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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촘스키 인터뷰]‘사적 독재자’ 기업주에 미디어 놔두면 안된다(한겨레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3.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5/009000000200105142051011.html

 

 

세계석학에게 듣는다/①촘스키

 

‘사적 독재자’ 기업주에 미디어 놔두면 안된다

 

여론을 독점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호도하는 거대 언론의 폐해는 심각하다. 흔히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 언론자유가 잘 보장된 나라로 꼽히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언론들이 어떻게 정부·기업과 손잡고 현실을 은폐한 채 부와 권력을 가진 강자들의 논리만을 전파하는지 통렬하게 비판해온 미국의 두 석학을 <한겨레>가 만났다.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라 불리울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허상을 지속적으로 파헤쳐온 노엄 촘스키(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는 진정한 민주정치 질서를 위해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통제와 접근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0년 <미국 민중사>를 써 미국 역사를 소수 영웅들의 손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것으로 되돌려놓은 하워드 진(보스턴대학 명예교수)은 강자들의 논리가 아닌 국민 대중의 생각과 항의를 담아낼 진보언론, 대안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겨레> 창간 13돌을 맞아, 미국에 연수중인 지영선 논설위원이 두 석학을 찾아가 언론개혁의 방향과 진보·대안언론의 미래에 대해 나눈 대담을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지영선=미국은 흔히 세계에서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가장 발전된 나라로 불리운다. 이런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나.

 

노엄 촘스키=부분적으로 맞다. 미국은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언론자유가 잘 보장되어 있는 나라다. 그러나 이건 최근의 일이다. 흔히 생각하듯 미국헌법이나 권리장전을 통해 보장된 것이 아니고, 1960년대에 와서 쟁취한 것이다. 국가를 비방하는 것을 형법으로 다스리던 `선동적 명예훼손'이라는 조항이 60년대 민권운동을 통해 폐지됨으로써 언론자유에 획기적 진전이 왔다. 미국이 민주적이냐는 질문,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건국 초 미국 헌법은 명백하게 대중으로부터 소수 부유한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을 원치 않은 대중들의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미국은 영국과 더불어 가장 민주적인 나라가 된 것이다. 이제 더이상 대중들을 힘으로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배 계급은 마음을 조정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바로 광고 홍보산업이다. 이것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 중의 하나다. 군대가 병사를 조직하고 배치하듯이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조정하고 배치한다. 대중의 마음을 공공의 일들로부터 떼어내 피상적인 일, 끊임없는 소비에 묶어 놓는 것을 업무로 한다. 사실, 이것이 현대 정치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런 일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니, 나는 새 구두나 사러간다는 식이 되었다. 홍보산업의 위대한 승리다.

 

지=하지만 미국은 국민의 목소리가 언론에 잘 반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촘스키=미국 언론이 국민의 의견을 잘 반영하느냐고 묻는다면 `정반대'라고 대답하겠다. 미국은 여론조사가 매우 발달한 나라다. 그래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안다. 지난달 퀘벡에서 열린 미주자유무역협정회의를 예로 들어보자. 이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다. 그 문제가 지난 몇년에 걸쳐 비밀리에 교섭이 진행됐다. 그러나 국민들에겐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미디어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국민들에게는 알리지 않는게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퀘벡회의에서 조지 부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이룩한 성과를 전 남북미 대륙에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과연 나프타가 일반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자. 나프타는 멕시코의 임금수준을 25%나 깍아내렸다. 미국에는 무역적자로 일자리 감소를 가져왔다. 미국기업들은 멕시코로 공장을 옮겨 싼 임금과 형편없는 작업환경에서 싼 물건을 생산했다. 노동조합은 무자비하게 분쇄됐다. 이런 상황은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역수입될 것이다. 미국 노동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대중들의 진정한 관심사다. 퀘벡에서 자유무역협정 회의가 열리고 있을때 인권감시기관인 휴먼라이츠워치에서 나프타 하에서의 노동자문제에 대한 방대한 연구보고서를 내놓았다. 퀘벡회의와 타이밍을 맞춘 것이다. 이 자료는 당연히 <뉴욕타임스>에도 <워싱턴포스트>에도 <보스턴글로브>에도 갔을 것이다. 나한테도 왔으니까. 당신은 기자니까, 이게 뉴스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 것이다. 어느 정도 신문에 났을 것 같은가?

 

지=하나도 안 났단 말인가?

 

촘스키=났다. 한 군데. 위스콘신주 매디슨이라는 곳의 한 지방 신문에 독자의 편지로 났다. 이게 우리의 민주주의다. 언론들의 보조가 이렇게 잘 맞는 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 탓이다. 하바드 같은 곳에서 그런 걸 배우는 것이다.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론은 그런 이슈에 대해서 언급을 안하는 것이다. 지난해 선거를 생각해 보자. 자유무역협정, 무역역조 같은 것이 국민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얼마나 선거 이슈로 등장했었는지 생각해 보라. 제로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들은 일치된 입장을 가지고 있고, 국민 대중은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과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잘못된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권력과 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중요한 그런 문제들은 제기되지 않는 것이다.

 

‘뉴욕타임즈’자체가 거대한 기업

 

지=민주주의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하는 언론이 어째서 그렇게 권력에 의존적인가?

 

촘스키=누구든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답은 간단하다. 비밀이 아니다. <뉴욕타임즈>가 무엇인가? 그 자체가 거대한 기업이다. 는 더 큰 거대기업의 한 부분이다. 거대 미디어들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초대형 기업들의 손아귀에 있다. 신문만이 아니다. 텔레비전, 아이들 장난감지 파는 오락산업까지 그들에게 장악되어 있다. 그들은 기업이다. 그들의 수입은 다른 기업에서 온다. 그들은 독자의 구독료가 아니라 광고로 돈을 번다. 그들은 독자를 다른 기업에 파는 기업인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들은, 특히 거대 미디어들은, 정부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소도시의 작은 신문사는 미국 방방곡곡에 특파원을 보낼 수 없으니까, 전국적 뉴스를 구할 길이 없다. 그래서 큰 신문,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그리고 두세개 통신사에서 뉴스를 받는다. 따라서 몇몇 큰 미디어를 통제함으써 전국의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은 오후 4시 쯤이면 이런 메모를 내보낸다. “편집자들에게 드리는 메모: 내일자 <뉴욕타임즈>는 다음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실을 예정임.” 전국의 신문 방송들에게 `내일의 톱뉴스'를 결정해 주는 것이다.

 

지=그런 상황이 개선될 여지는 없는가?

 

촘스키=오히려 더 강화되는 상황이다. 우선 기업합병을 통해서다. 벤 디키언이라는 언론학자가 정기적으로 `미디어의 독점'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있는데, 80년대 중반에 나온 첫번 보고서에서는 50개 정도이던 대형 언론사가 2년 전에 나온 최근 책에는 8개로 줄어 들었다. 대형 미디어 그룹들은 이제 국제화하는 상황이다. 법도 그들이 영향력을 넓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클린턴 정부에서 제정한 연방통신법은 메이저 네트워크에 엄청난 힘을 실어 주었다. 또 인터넷을 사기업에 넘겨 주고 있다. 인터넷은 30여년에 걸쳐 공공부문에서 개발되었다. 국민이 그 비용을 부담했다. 그런 인터넷이 1995년 민간부문으로 넘어갔다. 그 과정은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이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국민을 조종하고 통제할 수단이 될 수 있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디지털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다.

 

지=해결 방법은 없는가?

 

촘스키=유일한 방법은 대중이 조직되고 교육받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정확히 (권력자들이) 원치 않는 일이다. 더구나 지난 30년간 유럽과 미국을 지배한 신자유주의는 공공영역을 줄이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했다. 그들은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한다고 말하지만, 정부는 그래도 부분적으로 민주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국민의 참여영역을 최소화하는 것이 됐다. 그래서 국민적인 주요사항들을 기업이라는 사적 영역의 독재자들이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경험해 잘 알겠지만, 재정자유화도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재정자유화는 한 나라를 민간 경제권력의 볼모로 만드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재정자유화는 사실 경제에는 해롭다. 하지만 민주적인 요소를 줄이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대중의 위험'을 줄이는 또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미디어는 대중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지=비민주적인 부와 권력의 집중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없는가?

 

촘스키=전세계적으로, 특히 제3세계에서 거대한 항의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브라질 등에서 수십만의 시민들이 항의를 한다. <뉴욕타임즈>를 읽으면 서방국가들이 모두 세계화를 지지한다고 돼 있지만, 그 국민들은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국민이 조직되어 있는 곳에선 어디서나 항의가 벌어지고 있다. 권력자들도 그것을 잘 안다. 다음 국제무역기구(WTO)회의를 카타르에서 연다고 한다. 데모대들이 몰려오지 못하도록. 아마 우주왕복선에서 회의를 열 수 있다면, 거기서 개최하고 싶을 것이다.

 

지=국민들의 항의를 담아낼 수 있는 대안언론, 진보언론은 나타나지 않는가?

 

촘스키=많은 대안언론이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와 전자매체의 발전이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아주 싸게 신문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시애틀 세계무역기구 회의 때의 항의 시위, 퀘벡에서의 시위 등이 모두 이런 대안언론을 통해 가능했다. 인도네시아의 학생운동도 인터넷을 통해 조직됐다. 대중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각자가 고립되어 있을 뿐이라고 굳게 믿고 싶어 하는 `자유 언론'의 허점을 이렇게 치고 들어간 것이다.

 

지=당신은 민주정치질서는 미디어에 대한 통제와 접근의 확대를 필요로 하며, 정치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미디어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미디어에 대한 어떤 통제와 개혁을 제안하겠는가?

 

촘스키=나는 근본적으로 미디어가 영리단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대중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사적인 독재자-기업주-에게 무방비적으로 맡겨져서는 안된다. 장기적 미디어 개혁은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독재자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독재를 완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대안언론의 개발도 그중의 하나다. 미디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대중들을 교육하고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60년대의 민권운동은 그렇게 미디어를 움직였다. 대중이 뭉치면 독재자도 움직일 수 있다. 바로 한국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전국민적 시위에 독재자가 굴복해서 방향을 바꾸지 않았던가.

 

지=최근 한국에선 언론개혁에 관한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민간단체를 비롯한 국민과 진보적 지식인, 그리고 <한겨레>의 언론개혁에 대한 끈질긴 요구로 최근 정부가 불공정거래를 제한하는 신문고시를 제정하고 그동안 `성역'시 되어왔던 언론사에 대해 정기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대해 족벌 신문사들은 정부가 비우호적 신문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

 

촘스키=내가 잘 모르는 특정 상황에 대해 의견을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미국의 상황에 비춰 본다면, 그런 방법들은 언론의 자유와 다양한 목소리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당사자의 처지에선 언론자유를 억압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독재적 전횡에 대한 제한이다. 독재적 전횡을 막고 일반 대중의 참여를 높일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케임브리지/지영선 논설위원

 

편집 2001.05.14(월)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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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언어철학 물꼬바꿔 ‘혁명’

 

노엄 촘스키 교수는 셰익스피어, 마르크스, 성서와 함께 인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10대 인물(또는 저작물)이면서, 이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 살아있는 언어철학자이다. 그는 1950~60년대에 언어철학에 `혁명'을 일으켜,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가 과학과 심리학에 끼친 것과 같은 영향력을 이 분야에 끼쳤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그런 것처럼, 그는 자신의 활동 범위를 사회·정치 문제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 비판, 언론 비판 등까지 확장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미국의 양심' 또는 `진정한 지성인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2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유태인 촘스키는 60년 32살의 나이로 메사추세츠공과대학 정교수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64년 베트남전쟁 징병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지지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반전운동과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외교정책 비판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요즘은 동티모르, 코소보 등 분쟁지역에 대한 서방의 정책 비판, 세계화 비판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동시에 언어철학 연구도 계속해 지난해 가을 <언어와 정신 연구의 새로운 지평들>이라는 책을 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언어학자로서 촘스키와 정치학자로서 촘스키의 공존을 수수께끼처럼 바라본다.

그의 정치적 주장을 위해서는 결코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뉴욕타임스>는 “그는 살아있는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면서도 “(그런) 그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어찌 그토록 끔찍하게 쓸 수 있을까?”라고 했을 정도다.

 

신기섭 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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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기

 

“칠순넘은 나이 정열에 놀랐다”

 

촘스키 교수와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촘스키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 관심을 보였지만, 비서 벱 스톨은, 매시간 단위로 계획이 꽉 차 있다며, 5월중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잡아뗐다. 다시 촘스키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해 사정을 한 끝에, 45분을 허락받았다.

그는 MIT의 거창한 본관 건물과는 한참 떨어진 길모퉁이 건물의 연구실로 약속시간인 오전 10시15분에 정확히 나타났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그토록 바쁘게 활동한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기 담긴 내용은 폭발적이었다. 폭발적일 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조직적이고 정교했다. 천재적 언어학자이자, 지치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의 면모는 한시간이 채 안 되는 사이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촘스키의 책들을 읽으면 그 철저하고 정확한 내용 때문에 매우 차가운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 만나본 그는 상당히 따뜻한 인상을 주었다. 인터뷰 지면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도록, 인물 사진 외에 다른 좋은 사진거리가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우리 손주들 사진이 있어요.”

 

지영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