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환경연대> 2004-06-16
http://www.ecofem.or.kr/bbs/board.php?bo_table=pds_1&wr_id=5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인 <석순> 23번째(2003년)에 쓴 글.
어떤 에코페미니스트의 고민과 지향 그리고...
- 이안소영 -
글을 시작하며 : 나는 누구인가?
“세상에는 n개의 에코페미니즘이 있다”
처음 석순 편집부에서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원고청탁서를 보내 왔을 때, 기획의도를 설명하는 단락 중에 위와 같은 문장이 있었다. 동감이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될 에코페미니즘은 그 n개 중 하나일 테고, 내가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어떤 에코페미니즘은 당연히 내가 살아왔던 삼십여 년 동안의 내 삶을 어떤 형태로든 충실히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글을 쓰게 될 나에 대해 조금 설명하려 한다. - 1) 물론 이것은 당연히 나의 현재적 해석과 설명이다. 나는 현재 내가 의미있게 생각하는 사건과 역사만을 채택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 나는 특정한 페미니즘 혹은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내 변하지 않는 우호감 혹은 적대감 등을 보면서 사람의 경험과 역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
나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읍 단위 지역에서 태어나 근 20년을 살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했다. 서울의 대기오염에 적응하느라 상경 후 몇 달 동안 감기를 달고 살았고 한 동안은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식당 밥 먹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서울의 거대한-비인간적- 규모에 비교적 잘 적응해갔다. 나는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믿었고 방학 때는 인형공장, 가방공장에서 ‘공활(공장현장활동)’을 했다. 그리고 졸업 후 1년 8개월 동안 청계 8가와 신설동 사이에 있는 의류공장에서 미싱사로 살았다.
당시를 살았던 많은 여자들처럼 나도 내가 가진 여성성을 부정했고, 감정적이고 투철하지 못하며 사적인 것에 쉽게 매몰되기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공적인 대의명분을 위하여 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비장미 가득한 ‘남성’이 되기를 다짐했었다. 그것이 내 존재이자 나의 우월감을 인정받는 방법이었다. 나는 ‘여성’임이 드러나는 내 몸을 혐오했고 타인들에게 내가 여성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인간 관계와 품성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했으며, 질서정연한 규칙과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사회과학적 지식에 매료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물질성”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 말은 ‘실질적’으로 세상이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의 요구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관료주의와 자본가의 비생산성과 부도덕성을 날카롭게 지적해 내는 데에도, 종교의 폐해를 설득하고 관념주의를 공격하는 데에도 유효했다. ‘실재하는 것’과 ‘감각으로 실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떻게 구별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실재’한다고 증명하거나 알 수 있는가? 기氣나 영혼은 물질적 에너지로 설명될 수 있는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인가? 나는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가? 어쨌든 나는 신과 영혼 그리고 생전과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전근대성-제3세계-낙후함-농촌-여성-아줌마들의 기호라 여겼던 것 같다. 나는 우월한 인간이란 무릇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든 ‘혼자서도 잘 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얼마 후 나는 여성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한동안 나는 여성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노동 현장의 모순을 보았기 때문에 여성학과를 선택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나중에 생각해 보니 거대 집단의 목표에 매몰될 수 없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다. 수많은 관계들로부터 파생되어 ‘나는 ○○해야 한다’고 나를 짓눌려대던 윤리와 규칙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느꼈고, 내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알아가는 데에 촉수를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나는 여성으로서 나를 긍정하는 힘을 얻었고, 그런 면에서 여성학은 내게 새롭게 세상이 열리는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현재 나는 에코페미니즘을 공부하며 그것의 한국적 적용과 모델화를 고민하고 있는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이하 꿈지모)’을 함께 하고 있으며, 여성환경활동가들의 연대조직인 ‘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 나는 ‘서울의제21의 성관점화 방안’ - 2) 편집자주.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92년 '리우회의 의제21'의 연속선상에서 지역사회 구성원의 참여와 협조를 통한 지역의 지속 가능성과 탈중심화를 이룩하는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담은 '지방의제21'을 수립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지방의제21'에는 여성의 참여, 경험, 관심이 배제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제제기 및 그에 대한 방안으로 여성환경연대는 '지방의제21의 성관점화방안'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그리고 이 중 저자는 서울지역의 '지방의제21'을 다루고 있다.- 과 젠더관점으로 보는 환경ㆍ건강 문제에 관한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에 계속 ‘뜨고 있는’ 리더쉽 -3) 나는 '리더쉽'의 '리더'라는 단어가 주는 이상한 우월감과 수직적 위계와 배타적 권력욕의 잔재에 거부감을 느낄 때가 많다. 오히려 수평적/동지 관계로서의 '펠로우fellowship'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리더의 위치가 존재한다면 '리더'라는 단어를 다른 내용으로 채워서 의미를 전복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겠다. - 개발 관련 프로그램 만발 풍조를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다. 시민사회 집단 내에서 구성원-구성원간 그리고 구성원-조직간 관계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인간 사이와 비자연-자연 사이의 관계를 평화롭게 다져갈 수 있는 기본토양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다
최근 몇 년간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중 하나는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이상향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쉴새없이 자연을 착취하고 소비하고 대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결핍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지혜였다. 이러한 이상향이 오래 전부터 현실태로 존재해 왔다는 깨달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현재 전세계는 서구식의 개발이 표준이며 유일한 사회 변화의 방향이라고 설파되며 전지구를 단일한 개발신화로 몰아넣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적정-생태적 기술로 에너지 순환적, 탈중심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라다크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인 대안사회였다.
하지만 여성학이라는 학문과 에콜로지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나는 환경문제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에 관심있는 여성학과 대학원생으로 머물렀다.
1998년 여름, 여성학과 내에서 불교나 환경/생태사상 등에 관심있던 몇 몇 사람들이 에코페미니즘 세미나를 시작했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 이론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당시 상황에서 이 에코페미니즘 세미나 커리큘럼은 곧 바닥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의 에코페미니즘 저작을 읽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고 재해석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때로는 몸, 과학기술, 귀농, 생태공동체, 속도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욕망 등의 관심주제를 놓고 자료를 모아서 토론하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의 소비양식을 성찰하기 위해 ‘소비일기’를 써보기도 했고, 생태공동체를 방문해 보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해 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2000년 봄 학기에 여성학과에 문순홍 선생님의 ‘여성과 환경’ 수업이 개강했고, 이를 계기로 이전에 문순홍 선생님과 함께 세미나를 하고 있었던 몇몇이 모여 에코페미니스트 공동체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꿈지모)’를 만들었다. 에코페미니즘은 인간-자연, 남성-여성간의 억압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을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인간들간의 위계가 어떻게 환경문제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지 못하는 인간중심주의 비판론이나, 인간들간의 위계를 극복하는 데 전념하느라 인간우월주의가 어떻게 다시 인간들간의 위계로 악순환되는지를 보지 못하는 사회비판이론들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에코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전제는 자연이 인간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과 여성이 남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성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가부장적 이원론이라는 위계질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인식이다. 위계론적 이원론의 가장 큰 문제는 지구의 모든 존재를 ‘A와 A가 아닌 것’, 즉 양립할 수 없는 대립항으로 파악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우주의 모든 존재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기도 하고, A가 아닌 듯하면서 동시에 A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며, 자연은 홍수나 가뭄 등으로 인간사회를 위협하는 파괴자의 모습을 가지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보듬어주며,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한결같이 베푸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성과 합리성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과학의 발전은 과학자 개인의 열정과 감성과 같은 주관적 요소에서 아이디어를 제공받으며, 과학적 진리와 패러다임은 당대 인간 사회상을 과학자를 통해 ‘주관적으로’ 반영한다.
하지만 위계론적 이원론의 인식질서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중심-주변/주체-대상으로 나누어 배타적으로 대립되며, 사물들 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유사성과 공통성은 일거에 소멸되고 양립할 수 없는 차이만이 부각된다. 이원론의 핵심은 ‘관계성의 단절’이다.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는 차이는 위계화된 차별로 권력화된다. 그리고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이러한 대립항에 성차별주의적 기제를 촘촘하게 교직시킨다. 근대 과학 혁명 이후 서구 중산층 백인 남성의 인식론에서 여성과 자연은 늘 타자화되고, 모든 열등한 가치들은 그들의 속성이 되었다. 남성은 이성적이고 문명과 정신을 대표하며 정상적이고 우월하다. 반면에 여성은 감정적이고 자연과 육체에 가까우며 변덕스럽고 비정상적이며 열등하다. 자연-여성-비서구-열등한 계급 및 인종은 인간-남성-백인-중산층의 목적이나 의지에 맞게 개조되고 변형될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인간이 자연과 관계맺는 방식,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맺는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에코페미니즘은 기존의 관계맺기 방식에서 평가절하 당했던 가치들에 주목한다. 창조적이고 초월적이라고 여겨졌던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을 영위 할 수 있게 하는 재생산 노동, 보살핌 노동 등 반복적이고 비창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뭇생명
들을 유지하고 지속시켜왔던 ‘살림의 원리’ - 4) 편집자주. 여기에서의 살림은 일반적으로 '집안일'이라 불리우는 일을 의미함과 동시에 '살리다'의 명사형으로써 무엇을 살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를 복원해내고자 한다. 모든 존재-그것이 자연과 인간이든 인간과 인간이든-가 서로서로 전일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살피고 배려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공감’과 ‘관계성’이야말로 에코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신인간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코페미니즘에서의 몇가지 논점 : 여성성, 영성
기존의 가부장적 이원론을 극복하며 여성과 자연의 동시적인 해방을 꿈꾸는 에코페미니즘에는 몇 가지 이견이 존재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마다 조금씩 강조점이 다르긴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 공통적인 것은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이다. 자연과 여성의 연관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된다. 하나는, 여성과 자연의 속성이 유사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 여성이 처해있는 억압적 현실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는 별 이견이 존재하지 않지만, 전자의 경우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자연의 친화성이 생물학적이고 심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인지, 혹은 여성과 자연의 친화성을 중시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성에 관한 강조 여부 역시 미묘하게 입장 차이가 엿보이는 지점 중 하나이다.
에코페미니즘과 여성성/여성적 가치
에코페미니즘은 기존의 남성적 가치가 정상성을 부여받으며 사회와 인간 관계의 운영원리로 작동하는 것을 거부하며 여성적 원리로 세상을 새로 짤 것을 요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부장적 이원론에서 ‘남성다움-남성성’은 이성적ㆍ자율적ㆍ독립적이며 공적인 목적을 위해 사적인 영역을 가치 절하 한다. 때로 그들은 경쟁적이며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고 관계 지향적이지 않다. 반면, ‘여성성’은 감성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며 사적 영역에서의 돌봄과 보살핌 노동에 익숙하다. 하지만 페미니즘 논의 내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적 가치의 재의미화와 재평가가 논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대안적 원리로서의 여성성이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왜곡되어 있는 현 가부장적 사회에서 옹호되어야 할 여성적 가치는 무엇이며, 그러한 대안적인 여성적 가치는 여성만이 보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에코페미니스트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까운가? 여성적 가치는 여성만이 보유할 수 있는가?
현실에서의 여성은 때때로 자연 친화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문명 선호적이고 소비 지향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귀농하려는 남성이 설득해야 하는 것은 도시의 편리함과 문명의 이기를 못 잊어하는 아내이다. 산을 좋아하며 즐겨 산을 찾는 사람 역시 남성이 많다. - 5) 물론 여성이 귀농을 꺼리는 것은 농촌 사회의 가부장성과 가정생활의 불편함, 또 그로 인한 사적 영역에서의 노동증가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 되는 현실 때문이다. 여성이 산을 즐기지 않는 이유 또한 여성은 신체를 움직이거나 단련시킬 것을 격려받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적 원인이 있음에도 표면적으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자연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
한편에서 여성은 월경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남성과는 다른 삶의 경험 때문에 남성보다 자연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육아가 여성의 역할이며, 아이는 생물학적 어머니의 보살핌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 사회ㆍ문화적으로 구성된 모성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성역할 분업이 새롭게 구성되어 여성의 역할이 남성적 공간인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는 동시에 남성 또한 ‘사적인’ 영역으로 재편입되어 온다면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공통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태어나지 얼마되지 않은 아이를 돌봄으로써 ‘나’라는 중심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필요와 요구에 온 몸과 마음이 민감하게 눈뜨는 관계성의 경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성의 한 부분 될 수 있을 것이다.
월경과 출산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여성은 정기적으로 나-인간-주체의 이성과 논리로는 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질서가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임신을 통해 아이라는 다른 존재를 내 존재 속에 함께 가지고 있는다. 이로 인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의 관계성을 몸으로 체험하는 여성은 보다 자연에 가까워 질 수도 있을 것 같다. - 6) 사실 나는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절감할 수는 없다. - 현 사회제도 하에서는 인간다움의 완성, 즉 남성다움의 완성이 미개와 비문명을 의미하는 자연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라는 신화가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자연에 가깝게 길러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월경이 불결하고 오염된 것으로 규정되고 출산 경험 또한 여성에게 완전한 인간 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소외로 다가오는 현 상황에서 여성이 과연 이를 통해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오히려 나의 20대 시절처럼 자연으로부터 탈피하여 온전하고 결함없는 ‘인간’이 되고 싶어할 것이다.
여기서 자연에 가깝다는 말은 자연을 벗삼기를 좋아하고 자연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부여된 속성을 동일하게 보유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때의 자연적 속성 역시 자연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속성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 지배력, 규칙과 질서 정연함, 생산성 등 인간, 남성이 보유해야 하는 속성을 제외한 비창조성, 단순 반복성, 규명되지 않음, 가치없음 등만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는 전지구적 환경위기와 개발신화의 폐해를 해결하는 환경실천에 있어서 여성이 다시 ‘지구 청소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현실로 악순환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의 환경운동, 실천이 먹거리와 폐기물 등 전통적으로 여성적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의 활동으로 국한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가진 ‘어머니’만의 문제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다.
여성이 더 자연 친화적이어서 환경문제에 더 예민하고, 자연파괴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을 더 많이 지녀서 지구환경보호와 지속가능하지 않은 개발담론을 막는 데 일조하는 것이 반드시 문제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성‘만’이 생활쓰레기를 분류하고, 지역의 작은하천살리기 운동에 나서고, 마을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마을 노인들과 아이를 돌보고 친척들의 안부를 묻고 방문하는 등의 부가노동을 해야 하는 성별 분업화된 환경운동의 현실이 문제다. 여성에게는 해야 할 실천만 산적해 있고, 그에 따른 결정권과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되어야 한다. 그리고 환경단체들 스스로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당장 사업에 동원이 가능한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만을 펼치고 있는 현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먹거리나 가족 건강 등 여성의 관심이 먼저 닿는 분야를 사회적 의제로 개발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전업주부 외의 여성과 남성을 배제하게 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도 환경운동은 변함없이 전업주부, 여성만이 담당해야 할 과제로 남을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 중 어떤 쪽이 더 자연 친화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 문화에 부여되는 우월성과 여성, 자연에게 부여되는 열등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여성적 덕목과 공간으로 가치 절하되던 살림, 지속가능성, 반복, 관계성 등의 원리에 대한 사회ㆍ문화적 공감과 채택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대안적 가치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배타적 기득권이나 문화적 규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인간중심주의가 남성중심주의와 함께 교직하며 작동해왔다는 사실이다. 만약 남성이 자신에게 부여된 우월한 가치와 여성에게 부여된 열등한 가치가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중심주의 또한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남성-백인-서구 중심주의에 숨어있는 위계론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일이며,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관계맺음 방식을 전환하는 일이다. 나와 나 아닌 존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고 느끼는 일이며, 그로 인해 아픔과 기쁨과 상처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에코페미니즘과 영성
에코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서 많은 사람들은 여신숭배나 여신에 관한 신화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여신에 관한 신화를 읽고 재해석하며 다산성과 생명, 대지의 어머니로서의 여신을 복원하려 한다. 가부장적 제도가 안착된 이래 모든 종교는 남성-유일신 신앙이 되었고, 이러한 종교가 정신-몸, 영혼-물질, 신성함-속세성, 청결-오염, 선-악 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기반으로 여성과 자연을 무력화시켰다. 이것을 상기한다면 생명성과 육화성肉化性을 간직한 여신의 복원은 이러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신의 복원과 재해석이 마리아 미즈의 지적처럼 ‘사치성 정신주의’로 귀결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7) 마리아 미즈 · 반다나 시바, 2000,『에코페미니즘』, 손덕수 · 이안나 옮김, 창작과 비평사. - 여성이 주체하는 행사 때마다 여신의 상징이나 의례가 등장하고, 향을 피우고, 뉴에이지 풍이나 명상음악을 듣는 것이 ‘에코페미니스트 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한편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여신숭배를 복원하고 우리 속에 여신을 깨우고 찬양하기 위해 인사동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분위기있는 초와 비싼 가격으로 향을 구입해야 하고, 아름다운 여신이 되기 위해 화장을 하고 다른 용도로는 쓰기 힘든 많은 천들을 구입해야 한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이러한 문화적 실천들이 ‘남성적’ 엄숙주의와 추상성이 우월한 가치로 인정받는 기존 문화체계에 균열을 내며, 축제와 주술 의례 등을 통해서 ‘보이지 않으나 가치롭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즐거운 공감과 찬양을 할 수 있는 대안적 문화/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데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한편에서 장식성의 극대화를 위한 소비주의라는 덫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무엇이든 오랜 시간 공들이지 않고 손쉽게-주로는 상품구매를 통해-생태적 가치와 대안적 사유방식을 소유하도록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한 발 걸치게 되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에서의 영성 강조는 분리되고 독립적인 남성적 자아개념을 중시하며 모든 존재의 상호연관성을 부정하는 서구과학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으며, 이것은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내가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의 규정이 어느 만큼을 경계로 가지는가에 대한 성찰과 되묻기가 바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은 정신적이고 영혼적인 것에 대한 추구 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간의 전일성全一性의 회복을 의미한다. 기氣치료나 요가가 자연파괴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몸의 움직임과 자연의 생기生氣의 상호작용에 의지하여 인간의 안녕과 건강을 유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생태적이긴 하다. 하지만 기치료를 믿고 요가를 하며 꿈일기를 쓰면서 내 속의 여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 에코페미니즘을 증명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리아 미즈(2000:31-33)의 비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마리아 미즈는 서구에서의 뉴에이지 운동과 명상, 요가, 주술, 대안적 건강법 등이 식민지에서 물질적 자원을 약탈한 다음 정신적ㆍ문화적 자원마저도 세계시장의 상품으로 변모시키는 자본주의의 영악함을 경계하라고 지적한다. 마리아 미즈는 전세계 여성들 일상의 생존활동 속에 뿌리박혀 있는 ‘생존의 관점’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의 근거가 되어야 하며, 이런 관점 속에서 여성들은 지구를 그들 자신과 모든 동료 피조물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고 역설한다.
에코페미니즘과 여성환경운동에 대한 단상들
- 8) 제목은 거창하지만, 사실 내가 몸담고 있는 두 조직과 그로 인해 알 게 된 몇몇 운동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단상들이다. -
내가 몸담고 있는 꿈지모와 여성환경연대는 조금 다른 지점이긴 하지만 모두 ‘여성’과 ‘환경/생태’가 결합되는 지점을 고민하며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꿈지모는 구성원들이 번갈아 가며 『환경과 생명』이라는 계간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싣고 있고, 얼마 전에는 그곳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어서 책으로 내기도 했다. - 9) 편집자주, 『꿈꾸는 지렁이들』 - 우리가 『환경과 생명』에 글을 기고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생태론과 환경운동 담론들이 가진 ‘여전한’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문화 때문이다. 환경 논의들 속에 내재되고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 여성 구원 신화 혹은 모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감과 그 폭력성에 대해 발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의 눈으로 환경문제를 바라본다면 어떻게 다르게 보고 실천할 수 있는지 말하고 싶었다.
모유 수유나 천 생리대 사용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지원없이, 모유의 우수성과 자연친화성을 설득하려는 움직임은 여성이 놓인 가부장적 현실을 무시하는 건강 담론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성교육과 안전한 피임법 및 여성에 대한 이중규범의 해체없이 ‘자연/생태’와 ‘생명존엄성’과 ‘종교’의 이름으로 낙태를 결사 반대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은 뭇 존재들 간의 건강한 관계를 복원하려는 에코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는 관련이 없다. 환경 악화나 군사주의, 혹은 자본주의가 성별과 지역과 인종 등 다양한 집단들에게 어떻게 다른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를 동등한 문명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몰아세우는 것 또한 에코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꿈지모의 관심은 그 외에도 화장품, 자연출산, 환경호르몬, 생명공학과 여성건강, 육식문화와 여성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귀농과 에너지 운동 그리고 새만금 간척공사, 전쟁 등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파급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영역들에서 여성에 대한 논의나 관심사가 간과되거나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남성 중심적 가치 체계를 평화롭고 수평적인 가치체계와 대안적 문화로 대체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꿈지모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세상 다시보기를 하는 것이 기본 목적인 모임이지만, 이것이 이론적/학술적인 세미나와 글쓰기에 그치지 않도록 늘 경계한다. 물론 ‘다른 목소리 내기’ 자체가 현실적인 힘을 가진 커다란 실천 중 하나일 수 있지만, 그 다른 목소리가 우리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현장의 필요를 받아서 이론적인 정리와 모델화 작업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 세미나 집단이 아닌 에코페미니스트 공동체의 위상과 역할에 적합한 과정과 내용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우리의 바람은 늘 잘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직업과 생계유지를 위한 일터는 늘 이러한 바람과는 다른 장소에서 생기고, 가끔씩 구체적인 문제분석과 대안을 논의하기에는 우리의 식견과 깊이-물론 열정도-가 턱없이 부족하기도 하다. 과연 무엇이 ‘전문성’인가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 합의 또한 새로운 관점의 개입을 힘들게 한다. 새만금 간척문제는 갯벌이나 수질오염 전문가가 논의해야 설득력이 있고, 생명공학기술이나 유전자 조작식품 등은 의대나 과학기술 분야의 전공자만이 논할 수 있는 지극히 전문적인 분야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환경연대는 1995년 개최된 북경여성대회를 계기로 만들어진 한국여성NGO위원회 산하 ‘여성과 환경분과’를 그 모태로 하고 있다. 그 모임이 북경여성대회 이후 지속적인 정보교류와 연대활동을 해 오다가, 99년 6월에 여성활동가, 전문가간의 네트워크로 확대ㆍ발전하면서 여성환경인들의 연대조직으로 결성된 것이 여성환경연대이다. 여성환경연대의 설립목적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여성환경 의제(정책)에 대한 연구, 여성환경운동가의 지도력 개발, 국내외 여성환경운동가와의 연대를 통해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활동한다.”
여성환경연대는 구체적인 이슈에 결합하고 대처하는 대중사업조직이 아니라, 여성활동가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연대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활동가들이 환경ㆍ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민들이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활동내용 등을 지원하는 것을 주된 사업으로 한다. 여성환경연대는 서울, 대구, 대전 등지에서 여성환경포럼을 조직하기도 하고, 동북아 여성환경회의와 전국 여성환경 활동가 연수를 기획ㆍ진행하기도 했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환경과 건강 문제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며 해마다 워크샵을 열기도 하고, 여성 생태 안내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에너지 교재”, “환경문제 개선 및 환경정책 시행의 사회적 기반 마련을 위한 여성잠재력 활성화 방안” 등의 연구조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여성이 새로 짜는 세상 -21세기 여성과 환경』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나는 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한 지 이제 반 년이 되었고, 초기 창립멤버들의 고민이나 대단한 열정 등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성환경연대는 한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에코페미니즘을 화두로 설립된 단체이며, 초기의 문제의식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에코페미니즘을 염두에 두며 사업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의미가 있고 잠재적 가능성 또한 큰 조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만, 여성환경연대가 에코페미니즘 담론의 확산과 공유 그리고 구체적인 의제와 정책 개발이라는 영역을 자기 정체성의 주요한 부분으로 삼고자 할 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몇가지 있다. (감히 말한다면) 현재 한국의 에코페미니즘은 현실과 결합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서구이론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이나 핵발전소 문제뿐만 아니라 얼핏 보기에 ‘여성과 환경의 결합’으로 매개하기 어려워 보이는 지하철 붕괴, 이라크전, WTO 농산물 수입개방, 총선 등의 현안에 대해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이에 대해 집중하고 고민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전문인력은 학계의 연구자일 수도 있고, 오랜 기간 단체에서 상근활동이나 자원활동을 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어쨌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데, 단체에서 일한다는 것은 에코페미니즘 관점으로 사회적 의제와 대안문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정책을 개발해 낼만한 시간적ㆍ정신적ㆍ물질적 여유가 턱없이 부족함을 의미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요즘의 나는 조직이 최소한의 규모와 기본적 필요로 유지되면서 대안 사회에 대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사회화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해....생각이 많다.
나는 ‘여성’과 ‘환경’이라는 단어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가끔씩의 불협화음과 부조 화에 주목하며, ‘여성적’이라는 단어와 ‘가치’라는 단어가 결합하는 순간 생기는 수많은 오 해들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려 한다. 여성환경운동 혹은 에코페미니즘이 대안적 사회에 대한 아이디어와 가치를 지향한다고 했을 때, 추구해야 할 ‘여성적 가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예를 들어, 요즘 세간의 관심이 되고 있는 리더쉽 열풍 속에 ‘여성적 리더쉽 개발’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실 이 짧은 단어 속에는 적어도 3가지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리더쉽의 내용과 상관없이 생물학적 여성이 사회적 ‘리더’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 둘째, 남성과 대별되는 생물학적 여성만의 독특한 특성으로서의 리더쉽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이를 여성의 리더쉽으로, 차이의 정치학으로 특화하고 채택하는 것, 세 번째는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지 않고 대안적 리더쉽이란 무엇인가 개발하고 그것이 사회를 움직이는 운영원리가 되도록 실천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 여성이 리더가 되기 위해 ‘남성적’ 경쟁원리와 처세술을 배우게 된다. ‘괴물과 싸우다 그 괴물을 닮아가는 꼴’이다. 소위 파워 페미니즘은 이 길을 걷고 있다. 두번째는 차이를 규명하는 것에 급급하여 여전히 배타적 이원론에 머무른다. 여성의 모든 차이가 옹호되며, 여성은 자신에 대해 성찰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 새롭게 ‘여성적’ ‘남성적’이라는 단어를 대안적 가치와 사회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성차별주의라는 인간간의 위계를 통해 교직하며 작동하는 현실을 놓치지 않으면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특성이 정당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여성환경운동’은 어떤 활동을 일컫는 말이며, 무엇을 지향점으로 해야 하는가? 여성환경운동은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환경운동인가, 여성의 관심과 필요를 운동의 과제로 삼은 실천인가? 여성환경운동은 현 사회에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영역-주로는 살림의 영역-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사적-공적, 운동-정치, 실천-이론, 여성-남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노력에 더 힘을 쏟아야 하는가? 물론 나는 흑백논리에 쉽게 매몰되는 이원론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므로, 이러한 질문들이 상호배타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성적 가치, 젠더적 관점 등에 대한 이론적 정의/규정이 항상 명쾌하고 고정적인 것에 비해, 현실에서의 운동은 살아 움직이며 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자라며 변화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항상 내 고정관념의 한계를 깨닫으며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이 다수 참여하는 환경운동은 손쉬운 방향으로 현실에 고정되지 않기 위해서 늘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혹시… 어느 틈엔가… 여성이 하는 환경운동이 ‘저절로’ 에코페미니즘적 가치의 구현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말이다.
'마리선녀 이야기 > 에코페미니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여성주의의 출현과 도전 /김정희 (0) | 2006.12.14 |
---|---|
에코페미니즘의 이론적 지형과 동향 /김정희 (0) | 2006.12.14 |
에코페미니즘 /김기선미 (0) | 2006.12.14 |
생태여성신학과 지구화 문제 /김애영 (0) | 2006.12.14 |
생태여성론이란 무엇인가 /문순홍 (0) | 2006.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