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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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
1강, “유영모 사상의 사상사적 위치와 현대적 의미”
박재순 박사 / 2001.9.2
1. 유영모는 누구인가? 신선 같은 도인
‘공자’ 강의로 유명한 김용옥이 “유영모를 만나 보지 못 한 게 천추(千秋)의 한(恨)”이라고 아쉬워했다는 데 나는 운 좋게 유영모 선생님의 말년인 1975년경에 세검정에 있는 댁에서 두 시간 가량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유 선생님 댁 앞에는 맑은 계곡물이 흘렀고 작은 다리를 건너 마당에 들어서니 복숭아꽃이 가득했다. 80대 후반의 유 선생님은 신선처럼 보였다. 머리털과 눈썹은 눈처럼 희고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는 붉은 복숭아 빛이 가득했고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빨갰다. 하루 한끼 먹고 육욕을 버리고 온 종일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선의 몸이 된 것일까?
2. 다석의 삶과 사상
다석은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서구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1890년에 태어났다. 이 때는 가톨릭 전교 100년이 지나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특히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고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성격이 곧고 이지적이었다. 동경에서 예과인 물리학교를 마쳤다. 한학의 대가로서 서구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다.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 톨스토이, 동양사상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로 가게 했다. 동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귀국했다. 조선왕조는 남에게 일시키고 놀고 먹으며 족보 자랑하는 양반도덕으로 망했다고 보았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 민비 사상입니다.”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진리 上 204쪽)를 이상으로 알았다. 일하며 섬기는 삶을 추구했다.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이다.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다(제소리).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민족정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스승으로 함석헌을 제자로 사귀었다.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가까이 했고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와 사귀었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주체적 근대문화정신을 추구했다. 서구의 민주정신과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했다.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과 철학사상에 회통하는 신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었다.
3. 동서의 융합
유영모의 영성과 사상은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창조적 결합이다. 첫째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 한국적 정신으로 풀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한국사상, 한국적 기독교사상이다. 예수와 민족혼의 만남이고 성경과 동양사상의 결합이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다.
서구근대철학과 유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유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있는 것은 나뿐이다. 특히 (‘나’ 가운데서도) 생각뿐이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유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유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의 근본행위이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꽃피” 1, 825-8)
4. 현대사상과 다석사상
현대사상과 정신을 규정한 대표적 사상가는 칼 마르크스, 시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다. 이들의 사상이 현대사상과 정신을 풍토를 형성했다고 본다. 이들에 비추어 보면 유영모의 정신과 사상의 의미와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에 기초해서 물질적 생산력을 강조하고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내세웠다. 노동에 기초한 평등사회를 내세운 것이다. 유영모도 노동을 강조하고 민주적 평등을 강조한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유영모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자발적 헌신성(사랑)에 기초하고 물질적 생산력보다는 생각과 영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성이 주도하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한다는 것을 밝히고 무의식에서 리비도(육욕)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인간내면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고 성의 해방을 가져왔다. 유영모는 의식보다 무의식, 밝음보다 어두움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규정한다고 본 점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심층세계를 탐구하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통한다. 그러나 유영모는 식색을 끊고 육욕에서 자유로워져서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정면 도전했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적 도덕적 사유와 기독교 인생관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선과 악의 피안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긍정하며 원초적 생명의지에 따라 아무 속박이나 매임 없이 살 것을 추구했다. 유영모도 근원적 생명기운(元氣)에로 돌아가려 하고 살고 죽고 선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의 규정과 차이를 넘어서서 있는 것은 ‘이제, 여기’의 ‘나’뿐이라고 한 것은 니체의 생각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하고 空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보고, ‘나’를 중심에 놓은 것도 니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본능적 생명력을 넘어서 육욕의 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려 하고 타자와의 근원적 일치, 타자를 섬기는 사랑과 어짐을 강조한 것은 니체와 다르다. 타자와의 화해와 일치, 서로 살리고 돌보는 생태학적 원리를 추구한 유영모는 원초적 본능적 생명력, 신화적 힘을 추구한 니체와는 다르다. 니체는 서구의 비윤리적 생명력, 정복자적이고 전투적인 생명력 사상과 통한다. 자아와 타자(자연과 타인)의 갈등과 대립을 전제한 서구철학에서는 생명력에 대한 열광과 허무주의와 불안이 공존한다. 자연친화적이고 타자와의 공생을 추구한 동양사상에서는 허무와 불안이 나타나지 않는다.
5. 다석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성격
(1) 타자와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생태학적 사고이다. 서구의 생명사상은 해와 빛에 기초한 생명력사상이다. 유영모는 몸과 숨을 강조하지만 낮보다 저녁, 빛보다 어둠을 존중한다. 이성과 물질에 기초한 태양숭배를 거부한다. 어둠이 빛보다 크다. 해와 달은 없는 것이다. 物은 空이다. 생각으로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 어둠의 신령한 세계, 영원한 생명, 초월과 일치로의 귀일,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한다.
(2) 한국전통사상과 현대적 사상을 결합했다. 19세기 한민족의 독창적인 민중종교사상인 동학과 다석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말하는데서 일치한다. 동학과 다석이 다른 점은 동학은 부적과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신비주의적 비합리적 경향을 보인데 대하여 다석은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개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라는 것이다.
(3) 결정론을 거부하고 未定論을 내세웠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미정이다. 따라서 무슨 종교, 신조, 사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1, 809-12)
(4)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원주의사상이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게 아니라 삶과 정신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깨닫고 체험하고서 종교다원의 생각이 나왔다.
(5) 다석의 사상은 동서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歸一의 사상이다. 함석헌의 씨사상,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한국신학의 선구이고 깊은 샘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하는 사상이다. 우주적 폭과 실존적 깊이를 지녔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 영원과 절대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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