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류영모

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 2강(박재순)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

 

 

2강,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

박재순 박사


1 죽어야 산다


‘죽어서 사는 진리’


   죽음을 통해서 다시 산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근본내용이다. 다석은 죽음을 통해서 산다는 기독교 신앙원리를 동양적 한국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영모에게 죽어야 산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일 뿐 아니라 씨앗이 죽어서 생명이 싹트는 자연의 원리이고 인생의 보편적 원리이다.


“절대에는 일체여니 상하가 나누일 데가 없다...전일체에서 무엇이나 누구나 私하는자는 近小로 말라죽고 공하는데에 원대한 생명을 완성하는 자리니 죽고 또 죽어라 살고 또 살리라!”(1,665-666)


   다석은 1956년 4월 26을 죽을 날로 잡아놓고 1955년 4월 26일부터 1년 동안 하루 하루를 죽음의 연습과 삶의 해방을 위한 날로 삼았다. 그 해 5월 23일에 일기에서 ‘올(1955)’이라는 제목 아래 세로로 크게 “今大自紀念年祀”(올해는 특별히 자기를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는 해)라고 썼다. ”나를 불살라 없애는 해요 하나님의 빛이 가득 차는 해“다.


‘멸망이라는 확정판결을 받은 인생’


   다석은 “自然的 人生의 끝은 멸망이다. 멸망이라는 확정판결을 받고 나온 것이 인생이다.”라고 단언한다. “망할 놈이라 하면 욕이라 하고 아조 싫어하면서도 집행유예적 망할 놈으로의 현실 살림에 무심히 취하였으니.”(같은 글. 1,637)


‘죽어야 산다’


   삶은 죽는 연습이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죽음은 밀알캥이를 심는 일이다.”(1,821-4) 다석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이었고 죽음 속에서 영원한 삶, 참된 삶의 밀알캥이를 심는 삶이었다.


2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허파와 염통의 제사’


   다석은 먹고 숨쉬는 몸의 생리작용 자체를 제사로 본다. 먼저 숨쉬는 허파와 새 피를 돌리는 염통이 제사를 드린다. 묵은 피와 먹이로서의 생명을 불살라 새 피를 내는 일이 허파가 드리는 제사이다. 염통은 새 피를 “온 몸에 벌려 있는 4백조 세포에 돌려 이바지어 드리려는 밖에 없는” 제사장, 드림 맡은이, 교황(Pope)이다.


‘거룩한 생각의 제사’


   “새 피가 깊은 허리 기둥뼈 안쪽으로 굳게 달린 콩팥에 가서 알짬 샘물로 되어 잠근 동산 덮은 움물로 간직된다. 또 그 움물 가에서는 알짬샘물[精力]이 구름 피우듯이 온 몸 우로 떠오르도다.” 사람의 얼은 그 떠오르는 구름으로 살이 찌고 살이 찐 얼은 “다시 거룩한 생각의 구름을 피여 올린다.” 다석에 따르면 피여 오르는 거룩한 생각의 구름이 “한우님께로 올라가는 기름이요 빛”이다. 그것은 “참 목숨의 기림빛...빛난 기름”이다. 이것은 “참 받으실 만한 목을 드림이다.”


 ‘속죄의 길, 영생의 길’


   죽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섬기자는 것이다. 유영모는 쌍놈의 교, 봉사하는 종교가 좋다고 한다. “세상에 예수처럼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놈은 하나도 없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겠다는 놈만 가득찼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가난한 민중이 오늘의 예수다. “특히 무식한 어머니들, 우리들의 더러움을 대신지는 어머니들 농민들 노동자들 이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짐짐. 1,789-92) 이들이 사회의 희생양이요 이들의 삶이 희생제사이다. 더 나아가서 서로 밥이 되는 “일체가 대속이다...야채, 고기 다 말 못하고 죽는 대속물이다.”(같은 글) 다석의 시에 “新陳代謝妙 自然相贖殷”이란 구절이 있다. 신진대사 곧 먹고 싸는 일이 묘하고 자연은 서로 대속하여 융성해진다. “대속물에게는 반드시 영생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짐짐. 1, 789-92)


3 생사의 사이길: 예수의 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에로 솟아오르는 길’


   다석은 ‘우리 아는 예수’라는 신앙 시에서 “...예수는 믿은 이 높·낮, 잘·못, 살·죽---가온대로---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예수는 믿은 이 없이 계심 믿은 이“(일지1,921)라고 읊었다. 높음과 낮음, 잘함과 못함, 삶과 죽음의 사이 한 가운데로 하늘로 솟아오를 길이 있다.


   다석은 1942년에 믿은 지 38년 되는 해에 새로운 신앙체험을 하고 쓴 시 ‘우리가 뉘게도 가리이까’에서 “솟아날 門이 열리며 한나신 아들(獨生子) 오시니, 시원타. 죽어 산 길에 그 사랑을 펴셨네...十字架, 가로 가던 누리는 가로대에 못백히고 바로 솟아 나갈 얼만 머리우로 솟구치니, 영원을 허전타 마라 길히길히 삶이다.”(1, 663)고 노래했다. 우리가 솟아날 하늘 문이 열리고 독생자 예수가 오셨고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로 가던 누리는 [십자가의] 가로대에 못박히고 바로 솟아 나갈 얼만 머리 위로 솟구쳤다.” 세상욕심, 부귀영화 버리고 얻은 영원한 삶은 허전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그것이 길히길히 삶, 영생이다.



‘죽음은 생명의 꽃’


   “마지막을 거룩하게 끝내야 끝이 힘을 줍니다...인생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이 끝이요 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엄숙하고 거룩한 것입니다.”(진다2. 367) 우리는 대장부처럼 “저녁에 잠자리 들어가듯이 한번 웃고 죽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인간사상. 1,813-6) “죽음은 천국에 도착하는 것이고 제2목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1,821-4)이기 때문이다.

참 생명의 자리에서 보면 죽음은 없다. “죽음이란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죽음의 노예가 돼 있다.”(1,50) 유영모에 따르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과 연결된 긋을 가지고 있다...이긋이 자라고 움직이면 깃이 되어 날아간다...죽을 때는 이 세상 바닷가를 넘어서 영원의 날개를 펴는 날이다.”(1,756)

십자가는 “죽음이 삶에 삼키우는 것”이다. 죽음은 “정신이 육체를 이기는 것”이다. (꽃피. 1,828) “...몸은 흙 속으로 그러나 마음은 희망과 같이 울려 퍼진다.”(1,841-4)


4 죽음을 넘는 자유의 길: 빈탕한데 맞혀 놀이(與空配享)


‘대로, 몸되게’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의 경지를 다석은 ‘을 대로 하고, 몸은 몸대로 되게’로 표현한다. “사람은 사람 노릇하고 몬(物)은 몬들 절로 되게!”하라는 것이다. 대로 절로의 길은 허공 속에 있다. “道는 길이고 허공이 진리다.”(주기도. 1. 837-40) 그 길은 집착 없는 삶에 이른다. “예술가는 得意作 속에 거주하거나 자족하지 않으며 시인이 自成品 속에 해골을 눕힐 수는 없다. 종교가가 자설법 속에 열반할 수는 없을 것이다...작품 시집 업적 경전 보감 의사당, 교회 사회등등은 色界의 그림자다.”(빛. 1,853-6) 자신의 생명, 몸, 영혼, 생각과 업적,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불살라 제사 지내고 하나님을 향해 솟아올라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태우고 솟아오를 때 맘대로 절로의 길에 이른다.


‘제사: 빈탕 한데서 노는 삶’


   이런 자유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사 드리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다. 제사는 자아를 불살라 허공, 빈탕한데 하늘에 올리는 일이다. 다석은 제사(祭祀)를 ‘놀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 일은 사실 다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자고 일어나고 활동하는 것 모두가 다 놀이다. 하나님 앞에서 한 어린아이로서 이 세상을 지낸다면 그거야 말로 참 놀이가 될 수 있다.”

꾸밈없이 자유롭게 놀려면 “빈탕한데 얼(魂)이 연락되어야 한다....(번쩍거리는 세상물건에)...우리의 얼을 덜다가는 정말 ‘얼빠진 나’가 되고 만다...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실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버려야 한다...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한데로 날아가야 한다.“(빈탕한데 맞혀 놀이. 1,889-898)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http://saegil.or.kr 


135-080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05-9 삼흥빌딩 1212호 / 전화 : 02-555-6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