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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노자15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9.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 소리> 1989년 7월호

 

노자15장

 

옛 잘하는 선비
古之善爲士者

  
15.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若客, 渙若氷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옛 잘하는 선비는 그윽히 묘하고 깜히 뚫려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오직 알 수 없으므로 억지로 꼴그림을 한다. 저즘저즘 겨울내를 건너는 듯, 휘돌며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엄전하기 손님인 듯, 활짝 열리기 얼음이 바로 풀리려는 듯, 도타워 깎지 않은 나무 같고, 훤츨해 골짝 같으며, 통째로 하나여서 흐린물 같다.  누가 흐려가지고 고요히 해 천천히 맑힐 수 있으며, 누가 가만 있어 가지고 오래 움직여 천천히 살려낼 수 있을까.  이 길을 지니는 이는 가득 차려하지 아니하니, 그저 오직 가득 차지 아니하므로 해어짐에 견디고 새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고지선위사자(古之善爲士者)는 유선생님이 요걸 재미있게 글대로 번역을 했어요  "예간 잘된 선비는" 그랬어.  예간다는 건 고(古)자는 예, 지(之)자는 간다, 그거 옛적이야요.  예간, 걸어간, 옛적 그래도 좋고, 옛적에 잘하는 선비는, 선비도 선비 중에 잘하는 선비.  이 선비라는 건 물론 옛말로 그랬지 이제는 선비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래도 시대에 상관없이 말하면 무슨 진리를, 그저 살아만 가는거 아니라, 속에 무슨 집히는 것이 있어서 속살림을 해가는 사람.  그전에 다 한 얘기니까 혹 기억하는 분도 있을꺼예요.

공자가 선비라는거 뭐이 선비냐, 늘 언제든지 마음에 딱 잡히는 것이 있어.  무슨 일을 해 나가는데, 마음에 해나가는데 반드시 꼭 지켜가는 뭣이 있어.  반드시 다 온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을 선비라고 그러니까 선비는 뜻이 있어서 뜻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  내적 살림을 하는 사람이지요 목적의식이 분명히 있어서 뜻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  내적 살림을 하는 사람이지요.  목적의식이 분명히 있어서 가는 사람.  무슨 보람에 사는 사람.  난대로는 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런걸 알게 돼야 선비라고.

옛날에는 계급적으로 사회에 그런 사람을 사(士)로 아주 선비계급이 있어.  그사람은 벼슬자격이 있고 그 아랫사람은 벼슬자격이 없어요.  그다음에 농공상(農工商) 농사하고 바치, 장사치, 그러는데 사회적으로 그럭하고는 것이 옛날에는 좋으니까 다하기는 어렵고 하니까 어느 계급은 둬두고, 높은 계급은 일안해도 된다.  그 사람은 거기 전념을 해.  글공부를 한다든지 이래가지고 사회를 운영해나가는 그 길을 맡은 사람이지.  그렇지만 참뜻에서는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옛날에 있어서도 너무 그 사람들만 해가지고 안되는 줄 아니까 계급이 있으면서도 일반 이 상놈이라고하는 그 사람에게도 올라가는 길이 반드시 있어요.  그중에서 재주가 특별히 있어서 난 사람은 많이는 안돼도 시험에 통과해 오는 놈은, 그것도 같이 그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시험에 통과하면 벼슬도 할 수 있고 길은 열어줘.  그렇게해서 사(士)계급이 없어지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고 그리고

미묘현통(微妙玄通)이라 이상야릇, 한문자로 하면 그것도 좋아요.  미묘(微妙), 그건 뭐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선비의 그런 도를 닦아가는 선비의 인격을 형용하는건데, 미묘현통이라 뭐라고 형용할 수 없어.  '현통(玄通)'해.  뭔지 표면에 나타내고 그러는거 아닌데, 뭣이 없는 것 같은데 뚫려 있어.  속이 뚫려 있어. 뚫려 있으면 막힐데가 없어. 그래 뚫렸다고 그래.  무슨 일을 당하든지 무슨 물건을 갖다 대든지 어쩔줄을 몰라하지 않는거.  그런게 뚫려다는거.그런 것이 소위 도(道), 미묘현통(微妙玄通)이라 까맣게 뚫려서.

심불가식(深不可識)이라.  깊어서, 겉에꺼는 깊이가 없어.  눈은 눈대로 귀는 귀대로 얼굴이면 얼굴이 이대로지.  깊이가 없잖아요.  허지만 마음이란데는 글세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말 속에 얼마나한 뜻이 있는지.  그거는 대변을 할 수가 없어.  남의 말을 다 해도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귀는 차이가 많아요.  아주 그걸 긴히 잘 아는 사람도 있고 못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그거는 자기 마음이 깊이가 있어야 그렇지.  자기 마음이 깊이가 있어도 그 사람이 또 어느 만큼 깊은지 내정도에 따라서 깊이 아는 수도 있고 또 모를 수도 있어.  심불가식(深不可識), 깊어서 알 수가 없다, 지(知)보다도 식(識)이라 그러면 조금, 꼭 구별은 아니지만, 지(知)보다도 식(識)은 좀 더 이치가 있는 지식, 그저 감각만은 아니고.  깊어서 알 수가 없다, 아는건 좋지마는, 내 속에 빤히 알려보이는 사람은 옅은 물 같아서 그건 안돼.  물이 맑으면서도 깊으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몇길인지 알 수가 없어요.  사람은 깊이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잘한 선비가 아니고는 그럴수가 없어.  사람이 누구 만나서 얼마동안 지내보면 "나 이제 네속 다 알았다" 그런 사람은 수양이 아무래도 많지못한 사람, 야 갈수록 모르겠는데, "갈수록 모르겠는데"는 좋은 뜻도 있고 나쁜 뜻도 있어.  속이 음험해서 갈수록 모르겠는데 그러는 수도 있지요.  하지만 좋은 뜻으로도 참 갈수록 탄복하는, 그렇게 돼야.  그건 일부러 숨겨져서 그러는 거 아니라 속이 깊이가 있는, 정신의 깊이가 있기 때문에 그걸 단번에 다 알수가 없어.  어느 일에 부댔겨봐야 그 깊이가 나타나.  아, 난 그런줄 몰랐다, 늘 같이 지냈고 몇해를 한학교 다니면서 그런 줄 몰랐다, 그 담에 보니까 참 놀랍더라, 그러는거는 어느 문제를 만났을 때, 그제야 알려져.  참 어디 숨겨있던 보물을 캐기나하는 듯, 사람이 그러면 얼마나 사귀어가기가 재미가 있을까?

사람이 볼 때는 속을 곧 다 알고싶어 그러지만, 너무 다 뵈 줄려고 그래도 또 못써요.  그렇지 않아요? 또 다 뵈 줄 수가 없고,  뵈 줄라고 해서도 안되고, 그래.  어불가탈어심연(魚不可脫於深淵)이요, 국지이기 불가이시인(國之利器 不可以示人)이라, 그러지 않았어요? 고기가 깊은 소에서 나오면 못쓰는거.  그러니까 내 마음을 꼭 잃어버릴까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내 속을 빤히 그만 알아버리면 내가 일을 잘 못하게 돼.  일부러 간섭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심불가식(深不可識,)이라, 깊어서 알 수가 없다,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것보다도 깊어서 알 수가 없더라, 깊어서 속에 뭐이 있는지를, 아니 무한을 품고있어.  참 사람이 키가 이만하면 그 속에 영원. 무한이 들어있어.  하늘나라가 그 안에.  우주가 그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깊이를 알 수가 없어.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까 얼마든지 사귈 수가 있어.  하루 이틀만 사귀면 되는거 아니라 얼마든지 사귈 수 있어.  영원히 영원히.,  猶兮若畏四隣,

불유불가식(夫唯不可識)이라, 그저 오직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럼 어떡하나? 그건 말로 할 수가 없어.  깊이를 알 수 없어. 그러게

강용지용(强爲之容)이라.  굳이굳이 할 수 없어서 말안할 수는 없고 말할라면 뭣을 형용을 해야하니까 굳이 그것을 비유로해서 겉으로 꼴을 지어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랫 켠에 여러 가지 한거 그거야요.
도를 닦고있는 사람.  잘한 선비는 내부가 얼마나하냐, 그걸 말하는거.

예약동섭천(豫若冬涉川)이요.  코끼리가 겨울 냇물을 건너는, 큰 코끼리란 놈이 가는데 저벅저벅 건너가지 않아. 더구나 겨울에는 안가려는 것처럼, 가면서도 안가려는 것처럼 그러고하는, 그걸호 선비란 사람의 형용을 하면서, 그건 비유가 그러니까 그럼 그렇다면 그게 뭘까 자기가 풀어봐야지.  그 사람 마치 물건너가려는 코끼리 같애.  그런다면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왜 그렇게 됐을까? 가령 툭하면 저벅저벅 건너가면, 그건 알기가 쉽지만, 가려는 것도 같고 안가려는 것도 같고, 어쩌면 무서워하는 일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 무서움이 많아.  반항하는 것도 같고, 그 아래 여러 사람들이 푼 거 있어요.

유약외사린(猶若畏四隣), 강아치처럼, 사방.  이리도 보고 이리도 보고 그저그저 의심이 많아.  가다가 돌아보고 가다가 돌아보고, 그건 어떻게 보면 부족한 것같이 뵈지만 또, 그런데도 있다, 그건 왜 그럴까? 참 잘하는 선비가 왜 그럴까? 그러야지.
요새 나는, 내일은 안도산 얘기를 하라고 그래서 도산전기를 읽고 있습니다마는, 젊을 때 도산선생은 참 그런 점 많이 있던데, 어쩌면 이런 면도 있고 이런 면도 있고,
엄약객(儼若客), 또 어떤 때는 의젓해서 남이 들어갈 틈이 있나? 손님은 누구고 주인은 누군가? 그거를 생각해보면 재미있어.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갔으면 주인처럼 행세하면 좋다고 그럴수도 있고, 주인은 언제든지 내 집에 있지만"손님이지" 그러고 있으면 좋지않아? 바꿔 생각을 하면 좋은 점 많이 있지않아요? 그러면은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엄약객(儼若客)이라, 손님이라, 너무 굳어져서, 엄(儼)이라 그러면 너무 굳어져서 그러면 또 못써요.  굳어지면 못쓰지만 너무 풀어져서 아무 것도 규모도 법도도 아무 것도 없이 그러면 안돼! 역시 수양이 있냐, 없냐, 하는 사람은 그걸 따라서 달라요.  엄약객(儼若客), 아주 턱 제치고 앉아서 손님으로, 남의 집에 간 손님, 내가 남의 집에 온 손님이다, 제집에 살면서도 내가 이집의 손님이지.  그렇게 생각을 해보시오.  그러면 다를꺼 아니예요? (웃음) 또 반대로 남의 집에 가서도 이집의 주인이지.  그러면 또 그렇게 달리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저 칼릴 지브란 책에 보면 재미있잖아요? 아라비아에서, 그건 그럴 수도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주 귀한 손님이 오면 식탁에서 저녁식탁에서 손님이 주인노릇을 한 대요.  빵을 떼서 나눠주고 고기를, 서양사람들 아주 정성으로, 나는 그렇게 귀한 손님으로 초청을 못 받아 봤으니까 모르지만 보통사람들은 정식으로 초청을 하면 아마 고기덩이가 이만씩이나해.  그건 아주 주인이 남자주인이 슬슬 이렇게 썰어주잖아요? 옛날 법에는 귀한 손님이 가면 주인이 그걸 손님에게 맡겨서 했대요.  재미있는 일이야요.  그리고 그것 아마 아라비아 사막에 사니까 그랬겠지.  해가 지기전에는 밥을 못먹어요.  왜 그런고하니 손님이 오면 손님 대접을 못하면 그것이 아주 큰 죄예요.  죄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들어와도 손님대접못하면 안되니까 주부는 맘을 못놓는대.  저녁에 잠자리에 해가 넘어가야.  그러니까 거기 사람들은 저녁을 해넘어가기 전에 먹지 않아요.  주부는 밥을 담아 놓고는 마지막에 이젠 손님 안올꺼다, 그런 다음에야 밥을 먹지.  만일 먼저 먹었다가 손님 못대접하면 안된다고 그래.  손님대접을 아주 크게 중한 일로 알아. 그걸 안하면 아주 죄인줄 알고,

현동완씨라고 YMCA총무로 오래 계셨는데 47년에 내가 처음으로 넘어왔는데 마침 한국사람들을 오스트리아로 이민가도록 해볼까해서 호주에 갔다온 일이 있어요.  거기 갔다온 얘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
가니까 농장이라는데 한 4, 5십리 가다가 집이 하나씩 있더래요.  대개 농장이 젖짜는 양을 치던지 그러잖으면 또는 과수원, 이런건데 그래 가다간 집이 하나있고, 그래 사람이 그렇게 귀하단 말이지.  그집에 손님이 됐는데 밤에 자다가 그집에서 애기가 없어졌다고 대소동이 났어.  나중에 알고보니 애가 손님방에 가있어. (웃음) 애기가 돌아 와서 그러더래.  나는 성경에 보니까 손님 대접하라고 그랬는데 처음으로 난 손님을 대접해 본일도 없는데, 오늘 난 오신 손님하고 자고싶다고 해서 그럼 그러라고 해서 있었드랬는데, 집에서는 그런 줄을 모르고, 그애가 그리로 간줄을 모르고 밤중에 찾고 그랬다고.
어린애 때는 그래, 지금은 몰라.  우리가 자라날 때도 참 손님이 오면 그렇게 기쁜 것 없잖아요? 지금 서울에선 손님이 뭔지 모를꺼야.  시골 사노라면 저 먼데 있는 사람이 어떻게 돼 일년에 한번 오나마나 그렇기 때문에.  손님이 오면 참 기쁘던, 아주 좋게 생각해.  그건 옛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인생이 맛이 있던 끄트머리인데, 손님대접이 하나의 미덕이야.  아주 의젓하게 하기를 손님같이, 또 그것과는 반대로

환약빙장석(渙若氷將釋)이라, 얼음이 이제 바야흐로 확 풀리는듯한 태도.  그러한 점이 있어.
돈혜기약박(.敦兮其若樸), 도타와, 아주 말 하지 않는 동안에 어딘지 도타와서 박(樸), 등걸 박.
광혜기약곡( 曠兮其若谷), 텅비어서 골짜기 같애.  왼통해서 뭐라고 형통을 할 수가 없어요.  무슨 인자하다고 할까. 점잖하다고 할까.  아주 애정이 있다고 할까.  뭐라고 이름지어 할 수가 없으니까.
혼혜기약탁(混兮其若濁)이라, 물이 흐린 것 같애.  그래놓고는 그 다음에 그걸 받아서 탁(濁)과 청(淸)으로,
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濁以靜之徐淸)하며, 누가 능히 탁한걸 가지고, 흐린거 맑다면 보기에 맑은 거는, 맑은거 좋지만 빤히 들여다보이도록 맑은거는, 그거는 참 맑은거 못돼! 이건 도리어 흐린 것 같으면서 맑은거야요.  탁(濁), 흐려가지고 뭣이라고 비추이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곧 알만한 그런거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인지라, 속에 뭣을 물건을 가지고있는 것처럼, 산 생명을, 진리를 품고있는 사람이니까 흐린데 그걸 어떻게든지 고요히해서 정지(靜之)하야.  고요히 해서, 천천히 서(徐)자가 중요해.  서청(徐淸)하며 천천히 해서 맑게.  흐린건데 흐린 물을 가만히 하면 맑아지는 모양으로, 처음에 만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처음 보고 알 수가 없는데, 차차 있노라면 맑아져.  비쳐서 알게 돼.  또 혹은 자기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나도 "이게 무슨 생각이지" 그러면 차차차차 그 속에서 맑아져, 정신 통일되는 지경에 가면, 처음에 뭔지모르고 그런거 같은데 가노라면 속에서 자꾸자꾸 생각이 나.  맑아지는, 또

숙능안이구동지서생(孰能安以久動之徐生), 안(安)은 반대로 탁(濁)과 비슷하게 다른 걸로 가만히 있는 그런 걸로 구동지(久動之)요, 오래 급히 굴지말고 오래오래 뵈지않는 가운데 움직여서 서생(徐生)이요.  천천히 살려줘.  속에 생명을.  씨를 심어놓고 곧 나기를 바라고 그러다가는 싹을 못보고 말지 않아요?  그러니까 심궈논 다음에는 천천히 기다려야돼.  그게 야구가 터서 나오도록.  그게 구동지서생(久動之徐生) 천천히 살려내는, 그러면 사람도 그러야 할꺼예요.

지금 우리나라 정치의 나쁜거는 급하게 굴어! 어느 때도 늘그렇지만 지금은 더구나 그래.  급하게 그저 급해.  지금은 아예 급하게 구는거 크게 미덕인 줄로 알아.  어서 빨리하는 거 미덕인줄 아는데 그런거 아니야.  그거는 물건 편에서는 "빨리"가 있을 수 있지만 생명의 편에서는 그렇게 안돼.  꼭 무슨 법칙대로 할 수가 없어.  맘이란 결코 합리적인가 하면 아니야.  비합리적이지.
옛날에는 합리적인걸로 그렇게 많이 알았어요.  근래 오면서야 사람이 대단히 비합리적이다, 그런거 많이 있지 않아요?
요새 철학 없어진 시대니까 그런 얘기도 하는지 모르겠소마는 그러면 결단난거야요.  사람이란 본래 이 속에 깊이가 있는거고, 깊이가 있는 것은 내가 찾아내서 그 깊이를 내가 알도록 돼야 하겠는데 그거 철학이 옛날 철학 아니야요? 그런거 도무지 없어지고 그저 기술에만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걸로 돈을 주고 어디 사다가 놓는다, 아주 이렇게 돼서 걱정났는데, 그런거 반대를 하면 현대사람 아닌 것같이 들리겠지만 그래도 아마 인생이 그렇지 않아.
나는 이런거 보면서 아주 난 어쩔 수 없이 옛날사람이오.  노자 물론 예를 좋아해서 그래 고지선위사자(古之善爲士者) 옛날에 잘한 선비라 그랬지만, 공자도 예(古)를 존중해.  그건 퇴보가 돼서 그러는거 아니예요.  반드시 현대사람에게는 진보라 그러면 그것이 다시 없이 좋은건줄 아는데, 이 수백년동안을 아주 자동적으로 과학이 발달한, 자동적으로 진보, 프로그래스(progress), 발전해 간다는 걸 아주 당연한 걸로 알았는데, 근래오다가 거기 대해서 부정적인 논의가 있어.  발전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거 정말있냐? 참 의미에서 없는거 아니냐? 그런 사상도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거 다 마음에 문제가 됐는지 안됐는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아무 때 가서라도 좀 문제가 될꺼예요.

지금 인류전체로 보면은 이때까지 당연한 걸로 진보라면, 그저 발전이라면 그저 좋아.  그랬더랬는데 과연 진보가 진보냐? 생각을 하다보니까 그거 발전이 발전도 아니다, 발전이라는거 도리어 줄어드는거 아니냐? 그런 생각 많이 있어요.  이걸 인류가 언제가서야 이 고비를 넘겠는지.  아직도 넘게 되는 그 고비에는 못갔어요.  그동안까지는 이 시국이 언제까지 조금더 나갈꺼야요.  나가는 동안까지가 아마 어려울꺼야.  많이.  나는 그점에선 믿을 뿐이지 뭔지 몰라요.  아무도 그럴꺼요.  어떻게 될꺼는 모르겠지만 이런거 다 걸려요.  아주 어떤 사람들은 한참 히피가 나오고 그럴 때는 우리 미래 일없다, 미래 생각할 필요없다,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지금 있는 그거 너무 나쁘기 때문에 거기 대한 반동으로 그 얘기 나왔지요.  그렇지만 히피 이젠 가라앉은 모양인데 그래도 아직도 새 방향을 뭘 잡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요.  이제 정말 나오면 철학이 없어지겠나? 아니면 또 다른 무슨 철학이 나오겠나? 종교란 없어지겠냐? 종교란 참종교가 있냐? 하느님이란 있냐? 정신이란 있냐? 없냐? 다 이제 문제 될꺼야요.
그런거를 수천년전에 벌써 노자 때도 문제가 돼서 그때있는 현실주의한테 반항하는 의미에서 이러는거니까.  그래서
보차도자(保此道者), 이 도(道)를 지니고. 이걸 일으키워가지고 이걸 가지고 걸어가지만 또 가는 동시에 그걸 키워가요.  이말과 직접, 그말도 교정할 수 있지요.  그래 근래 오다가 한 생각이지.  우리는 석가면 석가라든지 석가라는 훌륭한 종교가가 있다다, 예수라면 예수가 있었다든지 그니의 것을 배운다든지.  아직도 단순히 "예수를 믿으면 된다", 그 믿는다는게, 믿는다는 말 참 하기 어렵소.  나도 믿는다면 믿는다고 그러지만 거기다 자꾸 절을 하고 그러면 모든게 거기서 모든 복이란 복은 거기서 다 오는 것처럼 그런 거는 난 믿고 싶지 않아요.  그런거 아닐꺼예요.
오늘은 또 어저께 편지가 왔던가.  집은 우리 주소로 편지를 하면서 다른 내가 아는 목사가 함 아무개는 성경을 잘못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 말 들었다간 안된다고.  그렇게 아주 편지가 왔던데.  누가 잘못본건지 봐야 알지. (웃음) 그건 그사람이 잘못 본건지 내가 잘못 본 건지.  나는 뭐 그런 소리는 안할꺼지만 그래서 참 문제되는거.  보차도자(保此道者)는 이도를 지니고 하는 사람은
불욕영(不欲盈)이라, 차려고 하지 않아.  찬다면 다야요.  그만.  가득차면 다인데, 그러니까 이말대로 한다면 나는 하나님은 "영원한 미완성"이라고.  그런 소리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그런 소리듣는데, 그래도 이단이거나 말거나 간에 나는 그렇게 믿어요.  끝까지 찰 수가 없어요.  찰 데가 없잖아.  찰 데가 없다는거는 차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야돼.  차는 것은 한정이 있어야 하겠는데, 가득 차보자고 하는 그 마음이 없어야 하겠는데 불욕영(不欲盈)이라 차려고하지 않는다.

부유불영(夫唯不盈)이라, 이걸 두고두고 씹어보세요.  차려고하지 않는다는게 이게 무슨 소리냐? 그러므로 (故)
능폐불신성(能蔽不新成), 해짐에 능히 견디어내.  해어진단 말이야.  입었던 옷이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이것도 해어지는 날이 온단 말이야.  그만 아니라 타고났던 이몸, 둘도 없는 몸, 나밖에 없는 이몸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하루살아가고 하루살아간만큼 해어져나가고 뭣이 떨어져나가고.  젊었을 때는 자주 세포가 분열이 왕성 하니까 새살이 나오고 새살이 나오고 더 이뻐지고 커지고 그러지만, 나 같은 건 이제 중가운데를 지나서 마지막이 가까우니까 날마다 날마다 떨어져만가고 해어져만 가는데, 해어져만 가면 그 다음엔 난 다 아니냐? 그러니까 요걸 어떻게 마지막에 붙들어볼까해서 약도 먹고 요가하고 별짓을 다하잖아요? 매달리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러질 않게 돼야 하겠는데, 그럼 그런다고 그건 요가하지 말란 말이아니라, 참 요가는 그럭하자는 요가 아닐꺼야요.  능폐불신성(能蔽不新成)이라 능히 해어지는데 견뎌내야 돼.  해어지는 걸 무서워 안해.
죽음을 무서워 안해.  죽음이 뭐냐? 죽음이 뭔지 알지 모하고 그래.  죽으면 어떡하지? 죽으면 어떡하지? 부모가 어린애 낳아놓고 알지도 못하는 애보고 "그럼 엄마 죽어! 엄마죽어!" 자꾸 그러면 자기도 뭔지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잖아요.  그러니까 천연수를  엄마아빠한테서 일생을 두고 받은거요.  엄마 아빠한테서 "죽는다, 그러면 죽어, 그러면 죽어!" 죽음이 뭔지 모르고 암시를 자꾸 주니까 머리 속에 ........ 그 한번 시험삼아 길러보고 싶어.  죽는다는 소리 안해보고 어디 일생 낳아놓고 어디서 길러보고 싶은데 말이야.  이건 누굴 만나도 죽는다는 걸, 우리나라사람 죽는다는 소리 더구나 쉽게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하는 줄도 모르게 아주 버릇이 돼서 "아이구 죽겠다, 아이구 죽겠다," 그러는데 (웃음), 그건 맘에 그걸 생각을 할라니까 버릇만 남아요.  사실은 내속에는 그리 죽음이 없어. (웃음)

그런 속에서 자라났으니까 얼마나 그 암시를 받고있는 것이 우리 일동일정에 나타나갔나? 측량을 해보면 참 큰 관계되는 걸 알 수 있을꺼야.  그러니까 부모님이 제발, 이담에 가서 결혼하고 애기들 낳거든 죽는다는 소리 너무 하지 말라고 그래.  난 아주 버릇이 돼서 이젠 고칠래도 고쳐지지도 않아요.

부유불영(夫唯不盈)이라, 차려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폐불신성(能蔽不新成)이라 그리고 새로 이룬다는 건 새로가 좋은 의미가 아니야요.  새로가 없어.  또 다른 거지.
그러니 소위 인도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또 태어난다고 그러잖아요.  그사람들의 이상은 태어나는거 목적이 아니라 안태어나는거 목적이예요.  조금 더 책을 보면 알갔지.  그럼 안태어난다는거 뭐냐 그러면 이게 우리가 낙제를 해서 우리 지금 여기가 공부, 일생의 공부인데, 잘하면 단번에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단 말이야.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천국이라고 그러면 되고, 면류관이고 뭐고 그까짓소리는 듣지를 마세요.  그까짓건 소용도 없는거고, 그런데 그거는 소용이 없는거 아니라 또 그게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한다고 그 사람 깔보면 못써.  그사람은 말은 어쨌던지 그걸로 듣는게 있어요.  그러니까 살아가는거고, 여러분은 그 정도는 지냈는데,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서도 상기도 면류관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거는 뭔가 잘못하는데가 있지.  그건 또 알아야 할꺼고.
나는 정도가 다르니까 정도가 달라서 그 쓰는 말이 다 같지 않으니까 일률로 그게 거짓말이라고 그래도 못쓰고, 그렇다고해서 그것만 한다고해도 못쓰고 그런건데, 내가 지금까지 아는 것 지내본 것으로는 그렇습니다.  나는 내 자리는 상관이 아무 것도 없는거고, 그래도 증거는 하고 가야 할꺼니까.
새거나는 게 참 새거가 어디 있냐? 참 새거가 없어.  성경에는 요한복음에는 니도대모가 왔을 때 첫마디에, 그 사람이 국회의원인데 첫마디에 예수님 말이 "새로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아노텐이라는 말인데, 아노텐이라는 말은 "고쳐난다"혹은 "우로부터 난다" 그러니까 "another"가 아니라 "new","new"라고 그러는거는 "another"가 아니다, 영어로 하면 구별이 돼요.  우리는 "또 다른거", "새거" 그렇게 하면 되겠는지 몰라도, "또다른 것"과 "새거"라는건 다르잖아요.  새거라는거는 아주 질적으로 다른거야지.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새로 나야된다고 하는걸 첫마디에 말을 해 준거요.

그러니까 사람의 목적이 뭐냐 그러면 번수가 다를 뿐이예요.  인도사람은 생각을 하기를 사람은 또나고 또나고, 왜? 단번에 되기가 어려워서.  잘하면, 내가 이세상에 온거는, 과거에 원인이 있어서, 그전에 말하자면, 쉽게 비유를 한다면 그전에 낙제를 해서, 낙제를 했기 때문에 또 고쳐해보라고해서 이번에 온거니까 이번에 잘하면 단번에 해방돼.  아주 완전히. 그래 해탈(解脫)이라고 그래.  이게 왼통 잘못돼서 엉킨거니까 제발 이걸 벗어나고 그래야 정말 자유자재하는, 그거는 말로 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세계인데 거길 내가 간다는 거야요.
그런데 그래도 이제 내가 온김에 단번에는 어려우니까 조금씩 조금씩 또 진보를 해서 이제 또 좀 나은 사람 또 좀 나은 사람, 공로를 해서 간다는 그 길도 있고 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인도식으로 하면 그래.

기독교에서는 뭔고하니 단번에 해버려.  여기서 회개하면 구원얻고 하늘나라간다, 번수가 한번이냐, 여러번이냐, 요컨대는 비유로 하는거니까 번수가 뭐 한번이 옳다.  여러번이 옳다, 그러지 말고, 아무거나 이게 여기 있지만 이것이 한번은 이게 번디쳐서 변화하지 않고는 안되는 걸, 변화해서 이것과는 다른, 아주 그건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어.  가봐야 알 일지만 무슨 그런 단계를, 생명이란 그런거다, 그러니 지금까지 지구에 생명이 어떻게 돼 있게 됐냐 하는 것 아직도 결정이 나지 못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돼서 우연히 됐다, 그거는 설명 못하겠으니까 할 수 없어 하는 소리고, 우연하게 됐갔지 그리고 안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조금 더 일리가 있는 사람은 그건 뭐냐? 그렇게 캐면 뭐라고 그러지?
어쨌든 문제가 되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제 나는 건데, 그래 말을 한다면 끝이 없는거야요.  끝이 없는건데 기독교에서 한다면 이제 "단번"이라 했지만 단번 이라고 할지? 여러번이라고 할지? 뭔지 이것과는 달리 가봐야 알꺼야. 거기까지 미리 짐작해서 다 아는것처럼 얘기하는 거 그런 모르는 말이야.  아주 거기 간 분들은 그 지경을 살아있는 동안에 체험을 한분들은 그런 말 안했어요.
해짐에 견딘다는 건, 이제 떨어져나가도 떨어져 나가는거 문제가 안돼. 왜?  떨어져 나가는건 생명이 떨어져 나가는거 아니라 생명이 쓰고 있던 이 껍질이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날마다 이러면 나도 오늘 목욕하고 왔지만 말이야.  이게 다 껍질, 때를 밀다가 살을 벗겨져요.  그거는 겁을 안내잖아요.  왜? 그래도 뭐 살이 내 살걸.  살이 내사는거를 생리적으로 설명못해도 그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런걸 알고 깍데기가 벗겨지지 않는 걸 아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돌로 아주 밀면서(웃음) 닦고 있지 않아요? 이태리 타올인지 뭔지 아주 제 피부를 긁어 못쓰게 만들고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잘하는줄 아는데, 그렇게 할것까지 없지.  해도 아무리 씻어도 그거는 어느 날에 가서는 벗겨질 건데 속에선 아주 돋아나니까 그러니까 해짐에 견딘다는건, 해지지 않는다는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래 해지는걸 무서워 안해.  해짐에 견딘다고 하는거.  그리고 불신성(불신성)이라, 또 다른거를, 새로라고 그랬는데 또다른 거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한거요.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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