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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삶에 대한 10가지 오해


- 박병상 -



들어가는 글


누가보아도 건강하고 말쑥한 김부장의 일상을 따라가 보자. 잘나가는 중견 회사의 간부사원인 그는 항균 시트가 깔린 메모리폼 침구에서 일어나 유기농 채소를 곁들인 간편한 생식과 유기농 과일주스로 아침을 맞고, 친환경소재로 실내가 마무리된 아파트를 초극세사 드레스셔츠를 걸치며 나온다. 누군가 설치한 방향제에서 내뿜는 합성 향기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 그는 미리 시동걸어 쾌적한 온도에 맞추어진 승용차에 올라탄다. 클래식 시디에서 나오는 잔잔한 음악과 은은한 자연향이 어우러지는 차내 공간은 거실처럼 공기가 정화되어 흐르고, 내비게이터의 길안내를 받으며 회사에 도착한 김부장은 수입생수로 내린 유기농 커피를 음미한 후, 항균 시트로 덮은 의자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다.


호텔식당에서 거래처 사람들과 거위 간 소스를 얹은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며 블랙와인을 홀짝이던 김부장은 가까운 퍼블릭 골프장에서 접대를 마치고 스파에 들려 몸을 가볍게 푼 후 회사로 돌아가 업무를 마무리한다. 퇴근 후 양주 한잔하자는 동료의 유혹을 뿌리치고, 식구들과 보낼 주말을 위해 호텔과 스킨스쿠버를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를 불러내 백화점에 들른다. 생태기행을 떠날 막내의 옷가지와 장비를 명품으로 장만하고 애완동물의 수입사료도 구입해야 한다. 모처럼 가족과 둘러앉아 유기농 채식으로 저녁을 푸짐하게 마친 김부장은 생활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헬스클럽과 스쿼시에서 땀을 푹 흘린다. 집에 돌아와 가죽 소파에 앉아 홈시어터로 프로골프투어를 시청한 다음, 아로마 입욕제로 반신욕을 즐긴 후 홈바에서 30년 된 양주 한잔 마시고, 유비쿼터스 시스템을 갖춘 전원주택을 꿈꾸며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전에 명상도 필수다.


웰빙, 웰빙, 요즘 장안의 화두는 단연 웰빙이다. 웰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저 웰빙이다. 물도 공기도 먹는 것도 웰빙이고, 옷도 집도 웰빙이다. 웰빙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세상, 웰빙은 이 시대 상업주의의 절대가치로 등극했다. 어떻게 살아야 웰빙일까. 항균제품, 명품, 수입생수, 유기농 채소, 친환경 실내장식, 생태기행, 생활한복, 클래식, 와인, 골프, 스킨스쿠버, 애완동물, 쇼핑, 헬스클럽, 양주, 홈시어터, 명상, 아로마, 스파, 반신욕, 유비쿼터스, 전원주택과 같이, 앞의 김부장처럼 살면 웰빙인 것일까. 최근에는 자연을 실내에 옮겨다 놓은 친환경적 생태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데, 그게 웰빙일까.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서 자유분방하게 유랑하던 집시 보헤미안(Bohemian)의 ‘보’와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부르주아(Bourgeois)의 ‘보’를 합성한 조어 ‘보보스’, “물질적 풍요를 기반으로 하되 정신적인 여유와 자연친화적 삶의 태도를 추구하며 자신만의 삶을 즐기고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이른바 ‘보보스 족’들은 웰빙 시대의 우상이다. “물질적 향유가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나 내면세계의 만족을 위해 과식과 스트레스를 피하고 유기농 식단을 즐기며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한 몸과 정신을 추구”한다는 보보스 족은 돈으로 자유와 낭만을 산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상업주의가 교묘히 안내하는 소비사회의 고혹적인 기호에 배타적으로 물들어 있다. 평등과 개성을 존중하는 순환과 다양성이라는 생태적 가치를 왜곡한다. 일상생활에 지쳐 살아가야하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참기 어려운 위화감을 선사한다. 이기적 웰빙은 한시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태적 삶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웰빙을 위한 항균제품은 자신의 면역능력을 무시하거나 약화시켜 자칫 사소한 질병에도 속절없이 감염될 수 있으며 골프와 스키는 우리 땅에서 전혀 생태적이지 않다. 생태적 다양성을 훼손시켜야 건설과 운영할 수 있는 골프장은 캐디의 기형아 출산율을 높일 정도의 빈번한 농약사용과 그로인한 수질오염과 지하수 고갈을 유발한다. 이웃 간에 위화감을 조장하는 명품 쇼핑은 물론이고 스파와 반신욕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했다는 ‘물부족 국가’에서 가당치않다. 휴일에 즐기는 등산과 스킨스쿠버와 생태기행은 어떤가.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애완동물 사육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생태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른바 ‘보보스족’들이 추구하는 삶은 과연 생태적인가. 자기만족에 근거하는 그들의 웰빙을 비판적으로 조명해보자.



1. 웰빙


“바쁜 일상과 인스턴트식품에서 벗어나 행복과 복지와 안녕을 위해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나 문화코드”로 해석하는 웰빙은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만을 추구하던 삶의 방식에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균형 잡힌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고 누군가 주장한다. 그를 위해 가격 중심이 아닌 인체에 무해한 친환경 자재와 공법을 채용한 실내는 항균벽지와 무공해 페인트를 바르고 공기정화기를 단 환기시설을 갖추며 수맥을 차단하는 동판을 시공하여 정신적 육체적 안정감을 주라고 관련업자들은 꼬드긴다.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하여 편리성은 물론 사용자의 건강까지 염두에 둔 가구이므로 장만하라고 속삭인다. 한국표준협회컨설팅은 웰빙을 측정하는 ‘소비자 웰빙지수’를 개발, 상품과 생활공간의 건강․환경․충족․안전성들을 평가해 웰빙 정도를 측정하여 기업들이 신제품 개발에 적극 활용하게 유도할 계획이라고 소비주의를 부추긴다.


하지만 자기만의 웰빙은 불가능하다. 내 웰빙은 내 삶을 지탱하는 이웃, 생태계, 문화, 환경이 두루 편안하지 않으면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유기농 채소만 보더라도 힘겨운 유기농업을 감당하는 농부가 있어야 할뿐 아니라 그러한 농산물을 신뢰를 바탕으로 소비자에게 연결해주는 매장이 주변에 있어야 내 식탁에 유기농 식단을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지 않은가.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웰빙에서 이웃의 웰빙을 먼저 도모해야 한다. 그 이웃에는 사람은 물론, 동식물과 그들의 건강한 생태계도, 선조로부터 이어온 문화와 전통도, 후손의 건강한 생명도 포함된다.



2. 유기농산물


2002년 벽두였다. 서울방송은 '잘 먹고 잘 살자'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기획, 유기농산물과 그렇게 재배한 채식의 이점을 실증적으로 소개했는데, 이후 동네 유기농매장의 생활재는 한순간에 동났고 푸주간은 한동안 파리를 날려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회의 마치고 고기구이 집으로 으례 가던 뒤풀이 발걸음을 잠시 보류했던 환경단체도 양 적고 값 비싼 유기농산물 식당을 이내 외면하고 말았다.


최근 한 식품회사는 유기농산물 두부를 광고하면서 수입 농산물로 가공한 사실을 밝히지 않아 환경단체의 비난을 받았다. 한동안 국산 유기농 콩만을 취급한다고 선전하더니 상표를 살짝 바꿔 값싼 중국산 유기농 콩으로 두부를 만들면서 유기농산물이라는 점만 광고해 소비자들이 국산 유기농산물로 짐작하게 유도했다며 환경단체는 기업의 비윤리적 행위를 꼬집은 것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을 시작하면서 유기농산물만 골라먹지 말자고 운동가와 소비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그는 위암으로 우리 곁을 10년 전에 떠났다. 어쩌면 순교한 것이리라. 장일순 선생은 시민들 사이에 발생할 위화감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관행농업에 비해 생산량이 형편없이 적은 탓에 값이 비싸게 책정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여유 없는 계층이 외면할 수밖에 없다면 순환을 통해 땅과 몸을 살려야 한다는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지 않은가.


내 몸만 생각하는 소비행태를 경계했던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이 최근 초심을 잃어가는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 유기농산물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증가에 발맞춰 유기농산물을 취급하는 매장이 증가하는 것이야 바람직하지만 매장 사이의 가격경쟁이 발생해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유기농산물 직거래의 취지를 십분 이해하는 조합원들이 믿음으로 거래하기보다 내와 내 가족의 건강만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유기농산물 시장을 주도하면서 생산자들의 출하 가격을 통제하는 일이 심심치 않고 그 과정에서 일부 매장과 식품회사에서 외국의 값싼 유기농산물을 수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진정한 유기농산물은 제철 제고장에서 생산한 것이라야 한다. 긴 운송과정을 거친 농산물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고에너지가 투입된 산물이다. 더구나 수입농산물은 우리 땅의 생태적 순환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몸도 보살피지 않는다. 식량을 모자라 수입하는 중국에서 오직 돈벌이를 위해 유기농산물을 수출하는 모습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지만 역시 돈을 목적으로 값싼 유기농산물을 수입하는 행위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유기농산물 직거래는 초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나만 생각하는 가격경쟁으로 땅은 물론 내 몸도 살리지 못한다.



3. 채식주의


우리 서해안 갯벌을 자주 찾는 영국인 탐조인은 별스러운 채식을 고집한다. 육류만이 아니라 조개나 낙지와 같이 갯벌에서 나오는 어패류도 절대 먹지 않는 것이다. 새벽 산행에서 발을 헛디딘 언니가 계곡 아래로 몸이 기울어질 찰라 옆구리 쪽으로 몸을 날려 대신 떨어져 죽은 개를 가까이서 본 동생은 개고기 먹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실천 방식도 다양하다. 살생을 꺼리는 사람은 육류와 어패류를 사양하지만 계란이나 우유는 마다하지 않는다. 단순히 붉은 살코기만을 기피하는 사람은 닭고기는 먹는다. 고기 색이 희기 때문인 까닭이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서양 식당의 샐러드 바에 깍두기처럼 썬 닭 가슴살이 버젓이 놓여있다. 그런가 하면 멸치국물도 사양하는 완벽한 채식주의자도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명상을 통해 채식을 실천하며 버섯까지 거부하기도 한다. 식물보다 동물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채식주의자는 함께 지내기 곤란한 고집불통자로 인식되곤 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육식이 빚는 건강의 문제를 알고부터 부러움의 대상으로 승인했다. 많은 이들은 육식을 피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고기로 향하는 젓가락 습관을 제어하기 어렵기도 하고,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그르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면서 육식은 살생을 방조하는 것이라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 채식은 살생이 아니냐고 따진다. 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채식인들은 육식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육식보다 채식에 맞는 체질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하며 생태적으로 건강한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다.


채식 메뉴는 되도록 우리 문화에 어울리는 것이 좋다. 비용이 만만치 않은 고급 채식은 위화감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무치거나 데치거나 절이거나 발효시켜 먹는 우리 전통 식단은 대부분 채식이며 밥상 차리는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다. 고기 맛을 흉내낸 콩단백질이나 밀기울은 솔직하지 않다. 그런 식재료로 가공하는 식단은 수입곡물이 들어가는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주로 서양식을 따른다. 우리 땅에서 제철에 재배한 유기농산물로 되도록 덜 가공한 채식이어야 우리 몸에 잘 어울리고 건강하다.


수입 채소, 유전자조작 곡물, 운송과 조리 과정에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식재료는 건강한 채식과 거리가 멀다. 먹는 자신은 물론 생태계의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늬뿐인 채식단은 채식으로 바꿀 것을 고민하는 이웃에게 거부감을 유발시킬 뿐이다. 이제 채식도 환경운동 차원에서 실천되고 보급되었으면 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수영양분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채식단을 개발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 유기농산물로 가공한 전통 채식단을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시민운동 차원으로 채식운동을 전개하면 어떨까.



4. 정수기와 공기정화기


수돗물과 정수기에서 뽑아낸 물이 컵에 담겨있다. 환경을 생각하는 목마른 이는 어떤 물을 선택해야 할까. 생태주의자는 업자가 당연히 권하는 정수기 물을 마다하고 굳이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셔야 하나? 정수기 업체는 수질오염을 정수기로 극복하라고 유혹하는데 정수기는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염된 수질이 오히려 장사밑천이다. 수돗물을 믿을 수 없다는 신화를 유포시켜야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그 사실을 익히 짐작하는 생태주의자라도 눈앞에 제공된 정수기 물을 피할 필요는 없다. 수돗물보다 깨끗하고 안전하리라고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태주의자는 수돗물을 정수기 물 이상으로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정수기와 같은 고가의 장비를 구입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서.


샘이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던 시절, 사람들은 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꼈다. 그러다 여유 있는 집부터 우물을 파자 가난한 이들이 물동이 지고 찾아야 했던 공동우물과 샘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방치되다 폐쇄된다. 울타리 안의 우물은 사람들의 물 소비를 늘였고 사용한 물을 함부로 버리면서 우물이 마르고 오염되게 되었다. 이후 부자들부터 들여놓은 수돗물은 이제 도시뿐 아니라 산골마을까지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는데, 마당에 있던 수도꼭지가 따뜻한 실내 여기저기에 쓰기 좋게 배치되면서 그만 수돗물은 허드렛물로 바뀌고 말았다. 요즘 사람들은 수돗물을 그냥 마시지 않는다. 끓이거나 정수하거나 생수를 별도로 구입해 마신다.


정수기는 수도꼭지 이후의 물에 계층을 발생시킨다. 정수기를 단 여유 있는 계층은 수도꼭지로 들어오는 물이 왜 안심하기 어려운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수원 오염에 무감각하고, 상수원으로 들어오는 집수구역의 정화를 위해 절개지에 나무를 심는다거나 유기농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남의 일로 생각한다. 상수원 보호 때문에 삶이 희생되는 지역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수돗물 값을 인상하자는 제안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로 추적이 용이해 관리하기 쉬운 물은 그나마 다행이다. 발생하는 호흡기 질환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이용료로 산출해야하는 공기는 어떤가. 내 몸에 들어오기까지 특별한 에너지 투입이 없으므로 사용료는 별도로 지불하지 않지만 요즘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는 지역적으로 지구적으로 현저히 오염되고 있다.


크고 작은 자동차와 공장, 석탄 화력발전소들에서 마구 쏟아내는 대기오염물질을 텔레비전 광고처럼 공기정화기로 산뜻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오염된 환경에서 발산하는 악취를 방향제로 덮을 수 있을까. 악취의 원인을 찾을 수 없게 코를 속이는 방향제와 마찬가지로 공기정화기는 오염된 대기를 근본적으로 정화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낭비를 일삼는 부자들에게 제한적인 상쾌함을 값비싸게 제공할 따름이다. 그것도 한시적으로.


자연의 정화능력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삶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물도 공기도 정화될 수 없다. 성능을 나날이 개선해야하는 정수기와 공기정화기는 더 큰 문제를 후손에게 떠맡기고 말 것이다.



5. 약수터


도시가 확장되면서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온 작은 산은 땅 주인의 잦은 개발압력 뿐 아니라 이게 어디냐고 찾는 시민들의 발길에 치인다. 그 중에도 약수터라 이름붙인 녹지공간의 이용도는 물통 들고 밀려올라가는 인파로 볼 때 가히 산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다. 물통을 들고 새벽부터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은 수돗물을 불신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벼운 운동도 하고 반가운 이웃도 만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약수터에 고여 흐르는 물이 약수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평소 졸졸 흐르다 비 내리면 어김없이 콸콸 쏟아내는 물은 지하수다. 용출돼 솟아오르는 약수와 다르다.


편성된 예산을 소비하기 위해 살포하는 항공방제와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중국 기원 산성비는 미생물의 번식을 방해하여 작은 산의 낙엽은 잘 썩지 못한다. 썩은 낙엽이 쌓여 만들어진 부식토가 얇아지고, 표토가 인파에 밟혀 다져지자 빗물은 쉽게 지하 깊숙이 스며들지 못한다. 새벽부터 진치는 시민들은 지표로 졸졸 스며나오는 지하수를 물통에 퍼담지만, 그런 물은 되도록 끓여먹어야 안심할 수 있다. 자칫하다 청색증에 걸린다.


끓여먹어야 하는 지하수라면 산에 흐르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야 많은 산새들이 모여들고, 산새들이 모여야 도심 속의 ‘녹색섬’ 신세가 된 작은 산에 외부 생태계의 씨앗이 공급되는 까닭이다. 약수터에서 호연지기가 무슨 소용인가. “야-호-” 라며 소리 지르지 않는 편이 산을 위해 좋다. 둥지 지키던 산새들이 놀라 달아나면 나뭇잎을 갉아먹는 곤충들이 그만큼 덜 구제되기 때문이다. 약수터 이용 시민들의 민원으로 보류했던 당국은 다시 항공방제를 서두를지 모른다.


약수터 휴식년제가 필요하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조용해지면 생태계가 회복되고 항공방제도 불필요해질 것이다. 시민들은 수돗물 개선과 함께 5분 걸어 다정한 이웃을 만날 수 있는 녹지를 도시 곳곳에 조성해줄 것을 당국에 요구하고, 산은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 시끄럽지 않게 이용하는 편이 내일을 위해 훨씬 바람직하다. 차제에, 몇 년 전 어떤 재벌이 발표한 설악산 계곡물 판매 계획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낙차를 이용하여 설악산 계곡물을 서울까지 관로로 운송해 팔겠다는 야무진 발상인데, 그 계획이 실현되면 지금도 기름진 그 재벌은 더욱 윤택해지겠지만 설악산과 후손의 삶은 그로 인한 갈증으로 허덕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



6. 생태주택과 전원생활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주변에 녹지가 부족하면 부신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어디론가 떠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고 환경생태학자는 주장한다. 연휴마다 영동고속도로를 메우는 승용차 행렬이 그 본능을 웅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곳곳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푸른 숲을 조성해 놓은 독일은 도시의 녹지 면적을 3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확장하려고 정책적으로 추진한다. 30퍼센트가 못되면 녹지를 찾아 떠나려던 시민들이 50퍼센트에 달하면 녹색으로 바뀐 도시에서 휴식 같은 삶을 만끽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나라도 녹지가 충만된 생태주택 또는 전원주택을 분양한다고 광고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생태도시와 전원주택은 반생태적이다. 주택을 건설하면서 주변에 나무를 심고 초원을 조성하며 생태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생태적으로 양호한 지역의 일부를 허물어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을 줄 세웠기 때문이다. 말이 생태도시지 사는 방식은 도심의 주택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텃밭은 물론 생활하수를 정화하는 호수도 없고 주택단지 내에 앉아 쉴만한 숲도 마련하지 않았다. 생활권과 멀리 떨어진 곳에 변변한 도로도 없이 세워놓은 아파트들은 주변 경관을 해칠 뿐 아니라 기존 주민들의 생활과 이질적이며 교통체증을 부추긴다.


주택단지는 여기저기 난립하는 주택을 한 군데로 모아 되도록 주변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데 있다. 공업단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주택단지가 난립된다. 아파트단지의 난립으로 녹기가 거의 벗겨져 민원이 빗발치는 용인의 경우가 그 예다. 독일 하노버 시에서 본 생태주거단지는 주택으로 인한 생태계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배려가 놀랍다. 나무와 짚처럼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자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지붕에 풀이나 나무를 심을 뿐 아니라 주택 사이에 바람이 통과하고 내리는 빗물을 지하로 스며들 수 있도록 설계하고 양이 노니는 초원과 더불어 생활하수를 정화하는 호수를 주거단지 주변에 마련한다. 또한 안내판을 설치해 방문자들에게 생태주택의 의미와 기능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관공서와 학교와 주택의 담 대신 나무를 심고, 담쟁이덩굴로 덮인 건물 옥상에 풀밭과 작은 나무를 심고, 5분 걸어 다정한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자투리 녹지를 조성하고, 조성된 자투리 녹지와 가로수를 근교 녹지와 연결하는 녹지축으로 도심을 수놓고, 생활권 내에서 이동 가능한 자전거도로를 확충하고, 차도와 자전거도로, 자전거도로와 보행자도로 사이에 가로수를 촘촘히 심고, 빗물을 저장해 활용하거나 생활하수를 중간처리해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간판을 정비해 보행환경을 쾌적하게 만드는 일은 다른 나라의 일상사에서 그칠 수 없다. 우리도 가능해야 한다.


녹색도시나 전원주택은 기존 녹지나 전원을 허물고 짓는 행태일 수 없다. 녹지가 부족한 도심공간에 나무를 심고 자연을 도입해 건설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도시는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아니라 녹색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7. 애완동물


사람 이외에 생명이라곤 어쩌다 들어온 모기와 개미들이 전부인 마당도 없는 사각 아파트에 살아가는 사람의 정서는 삭막하기 쉽다. 이웃 사이에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살아가기보다 애완동물 한 마리라도 사육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유익할 듯싶다. 그래서 그런가. 최근 아파트에 애완동물을 키우는 주민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텔레비전의 동물관련 프로그램에서 흥미 위주로 소개된 품종들이 대부분이다.


애완동물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하여 동물의 기생충이 어린이에게 옮겨가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어린이 놀이터나 화단에 눈 애완견의 대소변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식구처럼 소중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아니다. 남의 애완동물일 따름이건만 엘리베이터에 흘려놓은 배설물을 치우지 않은 주민들은 줄을 풀어주어 지나던 노인과 아이들을 놀라게 한다. 훈련이 충분치 않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낯모르는 사람을 향해 짖어대는 경우는 애교에 불과하다. 가방에 넣지 않고, 대중교통시설에 줄을 풀어놓아 지하철 내에서 겅중겅중 뛰게 놔두는 경우도 있다.


동물 털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동물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소홀히 취급하는 이들은 애완동물의 본성까지 왜곡한다. 모자가 달린 옷을 입히거나 선글라스에 신발까지 신겨 주위 시선을 민망하게 만들지만, 당하는 애완동물은 얼마나 불편하거나 불쾌할까. 애완동물이 죽으면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해 위화감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감당할 수 없이 성장하거나 경제력이 떨어지면 내다버리는 인심도 흔해 요즘 동물보호단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애완동물도 생명이므로 입양에 따른 책임이 뒤따라야 하는데 장난감처럼 인식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최근 관련 당국은 등록제를 실시하여 예방주사와 인식표 부착된 줄을 애완동물 입양시 의무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바람직한 행정이지만 제도로 그칠 수는 없다. 애완동물을 입양하는데 따르는 사회적인 책임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차제에 우리 생태환경에 맞지 않는 애완동물의 수입은 제한했으면 한다. 뜻하지 않은 외래질병을 몰고올 수 있지만 동물이 갖는 생태적 권리와 맞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붉은귀거북처럼 하천이나 호수에 함부로 방생할 경우 고유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점을 상인들은 소비자들에게 잘 홍보해야 한다.



8. 아이와 어른들의 체험과 놀이문화


초등과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체험이나 극기훈련과 같은 단체여행이 드물지 않다. 교실에 앉아 교과서에 구속된 지식을 파기보다 자연에서 보고 느끼는 수업은 권장할만할 것이나 그 규모가 생태적이지 못하다. 한 학년 또는 전교생을 사전 지식 없이 갯벌이나 산골에 풀어보내 주변 생태계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인천시 강화군 장화리의 해양생태탐구수련원의 경우, 밀려드는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각급학교 학생들은 갯벌의 생태적 가치와 탐구방법을 안내받을 틈도 없이 갯벌로 몰려나가 놀이 이상의 체험은 원천봉쇄된다. 야영도 마찬가지다.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씻고 조리하는 와중에 질서는 실종된 채 음식찌꺼기가 하천을 오염시키고, 떠들썩한 가운데 움직이는 인파로 주변 생태계는 혼란에 빠진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대행업체에 의존하지 말고 관련 시민단체와 연계하는 학급 이하 단위의 열린 기획은 어떨까. 시간과 공간에 여유를 갖고 자연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 텐데.


어른들의 놀이문화는 어린이에 비해 비생태적인 경우가 다반사다. 숲을 밀어내고 농약으로 주변 생태계를 훈증하는 골프는 물론이고 백두대산을 허무는 스키도 생태계를 토막내지만 등산과 낚시도 비생태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울긋불긋한 옷을 차려입고 등떠밀려 올랐다가 음식 쓰레기 남기고 내려오는 인파가 국립공원에 가득하고, 떡밥과 초고추장을 아무데나 버리고 나오는 낚시꾼들로 산과 들과 강과 호수는 몸살을 그치지 못한다. 영월댐으로 수장될 뻔했던 동강은 밀려드는 래프팅 인파로 조용한 날이 드물고, 계곡 가까이 없던 도로를 개설해 산림은 인간이 배출하는 각종 오염물질로 찌들고 있다. 하늘과 호수와 강을 누비는 패러글라이딩과 요트와 윈드서핑이 한 폭의 그림 같지만 시간과 경제 여유 없는 웬만한 사람에게 부담스럽고, 요란한 수상스키는 느닷없는 서바이벌게임처럼 주변 정적을 깬다. 간혹 스킨스쿠버 회원들이 바다나 호수를 청소하기는 하지만 일회성에 그치고, 여유 없는 계층에게 그림의 떡으로 그친다. 승마나 클레이 사격도 위화감을 유발시키는 것은 매한가지다. 방과후나 공휴일에 학교와 공설운동장을 시민들의 운동과 놀이를 위해 개방하는 방식은 고려하기 곤란할까.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단위로 찾는 동물원과 식물원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우리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는 외래 야생동식물들의 본성을 억압하고 행동을 구속시켜 억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지만 생물권을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 시멘트 바닥에서 던져주는 사탕과 과일을 받아먹는 야생동물은 야성을 잃었고 비만으로 허덕인다. 던지는 동전에 맞아 눈이 먼 동물도 있고 물을 자주 갈아주지 않아 피부병에 시달리는 동물도 많다. 좁은 공간에게 쳇바퀴 도는 동물, 구석에 웅크리고 체념한 듯 꼼짝도 않는 동물, 비굴하게 사탕과 담배를 구걸하는 동물들이 죽지 못해 사는 공간은 전혀 교육적이지 못하다. 본성에 맞는 시설을 최대한 갖춰 관람객의 방해를 최소화하며 개방해야 한다. 더구나 자전거 타고 거수경례하는 야생동물들을 돈 내고 구경해야하는 이른바 야생동물공연장은 생태나 교육적으로 볼 때 터무니없다. 외래식물을 분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촘촘히 심어놓은 실내 식물원도 생태와 무관하기는 동물원과 같다.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체험과 놀이는 최대한 생태와 어울려야 한다. 자신의 놀이를 위해 야생동물과 식물의 휴식과 번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전혀 생태적이지 않을 뿐더러 공평하지도 않다. 장기적으로 볼 때, 생태계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로울리 결코 만무하다.



9. 장묘문화


제주도는 중산간 밭에 돌울타리를 사각으로 쌓아놓고 그 가운데 묘를 쓴다. 얼마 되지 않는 밭을 희생시키는 까닭을 물으니 척박한 땅에 조상을 모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해할만한 풍습인데, 묘소가 늘어나면 붙여먹을 농토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묻힐 땅이 없다고,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몇 배가 묘지로 사라지고 있다는 경고성 보도가 몇 차례 나오더니 최근 화장이 급증했다. 부유층의 호화분묘가 사라지지 않았어도, 매장대신 화장이 늘고 묘소대신 납골당이 증가하면서 묘지로 사라지는 경작지나 생태공간은 전보다 줄어들 것으로 짐작한다.


일본인들은 조상을 화장해야 잘 모셨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경황이 없어 매장했더라도 나중에 다시 화장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 티베트는 천장(天葬) 또는 조장(鳥葬)이라고 하여 산꼭대기에서 조상의 시신을 독수리에게 내어주는 풍습이 있다. 윤회를 믿는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혼이 나간 시신을 독수리에게 보시하는 것인데, 약간의 경작지 이외에 척박한 땅으로 구성된 지역에서 어쩌면 고육책인지 모른다. 우리 전라남도 도서지방에는 아직도 초분(草墳) 풍습이 남아있다. 바로 매장하지 않고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이엉으로 시신을 덮고, 2에서 3년 후, 남은 뼈를 잘 씻고 매장하는 풍습이다. 요즘은 묘소를 구할 수 없이 가난한 이보다 효성이 극진한 후손이 선택한다고 전한다.


《내 영혼이 아름답던 날들》에서 할아버지의 친구인 윌로 존은 자신의 시신을 나무 아래 묻어달라고 할아버지에게 부탁한 후 숨을 거둔다. 자신에게 그늘과 바람을 준 나무에 대한 보답으로 일 년치 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주인공 작은나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윌로 존처럼 매장했고 자신도 그렇게 묻힐 것으로 다짐한다. 어쩌면 우리의 초분과 닮았다. 지금도 자신의 태(胎)를 묻은 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인습이 있는데, 시신까지 자연에 돌려주는 장례는 매장이나 화장보다 생태적이라고 생각한다.


매장보다 화장이 묘소의 크기를 줄일 수 있어 토지 이용 측면에서 효율적이지만 화장할 때 소비되는 화석연료의 양을 따져볼 때 에너지낭비를 우려하는 전문가도 있다. 인습상 티베트 같은 조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윌로 존처럼 매장하면 어떨까. 관이나 시신 주변에 석회를 뿌리지 않고, 봉분을 아주 낮게 처리한 후 그 위에 수명이 긴 전통수종을 심으면 어떨까. 시신이 썩으며 나오는 양분을 받아 튼실하게 자라는 나무를 후손들이 보살피며 그 그늘에서 선조를 기억할 수 있다면 나무 아래 묻혔던 선조도 기쁘지 않을까. 생태적이지 않을까. 땅도 에너지도 낭비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10. 귀농, 느리게 살기


이 시대의 진정한 농군인 천규석 선생은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모든 화두가 ‘돈’을 지향하는 어지러운 경쟁사회에서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결론은 귀농으로 모아진다. 설사 귀농까지 아니더라도 이웃을 돌아보며 안부를 묻고 위로와 격려와 희망과 행복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느린 삶을 추구하고 싶어진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회색도시에서 쫓기듯 살아가던 도시인일수록 문득 자신을 돌아본 후 느리게 살거나 귀농을 결심하며 가족을 설득하고 싶게 된다.


그런데 막상 귀농한 이후 먹고사는 일에 매몰되기 십상이고 유기농산물 재배와 관련하여 본의 아니게 이웃 간의 불편함이 생겨 마음 고생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관행농업하는 기존주민들의 완고한 비협조로 생태적인 삶이 어려워지고, 이웃을 상실하여 생기는 외로움으로 자괴감에 빠질 적도 많다. 그래서 먼저 귀농해 자리잡은 사람 주변으로 모여 공동체를 조성하려 애쓰지만 대부분의 귀농인들은 도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기 못한다. 자식이 농사짓겠다면 기분이 흔쾌하지 못하다. 농사짓는 도시인의 삶을 엉거주춤하게 유지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치곤 한다.


작금의 농촌은 중앙집중적 생산력주의에 매몰돼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동원해 밭떼기로 농사짓고 나 몰라라 판다. 찌들대로 찌든 농협빚에 의존해 하루하루 연명한다. 그들에게 유기농업 전환은 파산을 의미한다. 유기농산물을 재배하는 귀농인들은 어렵더라도 관행농업 농부에게 꾸준히 희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도시의 유기농산물 소비자들은 생명이 순환되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농부들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장일순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농약이 채 제거되지 않은 농토에서 수확한 전환기 농산물이라도 도시 소비자들이 흔쾌히 구입해주는 일, 직거래 관계자들은 유기농업을 희망하는 관행농부들이 농협빚의 멍에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무이자 신용사업을 강구하는 일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옆집아줌마바이러스’로 지칭하는 주변의 행태와 권유에 위기의식을 갖거나 현혹되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은 물론 이웃들까지 느리게 살 수 있도록 마음과 행동의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렵다. 나만 느리게 살면 도태될 텐데 하는 걱정 속에, 경쟁심을 조장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조바심이 발동하고,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자꾸 남의 삶에 나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이는 “느리게 살자고 이야기하러 다니느라 바쁘다”고 너스레떠는 필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나가는 글


웰빙을 기획 취재한 어떤 신문기자는 “우유를 먹는 사람과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웰빙족에 가까울까” 묻곤 정답이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우유를 앉아서 먹는 사람에 비해 배달하는 사람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걷거나 뜀으로써 충분한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태적인 삶은 마음가짐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태는 다양성과 순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양성은 개성이고 순환은 평등이다. 내가 아니라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이웃, 그 안에서 순환도 다양성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을 개발해 만든 노을공원은 퍼블릭을 유난히 강조하는 골프장이다. 그 골프장을 일컬어 서울시는 한때 ‘생태 골프장’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생태’라는 용어도 오염되었지만 그럴수록 생태적 삶은 중요하다. 나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진정한 생태적 삶은 무엇인지, 일상 속에 숨겨진 생태적 삶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의미가 없는 있은 아닐 것이다. 이글은 그 작은 의도로 썼다.


(「환경과 생명」, 2004년 겨울호)


http://ncolumn1.daum.net/dist/intro?cid=brilsymbio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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