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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제75호 2004년 3-4월호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제3회)


-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외 -

 

   《오래된 미래》, 우리자신을 비추는 거울


  김종철 :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가 세번째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 사상강좌의 취지에 관해 몇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다시한번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지난 2003년 봄부터 여름 사이에,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고 이 땅에 생명·평화의 메시지를 확산하기 위해 성직자 네분이 '삼보일배'라는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비폭력 행동을 결행하셨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절실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때 명색이 이 사회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와 영남대에 있는 동료 몇사람은, 공부하는 사람, 학교에 있는 사람으로서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개발의 신화, 그리고 세계화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협박하고 있는 이 체제에 대해서 조그만 소리로라도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들이 보기에 좀더 근본적인 각도에서 세계화, 개발, 경제성장 같은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실천적으로 모색해온 분들을 초대해서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다보면 우리자신이 좀더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리면 이를 통해서 자극을 받는 젊은이들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고요.


  비용문제로 고민을 했는데, 처음에 영남대에서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가 몇가지 사정 때문에 그만 중단되었습니다. 이 세번째 행사도 본래는 영남대 후원으로 대구에서 열리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때문에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가 호소를 해서 몇몇 단체들이 호응을 해주신 덕분에 공동으로 주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서울의 서강대에서 1차 강연을 한 데 이어 오늘 이곳 홍성에서 2차 강연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뜻을 모아 이 자리를 함께 준비해주신 단체들, 특히 풀무학교 전공부와 이곳 지역주민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해주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오래된 미래》의 저자입니다. 지금 이 책은 47개국어로 번역이 되어있답니다. 제가 이 책을 번역할 당시에는 22개국어로 번역이 되어있었는데 그 뒤로 8년 동안에 아마 스무개가 넘는 말로 다시 더 번역이 된 것 같습니다. 아까 여기 오면서 '오래된 미래 국제 네트워크'를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분을 지난 월요일 저녁에 공항에서 맞이해서 지금까지 4일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기자회견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옆에서 듣고 했습니다만, 책에서 읽고 느꼈던 것보다 훨씬더 중요하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추진해온 관례적인 개발의 논리, 세계화의 논리로서는 지금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까운 장래에 닥쳐올 대파국밖에 없다, 우리가 새로운 길을 발견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이 매우 확고한 분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자꾸 해봐야 별로 귀기울여주는 사람이 없는데, 오늘《오래된 미래》의 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니까 이렇게 많이 모이신 것 같습니다.(웃음)


  라다크라는, 우리에게는 낯설고 조금은 신비한 느낌까지 자아내는 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로서 우리가《오래된 미래》를 많이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저자하고 오늘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이건 라다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오래된 미래》를 번역한 47개 나라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이건 라다크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이야기다"라는 겁니다. 라다크의 이야기는 곧 '세계의 거울'이자 우리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식민주의 이래 계속되어온 논리 ―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 다수 민중의 희생 위에 극소수가 소위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겠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재앙으로서의 세계화라는 게 지금 세계 도처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명확한 이해를 갖고 저항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매우 귀중한 참고가 되는 책이《오래된 미래》라고 봅니다. 오늘 이러한 메시지를 저자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여러분과 더불어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이 자리에는 풀무학교 전공부와 고등부 학생들, 그리고 홍동면과 인근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농민들께서 많이 참석하신 것으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강연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이해가 되시리라고 믿습니다만,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씨의 사상의 핵심은, 앞으로 세계의 미래는 지역 농촌문화가 회복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곳 '환경농업교육관'에서 열리는 이 자리는 더욱 뜻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한분 더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며칠동안 옆에서 지켜보니,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가 지금처럼 전세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데에는 이분의 남편 존 페이지 씨가 뒤에서 아주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연사는 아니지만, 이분을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박수) 존 페이지 씨는 원래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해왔는데, 라다크에서 이십여년 전에 헬레나 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여태까지 이 부부가 함께 라다크 프로젝트에 헌신하고 있다고 합니다.《오래된 미래》가 책말고 비디오 테이프로 나온 게 있는데, 그 비디오 작품의 제작자이자, 아주 듣기 좋은 해설(나레이션)의 목소리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BBC 발음이라고 하더군요.(웃음) 자, 저는 이만 말을 그치겠습니다. 오늘 통역은 저의 동료인 영남대 영문과 박혜영 교수가 맡아주시겠습니다.(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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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 ―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헬레나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청중 가운데 농민들이 많아서 더욱 반갑고 기쁩니다. 김종철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가 농민들을 지원하는 데, 그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하여 지상의 무엇보다 우리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먹을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농민을 지원하는 것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생존가능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래에 살아남도록 지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경제성장, 개발, 진보, 산업화 등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국 건강하고 다양한 소규모 농업의 체계적 파괴를 낳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구의 90퍼센트, 심지어 100퍼센트의 사람들이 땅을 떠나 도시의 중심지로 몰려들어도 우리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을거리는 대규모의 기업농업, 혹은 대규모의 국가경영 농업 ― 공산주의 국가의 경우 ― 이 단작(單作), 집중화된 거대한 규모의 농사법으로 농산물을 기르면 된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를 둘러보면 이러한 방식의 농업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규모 단작, 즉 고도로 특화된 단작 재배방식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규모가 클수록, 특화되어 있을수록, 효율성이 떨어지고 자원을 낭비하게 되며 결국 자본, 석유, 화학약품의 측면에서 아주 비싼 식량을 생산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에너지, 물, 자원을 사용하여 더 적은 양의 식량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비효율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거대규모의 농사법이 효율적이라고 들어왔습니다.


  물론 '소규모'라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가령 1평방미터 땅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농사규모가 클수록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상적인 농사규모라는 것은 지역마다 다르고 경제적 상황, 문화 및 노동과 기계의 형태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면 우리가 다작(多作)으로, 그리고 일손이 더 많이 드는 농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 동료 웨스 잭슨은 에이커당 더 많은 '인간의 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효율적인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의 노동을 사용하는 농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땅을 죽이지 않고 곤충이나 다른 자연존재 ― 생명의 그물망의 일부이며 그들의 생존이 우리들의 생존에도 필수적인 모든 자연존재를 죽이지 않고 땅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과소평가되고 있고, 어리석고 뒤처져 있으며, 열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땅으로 되돌아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농사는 인간활동 중에서도 보상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입니다. 누가 이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만든 생산품 가운데 전지구의 인간이 모두 필요로 하는, 그것도 평균 하루에 세번씩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농산물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일은 주변화되고 있고 열등한 경제활동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농사일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그리고 현재의 경제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땅으로 돌아가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21세기의 들머리에서, 우리는 경제적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도 인류의 약 절반은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 지원금, 각종 규제, 세금 등에서 시급한 경제적 인센티브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들이 슬럼가로 흘러들어가는 대신 땅에 머물고 땅을 번영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인류의 절반이 슬럼으로 내몰린다면 빈곤은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이미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빈곤은 증가하고 있으며 빈곤층의 선이 중산층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스웨덴에서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현대경제의 정상이라고 하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에서 빈곤층이 날로 증가하고 있고 일자리는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더 경쟁적인 방식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경제적 세계화가 일자리의 희소성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 ?? 실제로는 일자리가 있지도 않은 ?? 로 몰려듦에 따라 세계 모든 나라에서는 폭력과 인종주의, 종교적·민족적 분열, 그리고 테러리즘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시와 농촌간의 균형, 세계와 지역간의 균형을 이루도록 지금의 경제체제를 바꾸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경제니 하는 것은 잘 모르니 그저 전문가나, 경제학자, 정부관료들에게 맡겨두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라든가 경제정책을 바꾸는 것이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미국, 스웨덴, 한국뿐만 아니라 심지어 라다크 같은 곳에서도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거시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그림 역시 그릴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화라는 것이 피상적으로 본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이나 스웨덴, 미국 할것없이 전세계 모든 사람들은 소위 하나의 '세계경제' ??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정치적 차이'라는 장막의 뒤에 숨어있지만 실은 공통의 이해를 가진 ?? 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기관에 의해 우리의 삶은 작동되고 있습니다. 세계경제를 꿰뚫어보고 누가 세계경제를 움직이며 어떻게 이것이 작동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정치적 힘을 되찾아올 수 없습니다. 정치의 배후에 있는 경제활동, 여기에 실제 권력이 있습니다.


  이들이 지배하는 법칙이 '세계적 경제성장'입니다. 세계적 경제성장은 세계은행, IMF와 같은 국제적 기관들과 기타 여러 은행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은행들은 거대화를 위한 합병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거대 다국적기업을 상대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다시금 은행들의 거대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대화, 세계적 경제성장은 전지구상의 지역 차원에서의 경제, 또는 부(富)를 파괴시킵니다. 미국정부는 이러한 형태의 경제성장을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지로 미국 국민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세계적인 투기자본, 부와 재화의 세계적 흐름을 지원하고 있지만 자국민들을 지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말해 이러한 사실은 희망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다수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지 못합니다. 오늘날 주변화되고 있는 것은 농민들만이 아닙니다. 대다수 민중들이 주변화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도시의 노동자들, 심지어 직장을 가진 노동자들조차 노동강도의 강화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들은 이런 형태의 세계 성장체제에서 뒤처지고 있습니다. 세계인구의 단지 5-10퍼센트만이 세계화 경제의 이익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머지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시스템을 따라가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들이 "아니오! 이런 식의 경제체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시점에 와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현재의 경제시스템에서 이익을 본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10퍼센트의 사람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경제체제는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자연세계의 파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분리, 그들 사이의 거리를 점점더 멀리 벌어지게 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먹는 음식은 점점더 먼 거리로부터 수송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과 그 생산지가 점점더 멀어지는 것만큼, 그래서 매일의 식품공급을 위해서 더 많은 석유와 더 많은 수송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만큼 비효율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점점더 많은 석유의 사용은 우리에게 빙산이 녹는다거나, 예기치 않은 폭풍이 닥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여러가지 기후변화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점점더 부자가 될수록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이 지구, 즉 물, 공기, 자연자원은 점점더 파괴되고 오염됩니다. 10퍼센트의 사람들도 이러한 상황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왜 10퍼센트의 사람들 중 일부가 다른 편에 동조해서 말하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이들은 "우리는 다른 형태의 경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장, 발전, 진보, 세계화를 재정의하여야 하며, 이것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 경제체제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이제서야 사람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어떤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체제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세가지 시스템의 기본적인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특징은 이들 체제가 작은 규모의 농촌사회 혹은 공동체의 지속적 파괴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작은 마을과 농촌들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을 더 큰 도시로, 슬럼으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런 체제는 모두 도시화를 지향하는데, 이러한 지향의 전환을 위해서는 지역공동체, 즉 소규모의 마을과 중소규모의 도시가 함께 생존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탈중심화된 지역공동체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연세계의 현실과 그 다양성에 반응할 수 있도록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생명은 다양성입니다. 식물, 씨앗, 곤충, 동물들 모두가 변화하고 움직이며 하나 하나가 유일무이합니다. 이러한 살아있는 세계에 반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변화된 발전, 즉 농촌사회를 존중하고 진정으로 생태적인 발전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것은 없어서는 안될 변화의 특징입니다.


  그간 정부와 대기업 차원, 또한 1992년 리우 회담과 같이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참여한 국제적 회의에서 지속가능한 발전과 자연존중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도시화가 초래하는 문제나 농업 및 농촌사회를 지원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이윤창출을 위한 대기업화·다국적기업화가 근본적으로 생태적·탈중심적 삶의 방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학교·대학사회·대중매체 등에서 이루어지는 지속가능성에 관한 토론에서도 다국적기업의 문제점이나 이들이 어떻게 내재적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를 파괴하는 집중화·도시화로 나아가는 소비문화를 촉진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기업의 독점권력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대기업에 유리한 세제, 재정지원, 규제 등을 적극적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독점기업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 자유시장을 논하고 있지만 자유시장이란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경제체제의 또다른 공통된 특징들이 있지만 오늘은 그 모두를 이야기하지는 않겠고, 두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재의 경제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를 점점더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계무역이 점점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세계화는 재화의 수송거리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버터, 우유, 살아있는 동물 등의 수출입도 포함됩니다. 같은 종류의 물품들이 서로 '스와핑'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대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 세계화가 아니라 ― '지역화', 경제활동의 지역화입니다.


  점점더 수송거리가 멀어지는 세계화된 무역체계를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이 비율이 정확히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슈퍼마켓에서 지불하는 식품값 중에서 정작 식품 자체에 대해 지불하는 비율은 점점더 줄어들고 대신 수송비용, 포장, 광고, 발색 등에 지불하는 비율은 점점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슈퍼마켓에서 지불하는 식품값의 5퍼센트만이 식품 그 자체의 값으로 농민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머지 95퍼센트의 돈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은 것들을 하는 데 돌아갑니다. 심지어 이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릅니다. 비밀이니까요. 가령 방사선을 조사(照射)하거나 유전자조작 씨앗 따위를 만드는 데에도 우리가 지불하는 돈의 막대한 비중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비밀에 부쳐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에서는 도시 소비자들이 농부들이 점점더 탐욕스러워지고 온갖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다고 비난하고, 한편에서는 농부들이 소비자들에게 식품값을 더 지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어느 쪽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농부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간극을 확장시킴으로써 분리시키고 있는 것은 기업의 중간상인들과 정부의 보조금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현재 시스템의 두번째의 근본적인 특징은 지금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 다시 말해 학교·대학사회·과학계·대중매체 등에서 나오는 모든 지식과 정보들이 점점더 전문화·상업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전일적인 지식, 전체적이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호연결된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불어 또하나 중요한 것은 과학, 대중매체 나아가 학교의 기업적 통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식의 기업화·상업화는 가장 위협적이고 위험한 흐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점점더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다가 지식의 기업화가 더욱 위협적인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과 이 행성의 이해에 기초한 실질적이고 정직한 연구조사로부터 나온 정보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지구에 대한 진실한 관심에서 나온 정직한 조사와 정보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고, 이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 스스로가 힘을 얻고 더 행복해지고 더 활동적으로 될 수 있는 많은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정직한 정보와 성실한 자료를 찾아보기가 점점더 어려워짐에 따라 우리는 개인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안적인 출처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업적 지식과 정보가 아닌 이와 같은 지식을 얻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행동할 수 있게끔 이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체제가 세계화된 경제체제이며 온갖 종류의 유사한 해악을 전세계 곳곳에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다른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활동은 우리자신을 교육하는 것이며 우리가 배운 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10명의 친구가 모여 정보를 취합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다른 이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일, 비디오를 같이 보고 책을 같이 읽는 지역공부모임을 만드는 일 등, 가장 좋은 교육의 방법은 공동체 차원, 그룹 차원에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하는 즐거움, 공부뿐만 아니라 함께 노래하고 함께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즐거움도 가져다줄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또한 세계경제의 압박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벗어나게 해주는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행동 중의 하나는 우리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북돋우는 일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어떤 종류의 명상 또는 노래부르기 등일 것입니다. 즉 잠시 동안 지적인 활동을 멈추고 더 행복하고 더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가 될 때까지 가만히 숨을 고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오늘날 점점더 분석적인 방식으로 너무나 힘들게 경쟁하고 일하며 기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자신과 우리의 행복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서 휴식과 명상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정기적인 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염두에 두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서구사회에서는 운동을 너무 안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적 불행의 상당 부분이 육체적 움직임의 결여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법을 익히기 시작할 때 단순히 움직임만으로 그들의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자라나고 폭력성이 감소하게 됩니다. 움직임을 통해서 폭력성과 침울함이 다함께 감소합니다. 우리의 몸을 움직이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 시스템의 또 한면은 우리들을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인위적인 소비문화로 내모는 것입니다. 전지구의 어린이들은 이러한 인위적 소비문화에 순응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밤 이 문제를 깊이있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지배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의 중요한 한 측면입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표준화되어 있는 하나의 역할모델(role model)의 이미지, 즉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서구적 외모의 역할모델은 전세계 모든 어린이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심지어 서구에서도 5세의 여자아이가 심각한 식습관 장애에 걸립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바비인형만큼 날씬하지 않다고 말하고 결국 자신의 몸을 혐오하게 됩니다. 아시아에서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성들이 좀더 서구적으로 보이도록 성형수술을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이 소비문화는 자기자신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식적으로 지역중심의 생활문화를 재건설해야 합니다. 지역중심 삶의 문화는 아이들을 광고와 텔레비전, 대중매체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텔레비전과 매스미디어 속에 나타나는 한국인의 이미지는 일반인들에게 열등의식과 그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완벽함이란 것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동감 있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일상의 문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재건설하고, 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자녀들의 역할모델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문화와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웃들과 지역공동체를 건설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연과 동물,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의 일부라는 의식을 재구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자연세계와의 결합 ― 어떤 사람들은 자연세계와의 이 결합을 '영적 결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명, 우주에 속한다는 의식을 갖게 해주는 심원한 결합입니다 ― 을 느끼도록 장려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안녕과 행복에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공동체 차원에서는 위로부터 우리를 압박해오는 이 거대한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또다른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즉,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역경제를 재건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지역통화, 물물교환, 지역식품시스템(local food system) 등이 활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역식품시스템은 현재 서구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운동으로 농부와 소비자를 연결시켜 농부들이 좀더 직접적으로 소비자에게 농산물을 팔도록 함으로써 중간착취를 피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점점더 멀어지게 하는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극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또다른 매우 전일적이고 의미있는 공동체 차원의 노력은 생태마을, 생태공동체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가장 고무적인 활동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지역 홍성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현존하는 농촌공동체를 건강한 지역경제와 더불어 생태공동체로 바꾸는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경제-생산시스템을 분산시켜서, 먼 거리의 수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산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라는 천(fabric)을 다시 짜는 일이며 지속가능한 생태주의적 경제시스템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생태공동체의 창조는 젊은이에게나 나이든 사람들에게나 매우 중요한 활동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개괄한 모든 개인적·공동체적 차원의 변화들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현재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몇몇 연구들에 따르면 전 인구의 30퍼센트 정도가 현재의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제가 앞서 개괄한 것들 중 어떤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변화도 필요로 합니다. 그것도 절박하게 말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어떤 종류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합의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오늘날 한 국가가 미국정부의 힘에 단독으로 대항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치러지고 있는 전쟁을 통해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WTO, IMF 그리고 세계은행 등에 대해서 단독으로 맞서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른 행동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국가들이 그룹으로 블록을 형성하여 공동의 행동으로 이러한 세계 기구들의 권력에 함께 맞서는 것입니다. 프랑스, 독일 등이 미국정부에 '감히' 맞서는 약간의 행동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22개의 소위 개발도상국들이 WTO의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블록을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비전을 갖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변화를 위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웃나라들과 함께 간다는 비전을 가지고 세계경제를 끌고 나갈 우리의 대표들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적 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 국가가 투기자본의 흐름과 독점을 통제하는 것이며, 여기에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가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러한 공동의 보조를 취하기 시작하면 에너지 정책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정책은 보다 건강하고 생태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데 중심적입니다. 우리는 탈중심적인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을 지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환경적 비용이 낮고 덜 파괴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지지하고 재정 보조를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를 두드러지게 지원하는 정부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대중을 잠잠하게 만들 정도의 조금의 빵부스러기 정도는 던지고 있지만,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에 대한 정부의 의미있는 헌신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한 탈중심화된 경제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한 탈중심화된 경제체제에서는 일자리 부족문제가 없을 것이며 또한 환경파괴는 극적으로 감소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자리와 환경 모두를 위한 '윈-윈 전략'이 될 것입니다.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에 기반한 탈중심화 경제는 난방도 전깃불도 없는 암흑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와 기술과 관련지어 또다른 예들이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하나의 예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일반대중들이 경제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좀더 깨닫기만 한다면 이룰 수 있는 변화입니다. 현재 과세·보조금 정책은 인간의 노동력 대신에 에너지와 기술을 더 사용하도록 모든 기업에 장려하고 있습니다. 신기술을 사용하게 되면 세금삭감, 또는 정부의 재정보조 등을 얻을 수 있는 반면 노동자들을 고용하게 되면 무거운 세금부담을 지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逆轉)은, 즉 더 많은 인간노동의 사용과 더 적은 에너지 사용을 장려하는 것은 현실 경제의 외형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며 전환시킬 것입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오늘 저의 강의는 여기서 마쳐야겠습니다. 모쪼록 저의 강의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경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농부들에게 그렇습니다. 농부들 자신이 농사짓는 일에 가해지는 경제적 압력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농사에 대해 생각할 때 그저 경작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농부와 농사일을 어떤 방향으로 내몰고 있는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식량과 농사일을 지키기 위해서 소비자와 도시의 활동가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다작(多作)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농부와 소비자 모두에게 막대한 생태적·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다국적기업의 손에서 사람들의 손으로 돈을 되돌려놓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식품운동'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움직임 중의 하나입니다. 세계의 식품시스템에 대해 인식하고 이것이 세계경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이 운동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좀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식품시스템의 다양한 이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경제-식품-농사'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밤에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를, 그리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룻저녁에 이 모든 이슈에 대하여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렵고 또한 저의 강의도 매우 일반적이고 어쩌면 피상적인 것으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언컨대 제가 드린 말씀이 피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지난 28년 동안, 여러 나라들에 대한 문화 연구와 경제시스템이 그 나라 사회에 미치는 일차적 영향을 고찰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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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의 / 응답]


  농민과 소비자의 연대


  질문  저는 다른 지역에서 온 63세의 농부입니다. 십년 동안 농약을 뿌리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농사지은 배추를 가지고 도시의 아파트단지 같은 데 가서 팔면, 주부들이 다른 물건값이 천원이면 아무 소리 안하고 잘 사면서도 배추 한포기 천원이라고 하면 비싸다고 야단입니다. 우리 주부들, 소비자들이 다른 쓸데없는 데에는 돈을 잘 쓰면서도, 농민들이 힘들여 농사지은 농산물 값은 비싸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의식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요. 이런 소비자들의 의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헬레나  이 질문은 현재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산업국가에서 농부들은 소비자들이 문제라고 말하고, 소비자들은 욕심많은 농부들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농부나 소비자 둘다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대규모 기업의 중간상인들이며 이들이 적정한 가격의 건강한 먹을거리 생산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 한국의 일부 주부들이 소비문화의 아이콘을 소비하는 데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부들은 좀더 적게 돈을 쓰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점점 올라가는 집세, 교육비, 교통비 등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절약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좀더 큰 그림으로 이 문제를 봐야 합니다. 문제는 농부도 소비자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를 점점더 분리시키는 경제구조에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자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먹는 대신 수입농산물에 의존하도록 만듦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여기에서 번 돈으로 출판, 교육, 과학적 연구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합니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다국적기업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개개인을 비하하거나, 개인적 차원에서 그저 기업에 의존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제도적 변화를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서로를 비하하고 미워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질문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예를 들어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헬레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우선 하나의 예로는 '농민시장'이 열리는데 큰 도시에서 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장은 매주 한번씩 열리는 경우도 있고 상설시장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다른 예로는 농부들이 동네 가게에 농산물을 대어서 지역주민들이 농산물을 사가게 하거나, 소비자협동조합이 농민협동조합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박스 배달체계(box scheme)'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농부들이 자기 가정에서 농산품 ?? 채소나 버터, 우유, 달걀 등 다양한데 ?? 을 개별 박스에 넣어서 이것들을 도시의 한 가정으로 배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사람들이 그곳으로 와서 자기가 주문한 물건 박스를 챙겨갑니다. 이것은 농민시장을 열거나 동네 가게를 통해서 물건을 파는 것이 어려운 경우에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다른 모델은 소위 '선지불 농사(subscription farming)'입니다. 이것은 소비자그룹이 자신들이 공급받기를 원하는 물품에 대하여 일년 정도 미리 그 값을 농부들에게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농민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며, 각 소비자 가정은 농산물 값을 일년 미리 지불하고 일년여에 걸쳐 필요 물품을 공급받게 됩니다. 또한 미국에서는 소비자그룹이 직접 농지를 소유하고 그 농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공급받는 사례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썩 잘 운영되고 있는 몇몇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공공기관, 즉 학교나 병원이 지역농산물을 이용하도록 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특히 영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지역농산물을 이용하는 학교들이 점점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학교와 대학 등이 농장을 직접 운영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실제로 농작물을 어떻게 기르는지를 배우고 음식 만드는 법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미국에서 매우 유명한 프로젝트로 '먹거리 학교마당(edible school yard)'이라는 게 있습니다. 주차장의 시멘트를 걷어내고 학생들이 채소와 곡물을 심고 재배하며 나중에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프로젝트입니다. 때로는 학생들이 기른 농산물을 학부모들이 사가기도 합니다. 이런 운동들은 정부로 하여금 슈퍼마켓이나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는 지역의 농민으로부터 식품을 구입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또다른 형태의 운동입니다.


  요컨대 학교, 병원, 감옥에서 소비되는 식품은 지역 농민들의 중요한 수요원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화, 빈곤, 정의


  질문  지역산 식품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로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래서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 경제적 약자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사회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헬레나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이 강연에서 여러분께 설명드리려고 애쓰는 것은 지금의 현상 뒤에 감춰진,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정부의 보조금·규제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요컨대, 국제무역에서는 탈규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지역의 소규모 농민이나 기업가에게는 관례적인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 선택, 예컨대 세금을 어디에 쓸 것인가, 무엇을 규제하고 무엇을 탈규제할 것인가와 같은 정치적 선택들입니다. 가격은 효율성이나 얼마만큼의 자원·노동이 투입되었는가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가격은 '정치적' 선택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역식품운동'을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지역식품운동을 통하여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건강한 유기농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거짓으로 뭉쳐진 시스템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규모의 단작이 보다 효율적이며 값싸고 더 많은 양의 식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분명히 알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더 희소해지는 자원을 가지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원의 희소화는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전세계의 어린이들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도록 부추겨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희소성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은 대구와 감자를, 한국사람들은 쌀을, 티베트에서는 보리와 야크 고기를 즐겨왔습니다. 만약 경제시스템이 우리가 이러한 자연세계의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우리는 알맞은 가격의 훨씬더 많은 먹을거리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일자리와 자원의 인위적 통제가 희소성을 만들어냅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대도시로 내몰림에 따라, 심지어 캘커타나 멕시코시티의 슬럼가처럼 매일밤을 굶주림에 허덕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땅에서 나는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농촌마을에 머무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시스템은 농촌에서의 삶을 '빈곤'으로 간주하며 경제성장의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도시로 이주하게 되면 굶주리거나 가난해지거나에 상관없이 경제지표로는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난'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화폐가 생겨나는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화폐란 만들어진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폐란 정치적 아이디어입니다. 그것은 제한된 양으로 은행에 저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자원의 사용은 어떻게 이 돈을 사용할 것인가, 누가 이 돈을 통제하는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재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  어느 학자가 조사한 바로는 지구가 지속가능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즉 모든 생물이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인구수는 4백만이라고 합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지금 지구의 인구가 60억이라고 할 때, 그럼 4백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지구를 떠나거나 죽어야 한다는 얘기인데요. 이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의 희생을 전제로 한 생태계 유지밖에 대안이 없는 것일까요?


  헬레나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산업화된 국가의 도시 소비자들처럼 자원을 소비한다면 아주 소수의 인구가 아니면 우리의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는 기왕의 고(高)소비자들이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길 뿐만 아니라 농촌지역의 사람들까지도 도시로 내몰면서 도시 소비자들처럼 소비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슬럼가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현대도시의 구조상, 즉 더 많은 석유와 자동차와 물과 콘크리트를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상, 농촌 생활자에 비해 자원을 더 소비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발전, 모든 사람이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화석연료에 기반하여 살아가는 모노컬쳐(mono-culture)의 소비자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발전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지금의 모노컬쳐는 이 비좁은 지구 위에서 더이상 지속될 수 없습니다.


  또한 거대기업이 우리의 물과 땅을 소유하고 중앙집중적으로 관리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너무 낭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성과 탈중심화, 생태적 순응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의 전환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들 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혜택은 우리의 삶의 질의 향상입니다. 진정한 삶의 질의 향상, 사람들은 이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산업화된 모노컬쳐밖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구상의 모든 이가 적정가격의 신선한 지역음식을 먹고, 주변의 자연적인 건축재료를 이용하여 집을 짓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거기에는 아름다움과 우아함, 지속가능성, 진정한 부(富)가 동시에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정책 차원에서의 변화로 경제시스템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현재 모든 기업들은 노동력을 사용하는 대신 기술과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장려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화 경제의 중요한 추진기제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업들에게는 정부보조금이 더 많이 지급되며 세금삭감 혜택도 줍니다. 반면 고용을 늘리면 세금부담이 무거워집니다. 간단하게 이것을 반대로만 해도, 기업의 노동력 사용이 장려되기만 해도, 전체 경제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경제시스템의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시스템 전환에 관심이 없는 정치지도자를 세워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제적 교양'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인식하고 있다면 전환은 생각만큼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


  질문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영어가 전세계의 공통어로 이용되고 있는데요. 저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현재로서는 영어가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해서 제 주변의 사람들과 같이 영어를 공부하는 모임을 꾸려가고 있는데요. 어떤 분들은 영어가 제국주의 언어이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언어학자로서 이러한 언어 제국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헬레나  저의 모국어는 스웨덴어인데요. 스웨덴에서도 현대경제에서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노컬쳐를 이야기할 때 언어는 중요한 한 측면입니다. 영어의 일반화는 우리의 자부심의 상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점점더 많은 나라에서 영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2등 시민이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어의 일반화는 세계화된 소비문화가 우리들을 파괴하는 중요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파괴시키는 많은 도구들, 예컨대 그것이 영어든 텔레비전이든 인터넷이든 우리는 그것들을 역으로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의 많은 활동가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그들과 더불어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의 국제적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것은 자명합니다. 현재로서는 영어가 유용한 도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유용한 도구와 미래의 비전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모든 언어가 똑같이 중요한 세상을 꿈꿉니다. 국제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언어가 중심에 서기를 바랍니다. 현재 존재하는 중심의 개념이 아닌 모든 것이 중심이 되는 것, 저는 이것이 진정한 탈중심화이고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며, 지속가능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국방'을 염려한다면 농업을 지키고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질문  흔히들 "한국은 분단된 국가로서, 경제문제는 바로 '국방'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들 합니다. "빈약한 자본을 가지고 노동력에 기대어 수출을 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국가"로서, 지역화된 경제를 실현하자면 "국방이 약화될 수가 있다"는 염려를 할 수도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헬레나  그 점이 제가 국제적 협력의 필요를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이미 몇몇 유럽국가가 미국에 맞서고 있고 G22 국가, 소위 개발도상국가들도 블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정한 무역,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위해서, 다시 말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독점기업을 통제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만들어 함께 국제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반드시 동일 지역권 내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국방에 대해 염려한다면 식량자급력을 높여야 합니다. 매일의 식량이 먼 거리로부터 공급되는 것, 이것이 국방의 약화를 의미하고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사적 이유에서도 우리는 지역경제를 강화해야 합니다. 국제무역은 국방유지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좀더 전략적으로 국제적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국방을 위해 군사력의 유지·강화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기보다 다른 나라와 연대하여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질문  현재 대외의존도가 극심한 한국의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립적인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끼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헬레나  우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세계무역에 의존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산업화가 더 많이 진전된 나라, 예컨대 스웨덴이나 영국, 미국 등의 의존도가 더 심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더 개발된 나라일수록, 더 산업이 발전한 나라일수록 국제무역 의존도는 더욱 높습니다. 따라서 지역화로의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의 큰 이슈는 우리가 더 의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덜 의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역 차원의 활동으로는 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웬델 베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위대한 농부이자, 시인이며 작가인 그가 저에게 켄터키의 한 농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농부는 대기업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고 담배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쌀농사였건 밀농사였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는 농사를 지어서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살충제나 화학비료, 비싼 기계 등의 사용으로 파산하고 빚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지역화의 경제적·생태적 이점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백에이커의 농사를 포기하고, 단 2에이커의 땅에 채소를 심어서 지역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농사지은 지 한 해만에 그의 채소는 꽤 이득을 가져왔습니다. 3년째 되는 해에 그는 채소농사의 규모를 조금 늘렸고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그 농부는 3년 만에 의존성과 빚에서 독립성과 이득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3년만에요. 우리는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꽤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화의 경제적·사회적·생태적 이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국제적 협력에 기반한 지역화


  질문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의 세계화, 기업적 세계화가 아닌 진정한 세계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헬레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간 또는 조직간의 국제적 커뮤니케이션·협력 또한 세계화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혼동시키고 이슈를 흐려놓습니다. 기업과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적 세계화는 '탈규제화'입니다. 다시 말해 거대 독점 다국적기업들이 국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을 막는 규제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거칠 것이 없게 된 다국적기업들은 수백만개의 기업들과 일자리를 없애고 수백만의 농부들에게서 땅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상품생산은 점점더 소수의 손에 장악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경제적 세계화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경제적 세계화와 사람들간의 국제적 커뮤니케이션·협력 사이에 분명한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후자에 대해 '세계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적 협력에 의한 지역화' 또는 '국제적 지역화(International Localization)'라고 불러야 합니다.


  세계적 교류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서로 다른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적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다크 지도자들을 굳건히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서구세계로의 '체험 여행(reality tour)'을 조직해볼 수 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모든 라다크인들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도 아니지만, 몇몇 라다크 지도자들이 서구세계로 와서 자신들의 눈으로 실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교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진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우리 같은 사람들과 서로서로 국제적 협력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적 협력' ?? 국제적 협력이라고 부릅시다 ?? 은 매우 유용하고 성과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경제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은 '북'과 '남', 농부와 소비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국제적 운동이며 노동조합과 환경운동가를 연결시키는 새로운 운동입니다. 이런 협력이 우리가 변화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행복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양성을 지키며 서로서로를 지원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서구인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서구인들은 국제적 협력은 '서구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를 전세계 커뮤니케이션의 공통언어로 간주한다든지 서구적 형식으로 민주주의·사회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 지원·협력해야 하며 이로써 서로가 함께 번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역화를 위한 국제적 협력, 혹은 국제적 협력에 의한 지역화가 진정한 세계화입니다.



  김종철  며칠동안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와 동행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오늘 이 답변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국제적 협력에 의한 지역화'라는 말인데요. 중요한 것은 지역화와 연대입니다. 땅에 뿌리를 박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 사이의, 지역과 지역 간의, 국가와 국가 간의 연대·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를 처음 시작할 때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이 체제, 즉 민중을 수탈하고 소수 기득권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지금의 체제가 끝나지 않으면, 이 체제가 극복되지 않으면, 인류의 운명은 물론이거니와 지구 자체가 더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시작했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저항해서 넘어가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라고 저희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내용을 어떻게 하면 이 경제적 세계화를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기획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대단히 중요하고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라는 말 때문에 많이 속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의 세계화라는 것은 '기업 식민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다수 민중에게는 엄청난 수탈체제입니다. 식민주의보다 더욱 강화된 수탈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압력이 필요하다


  질문  한국은 땅값이 너무 비싸서 도시의 젊은이들이 뜻이 있어도 생태공동체운동을 펼치거나 귀농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외국은 사정이 어떤지, 생태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고, 그곳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헬레나  한국의 전반적인 토지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보통 도시, 즉 일자리가 있는 곳과 가까운 땅은 매우 비쌉니다. 또 관광지와 가까운 곳이나 부자들이 사는 교외의 땅도 비쌉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는 땅값이 싼 벽지들이 있고 이것이 다른 나라들에서는 생태마을을 조금은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나라들에는 대부분 ?? 미국, 영국, 스웨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할것없이 ?? 규제가 존재합니다. 즉, 몇몇 가정이 한곳에 모여 사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따라서 생태마을 건설에 큰 장애가 되는 규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곳에서는 규제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한국의 경우 모든 지역의 땅값이 대체로 비싸다면, 저는 우리가 해야 할 운동, 정치적 운동의 하나로서, 땅의 일부를 새로운 삶의 방식의 실험 모델로서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도록 정부에 요구하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는 교육, 토지사용 방식 등을 포함하여 정부가 대안적인 발전방식을 택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운동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유럽에는 지금 몇몇 생태마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10여년간 수많은 생태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풀뿌리 차원에서 생태마을을 향한 노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지속되어온 생태마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는 20-30년 된 생태마을이 몇몇 있는데 제가 방문한 두 공동체 중에서 한 곳은 주민이 20명 정도였고, 다른 한 곳은 꽤 규모가 커서 주민이 2천여명 정도였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도 '크리스탈 워터스'라는 20여년 된 꽤 성공적인 생태마을이 있는데, 약 500에이커의 농장을 경영하고 약 100여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오르빌' 공동체는 외국인과 지역주민 수천명이 작은 공동체들을 이루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곳인데, 이 작은 단위의 공동체를 일컬어 '오르빌'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많은 농작물을 기르고 재생가능 에너지기술을 사용하며 때로는 지역통화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배 경제체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양단(兩端)의 활동을 모두 해야 합니다. 풀뿌리 차원의 추진력을 창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활동뿐만 아니라 위로부터의 변화도 모색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으로 우리는 정치적 차원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태마을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 곳이라 해도 일반적으로 그곳의 사람들은 주류 소비사회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충만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태마을은 가치있는 시도입니다.


  여러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에서도 몇몇 그룹의 사람들이 정부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생태마을을 '사회적 실험'으로서 건설할 수 있도록 땅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압력을 넣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정부로 볼 때 그 땅과 재생가능 에너지기술 지원에 드는 약간의 비용은, 이 사회의 파괴비용에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한국에서 정부지원에 대한 로비나 압력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마 김종철 교수님께서는 이런 활동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웃음) 저는 새로운 탈중심화된 모델을 위해서 땅과 에너지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찬성합니다. '시혜'에 의존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존을 만들어내는 모델이 아니라, 우리가 더 독립적이고 자립적으로 될 수 있는 자원의 제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행동할 때


  질문  지역문화를 살리기 위한 소규모 실천들을 범세계적으로 연결시킬 네트워크를 구상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헬레나  예, 그런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시도할 수가 없었는데 하루빨리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마도 김 교수님을 비롯한 한국사람들과 협력하여 네트워크를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각 지역의 지역화 운동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은 이 운동을 강화시키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생태마을을 지원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일도 국제적 네트워크가 있다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저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주요방법은 점점더 많은 그룹들이 이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정부가 깨닫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성명서를 내고 모든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는데, 국제적 네트워크가 있다면 이러한 활동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세계 생태마을 네트워크'의 창립자 중 한사람이고 라다크에서의 활동도 이 네트워크가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역화를 위해서 더 많은 네트워크, 더 폭넓은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우울해집니다. 이라크전쟁이나 부시정부의 정책 등을 보면 우리는 우울해지고 압도되며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전세계의 3천만의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여 행진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규모의 시위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 반전운동 때의 집회도 이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깨어나고 있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상심하고 우울해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행동할 때입니다. 개인적·공동체적·정치적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공동체와 개인의 안녕을 일치시키는 일을 한다면 우리의 이 운동은 활기있고 재미있는 운동이 될 것입니다.


  오늘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여러분이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저는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려 3시간여 동안 이 자리를 지키는 여러분은 이미 어떤 행동에 나섰다고 생각되며 저는 이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아주 흥미로운 곳입니다. 게다가 ―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 오늘 저의 청중들은 아주 지적 수준이 높으신 분들인 것 같습니다.(웃음)



  소비주의 문화와 행복의 정치학


  질문  농촌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들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헬레나  저는 어린이들이 문화의 '약한 연결고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라다크의 경우 지혜로운 전통을 따르고 자신의 가치관을 가진 어른들은 소비문화에 유혹당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있는 청소년들은 이런 소비문화에 취약했습니다. 소비문화는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라다크인처럼 생기고 라다크인처럼 먹고 라다크인처럼 입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어합니다. 소비문화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된 것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매우 정신적인 이유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른 많은 학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소비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소비문화의 일부로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할 때 "안돼"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우리의 아이들이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소비문화에 속하는 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저는《오래된 미래》에서도 이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하며 그 일부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주목받고 싶어하며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랍니다. 좋은 옷을 입고 보기 좋은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소속감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부러움과 경쟁심, 불안감을 갖게 만듭니다. 따라서 학부모나 어른들이 소비문화가 아닌,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다른 문화를 제공하고 생활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라다크의 경우 현재, 여성·엄마들이 자녀와 무리를 지어 함께 일하는 것이 어떤 변화의 시작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나는 변화인데, 즉 하나의 무리,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소비문화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속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곳에 속하는 것이 자신들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긴 대답이 되었군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면, 저는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즐겁습니다.(웃음) 우리들은 아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함께해야 합니다.



  질문  지금 선생님께서는 행복하십니까? 무엇이 선생님을 행복하게 만듭니까?


  헬레나  지금 저는 오히려 김종철 선생님처럼 사람들이 행복한 웃음을 짓도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때마다 여러분이 매번 유쾌하게 웃으시는데, 정작 본인은 매우 심각한 얼굴이군요.(웃음)


  저는 매우 행복합니다. 저는 늘 자연과 친밀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데요. 그 덕분에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자랐는데 운좋게도 바닷가나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덕분에 자연과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제가 하고 있는 일 ― 오늘 여기서 여러분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포함해서 ― 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 일이 저를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마지막으로 또하나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도 오늘 만나고 계신 멋진 남자, 제 남편과의 결혼생활입니다.(박수)



  김종철  이 암담한 시대, 우리가 외롭고 가난하지만, 이웃이 있고 친구가 있고 그리고 사상적으로 무장이 되어있다면 이 암담한 시대를 견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돈만 아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바보가 되라고 강요하는 이 체제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씨와 점심을 먹으면서 들은 얘기인데, 상당히 뜻깊은 이야기인 것 같아서 여러분께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 달라이 라마가 이끌고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총리로 계신 삼동 린포체(Samdhong Rinpoche)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매우 존경할 만한  현자라고 하는군요. 이분이 최근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지난 40년 넘게 중국의 군사적인 점령 통치 하에서 티베트 사람들이 온갖 억압과 고초와 고문과 악행을 당하면서도 티베트 문화는 본질적으로 아무 훼손 없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난 10년간 티베트에도 소위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소비문화가 들어왔는데, 불과 10년간의 소비문화에 노출된 결과 지금 티베트 문화가 뿌리로부터 훼손되고 있다는 겁니다. 결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계신 젊은이들한테는 듣기 거북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저도 한 30년 동안 대학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절박하게 느끼는 문젭니다. 우리가 군사정권 밑에 있었을 때에는 젊은이들이 대단히 똑똑하고 생기가 있었습니다. 눈빛도 빛나고 기백도 있었지요. 그리고 우리들끼리 상당히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독재 시대가 끝나고 90년대 이후 상업소비주의 문화가 창궐하면서 그런 기풍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 젊은이들이 방향을 잃고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인상이 뚜렷해졌어요. 자기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관심도 없고, 그냥 매스미디어에 놀아나면서, 소비주의 문화에 홀려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소비주의 문화만큼 무서운 게 없는 것 같아요. 정치적인 억압보다도 훨씬더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삶을 비천하게,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근원적으로 무기력하게, 빈곤하게 만드는 게 소비주의 문화라고 할 수 있어요. 티베트의 이야기, 40년에 걸친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던 공동체와 전통문화가 불과 10년도 안된 소비주의 문화의 압력 때문에 뿌리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다는 이 가슴아픈 이야기는, 우리가 이 시대에 사람으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데 깊이 참고해야 될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만 끝내겠습니다.(박수)


  (통역 ―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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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록은 작년 12월 10-11일 이틀 동안, 서울 서강대와 충남 홍성 문당리 '환경농업교육관'에서 연속으로 열린 제3회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내용 중 둘째날의 강연 및 질의/응답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번 행사는 '사상강좌 운영위원회'가 주관하고, 녹색평론사, 풀꽃평화연구소, (사)한살림, (사)천주교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풀무학교 전공부, 녹색연합 등이 공동주최하였다.



녹색평론사  (053)742-0663, 0666  fax (053)741-6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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