년 3월 조직된 관서지방의 무정부주의단체인 흑전사도 투쟁목표를 일제권력의 상징인 일본왕의 암살과 중요기관의 파괴에 두었으나, 1929년 7월 모두 검거되었다. 1930년 국내의 무정부주의운동은 1930년대 만주사변·중일전쟁 이후 거의 조직기반을 상실하고, 침체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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