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9-09-27 16:49: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909271649205
[사회적기업이 희망이다](26) 들소리
안치용 ERISS 소장
ㆍ2003년 사스 때 공연 불참사태 속 ‘대타 열연’ 깊은 인상
ㆍ전통음악으로 세계인의 심금 울려… 문화사업으로 성장
공연을 업으로 밥 먹고 살기는 힘들다. 그 공연이 풍물 등 우리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것이라면 밥 먹고 못 살 확률이 더 높아진다. 지금은 그나마 우리 것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심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어 부족한 대로 형편이 나아지고 있지만 25년 전이라면 어땠을까. 대학가에서 탈춤이 성황을 이루던 시절이지만 전통문화 공연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이 떨어지는 사람’이란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운동은 하지만 문화사업은 안 된다는 게 그때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사회적기업 탐방단이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사회적기업 들소리를 방문해 단원들의 공연 시범을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부터 들소리 황지연 기획팀장, ERISS 안치용 소장, 함께일하는재단 이명희씨,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최상권 회계사, 들소리 문갑현 대표, YeSS 김여래·이준호씨. | 사진 문준호(동국대4년)
우리 전통음악 공연을 주요 사업내용으로 한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 들소리의 전신은 1984년 창단된 극단 ‘물놀이’이다. 들소리 문갑현 대표 등 ‘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문화사업’을 하겠다며 첫 발을 내디딘 곳이다. 이제 들소리는 타악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대표적인 공연단체로 성장했다.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정규 관광순서로 자리잡은 난타, 친환경과 세계시민을 표방한 사회적기업 노리단과는 역할을 분담하며 척박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문화사업의 싹을 키우고 있다. 난타와 타악이란 공통점을 갖는 들소리는 국내에서 방한한 외국 관광객을 응대하는 난타와 달리 끊임없이 해외 시장을 공략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노리단과는 사회적기업 가운데 몇 안 되는 문화예술 단체라는 상징성을 공유한다. 반면 차이점도 분명하다. 노리단은 환경보호라는 세계 공통의 의제를 바탕에 깔고 현대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금속성’ 공연을 펼친다. 들소리는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오래된 명제에 천착한다. 노리단에서 찢어진 청바지와 편안한 운동화의 느낌이 묻어난다면 들소리에서는 한복과 차의 향이 두드러진다.
들소리는 애초에 사회적기업을 염두에 둔 노리단과 달리 사회적기업이란 지향을 내부에 설정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사회적기업이란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한 일이다. 공연단체로 출발한 들소리는 사회인식과 사회변화의 방법으로 문화운동을 선택했고, 문화운동을 힘있게 밀어붙이기 위해 문화사업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다른 길을 걸어 같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게 문 대표의 판단이다.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사회서비스 제공만이 사회적기업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 대표는 “어떤 분야든지 자신이 가진 최적의 콘텐츠로 사회에 기여하는 곳이 사회적기업”이라고 말했다.
현재 들소리에는 타악기 연주자 등 15명의 전속 공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연팀에 소속된 15명의 예술가들은 철저하게 공연과 연습에만 집중한다. 공연자가 여타의 업무를 병행한 관행에서 탈피해 들소리는 기획만 전담하는 3명의 기획팀을 운영하고 있다. ‘기획팀은 기획만, 공연팀은 연습만’하는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공연자를 뽑을 때 굳이 국악 전공자를 우선 고려하지는 않는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직업으로서 연주자의 길을 걷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실정을 감안했다. 처음 전문 연주자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중도 포기하는 것을 문 대표는 많이 목격했다. 대부분 무대에서 ‘끼’를 발산하기보다는 레슨으로 생계를 해결하곤 했다. 연주자로 살아간다는 건 열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들소리 기획자들은 특이하게도 영어 등 외국어 능력을 고려해 채용됐다. 해외사업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업기획력을 외국에서 실제로 풀어내려면 언어능력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실제로 들소리는 단체의 규모에 비해 해외 공연 이력이 화려하다. 해외 공연이력의 첫 단추를 꿰는 모습에서도 들소리에서 중시하는 열정이 드러난다. 1993년 일본 진출 이후 오랫동안 해외시장 확대를 모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 2003년에 제대로 된 기회를 잡게 된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으로 알려진 사스의 유행이 기회를 제공했다. 그해 싱가포르 아츠마트(Singapore Arts Mart)에 참가하기로 한 몇몇 외국 공연팀이 사스를 이유로 불참하게 되고 사스의 위험을 무릅쓴 들소리가 우연찮게 대타로 무대에 오를 기회를 잡은 것이다. 공연이 성공하면서 이후 조금씩 해외공연 무대를 넓혀가게 된다.
2005년엔 호주에서 열린 세계최대 월드뮤직 축제인 워매드(WOMAD; World of Music, Arts and Dance festival)에 초청받게 된다. 2005년 상반기 호주 워매드를 시작으로, 하반기에는 영국 워매드, 그리고 2009년까지 매년 두 회 열리는 워매드에 공식 초청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월드뮤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여기서 말하는 ‘월드뮤직’은 그 나라 고유 음률을 바탕으로 한 현대 대중음악을 가리킨다. 들소리는 북 가락을 중심으로 가야금·거문고·대금, 그리고 소리가 가미된 음악을 선보였다. 들소리 황지연 기획팀장은 “해외 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북 장단이 자아내는 극단적 신명에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표는 이 신명을 두고 ‘뚜껑 열린다’는 표현을 썼다. 우리 전통음악과 전통 놀이공연에서 관객들이 체험하고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일컫는 표현이다. 우리 전통문화가 만들어낸 신명에 외국인들이 얼마나 열렬히 반응하는지를 보고 들소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신명이야말로 국내외에서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한 공연 등 다양한 문화사업의 핵심경쟁력이다.
공연사업 중의 하나인 타오놀이는 우리 고유의 마을 축제가 가진 에너지를 역동적인 음악과 놀이로 무대화한 공연이다. 공연은 강렬하고 웅장한 타악으로 시작돼 관객 내면의 신명을 깨우고, 어린시절의 놀이 가락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을 무대로 이끌어내 관객과 무대가 하나가 되는 광경을 연출한다. 또 다른 사업인 월드비트 비나리는 타오놀이의 웅장한 리듬을 바탕으로 소리꾼의 구음과 대형 캔버스에 묵을 이용한 드로잉 퍼포먼스(Drawing performance)를 결합했다. 비나리는 광대들의 유랑 길에서 또는 민중의 굿판에서 성스럽게 구전되던 어진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축원덕담이었고 우리 민중의 삶과 가장 밀착한 노래였다.
국내외에서 들소리가 오랫동안 공연단체로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문화사업가가 되겠다’는 문 대표의 포부가 한몫했다. 보통 기존 이른바 예술사업에서는 한번 뭉쳐 공연하고 수익이 생기면 서로 나눠 갖고 헤어지는 게 다반사다. 열악한 예술인의 생활형편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게도 되지만 이 같은 구조에서는 지속적으로 문화사업을 진행하고 또 발전을 위한 투자를 기약할 수 없다.
문 대표는 초기부터 번 돈의 대부분을 투자했다. 잇달아 불평과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문화사업의 인프라를 깔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꿋꿋하게 자기 노선을 지켰다. 그 결과로 지금에 와서는 다른 어떤 문화 집단보다도 들소리가 공연자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편이며 국내외에서 도전적으로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들소리는 예술가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훈련을 통해 전문 예술인으로 성장시키고, 그들이 사회에서 장애인 등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공연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들소리의 존재가치이다. 그 전제로서 들소리는 문화사업단체로서 자신의 성장뿐 아니라 국내 공연시장, 특히 전통문화에 대한 공연수요를 키우는 역할을 자임해 제대로 해내야 할 것이다.
<안치용 ERISS 소장>
이준호·김여래
사회적기업 들소리 문갑현 대표는 들소리를 해외에서 인정받는 한국 전통음악 공연단체로 키웠다. 나아가 “놀이를 토대로 한 공연작품을 만들어서 외국에서 찾아오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다.
- 국악을 공연소재로 삼은 이유는.
“대학에서 국악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다 사회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 전통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사회 변화에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초기에는 탈춤에 미쳤는데, 수업은 안가고 매일 탈춤을 배우러 다녔다. 배낭 메고 탈춤 배우러 다니는 과정에서 풍물 놀이 등을 배워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하고 계속 적용해 보다가 이 일을 시작했다. 그냥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 들소리가 생긴 1980년 초·중반은 문화예술사업이란 개념이 없을 때다.
“외로웠던 시절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80년대 후반은 문화예술운동이라는 것은 ‘사업’과는 결부되지 않고 순수한 문화예술을 추구하는 게 당연시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념을 앞세워 운동만 하다가는 모두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화사업’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문화주의에 매몰됐다는 등의 비난을 들었다.”
- 들소리는 어떻게 경영되는가.
“무슨 조직이든 일정 정도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이것이 현장을 통해 내게 만들어진 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투자가 진행될 때도 임금구조는 열악했다. 임금 지급이 불가능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문화집단 중에서는 높은 임금구조를 갖고 있다. 처음에 런던에 투자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안 믿었다. 투자라는 그 자체에 부정적인 의견이 100%였다. 기획력이 있는 기획실이 있기 때문에 기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런던에 투자하고 난 뒤로 몇 년간 기금 등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런던에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 부유한 집단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도전을 통해 자생적으로 해외에 투자한 국내 최초의 문화예술집단이 될 수 있었다.”
- 난타와 다른 점은.
“난타가 시작할 때 우리도 준비했던 것은 사실이다. 타악을 중심으로 시작한 것은 비슷하나 시기로 보면 난타보다는 늦었다. 해외 진출로 따지면 들소리가 먼저 진출했지만 난타와 방향이 다르다. 난타는 에든버러를 통해 일단은 성공한 사례다. 분석 결과 난타와 같이 가는 길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고, 월드뮤직 시장이라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 대동놀이를 상품화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나.
“<오페라의 유령>을 한 사람이 몇 번이나 보겠나. 한두 번 정도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사실 몇 번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놀이는 다르다. 놀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본성을 찾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뚜껑이 열린다고 표현하는데 도취되는 것을 말한다. 자기와 점점 가깝게 되는 경험인데, 도취되면 또 오게 되어있다. 100% 온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자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다시 올 거다. 반복구매가 가능한 문화상품이라는 얘기다.
이명희 함께일하는재단 SE경영지원팀
ㆍ기업 운영방식 들소리는 1993년 일본과의 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해외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후, 동남아·유럽·미국 등지로 활동 무대를 넓히며 40여개국에서 한국 전통놀이를 해외에 알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북치는 공연단으로 ‘들소리’가 고유명사화해 소개될 정도로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공연단이다.
국내 공연시장의 취약성 때문에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 흥행에 성공하고도 적자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찌감치 영국과 미국에 법인을 만들어 해외시장을 겨냥했다. 해외시장 개척의 교두보로 인지도·신뢰도·네트워크가 최적화한 워매드(WOMAD), 워멕스(WOMEX; The World Music Expo), 싱가포르아츠페스티벌(Singapore Arts Festival) 등에 참가함으로써 해외에서 인정받는 공연단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과감하면서도 지속적인 투자와 우리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콘텐츠 개발, 그리고 기획력에 있다. 들소리는 문화기획팀을 두어 문화공연 기획만을 전담하고 있다. 들소리가 창조해 낸 문화상품은 예술로만 남아 있던 공연물을 해외에서의 성공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면서 상품으로 인정받게 하고 있다. 공연자체의 에너지, 한국 전통문화와 현대적 콘텐츠의 조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공연, 객석과 무대를 허무는 종합예술물이 들소리가 내세우는 강점이다.
공연의 질을 좌우할 공연자 양성에도 크게 신경을 쓴다. 국악 전공자이든, 비전공자이든 관계없이 무대장악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해 무대에 설 수 기회를 제공한다. 초청과 단발성 공연을 통해 공연의 질을 높였고, 극장공연의 비중을 점차 높여 장기공연이 가능한 공연상품을 개발했다. 그 결과 지속가능한 일자리창출과 동종업계보다 높은 임금구조가 가능하게 됐다.
들소리는 후원에 의존하는 공연산업에서 돈을 버는 문화상품을 발굴해 사회적기업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명희 함께일하는재단 SE경영지원팀>
최상권 |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회계사
ㆍ기업 경영과제
한국의 문화산업은 ‘한류(韓流)’라는 흐름으로 드라마, 대중음악, 영화란 형태로 해외에 수출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보여 줄 수
있는 매개체로서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문화기업으로 ‘전통’과 ‘축제’ ‘상생’은 들소리를 함축적으로 대표하는 단어들이다.
전통 북소리와 풍물의 신명과 에너지를 바탕으로 우리 고유의 축제를 재현하는 종합 예술 형태의 공연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넌버벌” “집단 신명 퍼포먼스”라는 독특한 입지를 형성하며 우리 전통문화의 상품화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6년 3월 영국 현지 법인을 설립해 유럽을 중심으로 현지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곧 미주법인도 설립해 해외진출의 속도를 더 낼 계획이다.
이는 전통 풍물가락과 놀이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차갑다는 현실에서 해외시장에서 인정받아 역으로 국내 공연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현재까지 이러한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물적·인적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고 자립 운영에 근접한 수준까지 도달하게 됐다.
과제 또한 많다. 다른 문화공연단체들과 달리 1회적 사업으로 발생한 수익을 나눠 갖는 관행을 깨고, 지속 가능한 장기공연을 위한 물적 투자를 계속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정기적으로 상설 공연하기 위해서는 공연팀의 확대와 공연 프로그램의 충실화가 필수적인 요소인데, 이는 창의적 구성원의 유지 및 새로운 인재의 발굴이 있어야 가능하다. 공연자의 의욕을 북돋을 수 있는 급여체계나 성과공유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스타공연자의 배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들소리라는 이름만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공연자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으나 스타공연자가 있으면 마케팅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내부 구성원의 자발적 경쟁과 창의성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사업을 바탕으로 ‘원 소스 멀티 유즈’가 가능한 분야에 대한 적극적 마케팅이 필요하다. 외국인 단체여행객들을 위한 한국문화체험프로그램을 여행사와 함께 진행하거나, 학교 또는 기업과의 연계를 검토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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