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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노자8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 소리> 1990년 7월호

 

노자8장

 

윗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8.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윗 선은 물 같도다.
물이 잘 모든 것에 좋게하여 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의 싫어하는 데에 있으니
그러므로 도에 거의 하느니라.
있기는 잘 땅에 하고
마음은 잘 소(못)같이 하며
더불어 하기는 잘 착함으로 하고
말은 잘 미쁨으로 하며
나라 일은 잘 다스림으로 하고
일은 잘 거뜬히 하며
움직이기는 잘 때맞춤으로 하야
오직 다투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허물이 없느니라.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상선(上善)은, 썩잘하는, 썩잘함은 그렇게도 되고, 선(善)은 우리말로는 착하다고 그랬야겠지요.  덕목 중에 선이라고 그러면, 선(善)자는 본래 "잘한다" 그말인데, 우리말로 애들 보고도 착하다 착하다 그래야 잘하는데 덕목으로는 착한것이라고 하는데 나을꺼야.


상선약수(上善若水).  썩잘함은 물과 같다.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이 착하게, 물이 잘 만물에게 좋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아서,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모든 사람의 싫어하는 곳에 가 있으니
고기우도(故幾於道) 그러므로 도에 거의 한다.
거선지(居善地), 있기는 잘, 그렇게 해도 좋고, 이제 착하다고 번역을 해 통일을 하면, 있기는 착하게 땅에
심선연(心善淵,), 마음은 착하게 못에, 혹은 소에, 소 같이 그러던지
여선인(與善仁), 말을 착하게 미쁨으로
정선치(政善治), 정치는 우리말에, 정(政)이라는 말이 없으니까 바로잡는다. 그래야지요.  올바르게 하는 일인데, 그래 공자님 번역에도 '정(政)을 정(正)야'라.  바를 정(正)자, 일을 바르게 하는 것, 바로잡음은 잘 착하게 다스림으로,
사선능(事善能), 일은 착하게 능히, 능(能)이란 말이 우리말에 적당한 말이 없어요.  능히, 꽤 잘한다 잘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능히 생각해 보세요.  그럴 때는 좀 더 적당한 말이 없냐? 많이 나오는 자인데, 능히 해낼까? 꽤해낼까.  잘해낼까. . . .
동선시(動善時), 움직임은 잘 때로 한다.
부유부쟁(夫唯不爭), 그저 오직 다투지 않는다.
고무우(故無尤), 그러므로 허물이 없느니라.  우(尤)자는 허물, 잘못,
모든 덕목(德目)을 다 포함한 선(善)
선(善)이라 그러면 모든 덕목을 다 포함한 말이야요.  본래는 잘했다 못했다, 일이 잘됐다 못됐다. 그런 때 쓰는 선이야요.  그런데 그 선(善)자는 우리 저번 다른 시간에도 했지만 양(羊)자, 요건 양(羊)인데 양은 본래 뿔이있고 형용을 해서 그런건데 양(兩) 옆에다가 말씀언(言)하고, 선() 옛날 본래 자는 이렇게 썼대요.  그게 착하다는, 잘한다는, 우리말로 착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런거는 양이 본래 성질이 착한 거, 개인행동을 안해.  무리를 지어서 다녀.  그러면서도 약점이 어디 있는고 하니 길을 잘 잃어버린대.  단체행동을 하는건데 어떻게 해서 떨어지면 그만 몰라.  


그래 예수님도 길잃어버린 양 같다, 그러는거.  그래서 늘 목자가 앞서서 가면서 지도를 해요.  또 양치는 목자들도 양의 무리에는 염소를 같이 둔대요.  대개 염소는 길은 잘안대요.  앞장을 서고 그러기 때문에 염소는 양하고는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정반대로, 아주 꾀있고 아주 깜찍한 놈이야요.  그건 먹여본 사람은 알지만 . . . 그래서 길잡이는 앞장을 염소를, 그래 산양이라고 그러잖아요.  양비슷하기는 한데, 산양을 우리는 염소라고 해요.  염은 수염났다는 말이고 수염났다는 염자는 소인데, 소처럼 생긴건데 수염난거라, 염소라.  우리나라에서 어째 그랬는지 몰라요.  그런데 염소를 산양이라 하는데, 양하고는 성질이 본래 달라요.  그러면서도 고놈은 아주 꾀가 있어.
 양은 어디까지나 착해서, 그러니까 아마 본래 옛날에 가축을 여러 가지로 먹이를 주는데 그것은 또 이용도 많이 하지 않아요? 털도 쓰지, 실로 해서 쉐타 떠입지, 가죽대로 쓰지, 고기 또 잘 먹지.

우리 선조도 옛날은 양쳤는지 몰라.  그렇지만 잊어버리고 목축은 그만둔지가 오래지만, 예수님 나셨던 그런 지방에서는 양을 늦도록까지 많이 키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한문자를 만들던 민족들도 처음에는 아마 양 많이 쳤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글자에 양()자가 좋다고 하는데 좋은 데는 , 착하다고 하는데는 이걸() 썼던건데, 그랬다가 후에 이게 약해져서 이걸(善)로 착하다고 하는게 표시되도록 됐고, 양이 크면 보기 좋다.  그래 미(美)라고 하는 걸로 표시했고, 또 의롭다 그럴 때도 의(義), 그것도 양(羊)에 나아(我)자,
내양은 내것이지 그러니까 또 네양은 네것이지 네것 내것 구분해 그렇고 때문에 그런지 의롭다, 마땅히 제것 제대로 찾는다 해서 의(義)라,
그다음에도 양(羊) 변에 쓴 글자가 많아요.  잘 한다고 하는, 착한 성격을 양이 더구나 그렇기 때문에.  그전에 내가 보지 못해서 몰라요.  내가 전해들었는데, 일제시대 때도 우리나라 산이 많기 때문에 산을 어떻게 이용을 해야지, 목축을 했으면 좋지 않겠나, 그래서 이제 또 차차 털도 있고 그러니까 양을 치기를 장려할라고 총독부시대에도 메리노를 수입을 해서 함경도 지방에다가 했던 일이 있어요.  하다가 잘 되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거기 있었던 사람의 말이라는데, 이제 하다가 못하게 되면 자연히 잡아먹지 않아요.
 그런데 누가 경험이 뭔고하니 양은 참 못잡을 것이더라고, 그런 말해요. 잡아도 소리도 안내도 그저 죽이는대로, 노상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야.  성경에도 있지만 "죽는 땅으로 가는 양이 아무 소리도 없이 끌려간다"고 하는 모양으로.  닭은 나도 잡아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마다 하면 끔찍한 일이라도 제각기 제각기 하면, 끔찍도 하지만 좋은 일도 될 수 있는데, 닭도 안 잡아보니까 모르는 점이 있을는지 몰라요.  잡고 싶어서 한건 아니지만 어찌어찌되니까 유선생님이 다 언제 잡으셨다고 그랬어.  누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잡지" 다 닭잡기 좋아 안하니까, 잡는다는거 좋은 일 아니지만, 또 그걸 잡아보느라면 좀 아는 것도 있지 않아요? 맹자 같은 사람도 다 젊잖은 사람이지만 군자는 뭘 공부한다는 사람은 푸주간에서는 멀리 산다, 푸주간이라는 데가 도살장이라 그말이야.  왜 그런고 하니 그 우는 소리를 들고는 참아 그 고기를 먹을 수가 없어.  매매 우는 수리를 듣고는 차마 고기를 먹을 수가 없으니까, 고기 먹기 그만두는 일은 못하니까 그랬는지 모르지만, 차마 그걸 보고까지는 못먹는다, 그래서 애들은 닭잡는 것도 안뵈잖아요? 여자들은 옛날은 대개 아주 잘사는 사람이야 안그랬겠지요.  종놈이나 종년이나 시켰겠지만, 평민인 다음에는 어머니들이 닭잡아 봤을꺼예요.  그런데 애들한테는 안보여 못써못써! 저리가! 큰 짐승잡는 건 물론이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걸 안하니까 도리어 어떻게 되나? 사람죽이는 걸 예사처럼 아는데, 하여간 양이란 놈 착한 성격이야.  양은 순하든지 사람의 가장 순하다고하는 것을 표시할 때에도 양으로 하게 됐나? 글자에까지 남게 됐나?

선(善)은 그렇게 된건데,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참 착하게 하는, 썩 잘하는 착함은 물과 같다.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라.  만물이 잘, 동물이고 식물이고 할 것 없이 물 아니고는 살 수 없잖아요.  생명하고 물하고는 아주 밀접한 관계야요.  그러니 이게 뭐냐? 옛날 사람이 우주의 맨처음에는 물이 먼저 있었을꺼다, 그런 말 당연한 말이야요.  그런데 그 적에는 물리적으로 실험을 한게 아니고 순전히 철학적으로 생각을 해서 했는데 탈레스가 맨처음에 "우주는 물로 됐을꺼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물리학 과학이 발달한 그걸로 봐도 물없이는 생명을, 우주선이 가는데도 수소가 있냐 없냐가 아주 기본적인 조건으로 말하잖아요.  그런데 우주의 어느 구석에 그런 것과는 전연 수소와는 관계 없이, 산소와는 관계 없이 되는 생명이 있는지도모르지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으로는 생명현상이라면 수소가 없이는 안된다.  그걸 다 알고 있는데, 물없이 산다는걸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지금 사람은 노자가 쓸 때보다도 훨씬 더 잘 이해해야 돼요.  노자의 이 비유만이 아니고 더 깊이 알 수가 있어.  상선이 약수라, 썩잘하는 것은 물과 같다.  같은 건 뭘로 증명하냐 하면 물의 천성을 가지고 말하는건데.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라, 물이 잘 만물을 이롭게 해 모두동물 식물할 것없이 모든 물건을 살려 줘. 이롭게 해 좋게 해 좋게 해주는데, 그런데도 부쟁이라, 다투지 않는다는거.  물의 근본성격의 좋은 것은 부드러운 것, 연약한 것, 그저하면 하는대로 해.  거스림이 없이 아주 약한 건데, 그런데 그걸 이길 수가 없어.

 "다투지 않는다"(不爭)는데 이 장의 안목(眼目)
그래서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라, 부쟁(不爭)이라고 하는데 여기 이장의 안목(眼目)이야요.  부쟁, 다투지 아니한다, 근본 사람의 도덕이라는거 뭐냐? 다투지 않는데 있다.  다투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려하기 때문에. . . 그러니 현대사람과는 아주 정반대야.
그러면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거지만 예수님만 아니고 다른 이도 깊이 생각하는 분들의 생각이 다 일치하지 않아요? 사람으로 살려면 착해야된다.  착하면 못살 것 같은데,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그거.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거.  다 인류전체를 생각을 하고 우리가 보기엔, 나란 생각이 없이 그런 분들이란 다 평화주의인데, 그 평화주의의 근본되는 데가 노자는 유약(柔弱)이라, 부드럽게 약하게 한다고하는, 강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다투지 않는거.
지금 인생관은 약육강식이라, 약육강식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런 것은 아니야요.  근세에 오면서, 다윈이 또 그런 것도 아니고 다윈의 학설을 괜히 약용을 해서 그것만 가지고, 약육강식이라는 자기네 그 주의를 뒷받침을 하면서 그래서 그게 인생관이 그렇게 돼버렸지.  지금은 그런게 과연 이 인류가 적어도 이성으로는 그걸 알건데, 남을 짓누르는 사람들도, 강해만 가지고는 못산다고 하는걸 알꺼요.  아는데 자기가 내가 살라니까, 사는 것만 아니라 지배해야 할테니까 이제 그걸 고의로 누르고 서로 경쟁을 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그래.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라 만물을 참 도와주고 서로 다툴라고 하지 않아.  경쟁할려고 하지 않아.  그걸 말만 아니라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라, 뭇사람이 다 싫어하는데를, 낮은 데를 . . . 사람들은 약한 거는 다 싫어해.  멸시받는 거는 다 싫어해.  천한 거는 다 싫어해.  그러는데 물은 늘 언제든지 그래.  갈린대도 잘 갈라지길 물같은 거 없어.

반항도 없이.  보다 더 낮은 데가 없어 하는 물의 근본 힘이, 그점을 맹자를 읽어보면 맹자에 그 얘기가 나와요.  고자하고 둘이 쌈하는 중에 유명한 싸움.  성선설(性善設), 사람의 근본 성질이 착하냐, 성선이냐? 성악(性惡)이냐?
수천년된 토론이지만 지금도 언젠가 가서는 자기 마음에 적어도 한번은, 한번만이 아니지만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을꺼요.  또 그것도 문제가 돼본 일이 없다,  그렇다면 안된 일이고, 그런 문제는 정말 사람이란 이게 뭐냐? 그런데 관해서 별로 확실한 의견이 없는 사람 많을꺼예요.  그러니까 나는 아마 수십 년 전에 그걸 보고, 당연한 얘기 같은 얘기지만 잊지 못해요.  수십년 전에 일본사람의 중앙공론이라는 잡지를 보다가 거기 어떤 사람이 정치에 관해서 썼는데, 정치논리인데, 첫마디가 "정치란 남의 사상에 의해 사는 것이다" 그랬어.  아주 뜨끔하는 소리야요.  참 그렇지 않야요?

정치할 때 본래 "너는 내 사상대로 살란 말이야" 벌써 그러는거고 또 정치 그밑에 그럭허고 있는 사람들, "그래 나는 그저 당신들의 생각으로 하라는대로 살꺼요" 그럴 때 그걸 그럴 수가 없다 하는 사람이 이제 정치비판하는 사람인데,  정치비판을 하면 기어이 그대로 두지 않아.  소위 문명했다고하는 나라에서도 어쨌거나 그런 사람은 뭘로든지 방해를 받게 돼.  아주 야만스러운 나라처럼 아주 죽고 감옥에까지 안간다 하더라도.
그거 비판하는 사람들. "나는 내 생각대로 살꺼요" 하는 사람인 다음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아도 낮고, 돈이 안모여도 안모이고, 적어도 타협을 안하고 그대로 간다 그런다면, 그런데 사실 안간사회가 인간사회 된 점은 바로 그점에 있는데, 글세 어떡하지?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라, 다 지금은 무슨 좋은 말을 하면, 내가 좋은 자리에 있어야지.  그걸 당연한 것처럼 말해요.  그런데 참으로 좋은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전연 그렇지 않아.  그것과는 아주 반대로 그러니까 노자도 전국시절에 춘추시대겠지.  전국은 그 다음에 오는 거지만 그때보다는 좀 심하진 않아도, 그렇게 될 무렵인데 사람들이 다 제각기 경쟁해서 잘 살라고 그러는, 그런 주의인데, 처중인지소오라, 뭇사람의 싫어하는데 처해.  심지어는 이담에 내려가다 보면 이제 "큰 나라란 뭐냐? 큰 나라란 쓰레기통이다" 그래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게 그게 대국자는 하류(大國者下流)라 대국이란 맨하류 같아서 모든 물이 다 그리로 모여.  그러니까 모든 걸 다 받아들이니까 천하의 대국이라 그러는데, 그러는 노자의 그말과는 반대 의미에서 지금의 대국은 참 모든 쓰레기예요.  세상의 죄악은 다 그곳에 있어.  안된 건 다 거기 있어요.  노자는 나쁜 의미로 다 몰아가지고 있다고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런걸 다 포용을 해 용납을 하고 귀찮은건 그걸 다 받아들여서 그러는데 정말 대국 큰 나라의 자격이다, 하여간 착하다고 하는 성격은 있는데 그건 물과 같아서, 뭇사람이 아주 싫어하는 데로 자기가 좋아서 그리로 가요.  쫓겨서 할 수 없어 가는 것이 아니고, 물은 자기가 모르니까 그래 그런지 모르지만 또 만일 물이 중인지소오(衆人之所惡)에 거길 있지 않는다면 물노릇을 못할꺼야요.  물 노릇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고기우도(故幾於道)라, 그걸 가지고 도(道) 자체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어쩌면 도와 근본성격은 거의 참 비슷하게, 드러내냐? 안드러내냐? 그면 만을 두고 생각을 할 때는 참 물이야말로 도의 성격을 잘 그대로 거의 표시하는 것 같다.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예수께 밤에 와서 물으라고 그랬을 때에 "새로 나야된다" "새로 나는거 어떻게 새로 납니까?" 그러니까 "물과 영으로 나야한다." 그럴 때 "물을 왜 거기다 넣었나?" 물론 그거는 예수님의 독창이 아니고, 그전에도 종교에 물이라고 하는거 . . . 물의 성격 중의 하나가 깨끗이 하는건데, 물 편에서 생각을 하면 뭔고하니, "모든 더러운 거는 그저 날 주세요" 그러는 셈이 되지 않아요?
물이 만일 더러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이 있다.  자기와 이질적인건 안받아들이는 성격이 있다, 그런다면 물이 물노릇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는데 물이란 어떻게 이질적인이거나 자기에게 해로운 그런거라도 잘 받아들여.  물한테 들어가더라도 물이 자기의 성격을 잃어버리냐 그러면 안잃어버린다,  본성을 안잃어버린다, 그말이야.

아까 그 맹자의 유명한 논전이 그거야요.  사람이 성선(性善)이냐? 성악(性惡)이냐?
거기서 고자(告子)라는 사람이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사람의 성격은 뭣과 같은고하니 "버들 같다".  버들회초리 같아서 그저 휘면 얼마든지 휘고 버들에도 "고리 버들"이라는게 있어요.  가시 안돋고 쭉쭉 이렇게 나가서 잘 꺾여지지도 않고 만만해서 그걸로 비유를 해요.  맹자가 논전을 하게 되는데 그거는 이담에 가봐야 알지만.
그러니까 내려가다가 사람의 인성이 이제 그 버드나무 같다고 한다든지 그것도 부족해서 물과 같아서 동편으로 물길을 이렇게 동그쳐 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물길을 내면 서쪽으로 흐르고, 그러니까 사람이 옳다는건 밖의 조건에 있지.  본래 사람의 본성이 그런거 아니라, 이제 그렇게 비유하니까 거기 반박하는데 재미가 있는건 그래 물이 과연 그렇다는 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물이 동서의 구별은 없지만 물이 상하의 구별도 없단 말이냐? 물은 어디까지든지 아래도 내려가지만 위로 올라가는 법 없지 않아? 그래서 사람의 착하다고 하는 것이 물의 내려가는 겁니다.  여기 노자의 이거 모양으로 '천중인지소오라 뭇사람의 싫어하는 바, 그저 언제든지 내려서 내려서 보다 더 낮은 데가 있으면 좀 더 내리고 좀 더 내리고, 그 성격을 들어가지고 그러면 저쪽에서 사람이 본래 뭐 일정한 생각이 없으니까 이렇게 하면 이렇게 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휘고 하니까 그래 성악(性惡)이라 하는 것도 우리가 보통생활하는 모양으로 본래 처음부터 맹수같이 악독만 하다든지 그런 말은 아니예요.  이것은 규칙을 뭘 잘 만드는 사람들이 먼저 세워가지고 훈련을 해서 그걸해야 사람이 돼지,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렇게 말을 주장을 하니까 성악이란 그런 말이 나왔는데, 맹자의 강조하는 거는 근본의 선한거 있지 않고는 어디 그렇게 될 수가 있나? 근본의 선한거 있다는 것이 뭔고 하니 마치 물이란 그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으로 근본성격이 그렇다, 그러고 해서 맹자가 인간의 이 역사 위에 있어서 성선설이라고 하는 걸 강조를 해서 꽉 자리가 잡히도록 한데는 그점에 굉장히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야요.

지금도 독재정치를 당연한 걸로 아는 사람들은 "사람이란 그대로 두면 안돼.  그저 내몰아야 하지 모르지요.  그러나 되기를 바라요? 그러는 사람들은 다 고자(告子)가 좋다고 할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거는 벌써 역사 상에서 시비판단이 난거야요.  사람의 인간성을 생각을 할 때, 학문적으로 하면 선도 악도 아니라면 그럼 어디서 선이 나왔지? 만일 또 성악이라 그러면 그건 부정사로 있는건데, 부정적인건 실재(實在)가 될 수 없지 않아요? 만일 악하다 그런다면 거기서 선이 나올 수 없지 않아요?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볼 거냐? 부정적으로 볼 거냐? 그러는데 인간성이라 그러면 역시 긍정적으로 봐야.  긍정적으로 보면 자연히 그게 높은 뭐 선악이라고 하는 높은 덕목보다 어쩌나 사람도 제생각으로 제가 살아가게, 나만 아니라 모든 전체가 살아갈 수 있게 성격이 됐다, 그런 인생관으로 봐야 할꺼니까 그거 없이는 도덕이고 뭐고 성립이 안돼요.그런데 거기서도 물과의 비유로 맹자가 노전에서 이겼다고 하는거요.  그걸 가 보면 재미있어요.
그래서 게까지가 기우도(幾于道)라, 그러면 말 다 된거야.  그 아래는 그걸 풀어서 일곱가지로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담에 다른데서 얘기할 때는 늘 그런 거는 몇가지 조목으로 뭘뭘 얘기했지 그걸 기억을 하는대로 일곱기지로 했다. 그걸 잊지 말고 들어두면 기억을 할 때 많이 좋을꺼요.
이거는 무슨 수에 맞춰서 한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될 수록은 사람의 하는 일이 이런 방면 저런 방면 여러 가지 방면을 생각해보자고, 어디까지든지 사람이란 다투지 않고, 나라는 생각없이, 그걸 강조하느라고해서 한 말이야요.

거선지(居善地)하며, 있기는 물의 성격이 그러니까 물의 성격에 비추어서 사람으로써 제 본성을 잃지 않고 참 옳게 한다는 사람은 거(居)는 늘 있는 데가 거(居)야요.  일시 잠깐 있는 데를 거주지(居住地)라고 그러지 않잖아요? 거(居)라 주(住)라 하는데 다 계속적으로 얼마동안을 아무개 하면 벌써 거기 있는 줄 알게 되는 그건데, 거(居)는 있기는 선지(善地), 물이란 언제든지 땅에 내려와 있어.  이제 그러면 그때도 노자도 알았지 모르지 않았겠지.  저기 위에 올라가도 물이 있는 것도 알았을꺼야요.  아마 공기 속에 상당한 수증기가 있다고하는 것 까지는 몰랐을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래도 눈에 뵈는 거로는 평상시에 있는거는 땅에 있는거 아니요?
그러나 참 재미있는거는 물이 아주 밑에 있기를 좋아하는데 그 실은 물의 근본은 어딘고 하니 저 위에 있단 말이야.  본래 위에 있는데 내려와서 상하(上下)를 다 차지해요.  아주 위에 올라가서 구름 속에 있는 수분도 그건데, 거선지(居善地)있기는 잘 땅에 해.  이 이상 없지.  땅이라 그러면 이거는 낮지.  낮으면서 또 모든 생물이 여기서 자라날 수 있는 근본 아니예요?

심선연(心善淵), 또 마음은 내몸이 있는 데가 가령 땅에 있다 그런다면 물도 또 무슨 마음이 있다면, 물론 사람을 두고 비유하는 말이니까 마음은 어떤 걸까? 마음은 소 같이, 이 연(淵)자는 소인데, 가다가 냇물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 가면 이제 물이 이렇게 깊어져서 물이 맑기는 맑아 바닥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보이는 수도 있고 안보이는 수도 있지만 말간 맑은물인데 땅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얼마나 맑은 지를 몰라.  그게 연(淵)이야요.  물이란 그런거요.  그래.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르겠다"그런 말도 있지만 그러나 물도 참 깊으면 맑긴 맑은데 헤아릴 수가 없지. 사람의 속만 모르는 거 아니라 물 속도 모르지만, 그래 비유해서 마음을 내 속에 내적인 나를 말한다면 소 같을 거다, 착한 사람의 마음도 그런거.  빤히 남한테 밑을 들여다보이도록 그러지 않아.  
여선인(.與善仁), 주는 거.  잘 줘.  사람은 줄줄 알아야 한다는 거.  그것도 생각이 많아서 줌이라고 하는 거 나왔을꺼요.  그래 서양사람의 보통말로는 "give and take"주고 또 받는 거.  "give and take"을 좋은 의미로도 쓰고 나쁜 의미로도 쓰지만 그런데 사람은 주기처럼 싫어하는건 없어.  주는건 참 싫어하지 않아요? 그러나 사람의 근본은 주고 싶어하는건데 사실은, 여선인(.與善仁) 주기를 잘 주면 인(仁)으로 가장 최고의 도덕으로 된다는거.  증자는 인(仁)만을 말했는데, 사랑, 지금은 사랑이라고 번역해야겠지요.

언선신(言善信), 말은, 사람인 다음에는 내 속을 발표를 해.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교통을 하려면 말로야 하니까.  말은 어떡하지? 말은 잘 미쁘게.  물은 분자와 분자가 만나면 틀림없이 하나가 돼.  다른 물건은 떼어놓으면 떼어논대로 갈라질 수가 있지만 물은 아무리 갈라졌다가도 틀림없이 늘 만나.  아주 화친력(和親力친력)이 강한거.  여기다 미쁨으로 해.  언선신(言善信)말을 잘 미쁘게.
물리학으로 하면 화친력, 응집력, 부착력 몇가지로 하지 않아요? 여러 가지 물질의 분자 중에 물처럼 놀랍게 여러 가지 힘으 가진거 없을 꺼야요.  어떤건 자기네 끼리 가령 철이라 그러면 굉장히 딴딴해 안갈라지지않아요.  그런데다 비기면 물은 참 아주 약한거요.  약한건데, 또 이쪽은 그 점은 강하지만 물처럼 다른 성격이 있을 수가 없어.
  
  다스림(治)과 지배(支配)는 다르다

정선치(政善治), 사람인 다음에는 정치를 하니까, 정치하면 다른거 아니고 지금은 정치하면 뒤에 반드시 누가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아랫사람 다스림받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본래는 그런거 아니야.  다스리고 다스림받는,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없었던건데, 그건 당연한거라고 그래서는 안돼요.  물론 인류초기레 있어 그럭할 수 밖에 없어.  그렇게 됐다고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 이상이란다면 정치가 옳게 되려면 지배. 피지배의 그런 정치해서는 안될건데, 여기는 좋은 의미로, 정선치(政善治), 정치는 잘 다스리며, 지금은 다스린다고 하는 말이 좋지 않게 돼 있어요.
 다스린다는거 보다는 지배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건데, 본래 다스린다고 할 때는, 그건 다스린다고 하는 글자는 본래 물 다스리던, 우(禹) 임금 때 물론 이렇게 치수(治水)라고 그랬기 때문에 물(水)번에다 쓴거예요.  台는 음므로 태, 그런거고.  물길을 요렇게 와서 치산치수(治山治水)라, 물을 다스리는거.
 다스린다는거는 물의 성격을 그대로 살리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어.  물은 아래로 내려가기 좋아하는거니까 아래로 빠져 갈 수 있도록 하는 요게 물 다스리는 치수(治水)의 치(治)인데, 그래 정치도 정치라고 하게 된게 본래 그럭하는거기 때문에, 그래서 정치(政治)라고 그랬는데, 정(政)자도 정은정야(政은正也)라, 요짝 왼편에 있는거 바를 정(正)하고, 일을 바로잡자는거.  또 아무에게도 골고루 준다, 주는걸로 가령 얘기한다면, 그래 바르다고 하는거 있고, 옆에 거는, 바르다는 거는 멎을 지(止)자, 요거는 딱 제자리에 선거고, 그래 위에 하나(一)를 더해서 표시한 거고, 지금은 "복( )"하지만 본래 옥편에 보면' '사람의 손아야요.  이게 회초리 같은 거라 이렇게 폭력이 들어 가는거야요.  강제가 들어가서 온누리가(웃음)

예수님도 도무지 안쓸 수는 없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예수님도 폭력썼는데 그러지만, 그건 또 너무 악용하는 소리고, 때리기 위해 그런건 아니고 씸볼로 하느라고 그런건데, 정치하는건 본래 그랬기 때문에 바르게 하려면, 그러니까 정(政)자만 그런거 아니고 교육(敎育)이라는 것도 그래요.  그대로 둬둬서는 말잘 안든는 학생이 있기 때문에 . . .  요새 폭력 쓰는 문제가 됐소만, 지금은 주로 일본서는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에 잘 폭력을 가한다해서(웃음) 큰 사회문제래요, 그런데 이제 여기는 안그래요.

그러니까 전연, 사람이 어질긴 어질지만 본성이 어질지만 다 제가 알아차려서 하는가 하면 그렇게 안돼.  그러니까 어느 정도 뭘 이렇게 이렇게 고쳐야 되니까 그런건데 정치를 해도 하게 되면 다스림으로, 다스리는거는 요렇게 아까얘기대로 물의 본성에 의해서 물을 다스린다 그러잖아요.  사람이 물없이는 살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물 때문에,
산골짜기에서 많이 산거는 그 때문이 아니요? 그래 우리나라도 지금으로 말하면 면(面)도 골, 동(洞)도 골, 군(郡)도 골, 골이라 그러다가 그다음 평지로 나오고 그랬는데, 사는 형편이 그래서 그랬겠지.
또 실같은 거를 다스릴 때도 다스린다고 그래요.  그럴 때는 쓸데없는 실은 뜯어내 버리고 요렇게 실파람이 잘되도록 그래서 다스린다, 또 무슨 다스린다는 말이 많이 쓰이잖아요? 목수가 뭘 잡은걸 만든다든지 또 대장쟁이가 그런데도 다 다스린다는 말을 쓸 수가 있는데, 그럴 때는 살릴걸 살리고 방해되는건 제거해 버리고, 차례를 잡아준다든지 고루고루한다든지 그런걸 다스린다 그러는데, 지금은 다스리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아주 지배라, 지배(支配)라 그러면 참 나쁜 말이야요
너무 말을 곁갈래로 들어가지만 나는 아주 지금 정치가 싫어서 하는 사람이요.  도대체 우리나라 정치만이 아니라 어느나라 정치도 아까 얘기대로

자기네 생각을 가져다가 전체에다 강요할려고하는, 지금은 문명했다, 그러니까 문명하는 것 때문에 방식이 안그런 것처럼 요렇게 해서 그렇게 하는데가 있으니까 많이 속는 점이 있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의 뜻이 잘 반영이 돼가지고, 자기네가 자유의사를 발표도 하고 의사에 따라서 선택을 하게끔 그렇게 하고해야 옳은 일인데 이 쪽에는 말인즉 민주주의라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주장을 하게 돼 있어요? 그렇게 돼 있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옛날은 다 무식한 때니까 괜찮았는데 지금 제각기 다 내로라고 하면 어떻게 정치를 하지요? 그런지 몰라.  하지만 그러니가 나라라는건 옛날과 생각이 달라져야한다.  그런건 다 큰 문제야요.  미래에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거야요.  물같이만 하면 된다 그러야지요.  정선치( 政善治), 잘 다스려.  제 순리대로.  

사선능(事善能), 일은 잘 능하게.  척척 어려운거 없이 턱턱해.  일을 할 때 잘 사리를 따라서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물이란 놈 높은걸 만나면 높은 것 대로처리, 낮은 걸 만나면 낮은 것대로 처리하고, 골짜기 들면 골짜기 답게, 들에 나가면 들답게, 무엇을 만나든지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척척 해, 막히는 것이 없어.
 
동선지(動善時), 또 움직이는데, 한가지로만 늘 있을 수가 없고, 이럭했다 저럭했다 움직이는데, 움직일 때는 잘 때로 한다 하는 것, 때에 맞게 해야 하는데, 물이 가다가 봄이면 얼음이 녹아서 내려오기 시작하고, 여름, 가을, 겨울되면 또 얼게 되면 또 얼어서 엉기고, 그때그때에 따라서, 아주 더워면 증기가 돼서 올라가고 때에 맞게.  그런걸 보면 다른 것과 아주 달라.  돌이라든지 쇠 같은거는 기후를 따라서 변동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바위는 강한 것같지마는 마지막에는 못견뎌.  풍우작용에 돌치고 부서지지 않는 돌 없지 않아요? 쇠도 그렇고, 그런데 물은 여전히 물대로, 왜 그런고 하니 늘 때에 잘 맞춰.  더우면 수증기 되고 또 차면 엉겨붙고 아주 고체가 될 때는 고체로 돼버리고 그래 동선지(動善時).

그러는데 그래놓고는 부유부쟁(夫唯不爭)이라, 여러 가지 덕이 다 있지만 근본을 말하면 뭐냐? 이렇게 잘하는데, 땅같이, 물같이, 사랑으로, 미쁨으로, 다스림으로, 무슨 잘 수단있게, 때 맞추고, 그게 다 좋은 덕목이지만 그걸 다 합해놓고 얘기를 하면 뭘로서 그럭하나? 그걱하면서도 내가 했다고 내 공로를 뽐낸다면 물이 물노릇을 못할꺼야.  부유부쟁(夫唯不爭)이라.  그러면서도 다투는 법이 없다.  자기 공로라는 것을.
고로무우( 故로無尤)라, 우(尤)는 허물과 과실(過失)이라 할 때 과(過)자와 뜻이 같애요.  허물이 없다, 잘못이 없다, 그말이야.  그러니까 언제 가서든지 잘못하는법 없어.  아무리 사람이 잘하면서도 흠이 없는 사람 없는데, 물은 그렇게 되는 일 없다.
그래서 사람의 착한, 도덕적인 근본, 사람의 성격에 비해가지고 설명한거요.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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