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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노자7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 소리>  1990년 2월호

 

노자7장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
  天長地久


7.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
하늘 땅이 능히 길고 또 오랠 수 있는 것은
그 스스로 살지 않음으로써 아닐까
그러므로 능히 길게 살 수 있다.
이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하여서 몸이 앞서며
그 몸을 밖으로 하여서 몸이 있으니
그 내로라함 없음으로써 아닐까?
그러므로 능히 그 나를 이루느니라.

 

천장지구(天長地久)라, 하늘은 길고, 천장지구란 말은 많이 하지오.  그래도 또 반드시 천지가 장구하다는 말 아니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아요.  그러면 반드시 천지는 뭐 영원히 간다고 그렇게 믿지는 않는데, 그래도 보통으로 보면 우리가 아는 것 중에서는 그대로 있는 것은, 그건 없어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예요.  지금은 우주 물리학이 발달이 됐으니까 하늘이란 것도 옛날과는 같을 수가 없고 우리 생각이 좀 달라져야지.
땅이라는 것도 이 지구라는 이거는 빤해진거지요.  햇수가 좀 많을 뿐이지 어느 때 거다가는 없어질 것만은 뻔한거야요. 또 우주학을 한 사람들이 다른데꺼를 봐서 그렇게 말하니까..............  꼭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대체로 한정이 있는건데, 그러나 이런 때 천지라 그러면 옛사람의 마음이 돼가지고 생각을 해야지.  지금 우리 새지식으로, 두가지 다 있어야지. 새지식만으로 되겠어요.  하늘이란 뭐냐? 땅이란 뭐냐? 그 생각도 해야겠고, 또 옛날 사람이 돼가지고 이런 것을 말할 때는 천지라는거는 물리학자적인 그런 입장에서 이걸 말하는거 아니니까 이 사람들이, 그거를 하나의 씸볼로 보는 거니까.  하나의 무슨 의미의 표현이라 할까.  그런 맘으로, 벌써 이런 말할 때는, 옛날 말대로 하면 신화적인 입장에서 서서 하는 말이지.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대해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옛날 모양으로 신화적인, 그렇게만 해서는 못쓰고, 또 지금 과학자들이 하는 모양으로 신화란 그건 사람이 유치할 때 한 말이다, 그렇게만 간단히 치워도 안되고, 그런 의미로 하면 저번에도 글쓰면서 그랬지요.  벌써 한번만이 아니고 몇번 얘기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새 신화가 있어야 한다, 새신화란 옛날 신화와 같아서는 안되지.  옛날 신화는 옛날 신화대로 자기 할 역할을 했어요.  그랬는데 그거는 과학 때문에 그거는 끝이 났고, 그렇지만 신화없이 살 수 있냐 그러면 그건 또 안 그래.  신화는 그렇지만 신화를 낳는 그거는 없어질 수가 없어요.  지금 사람이 말하기를 그거는 옛날에는 무식해서 지식이 발달이 못돼서 그랬지, 그러지만 지식이 발달 못된 것만이 아닌, 거기 또 뭣이 있어요 그러니까 말하기 어렵지요.

천장지구(天長地久)라, 하늘 땅이 길고 오래다.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  요걸 해석해서 어떤 사람은 왜 하늘 천(天) 하늘에는 길다고 장(長)자를 붙혔고, 지(地)에는 오랠 구(久)자를 붙혔고, 고것도 어떻게 설명을 하는데, 고건 뭐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천장지구()라, 하늘 땅이 한없이 오래간다, 오랜 거다, 그러는데, 그거는 쉽게 말해서 이자 얘기대로 하늘 땅은 그건 산물건 아니야? 산걸로 보는데서 나온 말이야요.  천장지구(天長地久)라, 그거는 누구나 다 아는거니까 내붙이고, 그래 말을 해요.

천이소이능장차구자(天地所以能長且久者)는, 하늘 땅이 능히 장하고, 길고 또 오래다.  긴건 뭐고 오랜건 뭐고 그것까지 분석해서 서로 어떻게 다르다고, 그 생각은 안해고 그저 다 오래라면 오래다, 오래간다는 말로 그렇게 해석해도 좋은데, 하여간 길고 오랜 거 그럴 수 있다는게 뭣 때문에 그러냐? 그러고 그 결론이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이라, 스스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스스로 내지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사람을 냈다.  살아나온다는 생각에 아마 낸다고 우리말로 그렇게 돼 있을거야.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이야.  의식적으로 내가 나를 살려나가야지 하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고 하는걸.  그걸 말하는거지.  스스로 내지 않는다(不自生)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고능장생(故能長生)이라, 그렇기 때문에 능히 장(長)해, 길이 살 수 있어.  왜? 제가 스스로 "나는 살아야지?" 이거는 사람표준으로 하는 말이지요.  사람이란 내가 있어서 내가 어떻게든 살아가야지. 그러는데 그거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럴 능력이 없어져.  내가 산다고 하면, 그 의식이 오래갈 수가 없어.  다 지내봐서 알아.
시이(是以)로, 그러니까 하늘 땅이 왜 오랜가.  왜 오래냐 그런건 사람은 왜 이렇게 재주가 있고 생각이 있다고 그러는데 사람은 왜 죽느냐?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라고 하는데도 문제가 그 문제 아니예요? 적벽강에서 아주 경치 좋아서 나이 많이든 노인, 본래는 술먹으면서 놀러나갔는데, 친구하고 강이 너무 좋으니까, 그래 좋아서 노래를 부르니까 슬퍼져.  "왜 이렇게 슬프지요?"  그러니까 손님이 얘기하지 않아요.  해석을 해요.  그건 왜 그래?
천지는 이렇게 오래고, 이런데 말이야 사람은 왜 이렇게 오래 살고 싶은데, 왜 그렇소?
옛날 이 적벽강의 고적을 들어가지고 조맹덕(曹孟德)이 얘기하고 제갈양(諸葛亮)이 얘기하고 주유(周瑜) 얘기하고, 그게 다 과거의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다 어디 갔나? 그것만 그래요? 우리도 또 그럴 것 아니요.  그러니까 슬프다 그말이야.
그러니까 거기 대해서 소식(蘇軾)이가 대답해서 소식이 자기깐에는 깨달은 거 있어.  보기 탓이다, 변하는 편으로 본다면 다 변이지.  변(變) 아닌 거 있냐? 그래.

천지증밀능이일순(天地曾不能以一瞬)이요.  소식이 말에 천지는 장구(長久)하다 그러고 천장지구(天長地久)라 그러지만 보통 말로는 그러지만 변하는 편에서 보면 천지증불능이일순(天地曾不能以一瞬)이요.  천지도 한 깜짝하는거나 마찬가지야.  상대적인 말이죠.  자기불변관지즉(自其不變觀之則)하니 그 변하지 않는 편을 생각을 하면, 물여아개무진야(物與我皆無盡也)라 당신도 나도 다 영원한 것, 죽고 살고가 없어.  이대로가 영원한 그거다, 그래서 그렇게 설명을 하니까 알아들었갔지.  그래서 그 다음엔 아 술이나 더 마시자." 그러고 해서 얼마나 먹었던지 다 쓰러져 드러누워서 날이 밝는 줄 모르고 실컷 잤다.  맘에 다 근심걱정이 없이 됐다고하는 뜻으로, 상여침적호주중(相與枕籍乎舟中) 부지동방지기백(不知東方之旣白)
다 서로 베고 내가 너를 베고 네가 나를 베고 드러누워서 날이 훤하게 밝도록까지 자고 몰랐다하는 거는, 참 문제가 다 풀려서...............

이렇게 좋은데 왜 슬프고 왜 이러오? 그래 크게 제목을 제출을 하고는 거기에 소식이 자기가 손님 됐다가 자기 됐다 이러면서 자문자답하면서 하는 설명이요.  소식이라는 사람 노자. 장자도 좋아한 사람이고 불교적인 신앙도 있고, 또 글잘하는 사람이니까......... 그것도 새겨 보면 재미가 있어요.
거기도 천지는 장구(長久)하다, 거기 대해 인생은 참 잠깐 동안이다.  사람은 이렇게 덧이 없는데 천지만 장구한건 뭣이 그러냐? 그러니까 이것도 역시 보기 탓이다.  차원도 달라서 그런다, 이 현실 이면에서 보면 아주 그렇게 덧없는거고 그러지만............

생이란 우리 삶이란 참 무상(無常)하다, 같은 부정하는 말인데 무상이라 그러면 참 덧이 없는걸로 그러고, 비상(非常)이라 그러면 아주 그것과는 반대로 그건 보통이 아닌, 비상한, 그래 생이라 그럴 때는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받은 명, 생명(生命)이라고 그러는데, 생(生)은 명(命)이라 명(命)은 하나님이, 하늘이 누군지 모르지만 내게다가 명해서 나는거니까 일반으로 생(生)이라, 삶이라 그러면 삶이란 참 덧이 없는 건데, 나의 그 덧이없는 것이 내가, 살아있는 내가 그걸 받아가지고, 요거는 내 명(命)인데, 명은 참 비상(非常)한거란 말이야.  보통이 아닌, 상(常)이라는 걸 노자는 좋아하지요.  한편에는 그 생각을 하면서 여기는 그것과는 다른 생각으로 보통 할 때 무상 비상하는 말씀이지.  그런걸 참고해서 여기서도 볼 필요 있어요.

그래 그 생각이 있기 때문에 천지는 이렇게 한없이 장차구(長且久)한 것 같은데, 사람이란 매우 형편없는 것 아니냐? 뭘로 그런가? 그 까닭을 설명하는데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이라.  하늘이나 땅은 제가 스스로 나는 나다하고, 나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살아야지."  그러지 않으니까 오래산다, 능장생(能長生)이라.  그래서 그걸 보고, 하늘 땅 그 이치를 아는, 거기 맞춰서 사는
성인(聖人)이라는 이는
후기신(後其身), 자기 몸을 뒤로 해.  나라는 걸 부정하는 태도니까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하고, 몸을 도리어 자기라는 걸 뒤로 미뤄.  앞세우지 말아.  우리는 내가 늘 앞설라고 그래.  내가 할래요.  내가 알아요.................  자기가 언제든지 앞장을 설라고 그러는데, 노자는 반대하지 않아요.  이담에 내려가다 있지만 내가 세가지 보배가 있어서 보배를 지킨다 하면서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이라 천하에 앞장 안 선다, 앞에 나선다고 그러지 않는데, 사람이란 말은 "내가 뭘 알아요? 내가 뭘 알아요?" 그러긴 그러면서도 자기가 늘 앞장을 서자는 거야.  "내가 뭘 알아요" 하면서 앞장을 설라고 그러는, 우리의 자아의 근본성격이 그렇다면 그런데, 그게 죽어야 된다는거야.  예수의 말씀도 그거 없어져야 된다는 거, 그거 나라고 하는거.  그런데 모순이게도, 그 몸을 뒤로하면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 그 몸이 앞서게 돼.  그러게 되면 생명을 잃을려고 하는자는 도리어 생명을 얻게 돼.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이라. 제몸을 밖으로, 제몸을 당초 돌아보지 않아.  그럭하면 도리어 신존(身存)이라.  내몸이, 내몸이란 꼭 뭐 육신이란 말이 아니야. 내 자아라는 것이 도리어 있게 된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자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니 한 마디로 따지면  
비이기무사야(非以其無私邪), 그 나라하는, 내로라하는, 사(私)는 내거다하는, 나는 나다하는 고거.  아주 일본사람은 그래서 이 사(私)자를 써놓고 "와다구시"라고 그래요.  와다구시란 "나"예요.  그 사람들은 요 사(私)라고 하는걸 .......... 그래서 사(私)자인데, 우리나라에서 사(私)라 그러면 몹쓸 걸로 그렇게 아는 건데.......... 사(私)가 없음이 아니냐? 나란 생각.  뭣이든지 내가 중심이 돼서, 내가 중심이 되려는 버릇은 어디서 났나? 그건 벌써 하늘에서 받았다고 그래야겠지. 그렇지만 거기서 유래해 왔다고 그럴꺼지만 그래도 그럭하면 그걸 잃어버리고 말아.  거기가 이제 역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가지려하는 사람은 잃어버린다, 나를 살릴려고 하는 사람은 도리어 자기가 있게 된다.  석가의 말도 마찬가지일거예요.  어느정도 다 공통하는 진리인데, 비이기무사야(非以其無私邪), 사사가 없음으로써 아니겠냐?

그러면 사람이 자아의식을 안가질 수 있습니까? 그거는 우리가 심리적으로 됐으니까 안 가질 수가 없지.  그러니까 도(道)를 깨닫는다는 거는 어린애 모양대로 그대로 있으란 말은 아니야.  예수 말씀에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애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수 없을꺼다."  그건 좋은 말씀인데, 그러나 그럭하는 것도 거꾸로 돌아가가지고 "어린아이가 되라!" 되려고 해도 되지도 못하지만, 또 돼서 안되기도 하고, 그거는 자아의식이 있으면서도 그걸 잊어버린다 할까, 주장을 아니하는............. "그러면 그거 어떻게 됩니까?" 그거는 열번도 백번도 천번도 물을 꺼야요.  그렇지만 거기 대해 대답이 없어요.  자기가 그걸 해서 그 자리에 가는 거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할 수 없어.  그저 말해주는 사람은, 그래.  그러지 않았어요? 선생한테 가서 몇 해를 있는데도 선생님이 가르쳐줄까 했는데 가르쳐주지도 않아.  그러니까 안됐다고 걱정을 해 말하니까 "이 자식아, 죽기 전엔 안돼! 죽을 각오해야 된다!" 그러니까 그럼 "내가 이제 죽어야지" 드러누워서 먹지도 않고 죽을 참으로 그러니까 며칠 있다 그랬는지 선생이 가서 들여다보고 "어디 정말 죽냐?" 그러니까 "이제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아직도 안 죽었구나!"(웃음) 안 죽었다는 그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거 아니요?

그거는 죽으란다고 죽으랬지 그러고 "약이라도 먹어야지."  그럭하면 낙제 아니요? 그말이 아닌데, 살아있으면서도 죽는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러니까 선생에게서 "이 자식아, 안 죽었구나!" 그 책망을 듣고야 활짝 그 자리에서 깨치는 거야요.  깨치면 "나 이제 알았습니다." 하고 그것이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야.  뭐이 여기 변화가 생겨. 변화가 생기면 그다음엔 자아의식이 있어도 그게 아니라 그말이야.  그거는 흉내고 못내.  나도 흉내는 못낸다고 하는걸 뭐라고 잘라 말할 수가 없어요.  나도 그 정도밖에 못갔으니까 하지만 다른이의 말을 다 들으면 그게 거짓말이 아니예요.   말하자면 죽었단 말이지.  그런 정도가 아닌게 있는거 분명해요.

그런거를 어느 때,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렇소.  가만보면 현대사람은 심리학을 배웠으니까 생각이 나는데, 뭘 이렇게 앉아서 "기도를 한다든지 명상하려고 와 앉았다든지 그러면 뭐겠어요? 한 번 두 번에는 안되는거 알지요? 누구든지 어느 때 참 감격이 오면 다 된 것같이 생각이............ 아주 참좋은 생각났다.  아주 고맙다.  하나님이 정말 주셨다.  그런 생각나는 때가 있지요.  그래도 어느 때 가서든지 힘을 쓴다면 적어도 그런 정도에는 갈꺼요.
그런데 그럭했다가도 조금 지나가면 그거 식어버려.  그전 같아서는 이제부터는 다 된 것 같았는데, 그 다음에 가서 또다시 그런 시간이 왔으면,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 한다고 와지는가 하면 안와집니다.  또 어느 때 가서 그게 올 때 오는거지.  그거를 몰라요.  사람마다 몇번을 거듭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러다가 그러는 동안에 어느 때 가서............ 이제 다 큰 것만 말하니까 그러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랬다고하는 그때만 그랬겠소.  생각이 많았겠지.  사람을 죽일라고 불이나서 지금 저 자식들 그저 잡아다가 죽일라고 하는데, 양심은 있고 하니까 속에 얼마나 싸웠갔소.  "이러야 된다" 그랬다가 "잘못이나 아닌가" 별별생각이 있지 않았겠소? 그러다 그러다가 쌓이니까 그 사람의 독특한 성격도 있지요.  어느 순간에 아주 결정적으로 달라져.  결정적으로 달라져서도 그것도 곧 됐냐하면 그렇지 않아요.  주의해보면 그럭하고 그다음 이후에 14년동안에 아라비아에서 뭘 했는지 아라비아 가 있었다고 그러는데, 아라비아에 가 있었다는데, 14년동안 어떻게 지냈다는 말이 없어요.  그럼 그게 그런 경험을 하고도 거기서 무슨 기도를 해도하고 뭘 많이 하지 않았겠소.
그러니까 소위 고쳐난다. 새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뭣을 듣는다. 하는게, 그게 사람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된다해고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래도 다 그런 저런 말을 들으면 어느 시기에 가면 아주 결정적인 변화가 있어서 그후에는 근심이 없는, 그런가봐요.

내 생각은 이제 현대심리학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다 사람이 생각할때는 과거의 뭐이 돼서 있던 기록이 자꾸 나오잖아요.  뭐 이 연상이라는거.  기억을 따라서 연상이 나오고, 그거는 꿈 속에 꿈을 꿔보면 알아요.  평상시에 내가 그 생각 안했는데, 그 생각 안하는데 꿈을 꾸노라면, 꿈에는 그때 무슨 들었던 것이 이것 저것이 섞여가지고, 이러고하는걸 보면 꿈이라는 건 평상시에 깨있는 의식이 채 죽은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건 자는지 그런 상태에 있어.  쉬고 있는 시간이니까 보통 우리가 말을 할 때는 그거는 대뇌는 쉬고 있는데 신경중추가 제나름대로 장난을 해 그런다, 수년 전에 우리 설명을 그렇게 들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하는지 나 그런 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소마는, 꿈에 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해서 사람들이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아요? 아무 사람도 꿈을 꾸고 꿈인 줄을 확실히 알지, 꿈인지 사실로 그런건지, 혼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좋던 꿈, 아무리 흉악한 꿈을 꾸었다해도, 꿈속에 깨고 나면 기분이 나빴지만 그거야 꿈이지, 그러니까 살아가지.  꿈에서 겪었던 그것이 그냥 있다면, 그게 어디 마음에 불안해 살겠어요.

사람도 다 자기가 지내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고, 무슨 흉악한 꿈이 있다가도, 꿈이다, 생시의 일로는 알지 않아요.  그러면 그건 뭔가 다르긴 다른데, 내 의식이란 깨있을 때 하는 것과 자는 때 하는 것과 달라요.
  인도사람은 그러게 생시의 생각과 잠에서 꿈을 꿀 때의 상태와 또 자면서도 꿈도 안꾸는 상태와 그 세 가지를 구별해 얘기하지 않아요.  제일 이상적인 상태가 뭔가하니 자면서도 꿈이 없는 상태, 그러니까 꿈을 안꿔도 자면서 자아의식은 쉬었는데 꿈을 꾸는 것, 그럴 때 보면 자아의식이 죽지는 않았어.  깨고 나면 내 자아의식이 다시 연속이 돼서 "내가 나다", 그래지지 않아요..  꿈은 그 중간과거에 드는거란 말이야.  그렇기는 그렇지만 어쨌든 내 의식은 살아있는데 꿈에 그런 거 뭐 있지요? 허나 또 꿈이 없어지면, 자기는 자면서도 꿈이 없으면, 확실히 자고 나서 의식이 다시 분명히 살아나는거 보면 내가 있기는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완전히 그렇게 쉴 수가 있었을까.  그걸 아주 이상적인 상태로 말을 해요.  비교하는 말이겠지요.  나도 그건 경험을 해보지 않으니까 몰라요.  내 의식을, 내가 자아의식, 이것 때문에 밤낮, 여긴 좋은 것도 있지만 여긴 사탄도 있단말이야.  하나님도 있고 사탄도 있는데, 섞여서 어떻게 말할 수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좋은 일도 있지만 마음에 괴로운 일도 있고, 산 것도 있지만 죽은 것도 있고, 섞여 있는데, 어쩌면 자아의식이 그런데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자아의식이 없어진 것은 아닌데, 그런 섞인 상태에 있을 적에 갈피를 못잡는, 아주 맑은 의식에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고민거리라 그말이야.  그런데 몰라 내가 못갔으니까 그 말을 못하지만, 뭘 깨쳤다 하는 그런 분들은 보통의식이라 할 수 없는, 그러니까 초월의식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성경에 있는대로 하면 "나는 내뜻대로 하는거 아무 것도 없다 아버지의 하시는걸 보고 들은거를 말할 뿐이다"하는 그 말하는 상태, 4복음을 다 통해서 하시는걸 보면, 거짓말 한다든지 수단으로 그 사람들 보고 한다든지, 그런 일이 없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한다든지 미처 몰랐던 거 있다든지 그러는 분은 아니예요.
시적으로 한다든지 비유해서 하지.  과장하지도 않는 줄 우리가 아는데, 나는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바랍니다" 하는 말은 그래서 하니까 내가 나를 증거해도 이것이 거짓증거가 아니다.  그거는 보통사람에겐 적용이 안되는 말이예요.  그런 말하는 걸 보면 보통지경이 아닌 데를 가신 걸 분명히 알 수 있는데..........
그이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낸 이니까, 이런 입장에 서면 문제도 안돼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면도 있지만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놓고, 그거는 히부리서 가자가 말하는 모양으로 그를 앞세워놓고 그가 하시는걸 내가 뒤로 가면서 꼭같이 될 수는 없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일을 가지고 마음이 괴로워 기도도 했고,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했다고 하는 그 점을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앞세워놓고 예수가 간 그대로를 그이를 따라 배워간다고 하는, 그런 생각도 있어야 돼.  믿는 사람은 너무 그 생각은 안하고, 그저 예수를 쳐다만 보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서 그거는 안 됐고, 아무리 자동적이라 그래도, 아무리 열심히 믿었다 그래도, 내 자아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렇지는 않을거야.  자아의식을 잃어버리고 갔다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있으면서 죽었다고 해야지.  내 자아의식이 살아있긴 있는데 그것이 그 잘못을 아니하게 되는, 그런 상태에 가기를 사람이 바래는 걸건데, 그런데는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많이 그런 점을 생각해야 돼.  그런걸 파서 들어가노라면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다가도 내버려서 열흘도 스무날도 가면 하나마나 하지만 그래도 늘 연속적으로 생각을 하노라면 역시 조금씩조금씩 깊어지니까 남의 말 듣는데도 알아듣기가 쉽고 책을 보는데도 그렇고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또 허투로 막 그러지 않게 되고 깊이가 있어가지요.  그런건 자기가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지금 나이 80이 돼서 이런 말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렇게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어.  그거는 지금까지는 그랬으니까 이담에는 어떻게 되겠는지.  이담 어딜 가서 어느 형식으로 내 자아가 자라겠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 생에서는 말 할 수 없을거고 지금 있는대로를 여러분 앞에 참고될 만한 걸 말한다면, 그런 정도는 말할 수가 있어.  그러니까 주로 뭔지 모르지만 모르면서도 어쩌나 내 속에 속이지는 말고, 그것만은 알 수가 있으니까 내가 날 스스로 속이고 있는건 아닌지.  속여서는 못써.  사람 앞에는 부끄러워서 못 내놓을는지 몰라도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는 감추려고 한다든지 겁이 난다든지 그래서는 못쓰고 그건 있는 그대로를 내놓으면서 그럭하고.......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하고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이라, 자기를 뒤로 앞장 안세울려고 해.  도리어 그럭하고 보니까 앞에 서게 됐고, 또 자기는 내버려.  생각도 안하고 외면하느라고 했는데 그래 자기가 있게 됐고, 그런거는 체험해 본거니까.  그러면 그거 뭐냐.
비이기무사야()라, 나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아주 완전히 그랬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이 체험은 이대로 들을 밖에 없지. 노자는어느 정도해서 이럴까 그러지만 비이기무사야() 나라는 것이, 내로라 , 언제든지 툭하면 내로라, 그래.  지금 이 시간에도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것이 내가 아닌건만, 여기 지금 내로라 그러고 우리 집의 심부름꾼, 말하자면 서사랄 까, 요새로 말하면 비서라 할까, 그게 나서서 말대답을 하는데, 그러면 주인이 안방에 있으면서도 "저자식이 왜 그러지" 그랬으면 당장에 불러 들여서 "네가 왜 그래?" 그러고 "말한다면 내가 대답해야지 네가 왜 그러냐?" 그랬어야 할건데, 대개의 경우 우리가 그렇게 안한단 말이야.  그렇게 못하는 그것이 사람의 약한 점인데.
그런데 능히 그걸 해.  그게 이제 자기 몸을 뒤에 세운다, 자기 몸을 외면을 한다, 그런 말이야요.
고능성기사(故能成其私)라, 그러고 나면 자아가 살아나.  살아나면 아까처럼 그런 짓을 아니하는 나.  나는 나다 하는 생각이 있는데, 내가 나다! 여기 이 오관을 통해서 얻는 이게 내 기억으로 되는, 내 연상으로 되는, 그게 나와서 자꾸 내다내다! 그런데 그러지 않게 되는.........., 그것이 사람이니까 생리의 이치를 거기에 두고 생각해야 돼.  생리적으로 하면 어떨까 그러는거는 뭣이 한 번 두 번하면 자꾸 사람은 그것이 버릇이 돼.  반복하게 되는, 그렇지 않아요?
한 번 해도 벌써 반복하게 될 줄을 알게 돼요.  그런데 소위 일부러 정신통일해서 이러구 한다는 데는 좋은 의미에서 그걸 이용하는 것도 있지요.  허나 또 나쁜 의미로 그렇게 되기도 해요.  그러니까 그것도 참 말하기 어려운건데, 지금은 내 상태로는 내가 뭘 느끼는 건 있기는 있는데, 어떻게 말하면 알아들을지, 그래 못하겠소만 이 정도 밖에 못하겠소마는, 그래 반드시 이 물리적인 어느 기록이 있을꺼라 그말이야.

사람은 근본을 말하면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그런,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느 물질적인 것의 의존이 없이, 본래 근본, 그건 말할 수 없는거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령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를 직접 본다, 내가 말씀을 직접 듣는다"라는 그 상태에 갔는데, 그건 어떤 자리일까.  우리가 잘 힘써하면 얻어지는 것일까 헤아려 상상을 할 수 있지만, 그 자리를 감히 말하긴 대단히 어려운거야요.
그러는 이들도 사람인 이상은 여기 신체적인 무슨 기록이 있다, 그말이야.  한 번 해본 것이 가령 한약집에 가면 서랍이 요렇게 있잖아요.  무슨 문제가 나면 곧 이안에 있는 내 자료를 쏙 뽑아내요.  비슷한 걸.  한번 가령 사과라는 걸 들어보면 "요거 아닙니까?" 사과! 그러고 사과란 말이 내 속에 나온단 말이야.  말도 나오고 생각도 나오고 그러잖아요.  한 번 본사람은 척 보고 "아무개!" 전화에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개!" 곧 가서 뽑아내잖아요.  그거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지 않아요.  심리작용을 할 수 있고, 그렇지만, 그대신에 한번 나쁘게 한거는 그냥 안없어져.  그러니까 김유신의 말이, 김유신은 안들어가기로 작정을 했지만 그놈의 말이 그 집으로 달려들어갔다는 거, 김유신이가 찍었다는건, 그러니까 말모가지를 찍을 때는 말모가지를 찍은 거 아니라 자기 모가지를 찍은 거란 말이야.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하니까 무슨 단단한 결과가 왔겠지요.  그럼 그랬다고 김유신이 완전히 초월했나? 그건 나도 말못하겠소.  그래도 말모가지를 찍는다고 할 때에는, 그럭하지 않고는

이 속에 것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말이야.  이게 지워져야 하는데, 또 있으면서도 그걸 가서 뽑질 않아야 되겠는데, 말하자면 내가 물리적으로 형용을 하면 그렇다 그 말이요.  이것이 여러분한테 좋은 암시를 주겠는지 나쁜 암시를 주겠는지 모르겠소.  날더러 지금 말하라면 그 생각이 늘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될수록은 끊지말고 계속 하라는 말이 그거야요.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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