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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방향의 전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녹색평론47호)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녹색평론》제47호 (1999년 7-8월호)


방향의 전환, 전지구적 의존에서 지역적 상호의존으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

― 스웨덴 출신 언어학자, 생태운동가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의 저자


  이 글은 Jerry Mander와 Edward Goldsmith가 공동으로 편집한 책 The Case against the Global Economy(1996)의 한 장 "Shifting Direction:From Global Dependence to Local Interdependenc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필자는 오늘날 세계화 경제의 본질적 한계와 파괴성을 드러내고, 그 극복의 방향을 명석하게 적시하고 있다.



   경제의 세계화란 무엇인가?


  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위협받고 있을까? 왜 우리는 직장과 동네와 거리,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집안에서조차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일까? 왜 광범위한 대중적 캠페인과 계몽적인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해가 가면 갈수록 환경은 나빠지는 것일까? 왜 공동체와 가정이 해체되며, 인종간의 분쟁과 빈곤, 폭력, 범죄는 계속하여 증가하는 것일까? 왜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있을까?

  만일 이런 문제들을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본다면 그 모두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해결방법을 찾게 될 가능성은 매우 커지게 된다. 체계적인 분석을 통한다면, 많은 산재한 문제들이 결국에는 단 하나의 뿌리, 즉 ‘성장’과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개인들을 단지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시키고, 다양한 문화전통을 획일화하며, 야생지와 생명다양성을 파괴하는 하나의 거대하고 집중화된 생산 및 소비의 체제로부터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체제는 우리들을 서로서로에게서 갈라놓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자연세계로부터 떼어놓는다.

〈남(南)〉의 세계는 지난 500년 동안 토착민들과 그 문화와 땅을 엄청나게 희생해가며 이 체제를 뒷받침해왔다. 사실,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산업체제는〈남〉의 자원, 노동력, 시장에 접근하지 않고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착취는 정복이나 노골적인 식민주의 대신에 '개발'이나 '구조조정' 그리고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형태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산업체제는 이제 경제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지역 및 국가경제를 집중적으로 관리되는 하나의 세계체제 속으로 편입시키고자 지구 구석구석까지 그 손길을 뻗치고 있다. 산업적 모델이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을 식민화함에 따라 이 과정이 누구에게도 ―〈북〉의 주민들에게도 ―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경제의 세계화는 흔히 경제적 '효율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거나 필연적인 진화의 추세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는 자연스러운 현상과는 거리가 멀다. 각 정부들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장려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틀을 지원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 사이의, 또는 국가간의 교역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년간 존재해온 현상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교역은 단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차적인 경제적 목표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 안에서 활용가능한 자원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가장 잘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필수적인 욕구가 지역 내에서 충족되었을 때만, 국외자들과의 잉여생산물 교역이라는 문제가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교역은 필연적으로 이익이 있는 것으로서 추구되게 되었다. 이런 근대적 지혜는 데이비드 리카도가 1817년에 발표한 이론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는 모든 국가는 '비교우위'에 있는 품목만을 생산하고 그 잉여분을 다른 필요한 수입품을 얻기 위한 무역에 사용함으로써 보다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한 나라의 번영을 그 나라의 무역의존도 및 수입규모에 암암리에 일치시키고 있다. 현대의 산업경제는 19세기 초의 경제와 거의 닮은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교우위'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부의 계획수립과 정책결정을 지배하고 있고, 이른바 자유무역이라는 지혜의 중심에 있다.

  자유무역을 추구함에 있어서 정부들은 지역의 사업과 일자리와 자원을 보호하는 법률과 규제들을 ― 모두 더 많은 무역을 위해서 ― 철폐하고 있다. 정부들은 또한 세계화된 경제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하부구조를 위해서 엄청난 지원을 제공해왔다. 특히 다음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고속통신 ― 인공위성, 전화망(케이블, 광섬유), 텔레비젼, 라디오

정보기술 ― 고속 컴퓨터, '정보고속도로'

에너지 ― 대규모의 중앙집중식 발전소(대규모 댐과 핵발전소 포함), 석유제품, 송유관 등

산업화된 농업 ― 화학집약, 단작영농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생명공학

전문화된 교육 ―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인력을 훈련하기 위한 하부구조


  이러한 지원과 그밖의 뒷받침의 한 가지 결과는 지구를 반쯤 돌아 수송되어온 대량생산품의 가격이 지역 내에서 생산된 물품들에 비하여 '인위적으로' 싸다는 것이다. 특히 식품의 경우에 그러하다. 이것이 빠리의 시장에서 뉴질랜드에서 수송되어온 사과가 프랑스산을 몰아내고, 2,500만마리의 젖소를 가지고 있는 몽고의 가게에 자기나라의 유제품보다 유럽산 유제품이 더 많이 쌓여있는 이유다. 지역 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실제로 오랜 세월 그렇게 해왔지만) 기초식품들을 몇천마일이나 수송하는 것이 무슨 이득일까? 숨겨진 지원비용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배후에 있는 시간, 노력, 돈을 고려한다면, 경제의 세계화는 납세자들의 돈으로 뒷받침된 특수하고도 계획된 변화이지 결코 자연적이거나 진화에 따른 현상이 아님이 명백하다.

  이와 동일한 경제정책들이 거대한 다국적기업들의 성장을 이끌어왔고, 이제 이들이 세계무역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 중 많은 기업들은 너무나 크게 성장하여 규모와 권력에 있어서 정부들을 능가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세계 100대 경제 중 50개가 국가가 아니라 기업들이다. 유권자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지는 일도 없이 이들 경제주체들은 막강한 경제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 500개 기업이 세계무역 전체의 70%를 통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단지 6개의 기업들이 쌀, 밀, 그리고 옥수수 등 주곡 관련 교역의 100%를 통제하고 있다.

  가트(GATT)나 나프타(NAFTA)와 같은 자유무역 협정들 덕분에 기업들은 그들의 사업을 세금과 인건비가 싸고 환경규제가 보다 약한 나라들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정부들은 토지의 무상이용, 세금감면, 자본출자, 그리고 다른 여러 형태의 지원을 통해 기업들을 유인하거나 계속 머물도록 한다. 공공의 비용으로 구축된 통신망은 기업들로 하여금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자신들의 기업활동들에 대한 중앙통제를 가능하게 하고, 수백만의 잠재적인 소비자들에 대한 광고사업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절대적인 규모와 재정적 힘 덕분에 기업들은 공급자와 금융기관으로부터 가격손실을 보상받는다. 이렇듯 불공정한 환경에서 어떻게 지역의 작은 식료품점이 거대한 슈퍼마켓 체인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매년 소규모의 기업이나 가게, 그리고 자영농들이 계속하여 몰락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 수 있겠는가?

  경제의 세계화는 우리들 모두에게 ― 개인으로서, 가족으로서, 공동체로서 ― 영향을 주고 있으며, 생태계 그 자체에 갈수록 큰 긴장을 주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세계화로 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의 쇠퇴:

명색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나라들에서조차도 정책결정이 유엔, 세계무역기구, 유럽연합과 같은 (흔히 선출되지 않은) 초국적조직들에게로 집중됨에 따라 개인들의 권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집중화된 정치기구들이 기업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고 그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국가들이 ― 지역공동체나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 그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다.


  전 지구적 의존:

수입과 수출의 복합적인 시스템 속에 묶인 채 국가들은 갈수록 그들 자신이 거의 또는 아무런 통제력도 행사할 수 없는 세계화 경제라는 틀 속에 견고하게 연결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식량생산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국가의 자급능력도 위협받고 있다. 지구 한 구석에서의 자연재해, 전쟁, 경기침체는 수천마일 떨어진 다른 나라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국가 자주권의 상실:

〈남〉의 정부들은 (그리고 갈수록〈북〉의 정부들도) 국제 '경쟁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구조조정을 수행토록 요구받고 있다. 이것은 사회보장비 지출을 삭감하고, 산업과 무역의 증대를 위해 필요한 하부구조를 위한 비용지출을 증가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은행이나 IMF는 그러한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차관을 준다. 채무의 상환은 정부의 재정정책에 제약을 가할 뿐만 아니라(복지, 교육, 보건 등을 희생시킨다)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강화시킨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희소성:

표준화된 대량생산 체제의 요구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적 필요와 욕망(음식, 옷, 주택, 사치품 등에 대한)이 갈수록 균일화된다. 사람들이 도처에서 자기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포기하고 산업체제에서 요구되고 있는 좁은 범위의 자원을 선호함에 따라, 그 결과 자원은 인위적으로 희소하게 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도시화:

경제의 세계화는 대규모로 인구의 도시집중화를 야기한다. 적어도 아직은 세계인구의 다수가 시골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2025년경에는 60%가 넘는 인구가 도시에 거주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시화는, 특히〈남〉에서, 많은 문제 ― 과밀한 빈민촌, 실업, 빈곤, 비위생적 환경, 오염과 같은 문제들을 의미한다.〈북〉에서조차도, 도시화는 직접적으로는 진정한 공동체의 상실로 연결되고, 간접적으로는 소외와 자살에서 범죄, 폭력, 마약에 이르는 문제들을 낳는다. 만일 세계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지속된다면 이러한 문제들이 유례없는 수준에 이르러 엄청난 파국이 닥칠 것이다.


  위협받는 식량공급:

세계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기도 하지만 가치나 이상도 도시적, 서구적 모델에 갈수록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남〉에서는 농업이나 어업은 일관되게 낙후되고 미개한 것으로 묘사되는 한편, 도시의 소비적인 생활양식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지구적인 상품시장 및 지원구조는 소농이나 기타 기초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최소화하면서, 기업적 중간상인들의 이윤은 극대화하도록 운영되고 있다. 농민과 어민들에게는 그들의 일을 계속해나갈 인센티브가 없어졌다. 식량생산의 포기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장차 우리의 먹거리는 어디에서 올 것인가? 예를 들어, CIS(구 소련)의 식량생산은 1990년대 초 경제적 자유화 정책이 도입된 이후 거의 30%가 감소하였다. 이런 추세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심히 우려할 만한 것이다.


  빈부격차의 심화:

경제의 세계화는 남북간 및 개별국가 내에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산업생산은 갈수록 대규모의 컴퓨터화 내지 자동화 과정에 의존하고 있고, 그 결과 사람의 노동은 점차 밀려나고 있다. 또한, 다국적기업들의 자유로운 이동성으로 인해 임금은 계속 내려가고 있다. 만일 세계의 인구가 계속하여 농장을 버리고, 산업부문의 희소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한다면, 일자리도 없이, 그리고 일자리에 대한 전망도 거의 없이 다수 인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빈곤의 확산은 필연적이다. 실제로, '일자리 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 만일 그것이 오래 지속된다면 ―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붕괴하고, 궁극적으로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간의 전쟁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세계의 350명 억만장자의 재산은 세계인구 중 45%에 달하는 하위 빈곤층의 연간수입 총액과 맞먹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불평등은 계속 커가고 있다.


  환경파괴:

경제의 세계화는 이미 산업화로 인해 심각해진 생태적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다. 오염된 공기와 물, 쌓여가는 독성 폐기물과 핵쓰레기에 덧붙여서, 우리는 삼림훼손, 오존층 고갈,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에 직면해 있다. 만일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생태계가 받는 위협은 심각한 것이 될 것이며,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는 파국적일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의 상실:

경제의 세계화는 지구상의 여러 다양한 문화들을 획일화된 서구문화로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은 토착적 전통들을 은근히 경멸하면서 서구적 소비주의 생활양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대중매체와 광고이미지들에 의해 끊임없이 세뇌당하고 있다. 그에 따른 심리적 압박 ― 특히 '금발머리, 푸른 눈'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 은 심각한 불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열등감과 자기부정의 심리는 특히〈남〉에서 오늘날 보는 인종적 갈등과 폭력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세계화 경제체제에서는 궁극적으로 승자는 아무도 없다. 노동자들은 실직상태이거나 고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아무런 보장도 없이 저임금을 받고 있다. 일차 생산자들과 소규모 상점주들은 큰 기업들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소농들은 비하되고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거대도시들 속으로 흡수되어가며, 그 결과 마을과 소읍들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활력을 잃어버린다. 환경은 단기적인 이익추구 때문에 갈수록 오염되고, 불안정해져가고 있다. 그리고, 부유한 소수들도 궁극적으로는 갈수록 커가는 문제들을 회피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생태적으로 손상된 지구 위에서 생존해야 하고, 범죄, 폭력, 인종적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적 붕괴현상에 마주쳐야 한다.


  어떻게 방향을 바꿀 것인가?


  경제의 세계화가 사회, 정치, 환경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의 지역화'를 향한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다. 세계화의 폐해에 대한 인식은 남과 북, 극좌와 극우를 막론하고 세계전역에 걸쳐 커지고 있지만, 경제의 지역화가 그 해결방안이라는 믿음은 그렇게 널리 퍼져있지 못하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역중심 경제로의 전환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왔고, 이제 우리는 세계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관점이다. 어떻게 오늘날의 전지구적인 생태-사회적인 위기들이 전세계적인 차원을 떠나서 해결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특히 더 이상의 세계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국제적 노력과 장기적인 해결을 가져올 수 있는 지역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고삐풀린 세계경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첫걸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무역협정의 재협상을 통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남〉과〈북〉의 사회 및 환경운동이 서로 손을 잡고 기업과 금융시장에 넘겨준 권력을 되찾도록 정부들에 압력을 가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국제적인 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만으로 경제와 공동체가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필요한 것은 문화와 환경만큼이나 다양한 수많은 작은 규모의 지역운동들일 것이다. 세계경제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는 일과는 달리, 이런 작은 운동들은 느린 발걸음과 지역의 사정에 대한 깊이있고 친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그 지역민 자신들의 손으로 설계되고 시행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작은 운동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문화적, 생물학적 다양성이 복구될 것이고, 장기적인 지속성이 회복될 것이다.

  많은 개인들과 조직들이 이미 그들 자신의 공동체와 지역경제를 강화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려면 국가적 및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정책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거대기업들에게서 정치적 권력을 박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참여민주주의가 강화될 수 있겠는가? 기업중심 복지와 자유무역 정책이 대규모 생산자와 상인들의 이익을 크게 북돋우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지역적 지원만으로 소생산자들과 작은 가게들이 번창할 수 있겠는가? 지구 구석구석에서 미디어들이 단일문화의 이미지를 아이들의 뇌리에 주입시키고 있는데, 어떻게 지역에 뿌리박은 교육이 회복될 수 있겠는가? 지역중심의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려는 지역민의 노력이 어떻게 거대한 댐과 핵발전소에 주어지는 엄청난 국가적 지원금에 맞서서 경쟁할 수 있겠는가? 지역운동은 세계화 과정을 저지하기 위한 정책변화와 나란히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정책의 변화에 뒷받침될 때, 이러한 소규모 운동들의 효과는 크게 확대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립 분산적 노력이 아니라 "소규모를 대규모로" 장려하고, 작은 운동들이 번창하고 확산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적 변화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역중심으로의 전환이 비실제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많은 오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지역경제에 대한 강조는 아무런 대외교역 없이 오로지 마을단위의 자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긴급한 문제는 추운 지방에 살면서도 사람들이 오렌지를 맛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반경 50마일 안에서 생산될 수 있는 밀, 달걀, 우유 ― 즉, 기초식품들 ― 를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지역화의 목표는 무역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수송을 줄이면서 국가 및 지역공동체 수준에서의 경제를 강화하고 다양화하는 데 필요한 변화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다양화의 정도, 생산물, 교역량은 당연히 지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남〉의 주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계화된 경제에서〈북〉의 시장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북〉의 자립도가 커지면 제3세계의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진실은, 좀더 소규모의 지역중심 생산으로의 전환은〈북〉과〈남〉모두에게 혜택을 주며, 어디서나 일은 의미있는 것이 되고, 실업문제도 완화될 거라는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에서〈남〉은 자신의 자연자원의 많은 부분을 원재료의 형태로〈북〉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남〉의 가장 좋은 농토는〈북〉을 위한 식량, 섬유, 심지어 꽃을 키우는 데 바쳐져야 한다. 그리고〈남〉의 많은 노동력은〈북〉의 시장을 위한 상품제조에 싼값으로 투입된다.〈북〉이 좀더 스스로를 위해 생산한다면,〈남〉을 더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원과 노동력과 생산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 허용할 것이다. 세계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토대로 한 안전한 생존경제로부터 뿌리뽑혀져 나와 가망없는 도시 빈민가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활동의 다양화와 지역화는 남북 모두의 다수 인구에게 훨씬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한다.

  지역화라는 개념은 또한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도시지역이 '진짜' 문화의 중심지이며, 작은 지역공동체는 고립된 낙후지대로서 편협성과 편견이 지배하던 옛 풍습이 남아있는 곳이라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믿음에 반하는 것이다. 옛날은 야만적이었으며, 착취가 날뛰고, 불관용이 만연하며,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시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낙후된 농촌지역 사람들보다 현대화된 사람들이 더 우월하다는 ― 심지어 더욱 고도로 진화되었다는 ― 엘리트주의적이거나 인종주의적인 사상을 반향한다. 이런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산업화의 전 과정은 농촌지역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하고, 그에 수반하여 농촌주민 스스로 자존심을 상실하여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오늘날 작은 공동체들에 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변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권력 ― 그리고 이른바 문화라는 것 ― 은 어떤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지역차원에서 사람들이 진정한 경제적 힘을 유지하고 있을 때 공동체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예를 들어 영국의 엔클로져운동 이전 시절이나 식민화 이전의〈남〉의 모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에 관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거의 없지만, 비교적 고립된 지역인 라다크Ladakh(또는 '작은 티베트')는 거의 자립적인 공동체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식민주의의 영향도, 또 최근까지는 개발의 영향도 받지 않았던 라다크의 전통적이며, 공동체를 토대로 한 문화는 활기와 기쁨과 타자에 대한 관용에 차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데서 오는 라다크인들의 자존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채 못되는 시기 동안에 이 문화는 경제개발로 인해 극적으로 변해버렸다. 개발은 지역경제를 해체시켜버렸다. 개발로 인해 가정과 마을이 가지고 있던 결정권이 먼 곳의 도회중심으로 옮겨졌다. 아동교육의 초점도 지역자원과 필요에서 라다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삶의 양식을 배우는 데로 바뀌었으며, 새로운 교육은 은근히 도시생활이 화려하고, 흥미로우며 편한 것인 반면 농부의 삶은 낙후되고 원시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변화들 때문에 자존심이 상실되고, 유치하고 속좁은 잡담이 증가하고, 미증유의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생겨났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곧 라다크의 마을 모습은 서양에서 흔히 보는 소읍의 모습과 별로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흔한 생각은 "시골로 돌아가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비슷한 회의론이 도시화 개념에 수반해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너무나 쉽게 잊혀지고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인구의 대다수가 ― 대부분 제3세계에서 ― 농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 도시화가 마치 인간조건의 일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 도시화를 부추기는 매우 위험한 오해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인구를 농촌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공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수십년 안에 4억4천만의 인구를 도시로 이주시키려는 중국의 계획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 중국경제의 이와 같은 '현대화'는〈남〉의 세계전체에 걸친 ― 방콕과 멕시코시티에서 봄베이, 자카르타, 라고스에 이르기까지 ― 제어할 수 없는 도시폭발로 이어지는 것과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다. 이들 도시에서 실업은 만연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집없이 떠돌거나 빈민가에 살며, 사회조직은 붕괴하고 있다.

〈북〉에서도 불건강한 도시화가 계속되고 있다. 농촌공동체는 계속하여 해체되고, 그 인구는 확대일로에 있는 거대도시로 내몰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전체인구 중 단지 2%만이 농촌지역에 살고 있고, 농장들은 매년 35,000개씩 사라지고 있다. 이런 모델을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모범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도시로 옮기기엔 우리는 너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디 있는가?

  이런 질문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은 중앙집중화가 어떻든 더 효율적이고, 도시인구가 상대적으로 자원을 적게 사용한다는 암묵적인 가정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경제 속에서 도시화가 차지하는 비용을 자세히 살펴볼 때,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진실로부터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세계전역에 걸쳐 도시중심은 극단적으로 자원집약적이다. 도시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의 집중화된 시스템들은 거의 예외없이 소규모의 다양화된 지역중심 생산체제보다도 훨씬 더 환경에 부담을 준다. 식량과 물, 건축자재와 에너지는 모두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하부구조를 거쳐서 멀리서부터 수송되어와야 한다. 그 집중화된 쓰레기들은 트럭이나 화물선을 이용해서 내다버리거나 소각해야 하는데 이는 모두 환경을 크게 훼손한다. 열리지 않는 창문들을 가진 유리와 쇠로 된 고층빌딩들에서는 숨쉬는 공기조차도 송풍기와 펌프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를 이용해 공급해야 한다. 빠리의 가장 풍요로운 구역에서 캘커타의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도시인구는 먹거리를 공급받기 위해 수송에 의존하여야 하는데, 그 결과 소모되는 식품 1파운드당 여러 파운드의 석유가 소모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오염과 낭비가 따르는 것이다.

  지구상에는 인구가 너무나 많다. 바로 그런 까닭에, 오직 소수에게만 의식주를 제공할 수 있는 세계화 경제는 포기되어야 한다. 그 대신 다양한 지역과 그 지역들 고유의 기후, 토양 및 자원에 대한 친밀한 이해에 토대를 둔 지식체계와 경제모델을 지원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땅으로부터, 또 서로서로에게서 떨어져 있는 〈북〉에서, 우리는 큰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하지만 고도로 도시화된 지역에서도 삶터와의 연결을 시도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대도시속에서 좀더 작은 공동체들을 재조직하고, 그러한 공동체들의 경제활동이 주변의 자연자원을 향하도록 재정립하는 것을 통해서, 도시들은 지역적 성격을 다시 회복하고, 좀더 '살 만한' 곳이 되며, 환경에 덜 부담스러운 곳으로 될 수 있다. 만일 아직 남아있는 농촌공동체와 소농을 지원한다면 우리의 일은 좀더 쉬워질 것이다. 농촌공동체와 농민들은 보다 견실하고 다양화된 경제를 위한 건강한 농업적 토대를 다시 건설하는 데 관건적이다.


  새로운 정책방향


  경제의 방향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역, 공공지출, 규제개혁, 개발 그리고 공동체 지원 등 전체 범위에 걸친 정책을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적 정책


  오늘날과 같은 무제한적인 자유무역의 풍토에서는 규제가 어느 정도는 분명히 필요하며, 시민들도 정부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주기를 강력히 요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진정한 다양화와 탈중심화를 장려하기 위해서 정부들이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는 데 합의를 보는 '국제적 협정'을 통해서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다국적기업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되어왔다. 세계 각처에 있는 사업장들 사이에서 이윤, 운영비, 투자자본을 쉽게 옮길 수 있었기에 다국적기업들은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뻗어갈 수 있었고, 심지어는 고용문제를 가지고 주권국가들을 볼모로 하였다. 예를 들어, 한꺼번에 수백개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회사는 건물과 설비비용을 위한 자금지원, 저리의 대출, 신규 노동력을 위한 훈련보조금, 그리고 많은 세금감면 등을 제공받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보조금이 주어지지 않는 소규모 지역기업들은 이렇듯 불공정한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수가 없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한다면 거대기업들이 좀더 소규모의 지역기업들 위에 군림해온 특권적 지위를 감소시키고, 기업들로 하여금 그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 장소에 대해 더욱 책임을 느끼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정부는 자유화와 경제의 세계화에 대한 개방이 그들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유무역' 정책을 껴안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생산가능한 품목에 대해서는 주의깊은 관세정책을 통해서 수입을 규제하는 것이 대다수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한 '보호주의'는 다른 나라의 동료 시민들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기업들의 지나친 권력에 맞서서 일자리를 지키고, 지역자원을 방어하는 방법인 것이다.〈남〉의 국가들은 가트와 나프타 같은 자유무역 협정들로 인해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다. 이들 나라는, 그러한 협정의 목표와는 반대로, 자신의 자연자원을 보호 보존하고, 국가적 및 지역적 기업을 육성하고, 외국의 언론매체와 광고의 영향력에 제한을 가한다면,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자유무역이란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역경제 구조에서 떼어내어서 세계경제라는 사다리의 밑바닥에 위치하도록 하기 때문에 '공정무역'이라 하더라도〈남〉의 대다수에게는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


국내정책


  직접적 및 간접적 지원이나 보조금 외에도 거대기업들은 좀더 작은 지역중심 기업들을 희생시키고 이루어지는 많은 정부규제들 ― 많은 경우 규제의 결핍 ― 로부터도 혜택을 받는다. 거대기업들은 번문욕례와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에 대해 큰소리로 불평을 하지만, 생산이 좀더 작은 규모로, 좀더 지역에 토대를 두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은 필요없어질 것이다.


규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조세규정'은 작은 기업에 불리하게 되어있다. 소규모 생산은 보통 좀더 노동집약적인데, 소득세, 사회복지세, 부가가치세, 고용세 등을 통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다. 반면에 세금감면의 혜택은 거대기업이 쓰는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인 기술 쪽에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편향된 조세제도의 역전은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계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함으로써 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에 사용되는 에너지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높은 수준의 기술에 덜 의존적인 기업들 ― 즉, 좀더 작고 좀더 노동집약적인 기업을 장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솔린과 디젤 연료에 대해서 세금을 부과하여 그러한 연료가격이 환경비용까지 감안한 진정한 비용을 반영하도록 한다면, 수송이 감소할 것이고, 지역 내 소비를 위한 지역 내 생산이 증가할 것이며, 경제의 건강한 다양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소규모 기업들은 은행의 대출정책에서도 차별을 받는다. 은행은 큰 기업들보다 소규모 기업들에게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소규모 기업 소유자들에게는 대출에 대한 개인적인 보증도 흔히 요구되는데, 대기업 경영자들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다.

소규모 기업들은 대규모의 생산에 기인한 문제들을 겨냥한 규제 때문에 흔히 부당한 피해를 입는다. 예를 들어, 공장식 양계장은 분명히 환경이나 건강문제와 관련해서 규제를 받아야 한다. 좁은 공간에 갇혀있는 수백만마리의 동물은 질병에 걸리기 매우 쉬우며, 다량의 농축된 폐수는 안전하게 처리되어야 하며, 장거리 수송을 통해 닭고기가 오염될 수 있다. 그러나 12마리 정도의 닭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키우는 농부도 근본적으로 똑같은 규제를 받고 있고, 그리하여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대규모 생산자들은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 소규모 생산자들보다 유리한 처지에 선다. 이러한 차별적 규제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쿠키를 만들어 가게에 내다팔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건에 관한 규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산업용 조리시설을 설치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없어질 것이다.

지역의 토지사용에 대한 규제는 야생지와 개활지와 농경지를 개발로부터 보호하도록 개정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다양한 형태의 토지신탁에 대해서 정치적 및 재정적 지원이 주어질 수 있다. 지금 미국에는 99개가 넘는 그러한 신탁이 있어서 270만에이커의 땅을 보호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방정부가 공공의 비용으로 농경지에 대한 개발권을 사들임으로써 그 땅을 교외지대의 확산으로부터 보호하면서 동시에 농민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개발된 토지는 지방정부로 하여금 그 토지개발로 인해 생겨난 세금보다 많은 비용을 서비스를 위해 치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토지가 개발될 때는 납세자들은 개활지가 주는 혜택을 잃을 뿐만 아니라 돈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도시지역에서는 대개 주거, 상업, 공업 지역이 규제에 의해 나뉘어 있는데, 이는 대규모 생산과 판매를 위한 필요와 위험성 때문에 생겨난 제약이다. 이런 규제들은 가정과 작은 가게와 소규모 생산을 통합시킬 수 있도록 변경될 수도 있다.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삶의 방식을 제약하는 규제들을 재검토하는 것 또한 혜택을 줄 것이다. 고밀도의 개발을 제한하기 위한 여러 규제들은 흔히 공동주거나 생태마을과 같은 환경적으로 건전한 삶의 방식을 금지하는 데 쓰여진다.


보조금과 공적 지원


장거리 도로운송에 사용되는 비용을 살펴보면 세계경제가 얼마나 크게 재정적으로 보조금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에는 이미 250만마일의 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앞으로 수년간 새로운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800억달러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으며, 알래스카와 시베리아를 잇는 도로마저 고려중에 있다. EC에서는 1,200억달러를 투자해서 서유럽에 7,500마일 연장의 초고속도로를 2002년까지 건설할 계획이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터널을 구상중이다.〈남〉의 전역에서도 부족한 자원이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뉴기니에서는 목재를 수출시장으로 수송하기 위해서 4,800만달러를 들여서 23마일의 도로를 건설했다. 이러한 지원이 보다 소규모의 지역기업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고용의 창출에서, 좀더 건강한 깨끗한 환경, 좀더 평등한 자원분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혜택이 주어질 것이다. 지역의 상황에 따라 수송비용은 자전거도로, 인도, 동물 수송도로, 선착장 또는 철도 등의 건설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집중적 하부구조에 대한 의존도가 뿌리깊은 고도 산업사회에서도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환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암스테르담에서는 도시중심에 보도를 넓히고 보다 많은 자전거용 도로를 건설할 수 있도록 자동차의 운행을 금지하려는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규모 에너지시설은 오늘날 특히〈남〉에서 많은 정부보조금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달러가 들어가는 투자를 중단하면서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지원한다면, 환경오염도가 낮아지고, 야생지역과 해양에 대한 압력이 줄어들며, 고갈되어가는 석유와 위험한 핵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한 돈이 지역경제로부터 새어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농업에 대한 정부보조금은 지금 주로 대규모의 농기업들 쪽으로 주어지고 있다. 보조금은 농민들에 대한 직접지불뿐만 아니라 생명기술과 화학-에너지 집약적 단작영농을 위한 연구 및 교육지원금을 포함한다. 이러한 지출을 좀더 소규모의 다양화된 농업 쪽으로 전환한다면, 작은 규모의 가족농과 농촌경제가 살아나고, 생명다양성이 북돋아지고, 토질이 개선되며, 보다 신선한 식품이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대부분의 정부보조금이 ― 그들이 식품을 위해 쓰는 돈의 대부분뿐만 아니라 ― 소규모 농민이 아니라 기업과 중간상인들에게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아마 잘 모를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정부지출은 기업적인 슈퍼상점, 하이퍼마켓, 대규모 유통기구의 성장을 촉진한다. 소규모 공공시장 ― 한때 유럽의 거의 모든 소도시나 마을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 을 위한 공간을 짓거나 개선하는 데 돈을 쓴다면, 한정된 자본밖에 없는 지역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자신들의 물품을 파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도시나 마을의 중심이 살아나고, 오염과 화석연료의 사용이 줄어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민시장을 지원한다면, 인접지역의 도시와 농촌경제 모두가 활성화되고, 식품을 가공, 포장, 수송, 광고하는 데 쓰이는 돈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텔레비젼과 기타 매스미디어는 연구개발비, 하부구조개발, 교육훈련, 그밖의 직접 및 간접적 지원의 형태로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받아왔다. 이들 매체는 지금 세계전역에 걸쳐 다양한 전통들을 급속히 균일화하고 있다. 지역에 기반을 둔 연예 ― 음악과 연극에서 춤과 축제에 이르는 ― 를 위한 시설을 건설하는 방향으로의 지원은 건강한 대안이 될 것이다.

현재, 보건에 대한 투자는 주로 도시주민들이 이용하는 거대하고 중앙집중화된 병원들을 선호하고 있다. 같은 돈을 보다 많은 소규모의 진료기관들을 위해 쓴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이 주어지고, 지역경제도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공공집회를 위한 공간 ― 읍 회관에서 마을광장에 이르는 ― 을 만들거나 개선한다면, 정책결정자들과 대중 사이에 얼굴을 맞댄 대화가 가능해지고, 그 결과 공동체가 활기를 띠고, 참여민주주의가 강화될 것이다.


〈남〉을 위한 정책


  제3세계에서는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개 지역경제에 의존하면서 소읍이나 농촌공동체에 거주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가장 급선무의 일은 지역경제를 강화함으로써 도시화의 물결을 막는 것이다. 여러 정책변화가 여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대규모 댐, 화석연료를 이용하는 공장들, 그밖의 대규모 에너지 및 수송을 위한 기간시설들은 도시지역이나 수출지향 생산의 필요에 맞춰져 있다. 그 대신 탈중심화된 재생가능 에너지 쪽으로 지원을 전환한다면 마을과 소읍들을 강화함으로써 도시화의 물결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남〉의 에너지 하부구조는 그다지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활동가들이〈북〉의 은행이나 원조기관들에 대한 로비를 통해 충분한 압력을 가한다면 이러한 일은 가까운 장래에 실제로 시행될 가능성이 있다.

식민주의, 개발, 그리고 세계화는〈남〉의 가장 좋은 토지가〈북〉의 시장에 내다팔 작물을 기르는 데 쓰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내 소비를 위한 다양화된 생산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면, 농촌공동체의 경제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현재 '개발도상국'들에 만연해 있는 굶주림이 상당부분 해결됨으로써 빈부격차가 줄어들 것이다.

〈남〉은 서구식 단일문화 교육의 종결에 의해서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생태적, 문화적으로 지역에 뿌리박은 지식을 장려하면서 지역언어와 가치에 최우선권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의 지역경제와 공동체는 또한 서구식 모델에 기초한 자본-에너지 집약적이고 중앙집중화된 보건의료체계가 보다 지역화된 토착적인 보건의료모델로 전환될 때 큰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일차 생산자들(특히 농민들)과 농촌생활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디어나 광고, 관광에 의해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는 농촌생활이란 사실상 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현대적인 도시소비자들이 되도록 강력한 심리적 압력을 넣는다. 이런 과정은 만화책에서 연극, 영화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남〉의 주민들에게〈북〉의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교환계획들을 통해서 저지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노력은 '반개발'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전역을 통해 지속불가능하고, 엄청난 오염을 유발하는 소비생활을 장려하는 힘들에 맞서는 의식적인 노력이기 때문이다.


지역수준의 해결방안


  경제의 지역화는 문화적, 생태적 다양성에 대한 적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청사진이 있을 수 없다. 창의적인 발상의 가능성은 공동체가 처해 있는 위치만큼 다양하다. 아래의 개관은 결코 충분한 것일 수 없고, 단지 이미 실행되고 있는 몇몇 조치들을 예시한 것일 뿐이다.


많은 곳에서 공동체은행이나 대출기관이 설립되었다. 그럼으로써 지역주민들과 사업체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 증가되고, 사람들이 먼 곳의 대기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웃과 공동체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우리고장 물건사기' 운동은 지역사업체가 대기업들을 상대로 한 경쟁에서도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운동은 지역경제로부터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값싸지만 먼 곳에서부터 수송되어온 물건에 숨겨진 비용 ― 환경과 공동체를 희생시키는 ― 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준다. 미국, 캐나다, 유럽 각지에는 농촌이나 소도시의 경제를 침범하는 대기업들의 유통망에 대항하기 위한 풀뿌리 조직들이 이미 생겨났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사는 ― 1993년 한해에 전세계적으로 900개의 레스토랑을 추가하고, 장차 9시간마다 새로운 레스토랑 하나를 계속 추가할 계획을 갖고 있는 ― 적어도 24개국에서 풀뿌리로부터의 저항에 부딪쳐왔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세계 최대의 소매상 체인 '월마트'의 급속한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생겨났다. 그들의 목표는 이 확대일로에 있는 '슈퍼상점'으로부터 일자리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지역통화와 '레츠'(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는 대체화폐로부터 큰 규모의 물물교환에 이르는 범위까지 걸쳐있다. 지역통화는 지역경제 내에 돈이 머물도록 보증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뉴욕주 이사카에서는 '이사카아워'라고 불리는 지역통화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1991년에 시작된 이 시스템에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지역통화량은 50만달러가 넘고, 1,000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이를 모델로 한 지역통화가 이미 미국의 12개주에서 사용되고 있다. '레츠'에서는 목록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이 제공해야 할 서비스나 물건, 그리고 그에 따른 보답으로 자신이 기대하는 값이 얼마인가를 표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레츠' 회원들에게 제공한 물건이나 서비스로 인해 발생한 플러스 계좌(크레디트)를 가지고 이 시스템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라도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진짜' 돈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지역통화 시스템에 참가할 수 있고, 거기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레츠'는 영국(현재 250개 이상의 조직이 운영중), 아일랜드, 캐나다, 프랑스, 아르헨티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샘솟듯이 생겨났다. 이 시스템은 지역의 생산품과 농산물뿐만 아니라 넓은 범위의 서비스들 ― 목공일, 자동차수리, 아기돌보기, 재봉틀일, 개인지도, 페인트칠, 회계일, 보건의료, 법률적 도움 등 ― 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해준다. '레츠'는 특히 실업률이 높은 지역에서 혜택이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영국의 버밍엄 ― 실업률이 20%를 맴도는 ― 시정부는 매우 성공적인 '레츠' 시스템에 대한 후원자가 되어왔다. 이들 지역통화 시스템은 경제적인 혜택만큼이나 중요한 심리적인 혜택도 가져다준다. 한때는 단순히 '실업자'가 되어, 따라서 '쓸모없는' 존재로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이 가진 기술과 지식 때문에 존중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운동은 소읍이나 도시의 소비자들이 인근 농민과 직접적인 연결을 맺는 운동이다. 어떤 경우에는 소비자가 한 철의 생산물을 전부 미리 사기도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산자와 함께 위험을 나누는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수확물을 월별 또는 분기별로 구매한다. 소비자들은 통상 그들의 먹거리가 자라고 있는 농장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며, 때로는 그들이 농장일을 직접 돕기도 한다. 산업체제에 연계되어 있는 소농들이 놀라운 속도로 매년 파산하는 데 반해서 CSA를 통해서 소규모의 다양화된 농장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번창하고 있다. CSA는 유럽,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어왔다. 미국에서는 1986년에 단지 둘뿐이던 CSA 조직이 1992년에는 200개로 늘었고, 현재는 1,000개에 근접하고 있다.

농민과 도시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농민시장 ― 직판장 ― 도 마찬가지로 지역경제와 환경에 혜택을 가져다준다. 뉴욕시에는 지금 24개가 넘는 농민시장이 있고, 이로 인한 인근 농민들의 추가적인 소득은 연간 수백만달러에 이른다. 코넬대학교의 '새로운 농민, 새로운 시장'이라는 프로그램은 도시의 시장에서 농산물을 직판하는 새로운 세대의 농민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특히 광범위한 농사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업상태에 있는 이민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결론


  위에서 윤곽을 그려본 정책변화들은 좀더 지역공동체에 토대를 둔 경제가 꽃피어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또한 많은 반대에 부딪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지역화된 생산을 위한 재정적 인센티브를 '보조금'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세계화를 위해 ― 수송, 통신, 에너지의 하부구조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중앙집중화된 생산기술의 교육, 연구개발을 위해서 ― 얼마나 엄청난 보조금이 주어져왔는가를 보았다. 실제로, 지역으로의 방향전환은 우리가 지금 세계화를 위해 쓰는 것보다 적은 비용을 필요로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탈중심화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심대하게 뒤바꾸어놓는 '사회공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지역으로의 전환에는 얼마간의 혼란이 불가피하게 따를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세계화를 향한 현재의 질주로 인한 혼란보다는 훨씬 덜할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는, 미증유의 규모로 사회적 및 환경적 공학이 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일자리 없는 성장' 경제이다. 전세계적인 경제성장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지구의 광대한 부분과 사회 전체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세계화가 뜻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삶, 언어, 음식, 건축, 문화, 그리고 존엄성을 서구식 단일문화를 위해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김형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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