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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환경운동,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녹색평론 94호)

by 마리산인1324 2008. 1. 12.

 

《녹색평론》제94호 2007년 5-6월호

http://www.greenreview.co.kr/

 

 

환경운동,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강양구

 

 

환경운동은 1년 전 새만금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의 끝물막이 공사가 끝날 때 바닥을 친 듯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더 참담하다. 여름에 폭우가 한두번 내리자마자 언론이 댐 타령을 하기 시작하더니, 거의 고사 직전이었던 한탄강댐 계획이 화려하게 부활해 공사를 앞두고 있다.

 

  수천억원의 보상금을 미끼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터를 마련한 정부는 기세를 몰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터까지 선정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탓에 빗장을 열고 들어올 광우병 감염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유전자조작(GM) 작물에 대한 불안감도 더욱더 커지고 있다.

 

  지역마다 악취를 풍기며 진행되는 온갖 개발사업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특히 논밭을 급속히 대체하는 수많은 골프장은 늘그막에 외롭게 농촌을 지키는 노인을 투사로 변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싸움도 결말은 예정돼 있다. 보상금으로 제시된 몇푼 안되는 돈 냄새를 맡은 도시의 아들딸의 회유를 견뎌낼 노인은 없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선 환경문제는 더욱더 심각하다. 최근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발표한 지구온난화 전망은 기후변화 문제에 둔감한 일반인에게도 섬뜩하게 다가올 법했다. 지구온난화에 대해 비교적 보수적 전망을 내놓곤 했던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내놓은 결론이 헐리우드 재난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경운동이 관심을 가질 만한, 또 가져야 할 문제는 사방에서 넘쳐나는데도 정작 환경운동은 위기를 말한다. 대개의 사회운동이 극복해야 할 대상을 통해 그 정체성을 자리매김해 온 과거를 염두에 둔다면, ‘산업주의’의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금, 오히려 환경운동의 쇠퇴가 운위되는 현실은 여러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환경운동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환경운동은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볼 문제가 있다. 만약 지금 환경운동의 ‘쇠퇴’, ‘위기’를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어느 때 환경운동이 ‘잘 나갔다’는 것을 가정한다. 많은 이들은 그 ‘잘 나가던’ 때를 1990년대라고 지적한다. 과연 그런가. 돌이켜보면 1990년대의 환경운동이 잘 나갔다고 평가하기에는 여러가지 무리가 있다.

 

  흔히 1990년대의 환경운동의 성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꼽는 것이 19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안면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1990년 11월)이나 낙동강 페놀유출사건(1991년 3월)이다. 여기에 굴업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1995년 5월)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본격적인 환경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의 가장 큰 쟁점은 ‘졸속으로 이뤄진 지질조사’ 등이었지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찬·반 대립은 아니었다. 낙동강 페놀유출사건 역시 법 적용이 허술한 틈을 탄 한 기업의 일탈행위가 물 관리에 대한 시민의 불안과 겹쳐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굳이 산업주의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세가지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사건들은 한국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일 중에서, 당시 막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던 환경운동이 제 목소리를 낸 경우일 뿐이다.

 

  이렇게 1990년대의 환경운동을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보면 한국 환경운동의 선뜻 이해하기 힘든 모습들이 잘 이해된다. 예를 들어 이런 모습들이다. 한국 환경운동의 제1세대 인사들이 낡은 성장주의를 고집하는 정치인, 기업인과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가? 고작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상징’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에 환경운동은 왜 그렇게 환호했는가?1)

 

  1990년대 환경운동이 민주화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온다. 그들은 환경운동이라는 방식을 택한 또다른 절차적 민주화운동을 했을 뿐, 산업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통해 환경운동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한번도 역사 속에서 또렷하게 스스로를 각인한 적 없었던 환경운동이 마치 1990년대 ‘잘 나가는’ 것처럼 인식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언론의 호의적인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언론의 환경운동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는 이미 1990년대 중반 거의 증오에 가까웠던 노동운동에 대한 그것과 비교하면서 살펴봐야 한다.

 

  언론은 한국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어떤 세력보다도 빨리 알아챘다. ‘국가가 주도했던 불합리의 시대’가 가고 조만간 ‘자본이 주도하는 합리의 시대’가 도래함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 스스로 자본의 성격을 지녔던 언론은 그렇게 시대를 주도하는 데 있어서 노동운동의 성장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노동운동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바로 언론이 선택한 파트너가 넓게는 시민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시민운동 중에서 초록색 옷을 입은 환경운동도 포함돼 있었다. 즉 ‘노동운동 때리기’에 나서면서 ‘시민운동 살리기’에 나선 언론의 이중적인 태도가 환경운동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을 불러온 것이다.

 

  예정된 언론의 배신

 

  사실 언론은 어느 때나 환경운동을 ‘배신’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런 균열이 대중도 느낄 정도로 가시화된 때가 바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이었다. 전국민이 ‘부자 아빠’가 되는 데 혈안이 되기 시작했던 그때, 앞으로의 환경운동의 지난한 운명을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있었다.

 

  1998년 8월 21일, 환경운동연합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길을 막고 자동차를 부수는 시위를 벌였다.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가로지른 환경운동가들은 번호판 없는 낡은 승용차를 도끼로 부수는 시위를 벌였다. 인류의 끊임없는 개발이 환경에 피해를 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행사였다.

 

  이 환경운동연합의 시위에 대해 언론은 싸늘한 반응으로 답했다. 이날 시위를 부정적으로 보도한 문화방송(MBC)은 “아무리 환경운동을 한다고 그렇게 때려가면서, 부셔가면서 하면 되겠어요”라는 한 시민의 반응을 전했다.2) 이런 부정적인 보도 탓에 실제로 한동안 환경운동연합은 탈퇴를 문의하는 회원의 전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된 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사건이야말로 1990년대 환경운동에 대해 언론이 갖고 있었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산업주의를 문제 삼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어, 조심해.” 환경운동연합의 시위에 대해 언론이 보인 반응은 바로 이런 경고를 담고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불과 10년도 안돼 이런 경고는 현실이 됐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환경운동이 단순히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등 각종 오염문제를 중심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데서 더 나아가 새만금 간척사업과 같은 대규모 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비판의 날을 세우기 시작하자 언론은 환경운동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환경운동이 산업주의에 근거를 둔 개발주의를 문제 삼으면서 언론의 환경운동에 대한 태도는 노동운동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게 없게 된다. 이런 언론의 외면은 환경운동에 큰 타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2000년 6월 동강댐 건설계획을 백지화시킨 이후, 환경운동은 잇따른 패배를 겪는다.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 경부고속철도 천성산터널 반대운동,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 등, 패배의 목록은 끝이 없다. 그나마 이 시기 언론이 외면한 ‘대중의 관심’을 환경운동을 향해 붙들어둔 운동이 바로 ‘새만금 삼보일배’나 ‘지율 스님의 단식’이었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이런 ‘대중의 관심’을 ‘대중의 지지’로 바꾸는 데도 실패했다.

 

  환경운동의 상황은 노동운동보다 더 심각하다. 노동운동은 그 위기가 말해진 지 거의 1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여러가지 한계에도 노동운동은 실재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그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 성격이 조합주의적으로 변할망정 앞으로도 노동운동은 무시 못할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이다.

 

  반면에 환경운동은 지난 20여년간 그 존재근거가 될 만한 지지자를 몇이나 만들었을까?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시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탈퇴를 문의하는 수만명의 회원을 그 존재근거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이 조로병을 앓고 있다면 환경운동은 이제야말로 성장통을 앓고 있다.

 

  환경운동, 세 갈래 길

 

  이런 상황에서 환경운동의 목소리가 여론을 움직일 리 만무하다. 한 중견 환경운동가가 토론회에서 토로한 대로 “환경운동가가 우리사회의 암세포처럼 취급받을 정도로, 생태적 입장이 여론을 움직이는 데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씁쓸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3) 이 위기를 환경운동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최근 환경운동은 세가지 방향으로 위기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선 첫번째 방향은 기존의 환경단체를 여러가지 환경정책을 제도화하고자 노력하는 일종의 압력단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대체로 수만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 등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2006년 환경운동연합이 바이오디젤유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시민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바이오디젤유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하도록 산업자원부를 압박한 것은 이런 압력단체로서의 활동에 해당된다. 당시 환경운동연합은 산업자원부를 압박하고자 농림부, 환경부 등 정부 내의 다른 부처와 협력하고 바이오디젤유 생산업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흐름과는 달리 기존의 환경운동과 선을 확실히 긋는 새로운 흐름도 있다. 수명의 중견 환경운동가가 환경운동연합으로부터 따로 독립해 출범한 ‘현장과 이론이 만나는 연구소 생태지평’이 대표적인 예다. 생태지평은 환경문제에 대한 연구활동, 정책개발을 활동의 전면에 내세우며 그간의 환경운동과 차별화를 선언했다.

 

  출범한 지 1년 남짓한 생태지평은 최근 한 언론을 통해 유력한 대선 후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경부운하 계획을 비판하며 대중에게 그 존재를 알렸다. 그 이전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이경숙 의원(열린우리당), 제종길 의원(열린우리당) 등과 함께 남북 환경협력을 화두로 세 차례에 걸쳐 토론회를 개최했다.

 

  1990년대 환경운동과 가장 다른 흐름을 최근 대안 에너지 운동을 전개해온 ‘에너지전환’이 보여줬다. 이 단체는 최근 회원 총회를 통해 대안 농업·교육 운동으로 이름난 충청남도 홍성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서울 중심의 운동에서 탈피해 지역에서 주민과 함께 대안을 만들어내는 환경운동을 펴나가기로 선언한 것이다.

 

  에너지전환은 앞으로 홍성에서 기존에 주력해온 풍력·태양 에너지는 물론 가축의 똥오줌에서 나오는 메탄(CH4)을 활용한 바이오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실험을 전개할 예정이다. 국내의 여건에 맞는 난방이 거의 필요 없는 고효율 주택―패시브하우스(passive house)―을 설계하는 일도 과제 중 하나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생태지평, 에너지전환이 모두 환경운동연합에서 떨어져나온 조직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생태지평이 환경운동연합에서 10여년 가까이 활동했던 중견 환경운동가들이 새로 살림을 차린 곳이라면, 에너지전환은 애초 환경운동연합에서 대안 에너지 운동을 전개하던 모임이 떨어져나와 그 운동을 양적, 질적으로 확장했다.

 

  이런 환경운동연합의 분화는 이제야 비로소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1990년대 환경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운동이 태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 환경운동은 ‘위기’가 아니라, 1990년대 환경운동과 단절하면서 비로소 한국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

 

  풀뿌리 환경운동

 

  앞에서 열거한 세가지 흐름 중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마지막으로 살펴본 풀뿌리 환경운동의 등장이다. 사실 풀뿌리 환경운동은 눈에 띄지 않았을 뿐 한국사회에서 계속 존재해왔다. 전국 각지에서 생명·환경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자 또, 다른 삶을 사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해온 예는 에너지전환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이런 풀뿌리 환경운동은 지금까지 주도적인 흐름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다들 풀뿌리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말해왔지만, 정작 이를 실천하는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로 폄훼되거나 근본주의자라는 딱지가 붙곤 했다. 에너지전환의 결단은 영향력 있는 환경단체가 바로 이런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풀뿌리 환경운동은 그간 환경단체 안팎에서 지적해온 환경운동의 많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간 환경단체는 회원이 수만명이 되는 데도, 실제로 참여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해 ‘시민 없는 환경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일부 환경단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더 언론을 염두에 둔 캠페인에 치중하기도 했다.

 

  풀뿌리 환경운동은 지역에서 제기되는 현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환경단체의 활동은 즉각적으로 지역주민의 이해와 얽히면서 상호 대면의 폭을 넓혀준다. 이 과정에서 환경단체가 지역주민을 환경운동의 지지자 또 더 나아가 참여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그 효과는 언론보도를 통해 회원을 늘리는 것보다 훨씬더 크다.

 

  그간 일각에서는 환경운동이 대중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반대만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 탓이라고 지적해왔다. 이를 의식한 일부 환경단체는 정작 환경운동이 목소리를 내야 할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환경운동이 대중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반대운동을 펴지 못한 데 있다.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을 얻어내는 반대운동이 아니라, 기존 활동의 관성대로 반대운동을 펼치다보니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아온 것이다. 대중과의 직접 대면이 잦을 수밖에 없는 풀뿌리 환경운동은 이런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견제·비판해야 할 정부, 기업의 지원에 환경단체가 크게 의존해온 현실도 환경운동의 큰 문제이다. 앞으로 환경운동이 정부, 기업이 유지하려는 구조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일수록 이 문제는 크게 부각될 것이다. 정부, 기업이 제 목을 죄는 환경단체에게 지원을 계속할 리도 없는데다, 이런 구조가 환경운동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풀뿌리 환경운동은 이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지역에 기반을 둔 환경단체는 서울과 비교할 때 적은 자원으로도 조직을 꾸리는 게 가능하다. 더구나 풀뿌리 환경운동이 더욱더 활성화되면 회원 및 후원금이 일부 큰 조직으로 집중되는 것도 막을 수 있어서 환경운동 전체의 자율성은 더 커질 수 있다.4)

 

  풀뿌리 환경운동의 가장 큰 장점은 환경단체와 지역주민이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짜내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데 있다. 홍성에서 에너지전환이 주민과 함께 에너지 자립의 한 보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 파급 효과는 언론에서 재생가능 에너지를 수차례 보도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물론 풀뿌리 환경운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 속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오해도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개발에 비타협적인 운동을 벌여야 할 때 과연 풀뿌리 환경운동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의문이 그 예다. 그러나, 오히려 풀뿌리 환경운동이 힘을 가질 때 이런 운동을 제대로 펼치는 게 가능하다.

 

  2000년대 들어 성공한 환경운동의 예로 꼽히는 동강댐 반대운동, 부안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을 살펴보자. 이 운동은 지역주민이 환경단체와 강하게 결속하면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반면에 새만금 간척사업, 경주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은 지역주민의 찬성 여론이 환경운동의 발목을 잡았다.

 

  때로는 지역주민의 반대가 대규모 개발사업을 가로막는 유일한 동력인 경우도 있다. 온갖 무리수를 둬가며 건설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가 강행하려는 한탄강댐이 그 좋은 예다. 언론은 물론 환경단체조차도 사실상 체념했을 때 다시 반대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역주민들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라도 확립된 사회에서는 국가조차도 주민의 아무런 동의 없이 밀어붙이기 식으로만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국가, 자본이 최근 크고작은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더욱더 노골적으로 돈을 미끼로 주민을 회유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주민과 깊은 신뢰를 통해 결속력을 다진 풀뿌리 환경운동이 절실하다.

 

  오히려 풀뿌리 환경운동이 조심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바로 ‘풀뿌리 권력’이다. 풀뿌리 환경운동가를 만날 때마다 가장 자주 듣는 하소연은 “내 편이 더 무섭다”, 이런 얘기다. 지역사회에서 온갖 인연으로 엮여 있는 ‘힘’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환경단체의 상층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그것이 결국 직접 활동하는 환경운동가의 힘을 빼곤 한다는 것이다.

 

  한두번 이렇게 힘이 빠지고 나면 그 환경단체는 지역에 있기는 하지만 풀뿌리 환경운동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변할 게 뻔하다. 그후에 그 환경단체의 궤적은 뻔하다. 지역언론에 의존하는 캠페인에 치중하는 구태의연한 활동을 하거나, 사업·정치에 뜻이 있는 환경단체 출신 인사에게 ‘초록색’을 덧칠해주는 역할로 전락하는 것이다.

 

  환경운동, 이렇게 준비하자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며 분신해 결국 목숨을 잃은 허세욱 씨의 삶은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택시기사 일을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타인에게 공감시키기 위해 헌신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 모든 운동의 모범이 될 만하다. 30여년 전 전태일이 노동운동에 나섰던 것도 허씨의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태일은 자기가 가난해서, 비참해서 행동을 한 게 아니다. 그 사람은 자기연민에서 운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자기와 비교해보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시다를 위해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자기가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임금을 더 받아야겠다, 이런 생각에서 행동한 게 아니다. 바로 타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죽었다.”5)

 

  지금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은 과연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이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려는 환경운동은 바로 전태일을, 허세욱을 닮아야 한다.

 


 

1) 2002년 국내 대표적인 한 환경단체의 서울 지역 활동가를 대상으로 대선 후보 선호도를 조사했을 때, 당시 노무현 후보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2004년 3월 노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을 때 환경단체가 가장 앞장서서 탄핵 반대운동에 나섰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물론 지금 노 대통령에 대해 그런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환경운동가는 없을 것이다.

 

2) “환경운동연합 광화문에서 교차로 막고 기습시위”, 문화방송(MBC) 뉴스, 1998년 8월 21일.

 

3) “대중성 잃은 환경운동, 풀뿌리 녹색정치가 대안”,〈한겨레〉2006년 4월 25일.

 

4) 이와 관련해 한 환경운동가는 귀담아 들을 만한 이런 얘기를 했다. “환경운동연합이 서울 종로구 사직동 부동산을 처분하고, 그 자원을 활용해 지역의 소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생태도시의 한 보기를 만든다면 그야말로 한국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5) “2004년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프레시안〉2004년 12월 8일.

 


  강양구 ― 〈프레시안〉기자.《침묵과 열광》,《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